두 개의 달이 뜨는 밤 (Two moons)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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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
며칠 후에 찾아온 변백현이 오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대뜸 말한다. 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었다. 세자빈 간택. 그것때문에 저리도 숨이 차도록 달려와 내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것이지? 무덤덤하게 웃으며 변백현을 맞이하였지만 그때문에 더욱 인상을 찡그리는 변백현이다. 변백현의 표정이 수시로 바뀐다. 화가 난 표정, 걱정스러운 표정, 슬픈 표정, 혼란스러운 표정... 그 모든 것이 한번에 섞인 끝에 변백현의 표정이 기괴하다. 풋, 조심스레 웃음을 터뜨리니 이제 얼굴까지 붉어진다.
"웃음이 나오냐...?"
"백현아. 이리와, 여기 앉아."
"... ㅇㅇ아."
"얼른. 나 고개 아프다."
"..."
마루에 앉아있던 나는 내 옆을 톡톡 치며 변백현을 타일렀다. 결국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옆에 앉은 변백현이 작게 한숨을 쉰다. 너뿐이다. 단자얘기를 듣고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보인 이는... 다들 무슨 콩고물이 떨어질까 기대가 가득한 얼굴들이었지... 변백현의 얼굴을 보며 살풋이 웃었다. 변백현이 진지하게 묻는다. 진짜로 가는거야..?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린다. 변백현의 표정이 더욱 굳어버린다.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친 변백현이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가지마... 나랑 여기서 살자... 고백을 해오는 변백현의 손이 조금 떨린다. 이렇게 말하긴 싫었는데... 하면서 입술을 질끈 깨무는 모습이 안쓰럽다. 백현아, 고마워. 그런데 여기는 싫다. 그렇다고 궁도 싫어. 나 좀 데리고 도망가줄래? 혀 끝까지 치고올라온 말들을 애써 삼키며 눈꼬리를 휘게 웃었다.
"걱정하지마."
"걱정이 아니라..!!"
"세자빈이 되든 안되든 난... 너랑 살 수 없어. 널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ㅇㅇㅇ!"
"그래도 17년이나 함께 해왔으니까 미련은 없다. 그동안 고마웠어."
"..."
알고있다. 변백현도 집에서 나를 만나지 말라고 압박 받는다는 것을. 좌의정과 우의정. 같은 위치에 있기에 서로를 견제해야만 하는 상호관계. 그것에 피를 보는 것은 우리로구나. 네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내가 먼저 너의 손을 놓는다. 백현아. 우린 여기까지인가 봐. 변백현이 베시시 웃더니 왜그러냐며 장난으로 넘기려 한다. 어쩔 수 없이 변백현 앞에서 처음으로 정색을 한다. 변백현이 잡은 손을 단호하게 떨쳐내야 한다. 나는 이제 더이상 너를 보지 않을거야. 눈이 빨게지고 피눈물이 흘러도 나는 너를 놔야만한다. 그것이 너를 살리는 길이니까. 변백현을 그렇게 보내고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아버지 앞에서도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들이 변백현을 보낼 땐 쉴새없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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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 어떻게든 떨어질 것이다. 다시 돌아와 할아버지 앞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오히려 그게 나를 구원해줄 빛이 될 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니까. 펑펑 울면서도 점차 변백현은 잊어가고 어떻게 세자빈간택에서 떨어질지 고민을 시작한다. 저 멀리서 변백현과의 대화를 지켜보던 종아이가 쭈뼛쭈뼛 머뭇거리며 나를 훔쳐본다. 아니, 저정도면 대놓고 보는건가. 곧 눈물을 멈추고 적적한 마당을 눈에 담고 있으니 종아이가 결심한 듯 내 앞으로 달려와 야단법석을 떤다.
"아가씨, 아가씨~!!"
"또 왜 그래?"
"오늘은 장날이어요~ 같이 장에 나가실래요?"
"장..?"
"예에! 오늘 특히 장신구들이 많이 들어왔대요~ 같이가요!"
"..."
"그러지말구요~ 얼른 가요~"
저번에 궁에 데려가달라 하던 아이다. 참으로 끈질긴 아이다. 쌀쌀맞게 굴어도 항상 다시 웃으며 다가온다. 내 못된 심보는 그아이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좋게 바라본다. 왜, 뭐 하나라도 건져보려고? 또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어찌보면 내 소문들은 내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그럼요~ 아가씨랑 같이 가야 뭐 하나라도 주워먹죠!하고 헤헤 웃는다. 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는 종녀에 입이 닫혔다. 진리. 그것은 종녀의 이름이다. 내가 지어준 단 한명의 이름.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친구처럼 잘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일방적인 냉대에도 꿋꿋하게 옆을 지켜온 아이다. 사실 저 아이게는 내가 많이 미안해야하는데... 나는 왜 자꾸 네가 미울까... 아마 너 또한 할아버지에게 소속된 종이기 때문이겠지. 단순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이유다.
결국 진리에게 끌려 장에 나왔다. 시끌벅적. 복잡한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듯 장안이 바글바글 사람들로 어지럽다. 진리는 뭐가 좋은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장신구들에 눈이 팔려있다. 화려한 걸 들고서 내게 올려치면 손부터 내저었다. 도대체 저런걸 무거워서 어떻게 달고 다니지... 참으로 단순한 생각을 하며 거절할 때마다 진리는 아쉬운 눈초리로 장신구를 내려놓는다. 아가씨 취향은 너무 지루하셔요! ... 주인에게 저리 말하는 종아이가 또 있을까. 피식 웃었다. 어? 지금 웃으셨어요?! 제가 웃겨놓고 웃음에 화들짝 놀라 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눈까지 촉촉해져서.
"아가씨. 또 웃어보셔요."
"..."
"아가씨는 역시 웃으실 때가 가장 어여쁘셔요.."
"... 쓸데없는 소리."
"판서어르신이 계셨을 땐 참으로 많이 웃으셨는데..."
"..."
감히 종아이가 아버지를 들먹이는데 왈칵 눈물이 흐른다. 진리가 당황해 아,아가씨하며 다가섰지만 손을 들어 제지시킨 나는 일부러 심부름을 보냈다. 빨리 돌아오지 못하도록 아주 어려운 심부름을. 딸기를 구해와. 이 한 겨울에 딸기를 찾기란 여간 쉽지 않을터. 종아이를 보내고서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문이 열린 화려한 가옥에 발을 들였다. 한적하다.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가옥을 돌아다니다가 잠시 쉬려고 대청마루에 걸터 앉았다. 앞에 만들어진 작은 연못에서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꽤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눈을 감고 있으며 소리에 취해 있는데 딸랑- 이는 소리와 함께 사내 한명이 문을 들어선다.
"이리오거라~"
참으로 거만한 자다 생각했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내였다. 어린게 벌써부터 거들먹거리긴...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사내가 마루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사뿐히 걸어온다.
"새로운 얼굴이구나. 새로 왔느냐?"
"..."
이곳에 자주 온 듯하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길래..? 알아듣지 못하고 사내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으니 사내가 턱을 괴고 신음을 터뜨린다.
"여기 있을 상은 아닌데..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됐지?"
"여기 있어야 할 상이 따로 있답니까."
"오호라, 말투에도 제법 귀티가 흐르는구나."
"..."
뭐 이런 놈이 다있나 싶었다. 궁도 아닌 곳에서 무턱대고 하대부터 하는 놈이다. 오세훈은 왕세자라 그렇다치고 넌 뭐냐. 넌 영의정의 자제라도 되느냐. 눈썹이 꿈틀거린다.
사내는 내 표정따위 살펴보지도 않고 잠시 고민하더니 들고 있던 부채를 쫙 피고 도포에 달린 종소리를 울리며 말한다.
-딸랑
"오늘은 너로구나. 좋아, 내가 너를 사주지."
하...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살다살다 이런 소리도 들어보는구나. 내 코웃음에 사내가 눈을 반짝인다. 지금 나를 비웃은게냐?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더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갈길을 가련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지나치려하자 사내가 다급하게 내 손을 잡는다. 사내가 움직일때마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내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 가느냐."
"하찮은 놀이 따위에 어울릴 시간 없습니다."
"하.. 찮은 놀이라.. 큭, 너에겐 놀이가 아니라 직업일터인데?"
"...?"
"아가씨!!!"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피며 나를 조롱하 듯 얘기를 한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냉기를 뿜으며 한 내 대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감히 ㄱ.. 사내가 뭐라고 하려던 찰나 한참동안 찾아다녔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난 진리가 나를 큰소리로 부른다. 나와 사내의 고개가 진리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사내가 진리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정색하며 사내의 손을 떼어내었다. 진리가 내앞으로 다다다 달려와 사내와 나 사이에 낀다. 그리고 사내를 죽어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른다.
"우리 아가씨께 무슨 짓입니까?!"
"아가씨라... 혹.. 저 계집을 말하는거냐?"
"계, 계집이라뇨?! 말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어라? 너 기생 아니었어?"
"히익!!!!"
"... 풉."
나보고 기생 아니었냐는 말에 진리가 거품물고 쓰러질 지경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진지하게 물어오는 사내의 물음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야 알았다. 여기가 유명한 기생집이었다는 것을. 진리가 웃는 나를 보고 더 식겁하며 아가씨!!!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알겠다. 알겠어. 사내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이다 고개를 숙인다.
"미안하오. 내 그만 착각을 한 것 같소."
단숨에 말투가 바뀌었다. 하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한마디. 그런데 사람을 왜 이렇게 홀려? 진리가 다시 눈에 불을 켜고 사내를 노려본다.
"하하.. 火家 당주의 장손 박찬열이라 하오. 실례지만 성함을 물어도 되겠소?"
"... 月家 ㅇㅇㅇ이라 합니다."
"이크, 제 실수가 아무래도 큰 모양입니다.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달의 가문... 역시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사내가 태도를 바꿔 이렇게 바로 저자세로 나오니... 불의 가문. 그 가문 역시 결코 낮지 않은 가문.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달의 가문은 이름처럼 너무도 높은 하늘 위에 떠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던겁니까?"
"그래요, 아가씨. 여기서 뭐하고 계시던 거에요?"
어느새 죽이 척척 맞는 사내와 진리의 모습에 당황스럽다. 이번엔 내가 볼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피하니 진리가 다시 아가씨!!를 외친다. 그만 좀 불러라. 다리가 아팠을 뿐입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대답했다. 진리가 사색이 되어 많이 피곤하셔요? 묻고 박찬열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다 참으로 엄한 곳에서 쉬고 계셨습니다.하며 웃는다. 여전히 옷깃을 팔랑거릴 때마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그 방울은..."
"아, 보셨습니까. 저에겐 아주 소주.."
"... 거슬립니다."
"... 예?"
"거슬린다구요. 빼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런... 아쉽지만 그 청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아가씨께 그 반지를 빼라는 것과 같은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
순간 박찬열이 가리킨 반지를 움켜쥐었다. 화들짝 나를 보며 실실 쪼개는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웃기만 할 뿐 더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오른손 중지에 낀 반지... 오래전 아버지가 주신 소중한 반지였다. 경계 가득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잘 지내십니까."
".. 스승님이라뇨?"
"아직도 못알아보네. 오랜만이야. ㅇㅇㅇ. 아니, 울보꼬맹이라고 해야하나?"
"!"
"나도 못알아봤으니 넘어갈까? 그래도 네가 준 이 방울까지 잊어버릴 줄은 몰랐는걸? ㅇㅇ이, 많이 변했네."
큰 손이 내 머리 위를 헤집는다. 아.. 생각났다. 딱 한번 우리집에 아빠 제자라며 찾아온 순하디 순했었던 키 큰 오라버니가 있었다. 변백현과 놀고있던 나는 그 오라버니를 질투해 울면서 아버지를 끌고와 절대 넘겨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서책을 함께 읽기위해 찾아왔던 오라버니는 결국 포기하고 나와 변백현하고 하루종일 놀아주다가 진이 빠져 돌아갔다. 헤어질 때 아끼던 방울을 박찬열에게 건넸다. 변백현이 달라고 할때는 단번에 거절했는데 박찬열에게는 먼저 방울을 내밀자 그 옆에 있던 변백현이 뾰로통해진 기억이 있다. 또 놀러오겠다며 떠난 박찬열은 그 후로 다시 오지 않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라버니가 火家의 장손이었다니... 또 아버지가 떠오르고 말았다. 눈물이 뚝뚝 흐른다. 요새들어 눈물이 너무 많아졌다.
"... ㅇㅇ아?"
"이리 세상물정을 몰라서야 어찌합니까..."
"... 무슨일인가."
"판서어르신께선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를 대신해 진리가 대답했다. 박찬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갑작스러운 비보가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손을 머리에 얹고 비틀거린다. 앞에서 울고있는 내가 고개를 푹 숙여 끅끅대고 있으니 슬퍼할새도 없이 몸을 추스리고 나를 감싸앉는다.
"어찌 이런 일이.. 얼마나 힘들었어.."
"... 흡."
"..."
육성으로 터져버린 울음에 박찬열은 더이상 아무말도 없이 나를 토닥였다. 등을 차분하게 두드리던 손이 가끔씩 떨리기도 했다. 제 충격도 가시지 못하고 나를 위로하는 오라버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더욱 눈물을 쏟았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주는 이가... 물론 변백현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변백현은 아버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었던 할아버지가 우선이었다. 할아버지가 변백현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변백현은 할아버지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꾹꾹 누르기 바빴다. 그때도 한량끼가 다분했던 박찬열은 변백현과는 정반대였다. 할아버지의 혀차는 잔소리는 가볍게 넘기면서도 아버지의 말은 한마디한마디가 명언이라며 가슴 깊이 새기곤 했다. 그래서 하루뿐이었지만 오라버니를 금세 따랐을 수도 있다. 드디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박찬열의 가슴팍에 얼굴을 뭍고 진한 울음을 터뜨렸다. 진리도 흐를듯한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내가 울음을 그칠때까지 기다렸다. 미뤄두었던 눈물을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야 박찬열에게서 떨어졌다. 박찬열의 도포 앞자락이 눈물로 가득 젖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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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겼다. 시끄러운 국밥집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고스란히 우리가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상당히 생소한 경험이다. 따뜻한 국밥이 각자 앞에 하나씩 놓여졌지만 나는 쉽사리 수저를 들지 못한다. 진리는 내 눈치를 보느라 들지 못하는 듯 하다. 종년이 어찌 주인과 겸상을 하냐며 식겁하던 진리를 억지로 붙잡아 놓은 것이 나다.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배에서 들리는 소음이 듣기 싫어서일 뿐이다. 박찬열은 많이 먹어봤는지 잘도 먹는다. 안먹으면 네것까지 내가 먹는다며 놀리기까지 한다. 주저하다가 결국 수저를 들었다. 진리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고 박찬열도 나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조금의 국물을 떠 조심스럽게 입에 넣는데.
"... 맛있어.."
"그렇지?"
박찬열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식사를 계속 한다. 나도 국밥을 한참 내려보다가 또 한입 들었다. 진리가 놀란 표정을 쉽게 지우지 못하고 나를 본다. 너도 어서 먹어. 차갑게 던진 한마디지만 진리는 눈시울이 붉힌다. 제가 어찌 감히 아가씨와... 고개를 숙이며 또 수저를 들지 못하는 진리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자 이제 박찬열이 나서 진리가 수저를 들도록 설득한다. 진리도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느꼈는지 드디어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한다. 이제야 다들 조용해졌다. 물론 그 정적이 오래가진 않았지만..
"그런데 이제 궁에 들어가실 분이 이런 음식을 드셔도 되는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궁에 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것도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설명을 해보아라."
"몰라도 돼."
진리가 밥을 먹다말고 하는 말에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박찬열이 또 물고 늘어진다. 진리가 박찬열을 질린다는 듯이 바라본다. 이젠 나도 궁금해진다. 이 오라버니는 뭘하면서 살길래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이렇게 까막눈인건지.. 박찬열이 진리를 보며 물었지만 내가 제지시켰다. 하지만 이미 물꼬를 튼 진리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오히려 신나서 떠드느라 내 시선은 보이지도 않나보다. 작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제 곧 세자빈 간택이 있지 않습니까."
"... 그래서 단자를 올리는거냐?"
"물론이지요~ 단언컨대 우리 아가씨가 꼭 세자빈으로 뽑히실 것이어요~!"
"흠..."
"생각없다."
"아가씨!"
"꼰대가 시켰구나."
"꼰대?"
"좌의정 어르신 말이다."
"도련님! 어르신께 꼰대가 뭡니까, 꼰대가?!"
나를 지켜보던 박찬열이 선택한 꼰대라는 단어에 진리가 기절초풍이다. 나도 알아듣지 못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박찬열이다. 할아버지를 감히 꼰대라 지칭하는 패기에 모처럼 기분이 좋다. 진리가 박찬열을 나무라지만 박찬열은 제 귀만 파며 정정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소리까지 내며 웃는 나를 가리키더니 ㅇㅇ도 동의하는 것 같은데? 하며 실실 웃어댄다. 그런 나를 보며 진리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울상을 짓는다. 뭐 어떠한가. 좋은게 좋은거지.
"헌데 도련님은 어찌 그리 모르시는게 많답니까?"
"어허, 내가 아는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판서어르신... 일도 그렇고 지금 세자빈 간택이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것도 모르시질 않습니까?"
박찬열이 여태 꼭 쥐고 있던 부채를 쫙 피며 당당하게 말했지만 내 눈치를 보며 하는 진리의 말이 맞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나도 궁금했기에 수저를 내려놓고 박찬열을 바라보았다. 박찬열이 음... 그래, 그렇긴 하구나... 하며 부채를 접고는 놀라운 말을 꺼낸다. 먼 나라에 있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와 진리의 눈이 동시에 커진다. 먼 나라?
"해신국이라고 아느냐? 여태 그곳에 있었다. 돌아온지 닷새도 안되었지."
"해신국이라면 저 멀리 바다를 섬기는 나라 아닙니까?"
"맞다. 왕도 바다가 선택을 하는 신기한 곳이지."
"바다가 왕을요? 어찌 그럴 수가 있답니까?"
"그러니까 신기하다 하질 않았느냐."
"그래서... 거긴 왜 간건데?"
조용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해신국이라는 곳은 나도 들어보았다. 한때 왕끼리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멀지만 가까운 나라였지만 지금의 왕가로 바뀌면서 그 사이가 틀어져 절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곳에 다녀왔으니 중요한 일을 하고 왔으리라 생각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는지 박찬열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선왕의 밀명. 박찬열에게서 너무도 조심스러운 단어가 흘러나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진리에게 무섭게 일러두었다. 오늘 들은 것들은 모조리 잊으라고. 절대 입밖에 꺼내지도 말고 상기하지도 말라고. 만약 발설하면 궁에는 절대 데려가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하자 진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리를 보내고 방에 들어와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목적을 바꿔야 할 듯 하다. 세자빈 간택. 떨어지려했으나 그러면 안될 것 같다. 나는 세자빈이 되어야한다. 고민 끝에 눈동자가 단호하게 짙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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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참으로 웃긴 아이다. 고작 하루 만났을 뿐인데 이틀이 지난 지금도 아직 눈에 선하다. 처음엔 어디서 굴러온 나비일까 고민했는데 알고보니 달이었다. 현재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달의 손녀. 아바마마 앞에서 당돌한 말을 하는 모습도 어찌나 놀라웠던가. 아바마마가 세자빈 간택 얘기를 꺼냈을 땐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낼 뻔 했다. 닷새가 남은 세자빈 간택. 기대가 크다.
나비야, 어서 날아오거라.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저하."
"그래? 내 오늘 확실히 기분이 좋긴 하구나."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아니된다. 말하는 순간 날아가버릴 듯 하니."
"예, 저하. 알겠사옵니다."
모처럼 세훈의 웃음기가 서린 얼굴에 놀란 내관이 물었지만 세훈은 입을 다물었다. 내관이 조용히 물러섰다. 세훈의 성격을 알기에. 더욱 입꼬리를 올린 세훈의 머릿속에는 한마리의 흰 나비만이 가득하다. 왕의 부름에 편전으로 들어서는 세훈은 들어서자마자 인사도 없이 나비에 대해 묻는다.
"아바마마, 좌의정의 손녀는 단자를 올렸습니까?!"
"인사도 없이 뭐가 이리 급하느냐."
"아.. 송구하옵니다."
왕의 나무람에 급히 인사를 한 세훈이 다시 눈을 반짝인다. 처음보는 아들의 모습에 왕이 당황한 눈치다. 그 때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제 아들은 좌의정의 손녀에게 빠져버린 모양이다. 그것도 단단히.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왕이 아들의 물음에 대답했다.
"좌의정의 손녀, ㅇㅇㅇ의 단자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구나."
"... 네?! 정녕 사실입니까?"
"그래, 사실이다. 일단 그 아이는 부친을 잃었으니..."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 하아.. 내 그리 법도에 대해 잘 알아두라 일렀거늘..."
"...?"
"원래 사주단자는 양친 중 한명이라도 여읜 여식은 올리지 못한다."
".. 그럼 그 아이는 세자빈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세훈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ㅇㅇㅇ가 아니면 결혼 절대 안하겠다고 떼쓰고 싶지만 자신의 자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리였다.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여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세훈에게 왕은 피식 웃으며 희망의 실낱을 내려주었다.
"그리도 걱정되느냐? 부친을 잃은 그 아이도 단자를 올릴 수 있게 손을 써두었다. 아직 기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거라."
"..."
세훈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셨으면 빨리 말해주셨어야죠... 속으로 안도한 하긴했지만 의문이 들었다. 손까지 써줬더니 왜 바로 단자를 올리지 않은거지? 콧대 높은 좌의정 영감이 시기를 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세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곧 다시 나비를 떠올리며 히죽대는 세훈을 앞에 둔 왕은 참으로 신기했다. 여인 하나가 궁내에서 미쳤다고 소문난 세자를 더 미치게 해버린 듯 싶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세자빈은 벌써 정해진 것 같군. 속으로 제 맘에도 든 좌의정의 손녀를 떠올리며 왕이 인자한 웃음을 짓는다. 세훈이 인사를 하고 편전을 나와 거침없이 발을 놀렸다. 내관과 궁녀들이 바쁘게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발이 멈춘 곳은 나비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세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멈춰섰지만 내관과 궁녀들은 숨을 고르기 바쁘다. 가장 가까이 있던 박내관이 재빨리 숨을 고르고 세훈에게 묻는다.
"여긴 또 어인 일로 오신겁니까? 혹 잃어버린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잃어버린 것이라... 그래. 있고말고. 하지만 곧 찾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해주시면 바로 새로운 것으로 대령하겠나이다."
"됐다. 새로운 것은 없을테니. 반드시 그것이어야만 한다."
"저하..?"
"그냥 그리 알거라.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을 빤히 바라보며 얘기하던 세훈은 끈질긴 박내관에 승질이 나 인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박내관이 식은 땀을 흘리며 바로 입을 닫았다. 누구보다도 평소의 그를 잘아는 박내관이기에 몸을 사린다. 그도 목숨이 아까우니. 그러다 문득 한가지 생각을 떠올린 세훈이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내관과 궁녀들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걱정을 시작한다. 저 망나니 세자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내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훈의 표정은 더욱 짖굳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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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한다. 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가씨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더니 웃는 낯으로 돌아온다. 종들 사이에서는 밖에 낭군님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부터 들었다. 세자빈 간택때문이었다. 나도 종들의 생각을 읽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진리도 딱히 해명하려 나서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내 명령때문이었다. 덕분에 종들에게 시달렸을 진리는 답답함에 가슴만 내려칠 뿐이다.
"아가씨.. 소문이란 건 무섭습니다..."
"말그대로 소문일 뿐이다. 신경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 소문이 궁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가씨..."
박찬열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오는 것이 저런 소문까지 낳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아는 날엔 분명히 집에 감금을 해서라도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박찬열을 매우 싫어했다. 가벼워보이는 행동때문일까? 이상하게 아버지가 박찬열에 대해 얘기할라 치면 항상 치를 떠셨다. 집에 처음 온 그날도 할아버지는 박찬열의 얼굴을 보기 싫다며 방에서 절대 나오시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도 시간 맞춰 집을 나선다. 진리가 빠릿하게 뒤꽁무니를 따라온다. 사실 진리도 없었으면 더 편하고 좋을텐데... 진리가 알면 할아버지께 말할까 그냥 별말없이 데리고 나온다. 오늘은 비단가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왜 비단가게에서 보냐고 물었더니 내게 선물을 준비했단다. 그런거 필요없다고 했지만 내가 꼭 주고 싶어 그러니 꼭 그리로 오라는 박찬열의 말에 하는 수 없이 가는 중이다. 집에 널리고 널린 시시한 비단 몇필 안겨주기만 해봐라. 혼구녕을 내줄테다.
"ㅇㅇ아, 여기다~"
"일찍 왔네?"
"하루종일 여기 있었어."
"왜?"
"네 선물을 준비하느라."
무슨 선물이길래 준비까지... 순간 박찬열의 손에 들린 작은 물건을 발견하고 입을 닫았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뒤에 있던 진리가 빼꼼 쳐다보며 먼저 묻는다. 저 해괴망측한게 뭐랍니까? 한마디에 박찬열이 무너져 내린다. 우릴 지켜보던 주인이 호호호, 웃으며 대신 설명을 한다. 아가씨, 저 총각 무지 열심히 한거라우. 그제야 박찬열이 다시 힘을 얻어 제 손에 들린 것을 내 손에 쥐어준다. 다시 살펴보았다. 머리는 사자인 것 같기도 하고... 몸은 뱀같기도 하고... 다리는 마치 구관조 같다. 뭐라 정의내려야 할까 고민하는데 나를 보는 박찬열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내가 정녕 알아봐주길 바라는 것인가...?
".. 괴수...?"
"..."
"..."
"..."
"푸핫!"
눈치없는 진리가 내 대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박찬열의 신형이 다시 무너져 내린다. 주인은 박찬열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레 혀를 찼다. 아가씨가 보는 눈이 없으시구만, 그건 강아지라우! 나와 진리는 한동안 할말을 잃었다... 오라버니의 미적감각은 제로인 듯 하다.
"응, 귀엽다..."
"됐다. 억지로 그러지마..."
"..."
얼굴을 가리며 우는 소리를 내는 박찬열이다. 순간 덕지덕지 감겨있는 박찬열의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혹시 이걸 만드느라 그렇게 된거야? 박찬열의 손을 잡고 물으니 어색하게 웃는다. 괜히 웃음이 나와 너덜너덜한 손을 꽉 잡고 이마를 가져가댔다. 고마워. 실로 오랜만에 꺼내는 단어다. 박찬열이 웃으며 뿌듯해한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한건지..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네.
"ㅇㅇㅇ."
"?"
갑자기 뒤쪽에서 내 이름이 들려온다. 익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목소리... 모든 이의 눈이 뒤쪽을 향했고 나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저자가 어찌 여기있단 말인가...? 눈을 의심하지 않고서야 믿어지지가 않는다. 눈앞에는 오세훈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박찬열과 진리는 처음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반응에 아는 사이임을 눈치채고 묻는다. 누구야?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온 오세훈이 내 손목을 덥썩 잡고 이끌어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뒤에서 놀란 두사람의 외침이 들렸지만 오세훈은 신경도 안쓰고 나를 무섭게 끌고 가기만 할 뿐이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그가 멈춰선 곳은 사람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 세자저하."
"밖이니 도련님이라 부르거라."
"..."
"내 너를 보려 집까지 갔는데 보이지 않더군."
"..."
"헌데 아주 재밌는 광경을 보았어."
"... 세.. 아니, 도련님."
"그래, 할말이 있더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정녕 모르느냐."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알겠어. 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화만 내는데.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모르겠다는 말에 오세훈이 심통난 얼굴로 묻는다.
"아직 단자를 올리지 않았더군."
"..."
"왜일까?"
"... 신중히 생각하는 중입니다."
"아까 그 사내 때문은 아니고?"
"무슨.."
"그 사내와 결혼 약속이라도 했나보지?"
어느새 투기로 가득찬 오세훈의 눈동자에 잠시 당황했다. 박찬열과 내가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구나...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라버니입니다."
"..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그대는 외동이라 알고 있다."
"친오라버니라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혼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
"그게 그리도 걱정되셨습니까?"
"... 아니다. 걱정은 무슨..."
"그렇다면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자,잠깐!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겠다고?"
점잖은 척 빼던 오세훈이 돌아간다는 말에 바로 체면이고 뭐고 다버릴 기세다.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오세훈 옆에 남았다. 박찬열과 진리가 기다릴텐데.. 하지만 세자를 버리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 난감할 뿐이다. 왕세자가 집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세자빈으로 가는 길이 한결 쉬워진 것 같아 보인다. 이참에 오세훈의 옆에서 좀 더 그 길의 문을 열어놓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박찬열이 잘 생각하고 진리를 조용히 데리고 있기를 바라며 조용히 오세훈의 뒤를 따랐다. 오세훈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실실 웃어대며 걷고 있다. 장에 이리저리 내놓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모습이 진리와 비슷해 보인다. 집는 물건들도 하나같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새삼 진짜 내 취향이 이상한건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이것이 좋겠다."
"?"
"선물이니 받아."
".. 저는 이것이 필요없는..."
"그냥 받지? 아까 그 사내가 준 것은 덥썩 받더니 내껀 거절하는거야?"
"..."
결국 화려한 노리개를 받아버렸다. 얼른 안차고 뭐하냐는 강렬한 눈빛에 한숨을 쉬며 저고리에 달고나니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오세훈이다. 오세훈이 내 손을 잡고 또 걷기 시작한다. 또 경기를 일으킬 뻔 했으나 꾹 참고 오세훈을 따른다. 내 앞에서 걸을때는 차가운 눈빛으로 따라가면서도 그가 나를 보면 최대한 밝게 웃었다. 그럼 오세훈도 따라 밝게 웃어보였다. 오세훈은 틈만 나면 얼른 단자를 올리라고 보챘다. 혹여 내가 올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 것이 확연하게 눈에 띈다. 세자빈은 네가 될 것이다. 오세훈은 단언까지 했다. 떨어지려고 했을때 이 얘기를 들었으면 참으로 비통한 소식이었겠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세자빈이 되어야 했기에 다행이었다. 오세훈이 왜 나에게 이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내 의지를 가지고 하려는 일은 술술 풀리는 듯 하다.
오세훈의 보챔에도 불구하고 내가 단자를 올린 것은 마감 직전이었다. 할아버지의 계략이었다. 이미 오세훈이 내정자를 찍어놓았고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세자를 좀 더 애간장타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안 오세훈은 분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집에 돌아가기 직전 다시만난 박찬열은 막무가내의 사내가 세자라는 것을 알고 혀를 찼다. 내가 힘들까봐 걱정하며 자기가 한 얘기때문에 무리하게 궁에 발을 담굴 필요 없다며 말리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생긴 의지는 그렇게 쉽게 꺼지지 않는다. 나도 박찬열도 아직 모른다. 오세훈이 나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대해 줄 것인지. 하지만 상관없다.
오세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에게 한 톨의 마음도 주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