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히비 [02] " 성규야,괜찮아? " " 응.괜찮아... " 책을 꺼내들자 먼지가 일어났다.검은색 표지부터 어두컴컴하더니 책을 펼쳐보자 요란하게 책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눈 앞에 펼쳐진 부분은 더욱이 어두웠다.그래,죽음은 소설에서나 접해왔던 이가 실제의 죽음에 익숙할리 없었다.책을 반납하고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평소보다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나른해지는 표정을 바라보던 명수가 입을 열었다. " 시원한곳이라도 갈까? " " ...응,가자. " 누나가,죽었어.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한 없이 작아져서 우는 그 모습이 컵 안에서 녹아가는 얼음과 같다고 쓰잘데기없는 생각이 들었다.처음보는 그 모습은 한 없이 작은 등으로 모든걸 떠안아야하는 부담감을 짊어지고있었다.남겨진 자의 서글픔마저 아직도 어려보이는 너는 다 가져가야한다. 어색한 상복을 입고서 처음으로 가보는 그 장소에서도 너는 하염없이 울었다.옆에 서있던 나마저도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비로소 납골당까지 다녀오고나서야 장례가 끝났다.그 시간동안 그의 가족들은 매우 헬쓱해져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누나 생각을 하는 것 같은 너의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런 표정조차 없었다. " 명수야. " " 왜? " " 우리 누나,나한테 유언을 했어. " " 뭐? " 빨대로 여전히 컵을 휘저으며 애꿏은 얼음을 입에 넣어 씹어먹는다.금방 입 속에서 녹아버리는 얼음을 삼키며 통유리로 제 모습을 보며 볼을 쓰다듬던 성규가 입을 열었다. " 자기 애인한테 자기 죽은거 말하지말아달라고하더라. " " ... " " 갑자기 우현이라고하는데 무슨말인지 모르다가 생각났어.그 이름,우리누나 애인 이름이였거든. " " ... " 헬쓱해진 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먹어도 계속해서 게워내고 몇날며칠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살은 더욱 빠져 옷이 헐렁해져있었다.제 옷차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컵 표면에 가득히 물방울이 맺혀있는 모습에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축 늘어진 명수가 입을 열었다.그래서,유언은 어떻게 들어줄건데? 명수의 말에 음료를 목으로 삼키던 성규가 어깨를 떨었다.약속장소에서 만나기 전부터 손에 가득 들고있던 종이가방을 들어올리며 손을 넣고 휘저었다.볼이 맞닿은 테이블 위로 하나둘씩 올라오는 물건에 깜짝 놀란 명수가 급히 굽혔던 허리를 바짝 세웠다. " 이게,다 뭐야? " " 붙임머리랑 립스틱.우리 누나,화장 안했잖아.누나 물건이랑 옷은 집에 그대로 놔뒀으니까 옷은 누나꺼 입으려고. " " 너 대체 뭐하려는거야? " " 누나 유언 들어주기. " 사망소식을 안 알리는건 어려워.무덤까지 그 소식을 안고갈 순 없잖아.내가 누나인 척 하면 다 해결 될거야.담담하게 말하고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였다.저 깊은 곳까지 산산조각 나는 듯 하였다.얼음이 녹는 동시에 그마저 녹아버렸다.팔로 얼굴을 가린 채 구석진 자리에서 녹아버린 그가 립스틱을 보며 흐느꼈다.일주일이나 넘게 지나버렸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않은 죽음이 실감나게 맞닿아왔다.볼을 잡고 귓속에 속삭이는 것 같아. 너의 누나는 죽었어. 소름끼치는 기분에 제 귀를 벅벅 문지른 성규가 고개를 숙였다.명수가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말했다. " 가게는?너희 누나 옷 도매가게 직원이잖아.가게 공사랑 휴가때문에 지금까지 안나가도 된건 알겠는데 너 이틀 후부터 가게 나가야되잖아. " " ...내가 누나대신 나가면될거야.나 누나랑 쌍둥이같다는 소리 많이들었잖아? " 어릴때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듣고자라긴했지.어느새 바닥을 보인 음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수가 붙임머리를 만지작거렸다.진짜 사람의 머리칼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고 감쪽같았다.테이블에 엎드려 옆 테이블을 곁눈질하다가 눈을 감는 그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성규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남은 음료를 입에 털어넣으며 종이가방에 다시 물건을 넣어준 명수가 말했다. " 착한 동생이네. " 누나 유언 지켜주려고 여장까지하고말이야.살짝 웃어보이는 얼굴에 고개를 들고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앉아있었다.낯익은 얼굴에 약간 고개를 갸웃한 성규가 당황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머리카락으로 가려볼까했지만 남자인 탓에 머리길이가 짧아 결국 종이가방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규야,어디 아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젓던 성규가 가방을 살짝 옆으로 치워 얼굴을 흘겼다. ' 김성유! ' ' 어... ' ' 뭐야,머리 완전 남자처럼 잘랐네.나한테는 왜 말도 안해줬어? ' ' 저기... ' 그때는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저 남자가 누나의 남우현이였단 걸.자리에 가만히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그를 보던 성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저 사람이 누나 남자친구야. " 뭐?진짜? " " 응.나 전에도 한번 누나로 오해받은 적 있다. " " 그러면 너는 얼굴보이면 안되겠네. " " 응.많이 보일수록 들킬수도있으니까. " 그럼 다 마셨으니까 일단 나가자.자리에서 일어나 명수의 등 뒤로 붙어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일부러 사람의 흔적이 적은 길로 돌아들어가자마자 성규의 다리가 휘청거렸다.미끄러진 발에 바닥에 주저앉았다.안도감때문인지 두려움때문인지는 몰랐다. " 괜찮아? " " ...응. "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던 성규가 명수의 등을 툭 쳤다.조금만 더 가면 너희 집이잖아.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말에도 성규는 끝까지 고개를 저어보였다.지금의 자신은 남에게 호의를 받을만큼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자괴감뿐이였다.골목길은 돌아나오자 자동차가 쉴새없이 지나가고있었다.눈 앞이 도는 느낌이였다.속이 잠시 배를 타는것처럼 울렁였다.쓰린 속이 아파온다. " 보지 마. " 빼앗다시피 들고있던 종이가방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가려준 명수가 성규의 어깨릍 붙잡았다.쓰고있던 모자마저 벗어 씌워주고선 어깨를 감싸고 길을 걸었다.한 발자국씩 걸어갈때마다 공포감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소리를 듣는 행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죽음이 얼굴에 스치다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명수에게 의지하여 걸어온 성규가 눈을 비볐다.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집에 다다랐었다. " 김성규,바로 집으로 들어가라. " " 응.다음번엔 나 안 데려다줘도 돼.고마워. " 잘 가.살짝 웃으며 손을 흔든 성규가 아파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보이는 뒷모습이 한 없이 약해보여 제 누나와 꼭 닮아있었다.명수가 성규를 부르기위해 소리치려다가 입을 닫았다. 누나의 유언을 지켜줘봤자 결국 상처받는건 너일텐데. 정을 받고 살아온 네가,정을 받고도 상처받을 상황인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선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려고하는걸까. 명수가 입을 꽉 닫은 채 등을 돌렸다.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느낌이란,가시가 박히는 기분과도 맞먹었다. " 다녀왔습니다.엄마,저 할 얘기 있는데, " " 성규야. "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오자 티비를 보던 몸이 고개를 돌렸다.의아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아버지가 뒤에서 그를 저지했다.태풍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듯 미묘한 분위기가 상황을 불편하게했다.아무 말도 꺼내지않는 제 아버지를 보던 성규가 고개를 돌려 구석진 자리에서 떨고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다.등과 어깨가 함께 떨리고있었다.잡힌 팔을 뿌리치고 그 자리로 다가간 성규가 무릎을 굽히고 말했다. " 엄마,울... " " 저리 가! " 달려드는 손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며 인상을 쓴 성규가 당황한 듯 손을 뻗었다.다시 한번 내리쳐진 손이 허공을 떠돌다가 가만히 내려앉았다.부서지는 기분만이 마음속에 떠돈다. " 아빠,이게 어떻게 된거, " " 네 엄마 들여보내고 얘기 좀 하자. " 방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다가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행동에 가슴이 아파왔다.그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부모에게서 얻은 상처가,마치 더 이상 아물어지지 않을정도로 큰 충격이였다.유년시절에 그토록 싫어하던 벌레를 대하는 느낌이 와닿아서. 그래서인지 더 아팠는지도 모른다. " 네 엄마가,당분간은 네 얼굴 제대로 보기 힘들거다. " " ... " " 자꾸만 네 얼굴만 보면 성유가 살아있는 것 같다고,당분간은 얼굴 보기가 싫다고하셔. " 눈가가 시큰해졌다.주먹을 꽉 쥔 손을 조용히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서 억지로 눈가에 힘을주자 코 끝이 찡해왔다.원치않은 죽음으로 이어져있는 남은 이 마저 상처받고있다.사람 한명이 같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 공식이였다.머릿속이 정전이 된 듯 아무것도 생각나질않았다.그저 깨질듯이 아파오는 머리에 성규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툭. 주먹 위로 가볍게 올라탄 눈물이 소나기로 바뀐마냥 쉴 새 없이 흐르고있었다. " 할 말...있습니다. " " ...말해. " " 저,당분간 누나 행세를 할거에요. " 고요한 집안이 숨통을 조여막았다.목을 조르는 듯 답답한 목에서 차마 말하기 싫은 사실만이 입 밖으로 내어지고있었다.목소리가 떨려오는게 두렵다는걸 일깨워주고있었다.인상이 찌푸려지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제 맞은편의 사람을보며 성규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 누나 유언이에요.딱히 어떻게 지켜줄까 생각하다가 이게 제일 적당한 것 같아서... ' ' ...그래.착하구나. ' ' ... ' ' 그래도 네 엄마 앞에선 조심해야할 거야.많이 상처받을 테니까. ' 내가 받을 상처는 더욱 깊다는 걸, 물이 조금만 닿아도 죽을 듯 쓰라려 고통스럽다는 걸. 아무도 몰라주는 달이 뜬 밤이였다. " 이,게 뭐야. " 옷장에서 성유의 옷을 꺼내입자 다리 사이가 휑했다.아무리 외형이 닮았다고해도 남성과 여성의 체형은 아무래도 다른 점은 있기에 어젯밤부터 털과 수염을 깎고 바지가 아닌 치마를 선택한 성규가 한숨을 내쉬었다.남자이기에 바지를 입으면 남자의 신체 특성이 분명히 도드라져보이기때문에 차마 바지를 입을 수 없어 치마를 골라입은 성규가 이마를 닦았다.난생 처음 해보는 경험이였다.가짜 머리칼을 조금 붙이고 누나의 치마를 입고 누나처럼 행동하기 위해 다이어리와 앨범까지 뒤지는 등 별 노력을 다 했다.예를들어 하품할때는 눈을 감아버린다던지의 사소한 행동까지도 그의 연인에겐 전혀 사소하지않기때문에 더욱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 성규가 조심히 길을 걸었다.치마를 입고 걸을때마다 뻥 뚫린 밑이 휑하여 괜히 길을 걷다가도 상가의 거울을 보고 치마를 툭툭 터는 등 낯선 경험이 어색하지않을 수 없었다. " 성유,왔어? " " 네... " " 어디 아파? " " 휴,휴가기간에 열이 조금 있어서...아직 다 안나았나봐요. " " 그렇구나.맞아,오늘 옷 떼왔고 여기에다가 전화로 찾으러오라고 말 좀 해줘. " 무심한 종이가 품으로 안겨왔다.우악스럽게 종이를 잡자 끄트머리가 조금 구겨져왔다.아무리 여자처럼 행동하려고해도 역시 힘은 누나랑 다를 수 밖에 없는걸까.가만히 서있던 성규가 거울 앞에 서서 빙글 돌아보았다. 죽음을 앞둔 채 누나가 가지고있던 살구빛 치마가 붉게 물든 느낌이였다. " 성유,전화했어? " " 잠깐만요! " 허둥지둥거리며 전화기를 집어든 폼은 어색하기 짝이없었다.종이를 보고서 성규가 입을 열었다. " 네,거기 우르미 쇼핑몰 맞죠.주문하신 무한 로고 티셔츠랑 치마들 각각 30개씩 들어왔으니까 가지러오세요. " - 무슨 소리세요?그 때 직접 사무실까지 가져다주신다고 하셨잖아요. " 예?잠시만요.어,언니...저희 우르미 사무실까지 가져다주기로했어요? " 성규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인 채 얼떨떨하게 웃었다.목울대를 울렁이며 커피를 삼켜내던 그녀의 행동이 멈추자 손에 식은 땀이 흘러내려왔다.첫 날부터 밖으로 나가긴 싫었는데,몰래 기도하는 성규와 달리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 맞다.그럼 성유 너가 가져다줄래?어차피 여기서 십분만 걸으면 나오니까 그냥 차 타지말고 가져다줘. " 바스락거리는 봉투를 우악스럽게 안듯이 떠받자 다리가 휘청했다.제일 낮은구두를 신어봐도 여자의 굽이란 알 수 없는 물건이였다.다녀올게요,고개를 숙이고 양 팔에 봉지를 끼고서 전혀 익숙치않은 구두로 익숙하지않은 길을 걸었다. " 아! " 익숙하지않은 구두에 익숙하지않은 지리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건물을 올려다보던 성규가 발을 헛디딘 채 중심을 잃었다.팔을 제대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였기에 다리랑 팔정도는 다칠거라고 생각하던 성규의 팔이 잡혀왔다. " 괜찮... " " 어...? " " 김성유!여기서 뭐 해? " 빨간 구두가 흠집이 생겼다.약간 굽혀진 무릎을 세우지도 못하고서 가만히 제 팔을 잡아 일으켜준 우현을 바라만보던 성규가 재빨리 무릎을 세웠다.잡혔던 팔을 바라보며 조금은 인상을 쓰다가 팔에 끼워져있는 봉투를 좀 더 제 품안에 끌어당겨 안았다.갈색 머리 위로 손바닥이 올라왔다. " 옷 가져다주는거야? " " 어,응... " " 나 잠깐 커피사러 나왔는데.그거 가져다주고 같이 갈래? " " 아니야,괜찮아.나 이거 가져다주고 빨리 가봐야해서.너도 빨리 커피사고 회사로 들어가. " 응.머리를 쓰다듬은 우현을 뒤로하고서 재빨리 건물 안으로 몸을 들여 엘레베이터에 올라탄 성규가 한숨을 내뱉었다.설마 첫 날부터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건지 이마에 흐르고있던 땀을 손으로 감추었다.우연히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저 누나의 대역인걸까.거울 속을 들여다볼때마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져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희미하고 흐릿해져만간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 성규가 립글로즈가 지워져가는 제 입술을 매만졌다.까칠한 입술이 손 끝으로 생생하게 맞닿아왔다. 내가 보는 나는,거울 속 나는 이미 까칠하다. " 잘 다녀왔어? " " 네.그나저나 거래처에서 연락온거 없어요? " " 응,걔네들은 모레즈음 연락 줄 것 같아.도매시장에서 싸게 떼가는 주제에 가져다달라고하기나하고 아주 그냥 비즈니스에 대한 예의가 없어. " 툴툴거리는 사장을 뒤로하고서 믹스커피 봉지를 입술로 잡아뜯은 성규가 가게 문 밖을 바라보았다.출근을 하고 퇴근을 기다리고.누나의 하루는 어떠하였을까. " 사장님. " " 왜? " " ...아니에요.커피 드실래요? " 내가 나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의심할 만 하겠지?거울을 보며 립글로즈를 살짝 덧바르면서 휴대폰을 힐끔 들여다보자 어느새 6시를 향해 달려가고있었다.진동이 울려왔다. " 성유야,너 전화오는데? " " 네? " " 남자친구 전화 아냐? " " 아...잠깐만 받고 올게요. " 전화기를 손에 쥐고서 가게 밖으로 나온 성규가 입술을 매만졌다.고심 끝에 받은 전화기 너머에서 꽤나 밝은 음성이 귓가로 전해져왔다. - 성유야,왜 지금 받아...내가 문자를 얼마나 했는데. 사실 일부러 받지 않았다.누나의 껍질을 쓴 채 누나의 연인을 대한다는게 너무나도 어색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전화기를 최대한 멀리했다.손톱을 바라보며 옆 화장품 가게를 바라본 성규가 입을 열었다. " 미안...내가 배터리가 없어서 계속 못봤네.지금은 배터리 갈았으니까 괜찮아. " - 아,그런거였어?뭐야.난 혼자 괜히 걱정했잖아. " 걱정?무슨 걱정? " - 얘가 바람이 난거면 어떡하지,뭔가 오늘 김성유 답지않은 느낌도 들어가지고. 심장이 내려앉았다.누나답지않다니?성규가 약간의 불안함에 제 구두만 바라보았다.무거운 기운이 들어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 김성유? " 아,아냐. " - 보고싶다. " ... " 살짝 머뭇거리던 성규가 빨간 구두를 내려다보며 떨리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괜시리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 나도,보고싶다. " 역겹다. 차갑고 역겨운 여름의 밤 바람이 음성 속 너를 관통해갔다.너를,나를.그리고 모든 이를. " 성유야,짐 챙겨.이제 문 닫자. " " ...네. "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실루엣이 비췄다.멀리 떨어져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않아 약간 인상을 찌푸린 채 주시하자 익숙하고도 반가운 얼굴이 제 얼굴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익숙하게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명수가 성규를 데리고 걷기 시작하였다.간간히 구두를 신어서 뒤꿈치가 아프다며 더디게 걷는 그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보행을 맞춰갔다. " 김성규,오늘 어땠어? " " 무서웠지. " " 무서워? " " 내가 군대에서 몰래 했던 짓들보다 더 무서운 경험이야. " 아하하.명수가 살풋 웃으며 골목길을 돌아갔다.고작 가로등 몇개에 의존하는 아슬한 골목길이였다. " 집 다왔다.빨리 들어가. " " 이제 안 데려다줘도 괜찮다니까... " " 빨리 들어가라니까. " 고마워.어두운 길에서 유일하게 빛이 보였다. - 암호명 - 남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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