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기다렸다가 백현이랑 같이 가자."
"왜? 걔 반대쪽에 살잖아."
소현과 같이 간다고 말했음에도 자기도 오늘은 그쪽으로 간다며 오전 내내 말해댔다. 같이 가자고 수십 번도 말한 백현을 혼자 가게하기가 뭐해 기다렸다. 소현은 뭐가 그리 맘에 들지 않는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찬열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복도에 서있었다. 백현은 한손에 가방을 들고 급하게 뛰어워더니 찬열과 소현의 사이에 섰다. 가자!
"그래서 내가 한방에 깼다니까?"
"오- 실력 많이 늘었는데?"
"그치?"
"응응, 소현아- 이쪽으로 와."
집으로 가는 길은 소현에게 있어 불편한 길이었다. 소현과 백현은 친한 사이가 아님은 물론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다. 가는 길 내내 찬열과 자신 사이에 껴있는 눈치 없는 백현을 째려보기만 했다. 찬열에게 바짝 붙어 조잘대는 꼴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소현이 말을 할라치면 백현이 껴들어 찬열과 얘기를 했고 소현은 그런 백현에게 질려버려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찬열은 그런 소현이 퍽 신경 쓰였는지 제 옆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순간적으로 엇갈려버린 대화에 이후로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변백현, 걔 너무 눈치가 없어."
"소현아."
커피숍에서 머그컵만 만져대던 소현이 대뜸 말했다. 그렇게도 생각할 만 한 것이 백현은 찬열이 소현을 사귄 뒤로 더욱 찬열과 붙어 있으려 했다. 소현과 만나기로 한 약속에도 백현은 껴있었고 둘이 어딜 가고 무엇을 하든 백현은 함께했다. 겉으로는 활발해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백현이기에 찬열은 난감했다. 소현을 챙기자면 백현이 걸렸고 백현을 챙기자면 소현이 제 옆에 있었다. 매번 난감한 상황이 찬열에게 닥쳤고 셋은 그들 나름대로 모두 지쳐갔다.
"나 만날 때만이라도 걔 걱정 좀 안 하면 안 돼?"
"걔 걱정만 하는 거 아니야."
요즘 들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찾는 백현을 보면 그런 백현을 두고 왜인지 쉽게 소현에게 갈 수가 없었다. 늘 내 옆에 있던 작고 여린 백현이 나도 모르게 사라져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얼굴에 다 보여. 소현과 만날 때면 늘 해오던 말이었다. 내가 백현의 걱정을 하고 있다고. 찬열은 분명 소현과 함께 있었고 얘기했고 함께 웃었다. 그런데 백현의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찬열은 그렇게 말하는 소현을 알 수 없었고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야! 박찬열! 지금 10반 난리 났어!"
"어?"
김소현이 변백현 뺨 때리고 소리지르고 장난 아니야, 나 걔가 그렇게 무서운 얜 줄 처음 알았다. 근데 변백현이 너 좋아한다고 소문난 건 아냐? 뭐? 그래서 김소현이 지금 저 난리 피우는 거잖아. 찬열은 걸음을 빨리했다. 소현이 화가 났다고 해서? 백현이 뺨을 맞고 있다고 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파도가 되어 모든 것을 쓸어내렸다. 벌써 교실 앞 복도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있었다. 대다수가 백현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찬열 역시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명이었다. 변백현이 박찬열을 좋아한대.
백현아,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소현은 백현의 뺨을 다시 한 번 내려치려 손을 들었다. 김소현, 그만해. 당황한 것은 소현 뿐만이 아니었다. 백현은 발개진 눈으로 찬열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이들 틈을 헤집고 저만치 달려 가버렸다. 변백현! 벌써 멀리까지 백현을 발을 떼자 소현이 찬열을 잡아왔다.
"또 갈 거야?"
***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자 찬열은 얼른 밖으로 향했다. 연회장 구석에 마련된 대기실에 가까이 가자 여기저기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해, 많이 친했던 사이야? 아, 그게…. 선뜻 대답하지 못한 나를, 너는 알았을까. 난 8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선배, 대기실에 여벌옷 있죠? 저번에 갖다놓은 거. 응- 찬열은 민주를 지나쳐 대기실 안에서 반팔과 반바지를 챙겼다. 얇은건 추울 텐데….
서둘러 방 안에 들어가자 백현은 허리에만 수건을 두른 채 뒤돌아 머리를 털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살이 없긴 했어도 마른 축에 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뒤돌아 있는 백현은 너무나 마른 몸이었다. 찬열은 백현의 목에 옷을 걸어주고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몸이었다.
"백현아."
"응."
"나, 아직도 미워?"
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8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상처가 났어도 벌써 아물고도 남을 시간, 하지만 흉은 사라지지 않는다. 백현은 묵묵히 옷을 챙겨 입었다. 흰 면 티, 검은 반바지, 영락없는 19살의 백현이었다. 찬열은 19살의 백현을 마주했다. 울고 있는 걸까.
***
"헤어지자."
"김소현."
찬열은 끝내 백현의 우는 등을 달래주지 못했다. 저만치 달려가는 백현을 두고 소현의 손목을 잡았다. 무작정 소현을 끌고 조용한 곳으로 데려와 다그쳤다. 백현이 때렸어? 박찬열. 때렸냐고. 아른거리는 뒷모습에 찬열은 소현의 울음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끝끝내 내뱉었다. 헤어지자고. 자신의 친구를 때렸다고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다그치는 찬열에게 질려버렸다. 넌 정말 못됐다. 아무것도 알지 못해. 상처를 주고 있는 건 너야. 소현은 홱 돌아서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백현도 소현도 찬열에게서 멀어졌다. 아슬아슬했던 관계가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소현은 몇 일 전부터 들려오는 지긋지긋한 소문에 눈을 감았다. 변백현이 박찬열을 좋아한대. 전혀 일리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둘 사이에 백현이 끼어들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언젠가 한 번 백현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꼭, 오래가라고. 소현은 뼈가 있는 백현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개의치 않던 소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찬열의 탓이었다. 어딜가든 백현을 찾았고 백현이 없다면 불안해했다. 정작 자신은 모르는 것 같다만.
"백현이는?"
"먼저 간다고 전해주래."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 있나? 혹시 어디 아파보였어?
찬열의 행동은 지나쳤다.
백현은 그 날의 소동 이후로 찬열의 반에 찾아오지 않았다.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체육복을 노려보다 사물함 문을 쾅 닫았다.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아직 넉넉한 시간에 교실 문을 나섰다. 백현의 교실까지의 거리는 꽤 되었다. 매일 이 복도를 걸었을까. 백현의 교실 뒷문을 조용히 열었다. 바로 백현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애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 당하는 백현이.
너 게이라며, 막 내꺼 보면 흥분하고 그러냐? 하얀 백현을 사이에 두고 상스러운 놀림이 오고 갔다. 백현은 묵묵히 문제집을 풀어냈다. 박찬열 없어서 어떡하냐? 네 왕자님은 찾아오지도 않는데, 가련한 공주님이네- 백현의 바로 앞에 있는 상현이 백현의 볼을 쓸었다. 백현은 손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고 뒷문에 서있는 찬열과 마주했다. 찬열은 눈을 피했고 교실을 나와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고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찬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제 교실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것일까.
***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
"8년이나, 지났잖아. 아까 물어본 건 대답 안 해줘도 돼."
그래, 아까 백현이 물은 것이 있었다. 왜 말 안해주지 않았냐고. 찬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던 입을 열었다. 말했지, 일부로 말 안 한건 아니었다고.
***
"너도 간다고?"
"네, 어차피 가족 다 가는데 저만 여기 있기도 좀 그래요."
"그럼 너는 졸업식 날로 출국일 잡아놓을게."
그 날 이후 찬열은 백현을 찾지 않았고 백현 역시 찬열을 찾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서로에게서 돌아섰고 멀어졌다.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던 날 백현이 찬열을 찾았다. 조그맣게 접힌 쪽지에는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적혀있었다.
얼마나 꾹꾹 눌러썼는지 종이가 구깃했다.
찬열은 쪽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캐리어를 택시 뒷자석에 밀어 넣었다.
혼자서라도 한국에 남으려 했었다. 하지만 찬열은 백현에게서 도망쳤고 남들의 시선 속에서 달아났다.
남겨질 백현을 생각해야 했을까,
19살의 찬열은 어렸고 백현은 남겨졌다.
+)
부끄럽지만 저에게도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분들이 계세요ㅠㅠㅠ♥
제 사랑 다 퍼드릴거에요!!!!! 꺄하
붕붕이님 레모니야님
제 사랑 받으실꺼시쵸? (딥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