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지민 |
익숙하게 필터를 깨물다 휴대전화기를 확인했다. 열한 시 사 분. 후덥지근한 온도에 잠이 오지 않아 찬물로 샤워를 다시 하고 이불을 구석에 망가뜨려 놓은 뒤 천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옅은 회색이 자신의 기분 같아 찜찜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벽지를 바꿔야겠다 생각하고 알람 시계를 확인한 뒤 불을 껐다. 겨우 일 년이 지났는데 아련한 듯 아련하지 않은 기억이 관자놀이를 툭 건드렸다. 여기서 밤낮 할 것 없이 많이 뒹굴었는데. 배고프면 시켜 먹고, 만들어 먹고. 고작 라면 따위를 끓여 먹어도 잘도 웃었는데. 같이 샤워하다 장난치고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일어난 사람 괴롭히면서 정말 발랄하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뒤숭숭한 기분에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흩어지는 연기가 꼭 박지민 같아서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그땐 그랬지, 추억을 되새김질할 시간도 없이 타올랐다가 금방 꺼진 만남이 민망하고 부러웠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만났다면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들이 가득하겠지. 혼자 방구석에 앉아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는 자신이 못나 보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생각 없이 자주 걷던 길을 걸으니 편의점이 보여 들어갔다. 바나나우유 하나, 맥주 하나, 쥐포 한 봉지. 담배 한 상자를 사고 집에 들어와 무작정 우유 껍질에 빨대를 꽂아 두 모금 가득 빨았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너의 생각을 생각하지만 영감이 오지 않아 애꿎은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곡 작업이나 해야지. 폴더 정리를 하던 와중에 장난으로 녹음하던 박지민의 목소리를 틀었다. 아, 아. 이거 녹음되는 거 맞아요? 오 신기하다. 까르르 웃는 시민의 목소리가 소년 같아 이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넌 내 옆에서도 순수하고 청량한 소년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겠지. 한참 정리하던 와중 '발견하면 바로 들으시오' 딱 봐도 박지민이 장난친 폴더를 열었다. 딱 네 곡만 들어있었다. 몇 초일지 모르는 그것들을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시켰다. 차례대로 들어가는 재목이 더럽게 박지민 같았다. <지금 뭐 해요.> <나는 형 생각하는데.> <왜 이렇게 무기력해. 애인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옆에 있어도 보고 싶냐. 나 좀 봐요.> 내가 잠깐 딴 짓하는 사이 녹음했는지 소리가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들키지 않으려고 용을 썼구나. 음량을 크게 올리고 자세히 들어보니 뜻밖에 일 분 남짓한 길이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형 지금 뭐 해요? 나는 여기 있는데. 형은 항상 나랑 같이 있어도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내 눈을 딱 쳐다보고 뭐 하냐는 질문하면 나 엄청나게 설레요. 창피해서 말하기 싫은데 형은 넋 놓는 것도 귀여운 거 알아요? 귀엽다는 소리 겁나 싫어하면서 나한테는 엄청나게 하고. 아니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닌데 형도 스스로 귀엽다는 거 인정하죠? 나랑 키도 별로 차이 안 나면서.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요 크크크. 다음 파일로 옮겨졌다. 형은 가끔 무슨 생각해요? 작업하는 생각은 너무 뻔하니까 패스. 내 손 짜리몽땅하다고 못난이 손이라고 하는 데 깍지 꼭 잡을 때 형 되게 선수 같았어요. 능글능글. 거기다 사투리 쓰면서 자기 더 꾀어보라고 장난치면 내가 얼마나 민망한지 알아요? 일부러 나 부끄러워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죠? 하여튼 못된 고양이 같아선. 다음 파일은 짧았다. 십 초가량 되는 음색이 한숨을 만들었다. 나 여기 있어요- 딴 데 보지 마요. TV도 보지 말고, 나만 봐요. 상체를 들어 두 손을 얼굴에 묻은 사이 다음 파일의 음성이 나를, 참. 형. 사랑한다는 말보다 좋아한다는 말이 더 설레니까 난 형 좋아할래요, 평생. 그런데 지금은? 지민아, 지금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존나 찐따같잖아. 엄지로 눈 끝을 꾹꾹 누르고 유에스비에 음성을 옮겼다. 내가 죽었다 깨어도 지우지 못할 것 같다. |
정국지민 |
일주일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구름 없는 낮은 벌써 강렬했고 열을 그대로 받는 땅의 온기가 모든 수분을 잡아먹듯 피어올랐다. 그동안 보지 못한 인어는 잘 있는지, 어디에 사는지, 심지어 무엇을 좋아하는 단순한 것조차 아는 것이 없었다. 정말 꿈처럼 지나간 시간이 꿈인 것 마냥 행동할까 제 자신에게 겁이 났다. 마냥 비린 물 냄새를 달게 만들었고 차가운 피부가 어린아이의 젖살만큼 보드라운 인어를 내가 어떻게 잊을 리 있을까. “보고 싶다.” 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누운 정국은 발아래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너무 맑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꿈벅꿈벅 뜨다 감았다를 반복하다 나른해지는 기분에 잠이 들었다. 다시 창문을 확인해보니 남색의 하늘이 비쳤다. 창문을 자세히 바라보니 비 온 자국이 말라있었다. 문을 열어 부엌에서 칼질을 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비 왔어? “지금도 조금씩 와.” “…나, 나갔다 올게.” 운동화를 구겨 신고 인어를 보았던 장소로 미친 듯이 뛰었다. 여전히 방파제 끝에 앉아 눈을 감고 비를 느끼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인어의 옆으로 다가갔다. 인어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 정국을 확인한 뒤 제 옆자리를 앉으라는 듯 두드렸다. 넘어지지 않게 손도 잡아주는 친절함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한참을 앉아있었다. 비는 그치고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간간이 보이는 별이 하늘에 하얀 점을 찍은 것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인어는 하늘도 재미없어졌는지 정국의 손가락을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쳤다. 손가락들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정국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통통한 인어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있잖아, 사람으로 살면 재미있어? 그렇게 재미있지 않아. 그럼 너는? 인어로 살면 재미있어? 사실 나도 그렇게 재미있지 않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사는 세상도 네가 사는 세상도 결국은 하나의 세상이니까. 정국은 인어가 건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맨발을 바다에 담갔다. 인어의 꼬리가 느끼는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손가락에서 전해오는 온기보다 더 차가워 소름이 돋았다. 이 안에서 사는구나. 정국이 챙겨온 핸드폰이 울렸다. 받기 싫어 뒤집어놓고 모르는 척 인어를 바라보니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아 손가락을 풀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꼬리로 물장구를 치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우리 약속하나 할래? 무슨 약속? 어디선가 나를 보면 안아줄래? 뭐, 길거리에서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나.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인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눈까지 접어가며 맑게 웃었다. 정국은 인어의 머리를 쓰다듬다 콧잔등에 입술을 콕 찍었다. 놀란 인어는 정국의 입술을 검지로 꾹 눌렀다. 놀랐잖아. 더 놀라게 해줄까? 정국은 고개를 살짝 꺾어 인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 혀로 슬그머니 인어의 입안을 훑었다. 너는 뭐가 이렇게 차가운지. 인어의 입안은 피부처럼 차가웠다. 말캉한 혀를 한참 건드리다 더 깊숙이 들어가 인어의 치열을 차근차근 건드리며 한없이 느꼈다. 약속이니까, 나는 너를 반드시 알아볼 수 있으니까, 너는 꼭 나타나야 해. 나의 인어. |
석진지민 |
소년이 태어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작고 통통한 손이 리듬을 타며 까딱거릴 때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기분 좋을 때 자주 하는 허밍은 이미 익숙해져 원곡을 한 번도 듣지 않았음에도 따라 할 수 있었다. 내 한 뼘도 되지 않은 발을 톡톡 건들면 간지럽다며 소심하게 웃기도 한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발이, 다른 부위에 비해 유난히 하얗고 발가락이 올망졸망해서 깨물고 싶게 만든다. 너를 못 만났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팔을 모아 턱을 괴고 소년을 관찰했다. 쪼그려 앉고 주방 세제에 물을 타 비눗방울을 만들어 놀고 있는 천진함에 내심 기뻤다. 어느 누구에게도 더렵혀지지 않아 너 자체로 순수함을 갈음했다. 바닥에 묻은 것들을 닦기 싫어하자 직접 걸레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네가 한 일은 네가 치워야지, 그치? “당신은 사는 게 재미있어요?” “응.” “왜요?” 바닥을 닦으며 소년은 열심히 물었다. 침대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들입다 누웠다. 혼날까 꼼꼼하게 닦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그래 네가 뭘 하든 내 눈에는 사랑스럽겠지. 걸레를 화장실에 던져놓고 내 품으로 꾸역꾸역 들어왔다. 가슴팍에 도리도리질을 하며 다시 한 번 왜요? 묻는 너의 눈을 보며 답했다. “네가 있으니까.” “아, 뭐야 오글거려.” 내심 좋다는 듯 그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통통 두드린다. 너는 나를 조련하는 방법 따위를 아주 잘 안다. 한 팔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적당히 마르고 탄탄한 허리가 안기 편했다. 몰래 운동이라도 하는지 그렇게 먹여도 살 하나 찌지 않아 속상하면서도 땀 흘렸을 너에게 보답으로 이마에 입술을 콕 찍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니 볼이 파르르 떨릴 만큼 입꼬리를 올린다. 너는 좋아하는 척 감정 연습을 배운다. 당황스러운데도 익숙한 척, 하기 싫은데도 좋은 척, 혹은 아까처럼 싫은데도 반가운 척. 너는 억지로 웃을 때마다 오른쪽 눈이 더 접히는 걸 알까. 애써 모른척하고 담배를 무니 알아서 라이터 불을 켜 담배 끝에 가져다 댄다. 깊게 마셨다 길게 뱉으니 하얀 연기가 부스스하게 입에서 나왔다. 너는 신기한지 연기를 잡으려 손을 허우적대다 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는 걸 보고 이내 팔을 내렸다. “사랑해요.” “…….” “농담이에요.” 해죽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아 농담인 거. 연기를 가득 머금고 소년의 입술에 전달했다. 입을 살짝 벌려 조금씩 불어주니 야금야금 잘도 먹는다. 그대로 입술을 박아 혀를 가지고 노니 숨 쉬는 게 벅찬지 어깨를 밀어낸다.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연기가 사라질 때 입술을 때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물이 촉촉하게 고여 있었다. 진짜 심술보 독한 것 봐. 얄미워. 혀를 내밀고 침 뱉는 시늉을 하며 잔뜩 찌푸린 미간이 같잖아 검지로 길게 눌렀다. 그런 농담 한 번만 더 하면 그땐 진짜 이상한 거 먹일 거야. 소년이 품에서 나와 혀를 날름거리며 도망갔다. 일단 잡아보기나 해봐요. 까르르 웃는 소리가 천진난만해서 사실 잡을 수가 없었다. |
태형지민 |
사랑한다는 말은 의무가 되어버렸고 서로가 이미 내 것이라는 안도감이 커서 그랬을까, 나는 너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너는 나를 목소리만 들어도 지친다며 어깨를 떨궜다. 다시 시작하자며 풋풋함을 담아내려 노력을 해봤지만 어느 노래 가사처럼 한 번 깨진 유리잔은 다시 붙기 힘들다는 표현처럼 우리는 어설프게 모양을 만들고 다시 깨트렸다. 지민아, 왜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가슴이 뛰지 않는걸까. 태형아, 우리는 왜 손을 잡고 있어도 시선은 다른 곳일까. |
윤기지민태형 |
항상 이 날은 하늘이 맑지 않아. 먼지 낀 것 같은 하늘엔 곧 천둥이 내려올 것 같아.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놓은 벌이라 생각할게. 그래야 덜 슬플 것 같아서. 여기는 어때? 태형이가 산은 싫다고 했는데 지민이 네가 하늘을 좋아하니까 제일 가까운 산에 왔어. 지민아 나 잘했지? 거기서 태형이가 내 욕하면 때려도 돼. 나는 고작 여기서 건드리지도 못하니까. 참 하늘도 웃겨. 너희 둘을 같이 데려가시고 내 옆에는 아무도 없게 만들고. 그거 아냐, 너희 둘 그렇게 가고 나서 나도 따라갈까 몇 번을 시도해봤는데 안되더라.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너희가 나를 거부하는 걸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나까지 그곳으로 가면 여기에 우리를 기억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잖아. 그러니까 나라도 있어야지. 가끔은 김태형이 더럽게 미울 때도 있어. 배다른 형제라서 더 붙어있고 더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왜 말리지 않았는지. 왜 굳이 같이 갔을까. 죽을 만큼 그렇게 좋았냐. 속는 셈 치고 말려보지 그랬어. 마음속에 숨겨놨던 고백까지 하면서 붙잡지 그랬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박지민을 너는 얼마나 더 사무치게 사랑했었길래 같이 따라갈 만큼 잔인한 선택을 골랐을까. 굳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을까. 너네한테 뿌려줄 술 내가 다 마시게 생겼네. 너는 평생 나에게 듣지 못할 말이 있어. 태형이는 그곳에서 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매일 해줄 것 같네. 김태형이 얼마나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물론 나도. 좋아해. 바보같이 나는 지금도 널 좋아해. 너는 여기에 없고 네가 있는 그곳엔 내가 없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김태형이랑 달라서 아마 평생 못 했을 수도 있었어. 너는 몇 번을 들었니, 나는 오늘 처음 너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조그맣게 해봐. 많이 좋아해 지민아. 태형이가 그러더라. 네가 너무 소중해서 차마 건드리지 못하겠다고. 고심해서 하는 말에 진심이 나오더라. 나는 한없이 사랑스러워서 내가 손댈 수도 없다고 하니까 형 마음이 제 마음이네요 말하면서 헤벌쭉 웃는데 둘 다 얼마나 모지리 같았는지. “웃겨, 그 새끼나, 나나.” 네가 싫어하는 담배 지금 피우고 있어. 네 옆에서. 한 번은 네가 담배 싫다며 오만상 다 찌푸리다 피우던 걸 반토막 내더니 혼날까 봐 뛰어갔잖아. 그때 얼마나 웃겼는지. 전봇대 뒤에서 빼꼼 쳐다보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안 때릴 거죠?’ 슬그머니 나와서 태형이 뒤에 바짝 붙어서 졸졸 따라오던 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넌 내가 이런 생각했다는 것도 몰랐지? 언젠가는 내가 덤덤해질 때 이야기해 주려 묵혀놨었는데. 이렇게 풀어버리네. 나중에 자주 놀러 와서 다 이야기해줄게.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고 바라봤었는지, 지금은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거기서 김태형이 잘해주냐. 예전처럼 그렇게 놀리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거기서 너무 행복해하면 솔직히 배 아플 것 같다. 나랑은 그렇게 행복한 적 없었잖아. 김태형이 잘 해주는 건 다 받는 대신에 너무 행복해하지는 마라. 나 버리고 둘이서 잘 살면 나도 금방 따라가서 훼방 놓을 테니까. 너희가 없는 이곳은 나 혼자 사는 독방 같다. 항상 셋이서 잘 돌아다녔는데. 햇빛도 좋고 바람도 좋고 김태형이 웃긴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박지민 웃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는데. 사고 치고 다니는 둘 뒤치다꺼리는 내가 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좋았는데. 나 혼자 있으니까 꼭 색맹 된 것 같더라. 그냥 다 회색이야. 아무런 색도 없는 그냥 시멘트 같은 그런 회색. 김태형은 별로 안 보고 싶은데 박지민은 욕 나오게 보고 싶다. 아, 삐치는 거 아니지? 너도 보고 싶기는 한데 일단 좋아하는 사람부터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인마. 입술 툭 내밀면서 찡찡거리는 거 생각하니까 관자놀이가 다 욱신거린다. 지민아, 네가 간 그 길은 그곳은 행복하냐.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 나도 조만간 따라갈게. |
윤기남준 |
민윤기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고 있다. 지금 저 알바생에게 당장이라도 자신의 명함을 주고 끌고 나오고 싶었다. 알바하는 주제에 머리는 은색빛이 은은하게 돌았고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9부바지 포인트로 멜빵을 하고 있는 모습이 훤칠한 키에 맞지 않게 꾸러기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윤기가 직접 디자인한 우리나라에도 몇 없는 한정판 슬립온을 신고 도드라진 복숭아뼈를 드러내는 패션에 코를 막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진짜 잘 어울린다. 흰 색과 검은 색으로 무난하게 흐르다 우주 모양이 가득하다못해 넘치고 검은 테두리에 흰 영단어로 윤기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SWAG이라는 단어를 제 필기체로 새긴 슬립온으로 마무리한 완벽한 패션에 박수를 한 번, 도드라진 복숭아뼈가 너무 귀여워 박수 두 번, 웃을 때 파이는 보조개에 박수를 세 번, 내내 지켜보다 자신이 맡은 일처리는 똑바로 하는 행동과 어투에 박수 네 번 스트라이크. 이게 무슨 말이냐! 민윤기는 카페 알바생에게 한 눈에 반했다는 것이다. 여기 알바생이 원래 저 학생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하다 오늘 처음 온 가게라는 것을 알고 빨리 카운터로 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예쁘게 웃으며 잔돈을 건네고 뒤를 돌아 바쁘게 움직이는 뒤태마저 윤기의 시선에 그대로 박혔다. 다행히 뒷손님이 없어 한참을 지켜보다 바로 받으며 명찰을 확인했다. 김남준. 이름도 예뻐보이네. 남준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대놓고 쳐다보았다. 알바생도 시선이 느껴지는지 힐끗거리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급히 고개를 내렸다. 저 애기를 어찌할까. 능글맞게 웃으며 쿠키를 주문하며 남준의 행동을 짖굳게 바라보았다. “여기 주문하신 쿠키 나왔습니다.” “학생, 모델 안 해볼래요?” “네?” “학생이 신고 있는 신발 내가 만든 거거든.” 학생 발목에 어울리는 슬립온을 만들고 싶네. 연애에 서툰 복학생처럼 윙크라도 해야 내 눈을 바라볼까. 윤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남준을 바라보며 명함을 내밀었다. 버리지 말고, 맘에 들면 아니 그냥 내일 전화해요. 윤기는 쿠키 하나를 입에 물고 가게에 나왔다. 진짜 연락이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 호기심에라도 하겠거니 싶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펴고 신호등을 기다렸다. 파란 불로 바뀌자마자 가게에서 남준이 나와 혹여나 윤기가 금방 가버릴까 어깨를 덥썩 잡았다. “저기, 이거 받으세요.” 윤기 손에 내려놓자마자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남준을 보고 속으로 웃으며 봉지를 열었다. 남은 쿠키와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쪽지를 열어 확인한 순간 윤기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남준을 끌고 나왔다. [저 수험생이라서 핸드폰 없어요. 내일 가게에 다시 와주세요.] 와주세요. 정직하다 못해 딱딱하다. 급히 끌고나와 당황했는지 남준이 윤기가 잡은 손목을 빼려 애를 썼다. 저 아르바이트! 에이 그것보다 시급, 아니 월급 더 줄게. 돈도 벌고 님도 따고. 난 좋은데 너는? 코를 긁으며 시선을 피하는 남준이 귀여워 잡은 손을 더 꽉 쥐었다. 아주 그냥 귀여워 죽겠어. |
모지리 언제 쓰냐...\ㅎ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