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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프 히야신스 전체글ll조회 991l 1

 

"민석이 형"

"아, 세훈아"

"하여간. 형도 참, 애 같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통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급하게 나가다가 입구에 쌓아 놓은 짐에 그대로 걸려서 꽤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세훈이는 그런 내가 익숙하다는 듯이 상처 근처를 손가락 끝으로 조심히 톡톡 두드리다가 입김을 호 불어준다 간지러워서 웃으니까 웃지 말라며 딱밤을 놓는다.
우 씨, 세훈이 네가 간지럽게 했잖아

 

"진짜 꼭 가야겠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아까 바쁘게 챙기고 있던 물건들을 챙겨서 상자 속에 가지런히 넣기 시작했다.
세훈이는 말없이 물건을 챙기는 모습을 현관에 비스듬히 기대어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돕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지 대충 상자 속으로 던지는
모습에 웃으며 상자를 앞으로 끌고 와서 여기저기 흐트러진 물건들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했다.

 

"가뜩이나 상자 부족하거든? 예쁘게 정리해 줄 거 아니면 방해하지 말고 나가시죠"

"애초 당시도와주려는 거 아니야. 방해하러 들어온 거지"

"아이고, 무서워라"

과장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서운 척을 하니까 세훈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어차피 항상 말은 저렇게 해도 도와주러 온 게 뻔히 보이는데도 또 츤츤거린다
세훈이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왔다. 부모님들끼리 굉장히 친하셨고, 게다가 담을 맞대고 있는 옆집 사이였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이모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겁먹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었는데, 어느새 부쩍 커버려서 지금은 오히려 내가 세훈이를 올려다봐야 한다. 세훈이랑은 피를 나눈 친형제처럼 지내 온 막연한 사이다

 

내가 특이한 성적 취향에 힘들어할 때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옆에서 힘이 돼주고 지켜봐 주었고, 세상이 의심의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자기가 더 상처받으면서
내게 오는 상처를 막아주는 그런 고마운 동생. 그 동생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처음으로 둘이 할 바며 장학금이며 모아서 독립한 이 집을 떠나는 건, 또 이기적인 내 욕심 때문에. 괜히 세훈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길 바란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결국에는 그 아이와의 추억이 가득한 이 집에서 사는 게 내겐 너무 힘겨웠다

 

"중국…. 왜 하필 중국이야. 형?"

"그냥 꽂혀서"

 

정말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오랜 시간 그 아이와 지냈던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한국은 여기저기 추억이 많았고 그게 내 숨통을 조여왔다. 전공도 중국어를 전공했기에
대화하고 일상생활을 하는데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혈혈단신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만난 중국 친구가 운 좋게 떠날 계획을 짜던 중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었다. 다른 나라로 떠날까 한다는 나의 말에 마침 자기가 같이 지낼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며 같이 지내지 않겠느냐고 반색하길래 별생각 안 하고 오케이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생각 없이 무대포로 진행 시킨 것 같기도 하지만

-

짐을 어느 정도 다 챙기고 나서 짜장면을 시켜서 세훈이 입에 물려주었다. 깨작깨작 먹는 모습에 좀 복스럽게 먹으라고, 그러니까 말라 비틀어지지 않았냐고 이야기하니까
형의 키는 다 뱃살로 가는 거냐며 비웃는다. 예전의 내 말이라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던 세훈이는 어디 갔는지 원...

 

"그렇게 걱정되면 가지말고 나랑 같이 살아"

"세훈아, 난 여기 있ㅇ…"

"알아, 그 새끼 때문에 여기 있는 거 힘든 건 아는데. 형 가면... 나는 혼자잖아"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올곧은 눈빛을 하고 바라보는 세훈이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는데 내 이기심에 또 상처받고 있는 세훈이를
마주하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짜장면만 계속 휘저었다 잠깐의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다시 앞에서 후루룩 먹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짱개는 믿을 만 한 거야?"

"짱.. 개가 아니라, 루한. 당연히 믿을 만한 친구지, 너도 아는 애잖아. 가끔 우리 집 왔던 친구"

"내가 불시에 찾아갈 거야"

"올 수 있으면 와보시지"

"근데 그 루... 뭐 시기형은, 형 이렇게 칠칠맞은 건 알아?"

 

하면서 근처에 있던 휴지로 얼굴을 벅벅 닦아준다. 어째 더 번지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학교 다닐 때는 절친이었어. 걔가 교환학생 기간 끝나고 중국 간 다음에 연락이 끊겨서 그랬지 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끊긴 했지만"

또.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돌연 내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그 아이가 생각나서 입안이 씁쓸해졌다. 굳어가는 내 표정을 본 건지 세훈이는 짜장면 형처럼 불어 터지겠다며 짜장면을 내 입에 쑤셔 넣었다. 아까도 그렇고, 사실 짜증 나고 이해 못해야 하는 건 세훈이인데 오히려 세훈이가 날 달래고 있다. 항상 그래 왔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

"나 갈게"



어느덧 시간이 쏜 살 같이 흘러서 중국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부피가 크고 웬만한 짐은 이미 붙여서 중국에 가있기에 간편한 옷과 최소한의 짐으로 공항에 왔다
세훈이는 그 기간 동안 안 가면 안 되겠냐고 습관처럼 물어왔지만 나도 습관처럼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세훈이가 어렸을 때 처음 놀이공원에 간 날처럼 손을 꼭 잡고 있는 통에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왠지 불안해 보이는 세훈이 모습에 손을 더 꽉 잡고 있었다
이륙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세훈이에게 어렸을 때 매일 하던 양머리를 쓰다듬어 줬는데 평소라면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냐며 짜증 낼 녀석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형"

"응, 세훈아"

"다시... 올 거지?"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녀석인데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왠지 같이 울컥해서 눈물을 보일까 봐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불시에 찾아온다며~' 하니까
그제야 웃는다.

 

"루... 뭐시기가 괴롭히면 바로 연락하고. 연락 재깍 재깍 안 하면 나 진짜 다 때려치우고 중국 간다"

"그래, 나 귀에 딱지 안 생겼어? 그 말 오늘만 100번째야"

"형은 …."

 

꽤 빨리 흐르는 시간에 벌써 시간이 촉박해져서 급하게 걸어가며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말을 뚝 끊는다 앞서 걸어가며 '나, 뭐?' 반문하니까 한참 있다 '바보니까'한다
마지막인데 참 좋은 말한다 짜샤. 기분이 확 상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게이트로 향해 돌진하니까 계속 뒤에서 "형! 형" 부른다. 이미 늦었어
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돌아봐줬는데 장난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해있다.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보니 걸음을 더 땔 수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는데 곧 이륙 준비한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손을 흔들며 '연락할게!'하고 비행기에 탔다.

 

1시간이 채 안되는 거리지만 요즘 통 신경 쓰느라 잠을 못 자서 이륙하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꿈속에서 어린 세훈이가 어른이 된 내 바지 끝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달래주고 싶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 난 그저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곧 베이징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에 겨우 일어나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가슴은 아려오고 현실에서도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은 것 같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베이징 공항에 발걸음을 내딛였다. 베이징 공항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분명 중국어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얼마나 내가 무대포로 왔고, 숨통을 조여오던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이.

 

-

게이트를 빠져나가니 사람 많은 중국답게 북적북적 거리고 사방에서 빠르고 시끄럽기까지 한 중국어가 들려왔다. 자꾸 부딪치는 통에 중요 물품이든 가방을
손에 꼭 잡고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입구 쪽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누가 가방끈을 쭉 잡아당기며 강하게 끌고 간다. 순간 머릿속에 중국에는 인신매매가
판을 치니 조심하라던 세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서 어떻게든 걸음을 멈춰 보려고 했는데 관성의 법칙인지 뭔지 아니면 끌고가는 사람이 무식하게 힘이 센지 질질 끌려갔다

"아, 좀 놔요!!"

더 이상 끌려갔다가는 도와줄 사람도 근처에 없어질 것 같아서 급한 대로 한국어로 소리치니까 모자 쓴 납치범이 뒤를 돌아 본다. 근데 모자 밑으로
살짝 보이는 납치범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다

 

"루...한?"

 

분명 루한이다. 예전의 수수했던 모습이 아닌 약간 화려해진듯했지만 예쁘장한 얼굴이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듯 웃는 모습이 루한이었다.
납치범의 얼굴을 확인하고 정신이며 몸이며 정신없는 틈에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

 

"北京欢迎您 (베이징에 온 걸 환영해)"

"어..? 응..."

"오랜만이네, 민석아. 살 빠졌다"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며 다정하게 웃는 루한에 놀라고 정신없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어서 마주 웃어 보였다.
연락 없이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도 불구하고 자주 만났던 사이처럼 편하게 대하고 농담도 곧잘 하는 루한 덕에 금방 예전 절친이었던 때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근데 원래 베이징 공항에 사람이 저렇게 많아?"

"응, 인구 수가 많다 보니까 유동인구가 많기는 하지. 근데 오늘은 좀 특별하게 많았어"

"왜? 누구 유명 인사라도 입국해? 아쉽다. 혹시 같은 비행기 탔을 수도 있잖아"

"음, 중국 유명 배우가 베이징 공항에 친구 마중 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와. 저렇게 사람 북 터지게 많게 만들 정도로 인기 많은데 친구 마중하러? 그 사람도 대단하네. 저 정도면 남한테 피해 주는 수준인데"

 

순간 어쩐지 루한이의 눈썹이 꿈틀 한 것 같지만 갑자기 차 밖이 시끄러워지자 루한은 급하게 차를 출발 시켰다
한참을 말이 없이 앞만 보고 운전하던 루한이 차가 신호에 걸려서 멈추자 긴 정적을 깨고 예의 울상 짓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민석아, 저기... 혹시 나 몰라?"

"뜬금없긴. 알지, 너 루한이잖아"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뭐하고 지냈는지, 무슨 일하는지 그런 거"

"어... 내가 좀 바빴어서.. 미안해, 애들한테 네 소식도 물어보고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쓸 정신이 없었었다. 나한테도 신경을 못 썼었으니까, 오로지 그 아이만 보였다. 온 세상이 그 아이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는데 입술에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드니 루한이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넌 여전하네, 입술 잘근 거리는거. 또끼 이빨 된다고 내가 하지 말라 그랬잖아"

 

"너도 여전하네. 토끼보고 또끼라고 하는거"

 

그 당시에도 내가 입술을 잘근거릴 때마다 토끼 이빨 된다고 하길래 뭔가 했더니 토끼가 발음이 안 된단다. 그걸로 서로 얼마나 티격태격 거리면서 놀렸는지.
과거에나 지금에나 겉모습은 좀 달라졌어도 목소리나 발음은 여전한 루한이의 모습에 옛 생각이 나서 살포시 웃으니까 울상을 넘어서 굳어 있던 루한이의 얼굴도 따라 웃는다
단순한 것도 여전하네.

 

"근데 너 울었어? 눈 붕어 같아. 물에 불어버린 빠오즈"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피곤해서. 그리고 빠오즈 아니거든? 아까 네 입으로 살 빠졌다 했다"

입술 만지던 손이 올라가서 아까 악몽을 꾸느라 퉁퉁 부어버린 눈을 만지작거린다. 이 녀석 어쩐지 스킨십이 늘어난 것 같아
피곤하다는 말에 눈을 만지던 손을 머리로 가져가 몇 번 쓰다듬더니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재생한다.

"아직 도착하려면 좀 남았으니까 좀 잘 둬, 도착하면 깨울게"

"으응, 고마워"

사실 아까부터 한계였다. 이사 준비를 한 피곤함과 아까 꾼 악몽이 더해져서 몸은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통에 자꾸 감기려는 눈을 부릅 뜨고 있느라 힘들었다
의자 시트에 편히 기대자마자 쏟아지는 잠에 허덕이느라 잠결에 '빠오즈 살 너무 많이 빠졌으니까 다시 빠오즈로 만들어야지'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민석"

"ㅇ..."

"잘 자. 빠오즈"

오랜만에 듣는 루한의 잘 자라는 목소리에 그대로 어두운 꿈속에 푹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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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6.32
다...다음편이시급합니다!!!
10년 전
독자1
ㅏ...아 너무좋다 , 처음엔 몰랐는데 다시읽어보니까 '그아이'가 세훈이인것 같기도 하고~? ㅠㅠㅠㅠ암튼 대박이네여ㅠ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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