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w.봉봉 쇼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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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나온 말이더라.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통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유없이 밤잠을 설친 탓에 수업시간 내내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반쯤 잠에 들었더랬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재대로 들은 말이 그거였다. …는 'Time waits for no one'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몽롱한 내 머릿속을 맴돈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찾아보면 쉬이 답이 나올 것이건만, 나의 쓸데없는 오기로 인해 그 생각은 1초만에 접혀버렸다. 아, 모르겠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눈 앞에 있는 문제집을 마저 풀기로 마음먹고 샤프를 손에 쥐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갔다.
째깍, 째깍, 문든 들려오는 시계 소리에 눈을 돌렸다. 문제를 꽤 많이 푼 것 같은데도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손에 쥐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감독 선생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한 치의 노닥거림 없이 야자 시간을 모두 공부에 투자하고 있는 중이었다. 톡을 괴고 텅 빈 녹색 칠판을 바라보았다. 잡념없이 집중하여 공부를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이따금씩 내가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시간 또한 매우 느리게 갔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어쩐지 모순처럼 느껴졌다.
정처없이 눈을 굴리는 도중에 내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왠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마도, 나와 마주친 그 눈 때문에. 나와 대략 5초 정도 눈을 마주하고 있었나, 그 아이는 나를 향해 눈이 초승달이 되도록 웃어보였다. 웃을 때 생기는 팔자주름은 밉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나와 저 아이 뿐인 듯 했다. 수능이 백일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이 시기에 농땡이라니. 싱글벙글 웃는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압박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한 채 말없이 웃으며 저 나름대로 노는 것일 저 아이는, 수업 시간에 밥 먹듯이 잠을 자고, 자습 시간 또한 공부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도 성적은 늘 최상위권에 머무는, 전교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오세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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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공부에 찌들어 노곤해진 반 아이들은 서로 인사 한 마디 없이 가방만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섰다. 버스 끊길 걱정은 안 해도 됐던 지라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템포 느리게 가방을 싸고, 한 템포 느리게 가방을 멨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물론 그 상대는 또 오세훈이었다.
"막차 놓쳐도 괜찮아?"
"아…. 나 버스 안 타."
"그래? 나돈데."
예기치 못한 오세훈과의 대화에 잠시 멍해졌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를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 나눠보는 대화였기에 더욱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어… 그래."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 해 그냥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얼떨결에 오세훈과 같이 교실을 나와 같이 길을 걷고 있었다. 걷는 도중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힐끔 그를 쳐다보았는데, 오세훈은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아직까지도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덕에 그를 쳐다보았던 아주 짧은 그 찰나에 오세훈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황급히 눈을 피한 것이 혹 그의 눈에 이상하게 비추어질까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왜?"
"뭐가?"
오세훈은 정말 모른다는 듯이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진 표정까지 띠워가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계속 쳐다보길래…. 아주 작은 내 목소리에 그제야 오세훈이 아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신기해서."
신기해? 뭐가, 내가? 내 어디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오세훈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너 말고, 라며 미리 대답을 해 주었다. 그것보다도, 내가 신기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신기하다는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신기해서."
"……어?"
"널 보고 있는 내가 신기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 뿐이었다. 날 보는 오세훈 자신이 신기해서 나를 쳐다본다니. 오늘 처음 들어 본 약간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뱉은, 뜻을 좀 잡을 수 없는 그 요모한 말 한 마디는 내 뇌리 깊은 곳에 박혔다. 큐피드의 화살보다 더 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세훈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큐피드의 화살은 맞으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속으로 나는 정정했다. 독약보다 더 독한 것, 이라고.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 휴대폰에 놀란 나는 오세훈을 쳐다보았다. …번호 달라고. 나는 아차 싶어 황급히 오세훈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내어 왔다. 다 누른 11자리 숫자들 중 틀린 것은 없는지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는 오세훈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근데 너 집에 안 가?"
휴대폰을 돌려받고 내 번호를 저장중인 듯한 오세훈이 휴대폰을 만지며 내게 물었다. 그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이곳은 내가 살고 있는 그 동네가 맞았다. 나는 오세훈에게 되물었다.
"이리로 쭉 가면 우리 집 맞는데. 그러는 너야말로 집에 안 가?"
"우리 집도 그쪽인데."
오세훈이 내가 가리킨 쪽을 보며 말했다. 동네 슈퍼나 골목길을 몇 번이고 오가면서 그와 마주친 기억은 없는데, 오세훈의 집과 우리 집이 이렇게 가까웠구나, 싶었다. 오세훈과 나의 발길은 다르긴 해도 몇 걸음 차이 나지 않는 거리에서 멈추었다. 단순히 같은 동네라고 생각했건만, 심지어 옆집이라니. 어……. 두 입에서 동시에 작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옆집이구나. 몰랐네."
"혹시 이사… 왔어?"
내가 이곳에 살게 된 이래로 누군가 옆집에 이사를 온 기억은 없음에도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역시나 대답은 노였다. 여기 산지 꽤 됐는데, 하는 오세훈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근처에서 그를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등하굣길에라도 한 두 번 쯤 마주쳤을 법도 한데. 오세훈은 졸린 듯 하품을 하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졸리다. 먼저 들어갈게, 내일 보자."
그러고는 씨익 웃는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아주 잠시 넋이 나갔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그를 보고, 나도 곧바로 집에 들어왔다. 불빛 하나 없는 집 안은 캄캄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엄마와 둘이 같이 살던 차에, 엄마마저도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다. 그것이 벌써 3년이나 된 일인데, 집에 불이 켜져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도 엄마가 떠날 때 두고 간 통장으로 다달이 돈이 들어오는 덕에 생활비 걱정은 필요치 않았다. 2층짜리 집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도 넓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넓다는 것보다는 외롭다는 것이 더 어울리기는 하겠지만. 1층 거실에 불을 켜고 2층에 자리잡은 내 방 문고리를 돌리자, 커튼이 쳐진 창 밖으로 환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커튼을 살짝 들추어 보니, 옷가지를 챙기는 오세훈이 보였다. 사생활을 엿볼 수 있을만큼 옆집이 가까웠던가. 조용히 다시 커튼을 내려놓으려는데, 오세훈과 눈이 마주친 나는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것 마냥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오세훈에, 나도 살짝 웃어주고는 재빨리 커튼을 내 손에서 놓아버렸다. 내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나의 웃음은 필시 얼굴에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한 어색한 웃음이었으리라. 나는 이유모를 걱정을 하며 잠에 들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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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연재 완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도 많이 사랑해주세요ㅠㅠ!♥
막간을 이용한 세종 떡밥 투척
아 김종인 진심 귀엽다.. 이런 케미덩어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