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그 경계에 서다
; It'll be heaven anywhere
.
'난 완벽한 사람보다는
구석구석이 서투르고 부족한 사람이 더 아름답다.
내가 채워줄 부분이 있으니까.
그게 너라서,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라서.
그것만으로 난 너무 행복하다.'
ㅡ
"누나, 누난 내가 왜 싫어요?"
"싫은게 아니라니까. 넌 싫은거 좋은거 딱 두개야?
왜그렇게 인생이 이분법적이야 단순하게."
"복잡한거보단 낫잖아. 누난 너무 생각이 많은거같아."
"너처럼 생각없는거 보단 훨씬 나아."
"나 진짜 싫어하는거같은데."
"나 남자친구 있다니까 세훈아.
들키면 혼나요!"
봐, 싫어하는거 맞잖아. 하고 토라져선 멀찍히 떨어져서 걷는 세훈이. 아침 출근길부터 아주 사람을 들들 볶지를 못해 안달이났다. 풀어줄줄 알았던 내가 아무말없이 앞만보고 걷자 슬슬 눈치를 보더니 내 앞을 막아버린다.
"누나 남친이 그렇게 대단해?"
"뭐?"
"솔직히 내가 더 잘생겼지. 그렇다고내가 어?
누나보다 어릴뿐이지 미래가 창창하다고.
내가 더 잘해준다니까?"
"세훈아. 제발 나 말고 대학교에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이랑 잘해봐.
누나 많이 바뻐. 간다."
회사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누나! 하고 외치는 세훈이를 뒤로하고 멀리서 00씨, 하고 불러오는 팀원들과 함께 겨우 지각을 면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 목마르다. 하고 일어서려는 차에 오빠가 여기. 하고 커피 한잔을 건냈다. 아 아직도 오세훈 그놈때문에 머리가 띵하다. 대학교에서 첨봤을때부터 누나누나. 하고 들러붙을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어. 졸업하고나서까지 저놈한테 시달릴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잊을때쯤이면 나타나서 절대로 잊지 못하게끔 만드는게 우연인지 저놈의 못된 계략인지 헷갈릴 정도로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한치의 진지함이 없는 저 철없는 녀석이
나중에 결혼이나 제대로 하려나. 쓸데없는 생각이 또 머릿속을 꽉 채운다. 그러게 저놈은 사람 들들볶는데 뭐가 있다니까.
"00아. 고민있어? 얼굴이 안좋다."
"어? 아니 어제 잠을 못자서그래."
"오늘 영화보러 가자고 할려고했는데.
그냥 내가 너네집가서 파스타 해줄게."
"와 진짜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옆에서 유독 우리 둘의 사내연애에 불만을 많이 가지던 찬열이가 한소리를 거들었다. 거참 솔로앞에서 염장지르십니까. 하고 서류를 탁탁. 오빠가 허허. 하고 일어나 팀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내옆으로 의자를 쓱 밀고 들어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찬열이.
"누구야?"
"어?누가."
"에이 모른척하는거봐.
아침에 너한테 누나누나 거리면서
따라다니는애. "
"그냥 대학 후배야."
"그냥?"
"정확히 말하면
나 좋다고 귀찮게 나 따라다니는 대학후배."
"한얼굴하던데. 그정도면 변팀장은 그냥 넘기지않나?"
"오빠한테 말하지마."
알겠다 알겠어. 하면서 자리로 돌아간다. 아 이러다 회사사람들한테 소문 다 나게생겼네. 에이씨. 하면서 아메리카노를 원샷 해버렸다. 으으 이시려. 여튼 오세훈
저놈을 빨리 단판을 지어버리던가 해야지. 답이없어 답이.
ㅡ
"누나아아!!"
대답도없이 회사안으로 휙 들어가버린다. 차마 저기까지는 못 들어가겠고 한참을 거기서 멍하니 회사쪽만 쳐다보다가 그제서야 곧 수업시간이라는게 기억나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다행히 딱 맞춰오는 버스를 타고 가려는데 아...버스카드에 요금이 없단다. 어쩐지 오늘 000 얼굴도보고 운이 너무 좋더라니. 당장 현금이라곤 백원밖에 없는데. 죄송합니다. 하고 내리려는데 두명이요. 하고 나한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는 어, 김종인이다. 짜식 고맙다. 하고 어깨동무를 하는데 징그럽다고 바로 내빼버린다. 여튼 사람이 정나미가없어 정나미가.
"여기까진 왠일이야."
"아 그런게 좀 있어."
"얼마나 좋은거길래 그렇게 넋이나갔냐.
정신좀 차려."
그제서야 후줄근한 내 옷이 눈에 띄였다. 어어 여기 라면국물 자국도있네.
아씨....어쩐지 날 보는 눈빛이 좀 이상하다 했어. 무슨 동물보듯이.
내가 어쩌다 김종인같이 지독하게 무뚝뚝한 여자를 좋아해서.
내가 미쳤지진짜. 하면서도 실실 새는 웃음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이제 진짜 가을이네. 아무리 어두워져도 숨도 못쉴만큼이나 턱턱 막혀오던 더위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숨겼다.대신 자리한 차가운 바람이 공기나 통하라고 아주 조금 열어놓은 창문새로 스쳐 들어왔다. 창문이랑 몇미터도 채 떨어져있지 않은데도 그게 귀찮아 애꿎은 가디건만 쭈욱 당겨 몸을 감싸다 아차 싶어 손을 놓았을때는 이미 흐물흐물하게 늘어져버린 후였다. 이거 오빠가 선물해준건데. 아쉬운맘에 다시 조물딱조물딱 줄이는 시늉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침대에서 한참이나 일어 서려다 다시 풀썩 누워버리기를 반복하다가 집 전화벨이 울리는소리에 기다리기라도 한 마냥 후다닥 달려가 수신지 확인도없이 받아버린 전화였다.
"누나, 나야."
"어....왠일이야 너."
"반갑다는 시늉이라도 해주지 그래."
거실 맞은편에 자리한 부엌에서 아직도 오빠가 해준 파스타 냄새가 그윽히 풍겼다.
동생녀석이 아쉽다는 투로 말을 건내자 어떤 대꾸도 해줄수가 없어 늘어진 가디건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 3개월만에 걸려온 전화인데도 어쩐지 반겨주면 큰 죄라도 짓는 것 같단 생각에 따뜻하게 맞아줄 수가 없었다.
'그 일' 이 있고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해방이라도 된 마냥 집을 나가더니 들려오는건 개망나니가 됬다는 소문들 뿐. 난 아직도 죄책감에 잔뜩 뭍힌채 살아가는데 혼자서 훌훌 털어버린 저놈이 속깊게 사무칠정도로 너무 미웠다.
"종인아."
-어.
"무슨일이냐니까."
-나 이제 집에 갈려고.
"...니 맘대로해."
대답도 듣지 않은채 수화기를 내렸다. 마지막에 뭐라중얼거리는거 같긴한데, 그 말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아, 내가 대신 이 집을 나가줘야하나.다시는 꼴도 보기 싫은놈과 한 집에 산다는 그 자체가 너무 끔찍했다. 누구덕에 내가 하루하루를 억지로 숨만 겉잡으며 살아가는데 추스려지기도전에 다시 망가트려버리는 그놈을 어떻게 감당을 해 내겠어. 차차 괜찮아 질거라는 주변사람들의 말도 그냥 형식적 동정일뿐 막상 내가 힘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겨우내 백현이오빠와 종인이와는 사뭇 다르게 누나, 하고 날 불러오는 세훈이 뿐이였다. 내 모든 세상이 무너져버린 단 3개월만에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맞이해야할 준비를 해야했다. 새롭다는 의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대가를 불러 온다는걸 알면서도 피할수 없는 내 처지를 원망 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ㅡ
아침 출근길. 오늘따라 아침부터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운게 감기라고 의심하기엔 날이 이상하다 싶을정도로 따뜻했다. 밤에 그렇게 춥더니 변덕이 여간 심한게 아니였다. 항상 그랬듯 같은시간에 같은버스에 올라탔다. 익숙한 냄새. 꼭 이 버스에만 타면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어릴적에 한번 맡아본적 있는것 같은 그런 데자뷰같은 반복에 언제 맡아본 냄새더라. 하고 도착하기 직전에 벨을 누르기 전까지 창문 밖 멀리에 시선을 두다 시간을 보냈다.
여기까지는 머리가 좀 아픈걸 빼곤 내 완벽한 일상의 일부였다.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종인이를 마주해버리기 전까지는.
".."
"누나....."
"니가 여기 왜있어."
학교 가는길. 하고 말하려던것 같았는데 종인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뒤에서 종인이에게 폴짝 뛰어올라 어깨동무를 한다. 금새 나와 눈이 마주쳤고 싸한 분위기속에 어쩔줄을 몰라하다 허허ㅡ 하고 나와 종인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한껏 상기시키는 세훈이였다.
온갖 생각들에 또 습관처럼 인상이 찡그려졌다. 제 잘못한건 아는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말도 없는 종인이에게 좀이따 보자. 하고 먼저 자리를 비켰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잠깐 종인이와 만났던 정류장쪽을 돌아보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있었다. 의자에앉아 머리를 싸메고있는 세훈이와 잠깐 눈이 마주친 사이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꼈고, 혹시 또 지각일까 하고 핸드폰을 확인했을때 아직 시간이 여유롭게 남은터라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회사 앞까지 다 다랐을때 반대편에서 자동차 경적소리와함께 들려온 세훈이의
김종인, 하는 목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모두 집중됬다. 수십대의 자동차들 사이에 스쳐 세훈이가 달려가는게 보였다. 저게 무슨 일이래요. 하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얼마되지않아 그 집중된 이목 아래 종인이가 힘없이 쓰러져있는게 서서히 보였다. 주변이 붉게 변했다. 이미 바뀐 신호등을 무시하고 무작정 그쪽으로
달렸다. 수십대의 자동차가 날 비키려다 끼익. 하고 멈춰섰다.
정거장 앞에 도착했을때 빙 둘러싼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간 사이에서
세훈이가 종인이 옆에서 끄윽끄윽 거리며 울고있었다.
누나 어떡해 종인이.
세훈이의 말에 대답 해 줄 새도 없이 급하게 종인이를 찾았다. 내 목소리에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린다. 정신 잃지마 종인아. 하고 손을 꼭 잡아 쥐였다. 내 손까지 피가 타고흘렀다.내가 그 특유의 피냄새를 싫어한다는 것도 잊은채 정신없이 종인이를 거두다
"...미안해"
날 보면서 입모양으로 내게 전하는 미안해.그 말에 몇개월만의 앙금이 다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억지로 꾹 참고있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울지마 종인아. 누나가 다 미안해.누나. 울지마, 하는 말을 뒤로 종인이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곧 힘없이나마 잡고있던 내 손사이로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종인아."
"누나..."
"종인아 누나가 다 잘못했어.
나만두고 가지마...응?"
"누나 종인이..."
시간이 멈춰버린것처럼 머릿속이 삐ㅡ 하고 크게 울려왔다. 아까 두통이 다시 도진모양인지 종인이를 앞에두고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그렇게 또 한사람이
내곁에서 떠났다.
ㅡ
누나.'
'...'
'누나?'
'응?'
'정신을 어디두는거야.
멍때리지말고있어.'
'버스냄새 되게 좋은거같애.
자꾸 멍해진다.'
'이 버스 방향제 내가 누나한테
선물해준 향수냄새랑 되게 비슷하네.'
'내가 이런걸 뿌렸었어?'
'어. 엄마한테 사달라고 울고불고하다가
결국 내가 몰래 용돈모아 사줬었잖아.
신나서 막 뿌리다 알르레기때문에 막 병원가고. 기억안나?'
'아 엄청 어릴때구나.
기억하는 니가 이상한거야 바보야.'
'그 장난감향수 아직 누나방에 있잖아.'
'...'
'또 못들었지?'
'ㅇ어?'
'참나ㅡ 내가나중에 비싼 향수 사준다고.'
'그래.'
방향제.
그리고
싸구려 장난감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