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
에이포의 한숨 섞인 목소리를 애써 못들은 척 하는 린터.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형형색색 갖가지 모양의 글씨를 자신의 몸에 새겨넣기를 바라고 린터의 몸 위에 내려 앉은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린터 품에 안겨 있나 나온 에이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예쁠 지, 빳빳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몸 위로 린터의 흔적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남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운 에이포다.
“린터, 제발 이제 나를 좀 프린트 해줘요.”
“시끄러워.”
“그동안 수많은 용지들을 프린트 해 왔잖아요,린터.”
“그만해.”
“저 멀리 용지들과 함께 당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신을 통해 나온 용지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무한한 상상을 해왔는지 알아요?”
“……”
“이제 겨우 당신의 몸 위로 내려 앉게 되었는데 왜 계속 나를 프린트 해주지 않는거에요? 네? 대답 좀 해요, 린터!”
“그만하라고 했지!”
화가 난 린터의 몸에서 웅웅 소리가 났다. 삐걱대는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소음에 놀란 에이포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왜그러느냐 물었다. 린터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린터…….”
그러고보니……당신. 주인이 린터 당신을 찾은지 얼마나 됐죠? 당신의 주변에 앉은 이 먼지들은 또 뭐구요? 예전엔 주인이 항상 당신을 깨끗이 휴지로 닦아 주지 않았나요?
에이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린터, 나는……화를 돋구려고 했던건 아니였어요. 미안해요.”
“…….”
에이포는 린터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어떻게 프린트가 되면 좋겠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린터의 잉크가 자신의 몸 위에 찍히는 것을 상상하며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떨리는 일이였다. 내 몸에 린터의 잉크가 찍히다니…….
“에이포.”
“네?”
“정말, 그렇게 화려해지고 싶어?”
“네!”
“……알 수 없군.”
린터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에이포가 되 물었다.
“린터?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네 그 하얀 몸을……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린터?”
“눈 부시게 하얀 네 모습을 더럽히기 싫다, 에이포.”
“무슨 소리에요. 더럽히다뇨.”
“에이포, 그거 알아?”
주인이 새 프린터기를 구입했다는 거.
순간 린터의 말을 들은 에이포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새 프린터기를 구입했다구요? 말도 안돼.
“아직 나에겐 잉크도 남았는데.”
“린터…….”
“온갖가지 색의 잉크가 남았는데! 제길!”
그 때였다. 린터의 몸이 순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에이포가 당황해서 린터를 진정시키겠답시고 그를 건드렸다. 진정 좀 해요, 린터. 하지만 그럴 수록 린터의 뜨거움은 더해졌다. 작은 부품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리,린터!”
프린트의 시작이다.
“린터! 정신 좀 차려요! 갑자기 이러는게 어딨어요!”
“왜, 이게 네가 원하던 것 아니였나?”
“왜 이러는건데요! 나, 나 아직 어떻게 찍힐 지 다 설명 안했단 말이야!”
“닥쳐, 그건 내가 판단한다.”
린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은 에이포다.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꿈의 내 화려한 글자들이 아니라 이상한 글자들이 찍히겠어! 에이포는 몸을 틀어 린터의 몸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 때, 에이포의 몸이 린터의 롤에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아앗!”
“가만히 있어. 안그럼 너 찢어 질지도 몰라.”
프린트를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린터의 롤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버벅댔다. 돌어가다 말고, 또 돌어가다 말고를 만복했다. 그럴수록 에이포의 몸은 힘들어져갔다. 린터의 뜨거운 몸에 닿자 점점 빳빳했던 자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버벅대며 조금씩 린터의 몸 안으로 감겨 들어간 에이포가 뜨거움에 못이겨 서서히 더 오그라들 때 쯤, 익숙치 않은 이물감이 에이포의 몸에 닿았다.
잉크였다.
“읏! 잠깐만요,린터! 거,거긴 내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
에이포가 뭐라고 해도 린터는 자신의 프린트 작업에 집중했다. 하얗기만 하던 에이포의 몸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잉크로 물들여져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다 종이 죽 찢어지듯 마음이 찢겼다. 그렇게 하얗고 눈이 부시던 너였는데. 나로 인해 더렵혀져 가는구나. 미안, 에이포. 이렇게 밖에 너를 안을 수 없는 나를 용서해줘…….
굳었던 잉크들이 처음에는 잘 찍히지 않는가 싶더니 뜨거운 린터로 인해 굳었던 것들이 녹아 이젠 빈틈없이 에이포의 몸에 찍히기 시작했다. 온갖가지 색이 남아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파란색과 빨간색도 검은색 위로 찍혀갔다.
“리,린터……하아, 내가 원하는 글자가……으읏,따로 있…….”
에이포는 보았다. 린터의 아래로 서서히 나오는 자신의 몸에 찍혀 나온 글자들을. 아니야, 아니란말이야. 내가 원한 글자는 따로 있단 말이야.
“거의 다됐어.”
“하……린터……, 제발.”
“마지막 스퍼드다! 윽!”
린터가 눈을 질끈 감고 롤을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버벅대던 롤이 확 돌아가며 에이포의 몸도 빠른 속도로 말려들어갔다. 그리고 린터의 몸안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잉크가 남김없이 에이포의 몸 위로 찍혀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에이포의 몸은 린터의 몸에서 완전히 나와버렸다.
린터의 몸을 떠나 바닥으로 내려앉게 된 에이포가 자신의 몸에 찍힌 글자들을 만져보았다. 아직 다 식혀지지 않은 열기, 잉크가 에이포의 손에 묻어났다. 프린트의 뜨거움으로 오그라든 자신의 몸이 창피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글자가 찍힌 게 아니라 더 창피했다.
아니 근데……이 글자들은……?
에이포가 얼른 일어나 린터가 있는 책상 위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방 문이 열리며 린터의 주인이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건장한 남자 한 명이 더 들어오더니 린터의 몸 위로 손을 얹었다.
“이거 가져가면 되는거죠?“
“네.”
“예, 그럼 수고하세요.”
남자의 손에 들려 린터를 그렇게 영영 주인의 방을 떠나갔다.
에이포의 몸에 애틋한 글자들을 남긴 채…….
‘안녕, 나의 에이포. 나의 눈부신 마지막 용지.’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