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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희끗한 새벽이 찾아오면 5평 남짓한 단칸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준이 형이 들어오는 소리다. 서늘한 새벽공기가 이불 위를 쓸어내릴 쯤 형은 피곤한 목소리로 일어나, 지민아 한마디를 한다. 내 옆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박지민은 잠들었던 적도 없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형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어둠에 내려앉아 서로 얼굴도 안 보인다고 킥킥대던 게 서너 시간 전이었는데도 군소리 없이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뒤척이는 척 형이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다. 우리 집은 너무 작았고, 우리는 이제 너무 크기 때문에 다 같이 잘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체구가 작은 박지민이랑 내가 마주 보고 누우면 누군가 우리의 모양을 따라 방을 만들어둔 것 마냥 꼭 맞아서, 준이형도 마당에 있는 영심이도 밤에는 우리랑 같이 잘 수 없었다.

준이 형이 눕고,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따듯해질 쯤 박지민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갔다. 영심이가 반가워 짖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에 쉿쉿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입김이 호호 나는 2월의 새벽인데도 박지민은 늘 마당에서 세수를 했다. 수돗가에 얼어붙은 얼음을 깨는 소리와 물고리가 트이는 소리가 났다. 박지민은 세수도 꼭 자기처럼 했다.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그렇게 한참을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문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끼익-


낡은 문소리에 혹여나 준이 형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박지민의 몸을 스치고 들어오면 태형아-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이제는 내가 일어나야 할 차례다. 나는 눈을 뜨는 게 버거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민아 조금만- 십 분만- 같은 투정을 부렸다.


"태형아 늦었어. 빨리이"


솜털 같은 목소리가 나를 재촉했다. 그래도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좁은 방안을 비집고 들어와 내 머리맡에 자리는 잡고 앉았다. 박지민이 미처 닦지 못한 뜨뜻미지근한 물방울들이 턱 언저리쯤 맺혀있다 내 이마위로 떨어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 애의 목소리가 너무 보드라워서 금방이라도 다시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일어나야지"


앞머리부터 뒤통수까지 간지럽게 왔다 갔다 하는 손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준이 형이 몸을 뒤척이면 박지민은 조금 더 재촉했다. 얼른 일어나- 축축한 손이 얼굴을 스쳐 지나 갈 때마다 손에서 박지민 냄새가 났다. 얼른얼른.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와 작은 손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하면 진짜 일어나야 할 차례다.


"읏차-"


"시끄러워. 김태형."


기합을 넣으며 일어나면 준이 형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박지민은 준이 형이 혹여나 감은 두 눈을 뜰까봐 내 등을 떠밀고 마당으로 나왔다. 씻으라며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건을 목에 걸어주면 수돗가로 가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훔치고 얼얼해진 손에 물을 받아 입안을 헹궜다. 마당 한편에서 영심이 밥을 챙겨주는 박지민의 등에 뭐 먹을래? 하고 물어봤다.


"아니, 괜찮아"


"그렇게 안 먹으니 키도 안 크고 덩치도 작은 거다."


아니거든. 등 뒤로 뿔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르는 물기를 대충 닦고 냄새나는 수건을 빨랫줄 위로 던졌다.


"갔다 온다."






삼각 김밥 세트 1개, 육개장 작은 컵 2개. 우리의 아침밥이다. 준이 형 몫으로 삼각 김밥 세트 1개와 진라면 큰 컵 한 개를 더 사 와서 방에다 던져두었다. 그 사이 박지민은 삼각 김밥 하나를 입에 물고, 컵라면을 나에게 내밀었다. 편의점에서 물을 부어 걸어왔을 뿐인데 컵라면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좀 더 먹어."


"아냐, 너 먹어. 나 진짜 배 안 고파."


투닥거리는 실랑이가 이어지면 박지민은 라면 다 뿔겠다하고 내 컵라면 옆에 아직은 미지근할 자신의 컵라면을 두었다. 한 젓가락도 안 되는 컵라면을 먹을 동안 박지민은 입에 삼각 김밥을 욱여넣고 쓰레기들을 치웠다. 총총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교복을 입고 나온다. 검은 교복 마이 때문인지 추운 아침 공기 때문인지 박지민의 얼굴이 더 창백해 보인다. 태태-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방으로 들어간다. 태태, 늦었어― 문틈으로 박지민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차가운 철문에 말간 볼때기를 붙이고 속삭이고 있을 모습이 훤했다. 빨리 나가야겠다. 박지민 볼 얼어붙어 버리기 전에.






교복 위에 얇은 후드 집업 하나 입은 박지민이 추운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빨간 입술 가까이 손을 두고 입김을 불어대며 손을 녹였다. 장갑을 끼라고 훈수를 두어도 집에 하나 남은 장갑을 꼭 나에게 양보했다.


"박지민"


"응?"


돌아보는 그 애를 보면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박지민을 향해 걸어갔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르고 작은 건 여전하다. 착하고 바보 같은 것도 여전하다. 목에 칭칭 감은 목도리를 풀어서 박지민 목에 감고 매듭도 야무지게 묶었다. 태태, 나는 하나도 안 추워. 추워서 이가 달달 떨리고 코를 먹으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목도리를 풀려고 하는 손을 붙잡으며 어허. 하고 엄한 목소리를 내보았다. 됐다, 이제 가자.







페달을 밟을 때마다 체인이 빠지는 소리가 나는 낡은 자전거는 몇 달 전에 민 씨 아저씨 고철 가게에서 받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침마다 신물을 돌렸다. 영심이 여자 친구 순이네 집부터 박지민 키보다 높은 담장만 보이는 부자 동네까지 몇 번이나 멈춰 체인을 끼워가며 신문을 돌리면 학교 급식비와 버스비 정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페달을 밟으면 박지민은 내 등 뒤에서 신문을 담장 위로 던졌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나면 등교를 해야 할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버스 정류장에 타고 온 자전거를 세워두고, 8시에 오는 버스를 타면 지각하기 직전에 학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류장에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출발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페달을 밟고 왔지만, 버스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뒤에 탄 박지민은 연신 미안한 기색이었다. 제 탓도 아닌데. 착해빠져서.


"오늘 땡땡이치자."


어버버거리는 박지민의 손을 낚아채서 길 건너 편의점으로 향했다. 맨손으로 신문을 돌리느라 얼음장 같아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박지민 아침이나 두둑이 먹여야겠다. 두 볼 가득 음식을 넣고 씹는 모습이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벤치에 앉아 메로나를 하나씩 물었다. 어제저녁부터 우중충하더니 멀리서 먹구름 때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지민아, 집에 가자."


어두워진 날씨를 눈치챈 건지 박지민은 군 말 없이 집으로 향했다. 준이 형은 벌써 집을 나선 후였다. 반겨주는 영심이를 뒤로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박지민을 위해 이불을 펴고 불을 껐다. 예상치 못한 비 소식에 박지민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지민아, 누워. 자자. 이불을 덮어주고 그 뒤로 내 팔을 둘렀다. 괜찮아. 계속해서 박지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민아 괜찮아.







이따금씩 박지민은 잠꼬대를 했다. 두툼한 눈두덩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긴 속눈썹 끝에 물이 고이면 엄마 가지 마. 엄마하고 울었다. 그럼 그날은 꼭 비가 내렸다. 아니지, 걔는 자기 전에 날씨를 확인하니까 비 오는 날 우는 건가. 나는 그 비가 꼭 박지민 눈물 같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주면, 내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뜨거운 눈두덩이 위에 올려두었다. 준이 형이 돌아올 때쯤 나는 박지민 눈물로 가득한 손바닥을 볼 수 있었다.


비가 그친 날 밤이면 박지민은 엄마 이야기를 했다. 태태, 우리 엄마는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지민아 하는 목소리도 예쁘다. 우리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쳐. 그러다 잠이 들쯤 눈을 꼭 감고 느리고 나른한 어투로 말했다.


"태형아, 나는 있지. 사실 엄마가 너무 미워."


목이 매여와 소리가 묻히고, 꼭 감은 눈 비집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나는 그 애를 안아줬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붉은 눈가에 키스를 했다. 울지 마 지민아. 괜찮아, 울지 마. 눈물이 닿은 입술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걔는 너덜거리고 축축해진 내 옷가지를 부여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 태형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는 박지민에게 독이었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졌다. 온몸에 오른 열꽃이 없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박지민의 팔과 다리를 연식 닦아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안 되겠다. 병원 가자"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싫다는 뜻이다. 괜찮다는 입 모양만 반복할 뿐이었다.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일하고 있을 준이 형에게 급하게 전화를 했다. 다급한 손짓으로 박지민이 나를 말렸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어, 남준 이형. 진짜 미안한데, 지민이가 지금"


"어어, 부탁할게. 미안해, 응. 조심히 와"


몇 분 뒤 남준이 형이 약을 사 들고 왔다. 형은 박지민의 상태를 살폈고, 나에게 약은 꼭 먹이고 재워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박지민이 괜찮다며 형을 붙잡았지만, 남준이 형은 빨리 낫는 것이 형을 도와주는 일이라며 박지민을 안심시켰다. 오늘은 찜질방에서 잘게. 문단속 잘하고, 내일 보자. 지민아. 형을 배웅하고 방으로 들어와 박지민을 일으켜 세웠다. 형이 사 온 해열제와 감기약을 먹이고 재울 참이었다.


"태태,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 내일 형한테 고맙다고 이야기해."


"응."






박지민은 약을 먹고도 새벽 내내 끙끙 앓았다.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겨우 잠이 든 그 애 곁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얇은 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달빛에 비친 박지민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프지 마. 나는 네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아프지 마."


알았어, 태태. 잠든 줄 알았던 박지민은 어느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 아플 게. 열로 바짝 말라버린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검고 깊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천천히 박지민에게 다가갔다. 박지민은 다가오는 나를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더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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