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자율학습까지 다 끝내고 학교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시계인줄로만 알았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 이호원.
"왜."
"가시나, 왜, 가 뭐냐. 너 지금 어덴데?"
사투리 발동시작되시는구만, 이호원씨.
"나? 지금 교문 막 지났어. 근데 진짜 왜?"
"내 지금 니네 학교 주차장 입구거든? 후딱 온나."
"기다려."
이호원씨가 참 할 일 없으신 밤이신가 보다. 10시에 우리 학교까지 출타하시고.
속으론 그렇게 살짝 비꼬면서 학교를 돌아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야, 야! 니 그러다 넘어진다!"
"안 넘어져. 그나저나 왠일이래? 여기까지 다 오고."
"그냥 안에만 있으니까 심심해서 산책 차 나와봤다."
쑥쓰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코를 긁적거리다 "뭐하나! 얼른 가자!"하기에 "자기가 꾸물거리고 있었으면서"라고 대꾸해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니네 학교 여기 좀 위험하다."
"뭐가."
"가로등이 적잖아. 으슥하다고."
"아. 그렇네. 뭐, 괜찮아."
"조심해서 다녀라."
"네네-."
별 말 없었다. 나도 원체 말이 많지 않은 편이고, 오빠도 오늘은 피곤한지 말이 없었다.
오렌지색의 가로등 불빛이 뽀얗게 퍼져 땅바닥까지 뿌려졌다.
"야, 니 잠깐만."
"응?"
뒤에서 오빠가 잠깐 서보라고 했다. 그나저나 언제 저기 멈춰있었나.
"니 가방끈 삐뚤어진 거 아이가."
"아닌데?"
"흐음... 이리 와 봐."
"아 또 왜. 오빠가 와."
"아, 와 보래도."
귀찮은데-, 투덜투덜거리며 오빠 앞에 가서 서자 계속해서 흘러내리던 왼쪽 가방끈을 제자리로 올려주고 내 가방끈 길이를 손수 맞춰줬다.
"오빠 뭐하는데."
"계속 왼쪽만 흘러내리잖아. 니 왼쪽어깨만 기름 발랐나."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나는 멀뚱멀뚱 서있고 모자 눌러 쓴 이호원씨는 내 가방끈에 집착하고 있었다.
"아. 자세 좀 비뚤어진 것 같긴 하다."
"가서 교정 받아라. 그거 냅뒀다가 고생한다."
"입시 끝나면. 그 때까진 너무 바빠서 병원 갈 시간도 없어."
무심하게 내 뱉는 내 말을 그대로 들으면서 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던 오빠가 이번엔 치마를 잡고 트집을 잡았다.
"니, 치마가 왜 이리 짧나."
"안 짧거든? 무릎 위 10cm 도 안 되거든?"
"하휴."
왠 한숨이래-.
내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오빠를 곧게 바라보고 있자, 오빠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나를 진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니, 내가 할 말 있다 그러면 어쩔기가."
"할 말 있음 지금 여기서 해. 나 성격 진짜 급한 거 오빠도 잘 알잖아."
"... 그래."
왠지 모르게 체념한 말투였다.
"야아-... 나, 곧 데뷔한다."
"... 아아... 그래?"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힘들게 통보하는 걸 들으니 괜히 좀 슬퍼진다.
"우리 이제 만나기는 힘들겠지."
내가 들어도 애매한 어조였다. 물음인지, 확신인지.
언제나 조금 애매한 어조이긴 했다만 이건 정말 애매했다. 나 스스로도 질문과 확신 사이의 감정으로 뱉은 말이었으니까.
"..."
"... 어? 오빠, 울어?"
이호원씨는 말이 없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오빠가 왜 울어!"
"그냥... 내가 니한테 좀 미안타."
"미안할게 없어서 그런 거나 미안해 하냐. 미안해 할 거면 여태까지 나한테 그따위로 했던 걸 미안해 해야지!"
진짜, 생긴 거랑 다르게 소심하고 마음 여리다니까.
"어차피, 나도 고3 됐으니까, 오빠 만나기 힘들었어."
"... 니, 맘에도 없는 말 마라."
"맞는 말이거든? 고3 때는 연애보단 대학이지. 근데 오빠, 지금 좀 늦었다. 우리 안 가?"
"야, 오늘 독서실 갔다왔다하고 나랑 얘기 좀 하자."
"... 역시 남자는 다 늑대랬어."
장난스레 눈을 슬쩍 흘기자 이호원씨는 또 당황해서 귀는 빨개진 채로 두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다-!
이호원씨, 귀엽긴.
오빠랑 아무 말도 없이 집 앞 놀이터까지 가서 그네에 탔다.
"근데, 있잖아, 오빠."
"응. 말해라."
"우리, 헤어지는 거야?"
"그러고 싶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래-. 그냥, 오빠는 나 대학 갈 때까지만 눈 딱 감고 기다려주면 안 돼?"
"그럴게."
그냥, 우리 그렇게 생각하자. 오빠가 데뷔를 하고, 아이돌이 되고,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수험생이 됐으니까 오빠가 조금 기다려 주는 걸로. 이호원씨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지만, 확고하게.
*
6월 2일.
6월 모의고사를 치고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뭔 놈의 모의고사가 이렇게 쉬워? 이러다 등급 말아먹게 생겼네. 빌어먹을 EBS 연계.
으아아아-! 하고 짜증을 내며 침대 위에서 발버둥 쳐댔다.
엄마가 만약 집에 있었고 내가 이런 걸 봤으면 저 년이 드디어 미쳤구나, 했겠지.
"EBS, 내가, 수능만 끝나면 죄다 찢어버릴 거야..."
결국 짜증에 못 이긴 나는 벌떡 일어나 그렇게 읖조렸다. EBS 문제집이 아닌 EBS 자체를 찢어버릴 거야, 하고.
「잘 봤음?」
그와중에 진동이 울려 확인해보니 그 날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이호원씨였다.
「... ㅡㅡ
EBS 찢어버릴 거야」
진심어린 답장을 보내줬다.
얼른 씻고 틀린 거 오답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속옷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가려는데 이번엔 전화벨이 울렸다.
"아, 왜."
"못 봤나?"
"잘 봤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아아아아-. 빨리 수능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스마트폰도 사고 그러지."
"짜증났나? 야, 내 할 말 있다."
"왠 또."
"일주일 후에 데뷔한다."
"어? 일주일?"
"응. 볼 수 있음 보라고."
"... 알았어."
"잘 지내고, 여름에 냉방병 걸리지 말고, 몸관리 잘 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어어-. 오빠도 몸관리 잘 하고 연습 열심히 하고, 괜히 팬들 걱정 시키지 말고."
"알았다. 끊는다."
"응. 수능 끝나고 연락할게."
근 3개월만의 연락이었지만, 달리 변했다거나 어색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 간간히 발신자 번호 제한으로 새벽 2, 3시 쯤에 문자가 오곤 했다.
별 시답잖은 내용들. 그냥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는 수능 바로 전날 8시 쯤에도 왔다.
「떨지 마라. 여태까지 니도, 나도 열심히 했잖아. 열심히 한 만큼 결과 있을거야.」
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밥 먹다 말고 왜 웃냐고 물었지만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폴더를 닫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24시간만 기다려라, 이호원. 내가 바로 전화해주마.
"오빠, 자?"
"아니. 안 잔다."
"바빠?"
"아니, 안 바쁘다."
"오빠. 나한테 할 말 없어?"
"어어... 잘봤냐곤 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냥 당당하게 문자 보내지 그랬어."
"어어?"
당황해하는 거 보게, 이 사람.
"바보 아니야? 그렇게 하면 누가 몰라-."
".... 아씨-..."
"오빠, 언제 귀국해?"
"12월에?"
"오면 연락해. 데이트 하자."
"알았다."
"아, 그리고 오빠."
이제 슬슬 끊으려는 타이밍에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기다려줘서 고맙다."
경상도에서 전학 온 반장에게 틈틈히 배운 억양이었다.
"야! 니, 그거 언제 배웠나!"
이호원씨는 기쁜 듯한 목소리로 큰소리를 냈다.
"귀국 때까지 기다릴테니까, 얼른 와. 그럼, 안녕-."
조금만 기다려 줘.
전화를 끊기 직전에, 핸드폰 너머로 그렇게 말하는 이호원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기다리고 기다려 주는 연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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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은 거 여기다 다 올리고 가렵니다!!!!!!!!!
제 USB 속 잠들어있던 빙의글들 다 올리렵니다!!!!!!!!! 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