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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건낸 첫 마디를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말간 눈물덩이가 마음에 내려앉던 날, 작은 분홍색 우산을 내 머리위로 드리우던 너. 내민 손을 뿌리치는 나를 보며 너는 그저 웃었다. 맑은 네 마음처럼 아주 환하게. 열여덟의 너는 그렇게도 빛이 났다.
'오래 걸리는 수술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남편분과 같이 오시는 편이…‥.'
죄인은 말이 없다. 애초에 자격이 없는 내게, 아이는 과분한 존재였다.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의사에게 나는 그저 옅게 웃어줄 뿐. 의심스런 눈으로 제 아이가 맞냐 묻는 그 남자의 얼굴엔 불쾌함이 가득했다. 마치, 더러운 오물을 덮어쓰기라도 한 것 처럼.
'숨 들이키쉬고, 편안히 눈을 감으시면 됩니다.'
갖는 것도 버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남긴 불운한 흔적. 그날밤 술에 취해 내 방에 들이닥치던 남자는, 버둥거리던 내 몸을 옥죄였고 유린했다. 벽장문을 타고 고통스런 울음이 번졌고, 놀란 여자는 내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당신 미쳤어요? 경악스런 얼굴로 그의 아래에서 울부짖는 나를 번갈아보는 여자. 그럼에도 그는 억지로 제 것을 들이밀었고, 만류하던 여자는 발길질에 채여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힘없이 늘어진 어머니의 몸을 남자는 발로 짓뭉갠다. 내 아비란 자는 그랬다.
"…많이 아팠을까…‥."
초음파로 들리던 심장소리가 쿵쿵 귓가에 맴도는 듯 하다. 불과 0.2 센티밖에 되지 않았던 생명을 잘라내고, 나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제 배를 내려다 본다. 사라진 아이를 보듬어주듯 손으로 매만지자, 목 울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울지마. 네가 무슨 권리로 울어. 나는 일렁이는 눈을 꾸욱 감았다. 머릿속을 울리는 고통스런 외침에 파묻혀, 나는 네가 만든 그림자도 알아채지 못했다. 네 고운 울림이 젹셔들기 전까지도.
"비가 오려나 봐요."
드리워진 분홍빛 그늘 사이로 제 얼굴을 내밀며 말갛게 웃는 얼굴 하나. 천천히 눈을 올려 바라다 본 네 동공에 흐린 내 모습이 박힌다. 구름한점 없이 청명한 하늘을 담은 네 미소가 한층 마음을 어지럽힌다. 아무말 없이 고개를 돌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너는, 이윽고 제 손에 들린 저와 닮은 우산을 내 손에 꼭 쥐어준다.
"사실 이런거 잘 안 챙기는데…‥.오늘은 왠지 필요할 것 같았어."
"…‥"
"쓰고 꼭 돌려줘요. 나 그거 하나 밖에 없거든"
실없는 네 말에 나는 대꾸도 없이 되려 그 손을 뿌리쳤다. 부딪친 손등이 붉게 달아오른다. 아으- 손 맵네. 큼지막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무안한 기색도 없이 헤픈 웃음만 남발하는 네 모습에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마음만 받을게요. 이건 가져가요. 바닥에 나뒹구는 네 우산을 집어 그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허탈하다는 듯 내 손을 낚아 채는 너. 감싼 손아귀로 네 온기가 전해진다.
"다음에 돌려달라는 말, 정말로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면 진짜 눈치 없는거고."
"……저기,"
"갈게요. 마음껏 울어요."
멍하니 제 얼굴을 올려다보는 내게 그 말만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너. 순식간에 사라진 인영과 쥐어진 분홍색 우산. 펼쳐진 우산을 나는 눈 앞으로 기울인다. 막힌 공간엔 나 혼자만이 들어차있다. 시야를 가린 분홍색 칸막이 안으로 멍울거리는 울음이 번진다. 네 말이 맞았다. 툭. 투둑. 마음의 비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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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머리 위로 우산을 들고 선 남자가 상혁이만큼 매력적이라면, 전 아마 울던 것도 잊어버릴지도 몰라요. 음.. 늦은 첫 인사네요. 욕망에 찬 햇살이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