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뜨겁고도 뜨거웠던 밤 이후 벌써 이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나대로 인턴 일이 바빴고, 준면이는 준면이대로 스케줄 소화하느라 바빠서 연신 휴대폰만 붙잡고 통화만 했다.
원래도 자주 하던 연락이었지만, 사귄다는 명목 하에 주고받는 카톡이나 문자나 전화는, 전파에도 사랑이 담뿍 묻어올 수 있구나,
하며 현대문명을 찬양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일에 치이던 나를 잠시나마 행복 속에 빠질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오늘도 그렇다.
" 여보세요? "
- 어, 여본데요.
" 뭐야 준배, 어디야? "
- 나 스케줄 끝났어. 숙소야-
" 끝났어? 나도 이제 막 끝났어. 집에 가기 귀찮다.. "
- 내가 데리러 갈까?
" 어? 아니아니!! 뭐하러 그래, 응? 숙소에서 쉬어, "
- 왜, 나 갈래. 오늘 낮잠을 많이 잤더니 잠이 안와.
" 그래도오... "
- 갈게, 기다려.
" 준면아, 여보세요? "
전화를 거는것도, 끊는것도 제멋대로다. 한숨을 쉬고 휴대폰의 홀드키를 누르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큰 수술 하나를 참관하러 들어갔다가 나와 샤워하고 난 직후라서, 갈아입은 흰 티셔츠가 미묘하게 축축했다.
지금쯤 동기들은 나이트타임과 파트 교대를 위해 대충 마무리를 하고 있을터라 우리 학번 휴게실에는 나 혼자여서 시계 째각거리는 소리와 내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밖엔 들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생각이 많다는 증거였다.
멍하니 테이블만 두드리는 효율성 떨어지는 짓.
연애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는 가야하는데 준면이가 올거라 언제쯤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기다리는게 왠지 설레는 느낌이라 전화도 걸기가 싫었다.
이렇게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 여보세요, "
- 다 챙겼어?
" 응. 나갈까? "
- 뒷문에 있으니까 잘 찾아봐.
" 에? 뒷문 주차장이 얼마나 복잡한데- "
- 찾으면 상줄게, 꼭 찾아야된다? 기다릴거야.
" 알겠어, 지금 내려갈게. "
이렇게. 내가 오래 기다리기 전에 나에게 올 그임을 알기 때문에.
_
이제 26년째 봐오는 얼굴인데도, 이토록 설레는 마음을 안고 주차장을 걷기 시작했다.
준면이가 차를 산건 한달정도 됐고 내가 타본적은 한번이었기 때문에, 차 종류는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준면이가 시동은 켜 놨을 줄 알았는데 밤 열두시가 넘어가는 이 시간에 주차장엔 헤드라이트가 켜진 차가 없었다.
" 어디 간거야... "
그렇게 5분정도를 걸었을까, 주차장 구석에 준면이의 차가 보였다. 나는 잠도 제대로 못자서 힘든데 김준면은 또 왜 장난을 치는지.
" 이렇게 구석에 있기 있어?? "
" 상이 너무 큰거라, 이정도 고생은 일도 아니지. "
" 이상한거면, 콱- "
" 어헛, 기집애가 진짜. "
일단 맛보기- 라며 내 볼을 감싸고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출발. 몇번 안해본것치곤 준면이의 운전 솜씨는 꽤 훌륭했다.
" 집에 데려다줄거야? "
" 데려다주고 같이 잘건데. "
" 에에??? "
" 에에??? "
" 따라하지 말구우! "
" 따라하지 말구우우- "
" ...김준면, "
" 왜 ㅇㅇㅇ "
" 진짜 자고가..? "
" 오늘 집에 가서 하루 잔다고 말하고 나왔어. 괜찮아. "
" 요새 외박 너무 잦은데? "
" 뭐 어때, 내가 하겠다는데 "
" 어쭈? 이제 막 나간다? "
내 말에 피식 웃더니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집이 가까워서 좋구나. 준면이 운전하는거 사실 좀 불안했는데.
" 주차도 제법 잘한다? "
" 니가 운전 안할거 아니까, 기사하려고 연습했어. "
" 좀 감동이다? "
" 그럼 뽀뽀나 해봐. "
" 어허, "
여기서 말고, 라는 말은 준면이의 입술에 스며들었다. 밖인데다가 뭔 배짱인지 모자도 안쓰고 나온 김준면때문에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심장이 쿵쿵, 두근두근 요동쳤다.
" 괜찮아. "
" .... "
" 아무도 없대도- "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4층을 눌렀다. 사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진도도 뺄대로 다 빼고, 스킨십도 이젠 너무 자연스럽고, 우리 진짜..
" 막장이네. "
" 뭐?? "
" 아니, 우리, 사귄지 이주 됐는데 너무 자연스럽다고. "
" 너랑 나라서 가능한거지, "
" 맞아. 그냥 말이 그렇다고- "
" 그래. "
" 삐졌어?? "
한숨을 폭 내쉬며 비밀번호를 누르는 준면이 허리를 안았다. 얘 진짜 삐졌다, 어떡하지.
" 잠깐만, 잠깐만. 문 열지 마. "
" ....왜 "
" 삐졌냐니까-? "
" 아니라고 "
" 뽀뽀해주면 돼? "
" ..... "
" 응? "
" ..응 "
귀엽다, 귀여워. 이젠 제법 많이 남자다워진, 크고 단단한 손을 꼭 깍지껴 잡은채 입술을 겹쳤다. 이내 잔잔한 호를 그리는 우리 둘의 입매가 꼭 닮았다.
" 들어가자. "
_
" 나는 씻고 왔으니까 얼른 씻고 나와. "
" 엉, 맥주 한잔? "
" 기집애가 진짜. 혼날래?? "
" 야, 인턴한테 술 빼면 시체야!! "
" 내 입술 먹어. 됐지? "
" 어우, 닭살- "
나도 좋으면서 괜히 맘에도 없는말을 잘한다. 준면이가 부엌에서 이것저것 하는동안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욕실에 들어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욕실 불이 밝다. 물도 금방 데워진 것 같고, 매일 쓰던 바디워시도 유난히 향긋하게 느껴진건 내 착각일까.
_
" 에? 죽? "
" 라면 먹지마. 속 버려 "
" 싫어!! 라면!! "
라면 달라고 징징거리며 떼를 쓰니 말없이 나를 식탁에 앉히더니 수저를 쥐어준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그러면 먹게 되잖아.
" 어이 인턴. "
" .... "
" 많이 먹고 빨리 커라- "
" 뭘 커, 여기서 또! "
" 확 보쌈해 가야지. 불안해서 살겠나. "
" .... "
" 입술 또 삐죽대지? 엉? "
죽 잘 먹고있는 내 입술을 톡 치더니 이내 내 손을 꽉 쥔다. 사실 아까 병원에서 아는 간호사 동생한테 내 왼 팔목을 채혈 연습용으로 내줬더랬다.
그래서 내 팔목 상태는 이렇게 엉망이고. 주사바늘 다 찔러놓고 미안하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동생이 안쓰러워 괜찮다며 웃었었다.
실제로 괜찮긴 했다. 환자들이 이렇게 되는것 보다야 내가 이렇게 되는게 피차 나으니까.
근데 준면이는 아닌가보다.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 뭐야, 이거 또 왜 이래. "
" 아, 이거? 아까 채혈하라고 했어. 간호사 신입 연습용. "
" 아니 뭔 채혈 연습을 의사한테 해? 간호사들끼리 하지? "
" 이번에 뽑은 간호사가 걔 밖에 없는데 걔가 누구한테 그걸 부탁하냐? 다 선배들인데. "
" 야, 그래도 그렇지.. "
" 괜찮아. 어차피 왼손이야. "
살짝 화난 준면이를 애써 무시하며 죽을 깨끗히 비웠다. 이거라도 다 안먹으면, 진짜 준면이가 엄청 화날걸 알기에 어쩔수 없었다.
웃으며 잘 먹었다고 배를 통통 두드리니 그제야 살짝 웃는다. 볼을 살살 간지르는 손길과 함께.
" 다음엔 그러지 마. "
" 왜애- 그럼 걔한테 주사맞는 환자들 불쌍해서 어떡해. "
" 김영광 있잖아. "
와, 김준면 괘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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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과일도 먹고, 차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운건 한 두시간 즈음. 이내 잠이 쏟아지는 나때문에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며 화장실로 나를 데려가 나란히 서서 양치를 했다.
딱 거기까지 기억난다, 거기까지.
눈을 떠 보니 열한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다. 어차피 오늘은 하루 쉬는 날이라 상관은 없지만, 준면이가 없었다. 워낙 스케줄이 바쁜 아이니, 이내 그러려니 하고 거실로 나왔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딱 두통 와있다.
" ...우리자기, 하트?"
저장된 자기 이름도 제멋대로 바꿔놓고.
[나 오늘 화보촬영 있어서 먼저 갈게. 점심 챙겨먹고, 식탁 위에 약 사다놨으니까 그거 손에다 발라.]
식탁으로 가서 미소와 함께 약국 봉투를 집어들었다. 멍든데 바르는 로션이랑, 이건 뭐지.
" 임신, 테스터기...? "
이건 왜, 하는 마음에 얼른 두번째 문자도 확인했다.
" 또 김준면... "
[그리고 테스터기는 그냥 혹시나 해서. 너 그날 위험한 날이었잖아.]
맞다. 사후피임약을 처방받는단걸, 일에 치여 까맣게 잊고있었다.
워낙 생리통이 심했던 나때문에 고등학교 다닐때부터 달력에 내 날짜를 표시해왔던 준면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뭐냐며, 하지말라고 되게 부끄러워 했는데 이거, 두번 세번 준면이가 알아서 챙겨주는 날이 늘어날수록 은근 편해서 그냥 냅뒀더랬다.
그래서 준면이가 내 배란일을 아는거고.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김준면 이번에는 너무 멀리갔어- 싶어서.
그렇지만 이내, 그 생각이 정말 틀렸다는 걸 알았다.
암호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