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회원분들을 위한 불마크 제거 버전입니다. 주의!
(이편은 부딪치는 인연들 다음편입니다)
앞으로 본글 & 비회원 전용글(불맠때만) 같이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내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며 허리를 바짝 당겨오는 오세훈의 행동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서 그를 밀어냈다.
“아 진짜, 왜 자꾸 풀러! 기껏 내일 모레 서른이 다시 매어준건데.”
그것도 ‘고작 이런 거’라는 험담까지 들으면서 말이다.
“내일 모레 서른?”
“있어, 그런 게.”
“뭐야, 치사하게. 알려줘요, 좀.”
가볍게 그 말을 무시한 내가 부루퉁한 모습으로 옷고름을 다시 묶으려고 하자, 세훈이 다시 그 옷고름의 끝을 뺏어가더니 이내 기운 빠진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없게.”
그리고서 나의 옷고름을 다시 매어주는 오세훈이었다. 자, 됐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는 오세훈을 보자니, 이럴 때보면 정말 영락없는 열아홉이 맞는 듯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직 어리다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주제에 벌써 여자나 밝히고는. 나는 오세훈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나 이제 궁으로 돌아갈 거야. 너도 적당히 마시다 들어가.”
“어? 나 아직 누나가 따라주는 술 못 마셨는데.”
“여하튼, 난 이만 간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뒤도 안돌아 보고 뛰었다. 혹시나 해서 전회궁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잠깐 뒤를 돌아봤으나, 역시나 오세훈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것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궁으로 들어섰고, 혹여나 찬열이 먼저 와 잠을 자나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러고 보면 마치 내가 진짜 찬열이랑 혼례라도 한 사이인 것 같단 말이지? 오늘은 바닥에서 자던가 해야지, 참.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문을 닫으려고 했던 찰나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어, 어? 아직 안자고 있었어…?”
“네가 아직까지 거기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
침소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찬열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차마 ‘신애국 황제인 도경수에게 붙잡혀 험담을 듣고, 오세훈이 내 옷고름을 다시 풀어버리는 바람에 도로 매고 오는 길이야!’라고 말할 순 없어 어색하게 웃으며 찬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제야 잘 보이지 않았던 차열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조금 젖은 눈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은 파랗게 질린 안색. 나는 찬열의 모습에 놀라, 그의 뺨을 잡으며 물었다.
“왜, 왜 또 이러고 있어?”
“…내가, 내가 분명 일찍 오라고 했잖아.”
찬열은 나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가슴께에 제 얼굴을 기댔다. 나는 그런 찬열이 안쓰러워 어깨를 매만져줬고, 내 손길에 감정이 북받쳤는지 찬열은 더욱 더 내 허리를 세게 안아왔다.
“미안. 미안해. 네가 나 없으면 불안해하는 거 알면서도 늦었네. 화 많이 났어?”
예전부터 찬열에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나에 대한 걱정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극심하다는 것. 예전에 딱 한 번, 몰래 집에서 빠져 나와 궁으로 놀러갔다가 병사를 붙여 준다는 찬열의 제안도 거절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그때 잔뜩 술에 취한 남자에게 억지로 끌려갈 뻔 했는데, 후에 그걸 알게 된 찬열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냅다 나를 전회궁 안에 가둬버렸다.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나중에 눈가가 붉어진 채 손을 덜덜 떨며 나를 안아오는 찬열에 의해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건 찬열 나름대로 나를 걱정해서 했던 행동인 것이다. 단지 이성을 잃으면 그 방식이나 표현이 지나치게 서툴다는 것. 평소에는 나 놀리는 맛에 사는 주제에, 내가 자기 시야에서 잠깐이라도 사라지면 늘 안절부절 못했던 찬열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구나.
“그렇게 걱정됐으면 좀 찾으러 오지. 왜 여기서 미련하게 나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도, 찬열은 불안했는지 내 품을 더 파고들며 말했다.
“…그래도 난, 네가 와 줄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
“그러니까 지금은 이걸로 됐어. 이렇게 네가 나한테 와준 거, 지금은 그거 하나면 돼.”
평소에는 개구지면서 짓궂고, 또 자기 신하들에게는 한없이 엄한 화과국의 황제지만, 나는 찬열의 여린 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예전부터 툭하면 버릇처럼 날 끌어안아오는 찬열을 진심으로 밀쳐내지 못했다. 분명 내가 진심으로 밀쳐낸다면, 찬열이 쉽게 상처받을 거란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위험한 짓을 할 때도, 내게 제대로 화조차 못내는 찬열이었다. 화를 낸다고 해도 결국 나중에는 자기가 먼저 안절부절 못하며 내게 사과해왔다. 그래, 그런 아이였다, 박찬열은. 나는 찬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 내가 네 얼굴 보며 지내온 게 벌써 십년이야. 그리고 내가 난생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다른 황제들을 어떻게 믿어? 십년지기 친구면 몰라도.”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한 도경수에, 여자라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오세훈.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고 싶다고 한들 어떻게 신뢰하고 싶겠어. 나는 생각할수록 아찔하면서도 소름 돋는 상황에 살짝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 찬열이 나의 팔목을 잡아 당겨 자신의 허벅지 위로 나를 앉히더니, 다시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오며 말했다.
“…아깐 먼저 두고 가서 미안해. 급한 일이 있었어.”
“괜찮아. 내가 어린 애도 아닌데 뭘.”
“아니야. 그래도 그런 곳에 널 혼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땐 그냥 화가 나기도 해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미안해.”
“엥? 화, 화났었어? 왜? 뭐 때문에?”
내가 찬열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 묻자, 찬열은 내 눈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곧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그런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 찬열이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찬열을 바라보자, 이내 그 시선을 먼저 피해버린 찬열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들이 널 거리낌 없이 만지잖아.”
“…무, 뭐?”
“거기다 변백현 그 자식은…….”
와, 박찬열 이거 지금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이대로 있다가 난 다른 황제들과 몸의 언약은 무슨, 이대로 박찬열한테 잡혀 사는 거 아니야? 나는 ‘거기다 변백현 그 자식은 처음으로 너한테 입 맞췄잖아’라며 살짝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뱉는 찬열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이 바보야. 네가 그런 거까지 질투를 하면 어떡해.”
“질투가 나는 걸 어떡하라고.”
“그래도 몸의 언약은 네가 처음이잖아.”
라니. 내가 지금 무슨 부끄러운 소리를 내뱉는 건지……. 나는 스스로 말해놓고도 귀까지 열이 쏠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찬열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렇지. 내가 처음이지.”
“뭐, 뭘 자랑스러워하는 거야. 그렇게 보지 마.”
그러다 나는 찬열과 어떤 자세로 안겨 있는지 깨달으며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아까는 분위기에 취해 그냥 찬열이 이끄는 대로 안겼지만, 이거 자세가 좀 많이…야, 야한 거 같은데. 나는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찬열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찬열이 아무렇지 않게 슬쩍 나의 가슴을 만지더니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 가슴은 아직 좀 작은 거 같다. 만져주면 더 커지려나?”
“이, 이, 변태야!”
“아, 아파! 왜 또 때리고 그래! 어차피 볼 거 다본 사이인데, 이정도 장난이 어때서!”
“넌 진짜 어쩜 이렇게 맞을 짓말 골라서 하니? 어휴, 어휴! 내가 못살아!”
어김없이 등짝을 마구 때리던 나는 씩씩 거리며 찬열의 품에 벗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열은 뭐가 그렇게 좋은건지 한참을 호탕하게 웃어재끼더니 곧 달뜬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너, 당분간은 모란궁(牡丹宮)에서 머물러. 네 아버지에겐 내가 말해 놨어. 아까 연회 도중 나간 이유도 그 문제 때문에 네 아버지랑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 그래도 여긴 궁인데 내가 막…살고 그래도 돼?”
“왜 안 돼. 내가 그러겠다는데. 그러니까 당분간은 내 곁에 있어. 또 쓰러지거나 아프면 안 되니까.”
“응? 으응.”
“그리고 또…….”
나는 말끝을 흐리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제 목덜미를 만지는 찬열에 같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인다는 건, 그만큼 찬열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찬열을 재촉하지 않고 그가 계속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곧 다시 한숨을 내쉰 찬열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살아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
“만약 저주를 풀게 된다면, 다른 황제들과 몸의 언약을 맺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그땐 나랑, 그…….”
방이 어두워도 알 수 있었다. 창에 발라놓은 창호지에 스며들어온 달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찬열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제 귀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딴청을 피웠다. 눈을 아래로 내려 깔았다가, 옆을 바라보다가, 분주한 그 시선에 결국 내가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찬열을 바라보자, 찬열은 헛기침을 하고선 침소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늘은 여기서 자. 내가 다른 곳에서 잘 테니까. 그럼 이만!”
그리고 황급히 전회궁을 벗어나는 찬열이었다. 참나.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혼례, 혼례,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진지하게 말하자니 또 부끄러웠나봐? 나는 괜히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을 삼키며 침소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자 얼마 안가 스르르 눈이 감기더니 곧 졸음이 밀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집에 아직 ‘그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가게 되면 가져와야겠다.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새근새근 숨을 내뱉는 나의 숨소리를 들으며 어느덧 깊은 잠에 빠졌다.
* * *
솔월국(乺月國)의 바다 같은 푸른색을 바탕으로 녹색 꽃이 수놓아진 겉치마를 입고, 연하늘색 저고리를 입은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옷고름을 매었다. 좋아, 오늘도 궁 산책준비 끝. 나는 전회궁을 지나 모란궁, 그리고 그 앞 매화궁까지는 산책을 해도 괜찮다는 찬열의 말에 신이나 열심히 옷을 입고 난 뒤 머리까지 단정하게 땋았다. 금으로 만든 나비 장식이 달린 *댕기(땋은 머리끝에 드리우는 장식용 헝겊)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거울로 한참을 바라보다, 곧 창호지로 스며드는 햇살에 기분 좋아 밖으로 향했다.
“와, 날씨 좋다.”
이른 아침에도 밝게 떠오른 햇살에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전회궁을 지나 매화궁 옆 산책로로 향했다. 넓은 연못을 끼고 그 앞을 작은 숲으로 만든 게 이 궁의 진정한 아름다움이지. 평소에는 내가 몰래 궁에 잠입하는 데 사용되는 통로이긴 하지만. 나는 매화궁 담장 옆에 핀 매화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곧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으아, 키가 작아서 인가. 계속 가지가 손끝에만 닿고 잡히지는 않자, 나는 결국 포기하고서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매화 가지를 살며시 꺾더니 그것을 곧 내 손에 쥐어주었다. 손등에 적힌 저 한자. 분명 수(水)였다.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은.
“어연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 그 산책을 좀 하고 싶어서, 하하.”
“그럼, 저랑 같이 할까요?”
사람들 모두 흐르는 강처럼 머리가 맑고 두뇌가 총명하여 모든 제국이 드높은 하늘 위의 주인으로 받든다는 천주국(天主國)의 황제, 김준면. 어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정말 흐트러짐 없이 참 단정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의 말을 거부하지도, 수락하지도 못한 채 매화 가지를 품에 안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찬열이가 아직까진 다른 황제들을 경계하라고 했는데. 그러자 그가 옅게 웃더니 곧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사랑을 쥐어주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돌아가려는 채비를 하려고 나온 거라서. 산책은 다음번에 같이 해요. 알았죠?”
나는 그의 말에 입술은 굳게 다문 채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생긋 한 번 웃어주더니, 마지막 그 말을 끝으로 자신들의 신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가 필요해지거든 꼭 천주국으로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라니. 사, 살았다! 황제 전부가 도경수, 오세훈 같은 건 아니었어!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내게 손인사를 건네는 김준면에게 살며시 손인사를 해주고선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자 매화궁 모퉁이에 숨어 나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변백현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아, 스토킹 하고 있었는데, 들켰네.”
“스, 스토킹?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있어, 그런 말이. 그나저나 나 뭔가 굉-장히 비밀스런 장면을 목격한 거 같은데.”
변백현이 도끼눈을 하며 말하자, 괜히 뜨끔해진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리듯 말했다.
“뭐, 뭐가 비밀스러운 장면이야. 여하튼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박찬열은 바쁘다고 안 놀아주고, 도경수 그 속만 늙은 인간은 여기에 더 이상 볼일 없다고 새벽에 떠나버렸고, 오세훈은 또 어디서 술을 처마시고 있는 건지 궁엔 보이지도 않고, 김종인 그 자식은 아예 오지도 않았고, 김준면 저 형도 간다기에 배웅이나 할까 나왔더니, 준면이 형이랑 굉-장히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고, 네가.”
“뭐, 뭐가 으, 은밀한 대화야!”
“이거이거, 말 더듬는 거 봐. 와, 대박. 뭔가 이야기 한 건 맞네. 준면이 형이 뭐라고 하디? 막 너보고 자기 나라로 와서 몸의 언약이라도 맺재?”
순간, 정곡을 찔려버린 나는 화르륵 뺨을 태우며 괜히 변백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백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진짜야? 저 형이, 천하의 김준면이 진짜 그렇게 말했어?’라며 나에게 되물어왔다. 그것에 내가 모른다며 몇 번 더 어깨를 치니 그제야 변백현이 그만 때리라며 저 멀리 도망갔다.
“우와, 그 형 마냥 순둥이인줄만 알았는데, 또 그렇지만도 않네.”
“너네보단 훨 순해보이던데 뭘.”
“…너네?”
“다, 다른 황제들 보다는…….”
아, 진짜 말조심 좀 해야지. 나는 변백현을 등지고서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자 어느새 내 뒤로 온 변백현이 그대로 내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리더니 짧게 뽀뽀를 하고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마을 구경 좀 시켜주라.”
* * *
아 진짜, 안되는데. 찬열이가 궁에만 있으라고 했는데.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미 몸은 궁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설마 나랑 찬열이랑만 아는 비밀 통로가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나는 마을로 나오자마자 잔뜩 들떠 이것저것 구경하는 변백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백연국의 마을조차 한 번도 제대로 구경해본 적이 없다는 변백현의 말에 순간 동정심이 생겨 고개를 끄덕인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을의 일반 평민들과는 달리 엄청난 고가의 고급스러운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우리였던 지라, 다른 사람들이 거의 노골적으로 나와 변백현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평소에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왔던 건데. 나는 들떠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변백현의 옷자락을 잡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봐,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빨리 돌아가자.”
“잠깐만 이리와봐.”
하지만 변백현은 그런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곧 내 손을 잡고서 어디론가 향했다. 바로 여자들이나 기생들의 장식품을 파는 가게였다.
“음, 이거 예쁘네.”
변백현은 은으로 만든 꽃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장식이 된 댕기를 들더니, 곧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에 남자 상인은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곧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안목이 좋으신 손님이구려. 그 댕기의 장식은 아직 화과국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백금을 도금하여 만든 것이라네. 꽃잎마다 박혀있는 이 보석은 서양에서 들어온 루비라는 걸로 만든 건데, 그 빛이 붉고 아주 예뻐 양반집 따님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지.”
“…좋아, 이걸로 사지.”
백현은 그렇게 말하고서 망설임 없이 금잎전 30개를 뭉텅이로 내려놓았다. 그것에 상인과 나 둘다 입이 쩍 벌어진 채로 변백현을 바라보았으나, 변백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댕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 뭘 저렇게 많이 줘! 아무리 비싸봤자 저거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일 텐데! 내가 귓속말로 쏘아붙여도 변백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가 하고 있는 원래의 댕기를 풀고서, 자기가 산 댕기를 달아주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산 것이 꽤나 마음에 드는 것인지 변백현은 씨익 한번 웃더니, 한줄로 땋은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매만지고선 말했다.
“네 머리 장식인데 이 정도는 주고 사야지.”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가게를 빠져나가자, 나는 못 말린다고 생각하며 변백현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버린 변백현 때문에 나는 숨을 헉헉 거리며 그에게로 뛰어갔다. 혹여나 사람들에게 묻혀 놓치면 어떡하지. 그 생각에 조금 필사적으로 뛰었던 게 문제였을까. 나는 심장에 곧바로 무리가 오는 것을 느끼고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다 진짜 놓치면 큰일나는데……. 그때였다. 누군가 나의 팔목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곧 제 등에 나를 업혔다.
“참나. 살다 살다 내가 여자를 업어주긴 처음이네.”
“왜, 왜 그렇게 빨리 가…….”
“너 좀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그랬는데, 앞으로는 안하려고. 응, 반성중이야.”
변백현은 스스로 척척 대답하더니, 곧 나를 업은 채 앞으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묵묵히 변백현 등에 업힌 채 가고 있을 때, 나는 순간 후궁이 많다는 찬열의 말을 떠올리고서 변백현에게 물었다.
“근데 너 후궁 많다며. 그런데도 여자를 업은 적 없다고? 말도 안 돼. 듣자하니 벌써 다섯 명은 된다던데?”
“무슨 소리야. 여섯 명이거든?”
“…내려줘.”
“싫어. 너 질투하는 거 더 볼 거야.”
누가 질투한데?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발을 동동 굴렸다. 빨리 내려줘. 허나 내가 몇 번이나 몸을 바르작거려도 변백현은 끝까지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선 오히려 나를 약 올리듯 얄밉게 말을 이어나갔다.
“참고로 내 후궁들은 백연궁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만큼 뛰어난 미인들뿐이다?”
“내려줘, 내려 달라니까!”
변백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가 버둥거리는 것을 즐겼다. 이, 이 변태! 오세훈 보다 더한 변태 같은 놈! 내가 등짝을 찰싹찰싹 내려치자, 변백현이 ‘히잉, 현이 아포~’하고 주먹을 부르는 애교를 피우다가도, 곧 자기가 언제 그런 애교를 피웠냐는 듯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나는 도저히 너를…….”
그때였다. 변백현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곧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에 나도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변백현이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오세훈 아니야?”
양 옆에 기생을 낀 채 뭐가 좋은지 그저 하하하 웃어재끼는 오세훈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빼박 오세훈이네.”
아무리 어려도 황제이면서, 지금 어딜 들어가려는 거야?! 본격적으로 기생들과 즐길 생각인지, 기녀집으로 향하는 오세훈의 모습에 결국 변백현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내가 곧장 오세훈에게로 향했다.
“너, 너 오세훈! 지금 어딜 들어가는 거야!”
“어? 누~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어제 못 따른 술 다시 따라줄라고?”
세훈의 말에 옆에 기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은 천상 양반집 규수인데, 하는 짓은 그게 아니온가 봅니다? 기생들의 말에 나는 괜히 수치심이 밀려와 입술을 꾹 다문 채 오세훈을 째려보았다. 허나 그런 내 마음을 다독이듯, 변백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기 품으로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디 있나 했더니, 고작 저런 기생들을 끼고 술을 마시던 거였어?”
“…형이 왜 여기 있어요?”
갑자기 돌변하듯 표정을 굳힌 오세훈이, 내 어깨에 올라간 변백현의 손을 노골적으로 한번 째려보고서는 말했다. 그것에 변백현은 제 어깨를 으쓱이더니 특유의 그 능청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 내가 왜 여기 있을까? 그것도 얘를 데리고 말이야.”
“…….”
“오붓한 시간 방해해서 미안해. 그럼, 훼방꾼들은 이만.”
그때였다. 갑자기 변백현의 팔을 확 낚아챈 세훈이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변백현을 바라보았다. 그것에 변백현도 덩달아 표정을 굳히며 세훈을 쳐다보았고, 나는 갑자기 이 둘이 왜 이러나 싶어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 못하고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뿐이었다. 얘, 얘네 이러다 싸우는 거 아니야? 나는 일촉즉발 냉전 같은 상황에, 백현의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세훈의 손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눈치를 살폈다.
“세, 세훈아, 그러지 말고 이손…….”
하지만 그 냉전 같은 분위기를 먼저 깬 세훈은 자기가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금세 표정을 풀더니 곧 해맑게 웃으며 백현에게 말했다.
“에이, 같이 한 잔 하고 싶었던 거면 말을 하지. 왜 삐치고 그래요. 그러지 말고 들어와요, 이번엔 내가 살 테니까.”
그 예상치 못한 반격에 백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나 했더니, 곧 피식 웃음을 흘긴 백현이 능청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그렇게 까지 말하는데, 합석이나 해볼까?”
…하여튼 이 황제들을 누가 말려.
* * *
이미 여자를 낀 채 술을 마시는 세훈과는 달리, 나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기생방 앞에 서있었다. 그러자 한 기생이 뒤에서 코웃음을 치더니, 곧 내 어깨를 툭 치고 방안으로 들어가 백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서 백현의 팔에 매달리듯 안겨 아양을 떠는데, 어휴…진짜 눈꼴시려 죽겠네. 결국 나가야하나 싶어 망설이는 그 찰나, 백현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떨어져.”
“…….”
“너 같은 게 옆에 앉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떨어지라고.”
백현의 말에 결국 눈치를 보던 기생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나를 휙 째려보고서는 기생방을 나갔다. 아니, 도대체 나는 왜 째려보고 가는 건데?! 내가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자, 곧 변백현이 제 옆을 손바닥으로 툭툭 내려치면서 말했다.
“일로 와.”
그것에 기분이 뚱해진 것도 잠깐. 아까 기생에게 말했던 거와는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백현에 은근 슬쩍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다가도 순간 아차, 싶어 세훈을 쳐다보니 역시나 바람둥이 황제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나를 힐끗 쳐다본 세훈은 곧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옆에 앉은 기생들과 히히덕거리며 술을 받아 마셨다. 그것에 순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니, 곧 세훈이 잔에 담긴 술을 쭉 들이마신 뒤 백현에게 말했다.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간만에 대결할까요?”
“…오늘은 좀.”
백현도 잔에 담긴 술을 쭉 들이마시더니 곧 내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것에 세훈이 ‘흐음’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곧 숨을 크게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뭐, 형이 그렇다니 좀 아쉽네요.”
“지금은 얘도 있고 하니까 다음에…….”
“하긴, 형의 기분도 이해 못하는 거 아니에요. 형이 술은 나한테 늘 안 됐잖아요. 매번 술 대결할 때마다 졌으니까.”
나는 분명 보았다. 술잔을 잡은 변백현의 손에 힘이 실리는 것을. 이,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이라던가? 나는 오세훈과 변백현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여기선 끼어들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그러다가 결국 변백현이 제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은 허용할 수 없겠는지, 곧 술잔을 탁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덤벼, 애송이 황제.”
“어이쿠, 이참에 애송이인 제가 어른송이인 백현 황제님께 한 수 배워야겠네요.”
“하, 그게 농담이면 왕 때려치우고 나가 죽어라.”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저에 대한 형의 애정 어린 조언이라고 받아들일게요.”
이걸 말려야하는 건가, 내버려 둬야 하는 건가. 나는 그 둘을 지켜보다 결국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 그 둘을 말렸을 테지. 나는 이기는 사람 내 편~이라고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술 대결을 지켜보았다. 어느덧 노을이 깔린 바깥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창틈으로 서서히 달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그러다 옆에서 쿵하는 소리에 놀라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변백현이 탁상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야, 야……. 나는 조심스레 변백현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이미 완전히 뻗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는 그였다. 큰일 났다. 이건 또 어떻게 데리고 간담? 주위 기생들은 세훈에게 달라붙어 아부하기 바빴고, 이대로 있다간 정말 안 되겠다 싶은 내가 결국 변백현의 어깨를 잡았다. 나라도 부축해서 가야지, 어쩌겠어. 허나 그때였다. 갑자기 변백현의 어깨에 올린 내 손을 확 낚아 챈 세훈이 잔뜩 목소리를 내려 깔며 말했다.
“저거 데리고 다 나가.”
세훈의 말에 기생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저, 전하? 허나 세훈은 두 번 말하긴 귀찮았는지 기생들에게 인상을 쓰며 나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강제로 몸이 일으켜진 나는 세훈의 품으로 안겼고, 기생들은 그런 나와 세훈의 눈치를 보다 곧 백현을 부축하고 기녀방을 나섰다. 세훈은 문이 닫히자마자 나를 와락 껴안더니 곧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에, 얼마나 마셨으면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나.
“제발, 질투 나게 좀 하지 마.”
코끝을 스치는 강한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곧 나를 향해 그렇게 속삭이는 세훈에게 어이가 없어진 나는 세훈의 어깨를 밀치며 말했다.
“넌 그런 말할 자격 없어. 옆에 기생들까지 껴놓고 놀았던 주제에 말은 순 모순 덩어리잖아?”
나의 말에 세훈은 무언가 울컥한 듯 말을 하려다, 곧 입술을 꾸욱 다문 채 바닥으로 시선을 내려 깔았다. 얘가 왜이래? 취했나? 보다 못한 내가 세훈의 앞으로 손을 휙휙 흔들며 괜찮냐고 묻자, 세훈이 그런 나의 손을 덥석 잡아 내리더니 다시금 말해왔다.
“그건, 어린 애 취급당하는 게 진절머리가 나서 일부러…일부러 그랬던 거야.”
“뭐?”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진지하게 내 눈을 맞춰오며 말하는 세훈의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세훈이 나를 자기 품으로 당겨 껴안더니, 곧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말했지. 다음엔 물러나지 않겠다고.”
“…아, 아무리 그래도 옆에 기생들 껴놓고 술 마시는 사람의 말은 믿기 힘들어.”
“그러니까 그건…!”
세훈은 내 어깨를 잡아 그대로 제 품에 나를 떼어놓았다. 그리고서 어딘가 답답하고 화가 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은 채 입술만 달싹이는 오세훈이었다. 허나 나를 향해 인상을 쓰는 것도 잠시. 곧 한숨을 내쉰 세훈은 제 이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더니 곧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깜빡이다가도, 곧 큰소리로 내게 ‘아, 미안하다고!’라며 열을 내는 세훈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푸, 풉ㅋㅋㅋㅋㅋ오세훈ㅋㅋㅋㅋㅋ”
“그렇게 웃지 마. 아니, 웃으려고 해도 그‘ㅋ’은 좀 떼고 말하던가.”
“그..그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민망했는지 연간 자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세훈의 행동에 결국 배까지 잡으며 웃는 나였다.
“뭐야, 역시 어린 애 맞잖아ㅋㅋㅋㅋㅋ!!”
그래서 나는 속으로 하려던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지도 모른 채 웃어재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오세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하자, 순간 정신을 차린 내가 다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세훈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었는지, 씨익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세훈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져 몸을 떨었다.
“그, 그러니까 세훈아,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 그래? 너한텐 내가 아직 어린애로 보인다, 이거지?”
“아, 아니? 내가 언제?”
“근데 어떡하냐. 그 어린애랑 언젠간 몸의 언약을 맺어야 할 텐데.”
세훈은 기녀방 맨 안쪽에 있는 침소까지 날 밀어붙이더니, 곧 다리를 걸어 나를 그 위로 넘어 뜨렸다. 뭐, 뭐하는 짓이야! 허나 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 위로 올라탄 세훈이 나의 치마 속으로 슬쩍 손을 넣어 허벅지를 쓸어왔다.
“흐으, 마, 만지지 마…….”
“왜. 어차피 맺어야 한다면 지금 맺어도 상관없잖아. 안 그래?”
“아, 아직은 안 그래도…읏, 아…!”
세훈이 입으로 저고리의 옷고름을 잡아 당겨 매듭을 풀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왕 맺을 거면 빨리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세훈은 피식피식 웃으며 천천히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어, 어? 하지마.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아예 콧노래까지 부르며 내 옷을 착착 벗겨가는 세훈이었다. 아무리 바깥이 어두워졌어도, 기녀방에는 아직 향초에 불이 붙어 있는 상태라 환한 상태였다. 그 상태로 세훈에게 알몸을 보이니 얼굴이 확 달아올라버린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세훈이 그 손을 살며시 치우며 나를 향해 물어왔다.
“정말 싫어? 하지 마?”
그것에 내가 결국 아무 대답도 못한 채 시선만 피하자, 세훈이 씨익 웃으며 내 머리의 댕기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곱게 땋은 머리가 길게 풀어헤쳐졌고, 세훈은 그런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세훈의 손등에 적힌 한자가 그제야 내 눈에 보였다. 바람을 나타내는 한자, 풍(風)이었다. 어쩐지 열라 바람둥이더라.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세훈은 곧 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오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어디까지 진도를 나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