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남준 |
찜찜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기척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좋지만은 않았다. 문을 잠그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은색의 머리를 가진 소년이 엎드려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삐거덕거리는 몸을 움직여 급히 교무실로 향했다. 이게 네가 알지 못하는 첫 만남이다. 너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지 머리는 왜 은색인지 왜 귀신이 되어 이 교실에 남아있는지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 펜을 들어 몇 글자 적는 것을 기다리면 쓸데없는 글만 잔뜩 나열했다. 배고프다, 너 잘생겼어, 언제 가 시끄러, 안알랴줌 뭐 이런 것들. 오기가 났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의 대단한 준비를 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무난한 학교생활을 하고 야간자율학습까지 끝냈다. 슬슬 네가 나타날 시간이다. 어김없이 그 자리에 나타난 너의 옆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너는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었다. [조용하네.] 종이에 답을 할까 말로 할까 고민하다 나는 말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냥. 두 글자에 순응하는 듯싶었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잠을 자지 않으려 커피도 싸왔다. 한 모금씩 홀짝대며 기지개를 폈다. 너는 냄새를 킁킁 맡더니 내 옆으로 치웠다. [독한 냄새나, 그거.] 커피라는 거야. 왜 마시냐는 물음에 뭐라 답할까 고민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너는 언제 갈까 궁금해서. 항상 내가 먼저 갔잖아. 너는 펜을 들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그러고 있다 고쳐 잡은 뒤 이번엔 길게 적었다. 궁금해서 보려고 고개를 기웃거렸지만 너는 철저하게 가렸다. 뭐야 궁금해지게. 기껏 썼는데 안 보여줄 거야? 무언가 잔뜩 적고 나서야 공책을 덮고 나에게 건넸다. 점점 사라져가는 너를 보며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라지고 나면 봐.” 네가 없어지자마자 해가 떴다.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 나는 급히 공책을 펴 네가 쓴 글을 확인했다. 단정한 글씨체에 비해 담긴 감정은 올바르지 않아서 같은 부분을 여러 번 읽었다. 너는 그동안 많이 쓸쓸했구나. [혼자 보는 아침 해는 예쁘고 외로워. 아무도 없는 굳게 잠긴 교실 안에서 내가 뭘 했을까. 마지막에 앉은 자리에 앉아보기도 하고 풀었던 문제들을 되새겨보고 분필로 너는 알지 못할 영어 단어를 끄적이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매일 느껴. 이런저런 감정들을. 너는 몰랐으면 해. 말을 하지 않으면 넌 시큰둥하게 나를 쳐다보다 금방 갔으니까 오늘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한 검은 물가지 가져오고. 너 좀 독하다? 내일 또 만난다면, 그때는 어서 가길 바라. 위에 적었듯이 이곳은 참 많이 외롭고 심심하고 알게 모르게 지옥 같은 곳이니까.] 너는 이곳에서 얼마나 있었길래 이런 감정을 알려줄까. 공책을 베개 삼아 엎드렸다. 꿈에서 네가 나올 것만 같다. |
석진남준 |
가로등 옆 자전거는 오랫동안 주인에게 관심을 받지 않았는지 녹이 슬어있다. 은색 위에 덕지덕지 묻은 게 떼어내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쭈그려 앉아담배를 피울까 생각했다. 당신이 오지 않는 시간은 이상하리만치 길었으니. 싸구려 라이터를 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가로등과 같은 색에서 길고 가는 연기가 나왔다. 연달아 세 개를 피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보지 못하는구나. 민망함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당신의 문 앞을 지나친다. 바로 꺾은 골목에서 눈이 마주쳤다. 롱 코트 단정한 머리가 당신이 여전히 멋있다는 걸 보여준다. “왜 여기 있어?” “보고 싶어서요.” 한 마디로 정리하지 못할 감정이 꾸역꾸역 나왔다. 흘러봤자 내 발 밑이겠지. 어렵게 지나치고 골목을 걸었다. 당신이 온 자리에 나가는 꼴이 비웃을만했다. 내가 여기로 또 올까. 내기를 하면 나는 질 것이다. 당신에게 약한 게 내 유일한 약점이니까. |
석진남준 |
“우리 얘기 좀 할까?” 분명 이 놈일 것이다. 동방에 놓은 분홍색 삼선 슬리퍼를 이 놈이 가져갔다는 아이들의 말을 믿으며 일단 끌고 나왔다. 은색 머리에 멋들어지게 올린 것이 여자 꽤나 울렸을 외모다. 그래도 나보다 더 할까. 나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요?” “너 우리 동방에 있는 슬리퍼 신고 갔어?” 아, 그거요? 어제 비 와서신고 갔는데. 근데… 끊어졌어요. 야, 이씨 그거 내 거야. 녀석은 멍청하게 눈을 두 번 깜박이다 입을 막았다. 헐 죄송합니다. 녀석은 허리를 몇 번이나 접어가며 인사를 했다. 아, 아니 이렇게 사과 말고 그냥 뱉어내라는 것뿐인데.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니 후다닥 도망가는 뒤통수를 보다 허 웃었다. 나 분명 따지러 온 거 맞지? 다음 날, 동방에 들어가자마자 분홍빛으로 가득한 소파 위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선배 죄송합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김남준. 이름이 남준이야? 동방에 아직 남아있던 친구들이 애새끼 그거 사느라 요 앞 문구점이며 서점 아래에 있는 팬시점이며 다 돌았다고 하더라. 네가 좋아하는 거 물어봐서 분홍색이면 다 좋아 할 거라고 했더니 무식하게 사 왔어. “그리고 이거” 다른 사람이 신고 갈까 봐 나한테 맡겼다. 난 수업 들으러 먼저 간다. 남준이 찢은 슬리퍼와 똑같은 걸사 왔다. 가득 쌓인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분홍색 곰돌이 저금통에 가득 들어있는 분홍색 사탕 분홍색 포스트잇에 분홍색 필통 분홍색이 주로 들어간 공책들 심지어 분홍색 헤드폰 분홍색으로 포인트를 준 운동화 얼레 이거 진짜 비싼 건데. 아무튼 온갖 잡다한 것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받아도 되려나. 일단 가방 안으로 쓸어 담았다. 안 들어가는 저금통은 품 안에 넣고 동방에서 나왔다. 집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니 녀석이 이어폰을 끼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작정 어깨를 잡아 돌렸다. 엄청 말랐네 휙 돌아가는 거 보니. “아, 안녕하세요.” “잘 먹을게.” 하나를 꺼내 녀석의 손에 쥐여 주었다. 두 손으로 곱게 받고 꾸벅 인사하며 또 도망가듯이 가버렸다. 혹시 쟤 나 싫어하나. // 남준이 동생 방에 노크를 했다. 오빠가 오래 간만에 웬일이지. 또 사고 쳤나. 방문을 열자마자 안절부절 못 하는 발걸음으로 어떡하냐며 동태 눈깔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이 새끼야. “내가 아는 사람 물건을 망가트렸거든.” “가지가지 한다.” “어떡하지 그거 선배 물건인데.” 그 선배 뭐 좋아하는데 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분홍색 좋아한 댔어. 그럼 분홍색 관련된 거 다 사다줘. 뭐 하나는 취향에 맞겠지. 그럴까? 응 그러니까 빨리 가봐. 응응. 의외로 단순하고 순진하며 나이 많은 사람을 꺼려하는 성격 덕에 –거기에 모든 물건을 부숴버리는 미친 손까지- 나에게 이런저런 일 들을 말해주며 고민 상담을 하는데 오늘도 역시 거하게 일을 치러버린 모양이다. 일단 대충 둘러댔으니 괜찮겠지? |
진랩 드루와 드루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