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인간따위가."
"빨리 안 꺼져? 인간은 딱 질색이야."
"믿어. 무조건 나 믿어. 그러니까 김성규, 내가 올때까지 꼭 여기 숨어있어. …그리고 내 인간 이름은 남우현이다."
"으, 으아…! 세상에. 실제로 드래곤이 있을줄이야…!"
"레드 드래곤씨는 인간 모습으로 못 변해요? 책에서 보니까 인간의 모습으로도 된다던데…"
"…우현씨, 꼭 돌아와야해요."
*** *** ***
평소 판타지에 관심이 많던 성규가 제법 두꺼운 책을 빌려왔다. 오래되었는지 모서리부분이 많이 헤져있었다.
옅은 불을 내뱉는 탁상용 스탠드에 의지한채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는 성규였다.
책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법책같았고 글 옆엔 간간히 그림도 그려져있었다.
낡아서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드래곤 그림만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 피곤한가?"
눈을 점차 느리게 꿈벅이던 성규가 이내 드래곤 그림을 빤히보다가, 책속에 빨려 들어가 듯이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낡은 책에는 선명한 붉은 빛을 띄고있는 레드 드래곤이 그려져있었다.
"으응… 뭐야, 여기가 어디지?"
뭔가에 홀린 듯 눈을 감았다가 뜬 성규에겐 제 키의 열배는 훌쩍 넘어보이는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울창한 숲이었다.
나무뿐만이 아니라 이름모를 풀들도 키가 큰 것은, 성규의 가슴께까지 닿았다.
"뭐야 진짜, 말도 안돼… 난 분명 내 방이었는데?"
주위를 찬찬히 살피던 성규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연못과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다.
독특하게도 연못에는 그 흔한 개구리나 잉어따위가 아닌, 손가락만한 사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성규의 흥미를 끈 것은 커다란 동굴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으, 으아…! 세상에. 실제로 드래곤이 있을줄이야…!"
"크르릉…."
펼쳐진 상황에 적응을 전혀 못한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도착한 동굴안에는 선명한 붉은빛을 자랑하는 드래곤이 있었다.
책 속에서만, 영화 속에서만 보던 드래곤이.
성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자 레드 드래곤은 사나운 소리를 내며 반응을 했다.
"너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인간따위가."
"…으으아."
화가 난듯 소리치는 드래곤의 말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성규가 엉덩방아를 찧은채 뒤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니꼽게 성규를 보던 드래곤이 콧바람을 내뱉었고,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온도와 세기에, 콧바람 하나에도 성규는 괴로워했다.
"빨리 안 꺼져? 인간은 딱 질색이야."
*** *** ***
"레드 드래곤씨, 오늘 날씨 진짜 좋은데 동굴에만 있지말고 좀 나와요!"
"시끄러."
꿈에서 조차 상상도 못해봤던 드래곤과의 동거라니, 성규는 제법 '이 쪽' 세계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이제는 드래곤은 물론이거니와 연못의 요정들이나 엘프와도 서슴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발톱으로 찢어버리기전에 그만 좀 쫑알대라."
"에이, 진짜로 그러지도 못할거면서."
'이 쪽' 세계에 익숙해진 성규는 이젠 드래곤한테도 나름(?)의 반항을 했다.
바닥이 다 보일정도로 투명한 에메랄드 빛 연못에 발을 담그며 성규는 넌지시 물었다.
"레드 드래곤씨는 인간 모습으로 못 변해요? 책에서 보니까 인간의 모습으로도 된다던데…"
"인간따위한테 그런거 안 가르쳐 줄거다."
"치… 되게 쪼잔하네."
*** *** ***
원래 세계로 돌아가봤자 재미없는 공부만 해가면서 반복되는 삶을 살빠에는 여기서의 생활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성규였다.
저와 함께 지내는 레드 드래곤의 잘빠진 날개를 등받이 삼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노곤해져서 잠이 들려던 찰나에 드래곤이 몸을 일으켜 눈을 번뜩였다.
깜짝 놀란 성규가 동굴바닥에 깔아놓은 나뭇잎더미에 구를뻔했지만 드래곤이 꼬리로 감싸올렸다.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왠일로 잠잠하나 했더니… 놈들이 오고있다."
"놈들이라뇨?"
"블랙 드래곤. 지독히도 더러운 성깔탓에 우리랑 천적이지"
"레드 드래곤씨보다 성깔 더러우면 말 다했네요 뭐,"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을 내뱉는 성규와는 달리 드래곤은 꽤나 심각했다. 서열자체는 레드 드래곤이 우세하며, 훨씬 강하지만
여긴 지금 저 밖에 살지 않았다. 이쪽으로 몰려버리면, 나약한 인간인 성규를 지키면서 싸우기엔 확실히 불리했다.
"김성규. 지금부터 내 말 잘들어라."
"왜에- 뭔데요."
"보다시피 이곳엔 너랑 나, 둘밖에 없다. 혼자 싸우면 그깟 블랙 드래곤따위 여려마리 몰려와도 이길 수 있지만,"
"…"
"니가 있다는 걸 들키면 얘기는 달라져. 넌 인간이니까."
"아…"
성규는 탄식을 내뱉었다. 일은 점차 심각해져갔고, 맑디 맑았던 하늘은 점점 까맣게 물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규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블랙 드래곤의 무리는 가까워져왔다.
멀리서부터 드래곤 특유의 사나움이 묻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성규는 흠칫하며 드래곤의 오른쪽 날개품으로 파고들었다.
섬세하게 빛나는 붉은 날개가 성규를 보호하듯이 감싸안아 품었다.
"드래곤, 씨…"
"겁먹지마라. 레드 드래곤이 고작 블랙 드래곤따위에게 질 것같으냐?"
"하지만,"
"믿어. 무조건 나 믿어. 그러니까 김성규, 내가 올때까지 꼭 여기 숨어있어. …그리고 내 인간 이름은 남우현이다."
정말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레드 드래곤, 아니 우현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날개로 감싸져있던 성규에게 우현의 팔이 둘러져있었고, 깜짝 놀란 성규가 입을 벙긋하자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레드 드래곤으로 변해 있었다.
우현은 이내 동굴밖을 빠져나가며 방금까지 성규를 품던 날개를 망설임 없이 펼쳤다.
몸풀기라도 하듯, 허공에 화염 브레스를 뿜어대자 블랙 드래곤들이 모습을 하나 둘 들어내었다.
동굴 속에 숨어있던 성규가 살짝 내다보았을땐 새까만 블랙 드래곤의 마리수는 언뜻 봐도 5~6마리정도는 되보였다.
"…우현씨, 꼭 돌아와야해요."
블랙 드래곤의 암흑 브레스와 우현의 화염 브레스가 만나 대지를 울렸다.
연못이 출렁거렸고 요정들은 다 도망간지 오래였다. 급한 우현의 부탁으로 엘프가 성규를 보호해주고 있었고,
아무리 강한 레드 드래곤인 우현이라해도 한꺼번에 덤벼드는 드래곤들을 쉽사리 이기진 못하였다.
까맣게 타들어가고, 크르릉 거리는 모습이 마치 괴로운 듯 보여 성규는 애가 탔다.
"강하다면서 왜 당하고만 있어… 거짓말쟁이."
우현과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우현덕에 엘프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탓에 엘프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그때였다. 한꺼번에 3마리를 상대하던 우현의 뒤로, 가장 몸집이 큰 블랙 드래곤이 어마어마한 암흑 브레스를 뿜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안돼! 성규는 우현의 당부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안돼요 성규님! 지금 나가면 큰 일 나요!'
"우현 씨가 당하고 있는 것보다 큰 일이 어딨어요!"
우현 씨! 위험해요, 뒤를 봐요! 엘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규는 결국에 뛰쳐나갔다.
성규의 외침덕에 우현은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주위만 맴돌던 블랙 드래곤 한마리가 눈치빠르게 성규쪽으로 날아들었다.
날개짓을 멈추며 땅에 안착하자 바람과 땅의 울림에 못이긴 성규가 미끌려 땅에 굴렀다.
"내가 나오지 말랬잖아! 하여간 김성규, 멍청한 인간…"
"인간 냄새가 나네? 언제부터 고고하신 레드 드래곤이 인간을 기르는 취미가 있으셨나."
흥미가 넘치는지 성규 앞에 바싹 다가와있는 블랙 드래곤의 콧김에선 암흑 브레스가 조금씩 섞여나왔다.
우으… 괴로워. 성규가 뒤로 물러나려했지만 등에 맞대져있는 동굴벽에 도망치지 못했다.
우현은 속이 타들어갔다. 저 멍청한 김성규가…
"정말 약해빠졌어, 인간들은."
"윽…"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블랙 드래곤이 검게 물든 손톱으로 성규의 목을 꽉 움켜쥐었고, 그 힘은 무시무시했다.
머리와 목에 핏발이 잔뜩 선채로 숨을 쉬지 못해 괴로운 듯 바들거리는 성규였고,
그런 성규를 구하려는 우현은 주위의 다른 블랙 드래곤들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김성규!"
"톡하면 뿌러질것 같은데? 꽤나 정들은 모양인데 이제 작별인사하셔, 레드 드래곤."
"너네따위가 감히…"
"너무 걱정은 마. 이 인간따라 너도 갈테니"
괴로움에 바둥거리던 성규의 몸부림이 잦아들었고, 결국 힘없이 손 발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그제서야 손톱을 거둔 인간의 모습을 한 블랙 드래곤이 만족한 듯 깔깔거렸다.
동굴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성규의 목에는 흉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우현은 한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구겨진 종잇장 마냥 널부러진게 성규라는걸 서서히 인식할때쯤,
하늘이 핏물처럼 새빨갛게 물들 정도로 폭주했다.
*** *** ***
뒷편은 다음 기회에..★
언젠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