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는 거짓 말 처럼 이른 아침 아직 여명이 되기 전부터 갑자기 멈추어버렸다. 일주일 동안 사용하던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붉은 빛 우산을 두고 집을 나섰다. 가뜩이나 이틀 전 차까지 고장이나 도보를 이용하는데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아침부터 강하게 내리 쬐는 태양이 야속할 뿐이다. 출근 시간은 언제나 직장인들로 가득 찼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항상 그게 그거인 비슷한 업무를 해결하고, 때가 되면 퇴근을 하고 항상 같은 패턴. 지겹다. 차라리 그 때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남자 애를 따라 내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해맑게 미소 짓던 그 남자. 후회해 봤자 이미 지나가 버린 부질 없는 짓이지만 그 남자 애가 떠오를 때면 후회를 해버린다. 차라리 그 애를 따라갔다면, 그리움이 되버린 그 남자 애를 따라갔다면 내 지겨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어느덧 회사 앞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그렇듯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후끈 달아오른 내 살결을 스치듯 불어온다.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내고, 지나가던 직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낸다. 그에 맞춰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짓는다. 회장 아들이기에 가식을 떨며 내게 인사하고 붙어올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그 남자 애만은 달랐었지. 괜시리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8층에 위치한 디자인팀의 문을 열고 팀장실에 들어서 언제나 그렇듯 비슷한 업무를 처리해야한다. 지루하지만 업무를 다 끝내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었다. 책상에 앉자마자 서랍 안에 가득 차있는 딸기맛 사탕을 까 입에 물고 턱을 괬다. 그리고 그 남자 애를 떠올렸다. 항상 나를 보며 지어주던 미소와 나의 손을 감싸던 따스한 손길. 깊고 깊었던 검은 색의 맑은 눈동자. 나에게 있어 그 애의 존재는 언제나 당연했다. 항상 함께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애는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그리운 남자로 남아버린 네가 너무 그립다. 오늘만은 업무 따위를 뒤로 미루며 그 애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 그래, 그건 아련함이 었다. 항상 모두와 동떨어진 듯 혼자 멍하니 창밖을 내다 보는 너의 모습은 늘 아련했다. 누가 저를 불러도 빤히 응시해도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느껴도 못 느낀 척. 창 밖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수업시간에는 엎드려 자기만하면서 성적은 잘 나온다. 그렇기에 선생님들도 미워 할래야 미워 할 수 없었고, 같은 반 아이들은 그 애를 싫어했다. 괴롭혀도 무시하기 일쑤고 맞아도 가만히만 있으니 아이들은 그 애를 없는 존재인 것 마냥 취급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눈이라도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휑하니 도망가 버리고. 창 밖을 빤히 바라보는 그 애를 응시하다 창 밖을 보고 또 다시 그 애를 바라봤다. 창 밖엔 당연하게도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지겹도록 보는 건물들과 재미 없게 흐르는 하늘. 그 런 것을 보는게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매일 같이 보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아, 눈이 마주쳤다. 창 쪽으로 향해있던 눈이 어느덧 나에게 향해 있었다. 베시시 웃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눈까지 휘며 나에게 미소 짓는다. 잎 꼬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움푹 파이며 보조개가 생겼다. 가끔느끼는 거지만 웃는게 참 귀엽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흔히 아는 그 웃는게 아닌 것 같달까. 그 행복한 미소와는 다르게 아련한 미소. 다른 이에게 억지로 웃음지어보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렇기에 그 애에게 항상 눈이 갔다. 꽤나 고생한 듯한 손으로 턱을 괘고 그 손가락의 움직임마저 놓지지 않고 관찰하는게 내 학교생활의 낙이었다. 지겨운 생활 속에서 그 애는 밝게 빛이 났다. 내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위에는 개새끼들만 득실거렸다. 무언가를 원해서 뜯어 먹기위해. 그런 새끼들은 쳐먹을거 다 쳐먹고나면 나에게서 등을 돌렸고, 무언가가 또 생기면 또 다시 다가왔다. 마치 "성규야아~" 지금 처럼. 역겹다. 지독한 향수를 잔뜩 뿌리고 내게 앵기는 이 년이. 여자들 특유의 화장품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일때마다 토기가 몰려왔다. 아침에 먹은 토스트를 금방이라도 게워내고싶었다. 내게 안긴 년의 팔을 부러뜨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부모라고 부르기에도 역겨운 두명의 사람이 그냥 부모 얼굴에 먹칠하지말고 닥치고 웃기만 하랬으니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싱긋 웃었다. 가까이서보니 눈에는 뭘 그렇게 쳐바른 건지 까맣다. 하얀 얼굴과는 다르게 까만 목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앞에서 이 년이 뭐라하든 말든 창 밖을 바라보는 그 애에게 힐끔힐끔 시선을 옮겼다. "아, 비오려나..우산 안가져왔는데.."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소년다운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순간 내 시선은 그 애에게로 향해 있었다. 목소리는 또 처음 들어보네. 웃는 건 많이 봤어도. 1학기 들어서 선생님이 발표하라 시켜도 멀뚜히 서있기만 한던 그 애인데 혼잣말은 자주하는 듯 했다. 지금 교실에 옆에서 쫑알대는 년과 나, 그 애만 있어서인지 온 신경이 그 애에게 향해있어서인지 유독 크게 들렸다. 내 생각에는 후자인 것 같지만. 그 애가 응시하고 있는 창 밖은 회색빛 구름들이 무겁게 떠다니고 있었다. 3교시 때까지만해도 푸른 하늘을 자랑하며 햇빛을 내리쬐었는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 질 것만 같다. "어, 성규야 비오려나보다! 우산 가져왔어? 나 가져왔는데 안가져왔으면 같이 ㅆ.." "가져왔어" "아..그래? 다행이다!" 이 년이랑 우산을 함께 쓸바엔 차라리 비를 맞고 가는게 낮지. 다행이도 저번에 가방안에 처박아둔 3단 우산이 있어 맞고 갈 일은 없을 듯 하다. 그 애는 가져온 것 같지 않은데 좀 있다 말이나 걸어 볼까. 놀란 표정을 지을까. 싫어하는 표정을 지을까. 뭐, 둘다 귀여울 것 같지만. 동그란 뒷통수와 얇은 허리라인이 조금씩 비치는 하얀 하복 셔츠. 벗겨놓으면 섹시하겠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그 애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맑은 눈동자에 내가 담긴 순간 세상이 멈춘 줄로만 알았다. 주위의 여자들 처럼 예쁜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남자가 가질 수 없는 묘한 예쁨. 그래 그 애는 묘하게 예뻤다. 맑고 깊은 검은 색 눈동자와 짙게 그려진 쌍커풀, 새까만 머리카락과 대조 되는 뽀얀피부. 오똑한 코에 붉은 빛이 감도는 입술. 여자들이나 보통 남자들이 봤을 때는 한 눈에봐도 잘생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생겼을테지만 나에겐 저렇게 이쁠 수가 없다. 그 애가 웃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안들었는데. 뚱한 표정, 입술을 미세하게 내밀고 나와 이 년을 쳐다보는데 질투인가. 괜히 웃음이 나온다. 하굣길에 고백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할까, 뺨을 때릴까. "아, 종치겠다. 얼른가" "앗 그러게! 내일 약속 잊지말고!" 약속은 무슨 약속. 쫑알대는 말 하나하나 다 듣지도 않았는데 지키긴 뭘 지켜. 뭐 들었어도 절대 안 지켰을 거다. 손을 흔들여 나가는 모습에 적당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담임이 교실로 들어온다. 아, 오늘 단축수업이라고 했었나. 담임의 종례가 끝나자마자 교실을 나서는 그 애를 따라 나왔다. 검은 색 가방엔 들은게 하나도 없는지 홀쭉하다. 중앙현관에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멍하니 서 있다가 발걸음을 내딛는 그 애의 가방 끈을 잡아 끌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몸이 뒤로 기운다. 힘 없이 넘어오는 그 애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볼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는데. "명수야, 우산 안가져왔지?"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다. 역시나 보는 눈이 있으니 말을 안하네. 가방에 처박혀있던 우산을 펴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는 김명수에게 이리 들어오라고 손을 까딱 거렸다. 주춤하는 가 싶더니 꼬물꼬물 기어들어온다. 우산 위로 비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우산이 작은 탓에 두명이 쓰기에는 역시 작다. 우산을 김명수에게로 기우니 비가 어깨를 적신다. 원래 같으면 이런 대우 안해주는데 김명수니까. "명수야, 우리 잘래?" "....?!" "어어..아니 미안, 잘 못 말했다. 우리 사귈래?" "....??!!!?!" 씨발, 눈이 동그래져서 놀란 듯 쳐다보는데 귀여워 죽겠다. 여기서 벌써 놀라면 어쩌자는 거야. 키스 하면 어떤 반응 보이려고. 싫어? 고개를 좌우로 막 흔든다. 그럼 좋아? 잠시 뜸들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발 끝만 바라보며 찰방 소리를 내리며 걷는다. 붉어진 귀에 표정이 어떨지 보고 싶어진다. "아, 명수야 너 집 어디야?" 손을 쭈욱 뻗어 앞을 가르킨다. 쭉 뻗은 뽀얀 팔 위로 빗물이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우산을 명수에게 건내고 근처 아파트로 뛰어들어갔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 씨익 웃어보였다. "나 집 여기야. 나중에 우산 돌려줘!" "..으응.." 붉은 색 우산이 멀어질 때 쯤까지 손을 흔들고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빗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반대쪽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비가 옷을 적실때마다 찝찝한 느낌에 기분이 나빴지만 한편으로는 좋았다. 나와 김명수의 거리가 좁혀진 첫번째 발걸음이었기에. - "성규야~" "..." "김성규~!!!" "어..?어?왜?" "자꾸 그렇게 멍때릴거야?" 입술을 쭈욱 내밀고 삐진듯 나를 쏘아본다. 몇번이나 불렀는지 알아?얼마나 멍때리고 있으면 사람이 온지도 몰라? 쏟아지는 잔소리에 입술에 촉하고 입술을 짧게 부딫히자 거짓말 처럼 잔소리가 멈추고 매운 손이 등으로 떨어진다. 이젠 내가 편해진건지 말이 꽤나 많아졌다. 물론 나에게만. 말이 많아진 김명수에 놀랐는지 호기심에 김명수에게 말을 거는 같은 반 아이들이 많았지만 그냥 웃기만 할뿐 말은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나로인해 막힌게 대부분이지만. "미안 미안~딴 생각 하느라.. 곧 졸업이기도하고.." "아.." "넌 졸업하면 뭐 할거야?" "글쎄..세계 곧곧 사진 찍으러 다니겠지?" 김명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남들이라면 놓쳐버릴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 다 사진 속에 담았다. 집에 놀러가 방을 구경할 때도 한 켠에 사진기를 전시라도 하듯 늘어뜨려 놓았고 다른 한켠엔 사진들이 들어가 있을 앨범이 가득했다. 그 앨범들은 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었다. 학교 근처나 이 근처를 찍은 사진도 많았는데. 한국에 이렇게 이쁜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라면 무심코 지나가버릴 곳도 많았다. 진짜로 좋아하나보네. 졸업하면 세계로 나갈 생각을 하다니. "서방님보다 좋아?" "..ㅅ..서방님은 무슨!!..네가 더..좋..지.." "어휴~귀여워" "아, 하지마!!!ㅇ..아, 잠깐..나 갈게!" 집에 갈 시간이 다 된건지 짐을 챙겨 후다닥 나가버린다. 김명수의 검은 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며 손을 흔들고 나가버리는 김명수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그리운 남자가 되버린 김명수..네가 너무 그립ㄷ.. "팀장님!!" 외국에 있는 회사에서 이 곳으로 온지 1년이 채 안되는 엘이란 이름을 가진 김명수를 꼭 닮은 남자. 화가난 듯 입을 뚱하게 내밀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불러도 대답을 안하십니까?" "..아, 미안 미안~딴 생각 하느라고" "진짜 이럴 때마다 옛날 제 애인이랑 하는 짓이 똑같다구요~ 결제 싸인 받으러 왔더니 아무 것도 안하고 멍때리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안하ㄱ.." "아..아..엘씨야 말로 잔소리만 하던 제 전애인 닮았는데? 잔소리가 어찌나 많던지.. 첫 인상이랑 다른게 진짜 똑같다니까? 맨날 멍하니 밖에만 보고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아니거든요?!" "아휴 귀여워라" 엘이 자신의 머리리를 쓰다듬고있는 내 손을 아프지않게 쳐내고는 휑하니 나가버린다. 어느 날 갑자기 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을 땐 정말 놀랐었는데. 뭐..새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김명수는 이미 그리움으로 남아버렸으니까. 그린비::그리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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