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주세요
W.황월영
" 사과도 없이 훅-! 지나가더라? 아니 그래서 내가 걔 멱살을 잡고··! "
" ········ "
" 야 박여주, 너 또 수면제 먹었지 "
" ······어? 아니?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졸더만. "
" 아 진짜! 내가 서쌤한테 너 수면제 처방해주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는데! 또 어디서 구한거야?! "
앞에서 신나게 앉아 떠들어대던 수민이가 어느새 금방 씩씩거리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야, 서 선생님은 아무 잘못 없어··! 그냥 쟁여뒀던 거 먹은거야. 어? 너 지금 수면제 먹었다고 인정한거다! 너 진짜··! 침까지 잔뜩 튀겨가며 노발대발하는 수민이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진서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너 약혼문제 때문에 그래? "
" 어? 에이, 그런 거 아냐."
" 맞지 뭐! 그 영감탱이, 진짜 맘에 안 들어. 네 인생이 네 인생이지. 지 인생이야? "
"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똑바로 말씀드려. "
박여주, 너 언제까지 꼭두각시처럼 너희 부모님, 할아버지 말만 따를거야. 너가 하고싶은대로 살아가야지. 네 인생인데. 진서의 말을 듣고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꼭두각시일지도 모르지···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정해준 옷을 입어야만 했고 정해준 친구를 사귀어야만 했다. 그러다 조금 컸을 때에는 아버지가 정해준 학교에 입학했고, 또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원하지도 않던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또 성년을 맞자마자 숨 한번 돌릴 틈도 없이 할아버지의 말씀, 아니 명령대로 회사의 이사직에 올랐다. 이 모든 게 권유가 아닌 명령, 강요였다. 나는 여전히 그런 꼭두각시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렇게 나는 또다시 양측 가족들의 무언의 압박 속에서 H그룹 막내아들, 신재현씨와의 약혼을 준비 해야만 했다. 내 말에 수민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 내 친구, 불쌍해서 어떡해. 그 흔한 사랑 한번 못해보고 결혼하게 생겼으니··· "
" 야 한수민, 유난 떨지 마. 얘가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니고. "
" 그래··! 박여주, 너가 이번엔 꼼짝없이 당할 생각 말고 한번 나서봐. 너도 이제 성인이고 다 컸는데. 진짜 윤진서 말대로 언제까지 꼭두각시놀이할 거야. "
친구들 말대로 나 역시도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자유로워진 나를 수없이도 상상했다. 나도 주변 친구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연애'라는 걸 해보기도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을 찾아 직업을 삼아 보고도 싶었다. 또, 밤늦게까지 입고 싶은 옷을 입은채로, 조금은 짓궃다고 할 수 있는 옷차림을 한 채로 네온사인이 쉴 틈 없이 반짝거리는 밤거리를 돌아다녀보고 싶었다. 상상 속 나 역시 그런 자유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 백날하면 뭐 하겠어,
" 달라지는 건 없을텐데··· "
나는 여전히 J그룹의 이사였고, J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J그룹 부회장의 딸이었다. 삼켜내는 침들이 쓰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나의 말에 그저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줄 뿐이었다. ······ 친구들의 따뜻한 손길에 나는 한번 쓰게 웃었다. 그때, 룸의 문이 활짝 열리고 바깥의 열기가 방안을 훅- 하고 감싸며 늦은 희린이 부랴부랴 들어왔다.
" ·····전희린! 너 왜 이렇게 늦었어!! "
" 아 미안미안, 나 그래도 대박인 거 들고왔는데토닥여줄뿐이었다. ······ 친구들의 따뜻한 손길에 나는 한번 쓰게 웃었다. 그때, 룸의 문이 활짝 열리고 바깥의 열기가 방안을 훅- 하고 감싸며 늦은 희린이 부랴부랴 들어왔다.
" ·····전희린! 너 왜이렇게 늦었어!! "
" 아 미안 미안, 그래도 나 대박인거 들고왔잖아! "
" 뭔데! 대박 아니기만 해. "
근데 왜 이렇게 룸 안 분위기가 무겁냐, 무슨 일 있었어? 약속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들어온 희린이 뒤늦게 내게 눈치를 보며 말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희린이를 반겼다. 전희린, 오늘 힘 좀 줬나 봐. 귀걸이가 아주 그냥 반짝반짝하네. 희린이가 내 말에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힘 좀 주느라 늦었지-
" 에휴-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맨날 늦어요, 맨날. 아니 그래서, 들고 온 대박이라는 건 뭔데? "
" 궁금하지? 짜자잔- 이게 뭐게! "
희린이가 웃으며 가방 안에서 꺼내든 건 다름 아닌 초대장으로 보이는 물건 네 장이었다. 희린이가 물건을 꺼내듦과 동시에 우리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파헤치기 위해 뚫어져라 쳐다보기 바빴다. 어, 이거 연말 무용발표회 티켓 아닌가. 진서가 말했다.
" 딩동댕- 맞아! 이거 지우 오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줬어! "
" 이씨, 난 또 뭐라고··· "
수민이가 볼을 한껏 부풀리며 실망감을 표했다. 야! 이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 건데··! 나도 이거 사정사정해서 얻은 거거든! 희린이가 그런 수민이를 눈을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진서는 나를 툭 건들이며 말했다.
" 갈거지? "
" 회사 스케줄 봐서 비면 가야지. "
" 웬만해서 시간 비워봐. 너 요즘 예술재단쪽에 관심 있다며, 여기 주로 소속 없는 사람들이 공연하는거라 괜찮은 인재들 스카우트하기에도 좋을거야. "
이 연말 공연 표 구하기 힘든 것도, 예술계열쪽 회사사람들이 이 공연에서 혈안을 띄며 괜찮은 사람들 스카우트 해가려고 그렇게나 애를 쓴다더라. 그래서 회사사람들로 만석이래. 진서가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 그래. 한번 시간 비워볼게.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도 나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잔 안에 남은 술을 비워냈다.
밖에선 여전히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소리가 쿵쿵-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
오늘은 꿈을 꾸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내 숨통을 조여오던 그 꿈. 괴로운 그 꿈에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됐었고, 그렇게 숨죽여 울다 끝내 수면제를 삼켜내지 않아도 됐었다.
" ····· 이상해, 진짜··· 이상해. "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었다. 전처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듯한 통증도 없는데다가, 머리가 갑작스럽게 핑 도는 일도 없었다. 독한 술을 먹거나 수면제를 먹고 세상모르게 잠들어도 이런 개운함을 느끼지는 못했었는데··· 나는 양치를 하며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듯 헤헤- 웃었다. 개운함과 동시에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
요즘 근래 들어 오지 않았던 눈들이 한 번에 몰아 내리기라도 하는지 창밖에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길가는 하얗게 물들여져가고 있었다.
" 아··· 뭐 입지 "
나는 드레스룸에서 겨울용 니트 두벌을 집어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네이비 색···? 버건디 색···? 그러다 한참동안을 고민하는 나의 눈에 띄는 옷 한 벌. 다름 아닌 며칠 전 수민이 선물해준 겨울용 원피스였다. 나는 원피스를 집어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이내 결심하고는 파자마를 한 장 한 장 벗어냈다.
조금··· 안 어울리나.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은 어색했다. 평소 겉모습, 드러나는 외적 이미지, 용모가 중요한 자리에 위치한 나였기에 항상 단정한 옷차림만 고집해왔었는데··· 수민이 취향의 이런 옷은 평소 나의 옷차림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내가 입을 옷이라며 그나마 단조로운 색상의 옷을 사기는 했다지만은··· 디자인이 꽤나 과감했다. 그래도 내 생각이 나서 샀다며 직접 옷을 선물한 수민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끝내 혹시 몰라 꺼내놓았던 니트를 다시 옷장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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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꺄-! 박여주 미쳤어, 미쳤어. 오늘 진짜 이쁘다. 머리도 했네? 게다가 내가 사준 옷까지 입어주고! "
" 이야- 박여주. 너 되게 오늘 낯설다? "
" 한수민 네가 사준거야? 잘 어울리네 박여주. "
수민이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입는 원피스가 아직은 내게 많이 낯설었다. 야 진짜 잘 어울려. 완전 너를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니까? 지나가던 사람들 다 너한테 반하겠다! 내가 원피스 밑단을 끌어내리며 어색해하자, 금세 내 곁으로 다가온 수민이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가지각색의 칭찬과 함께 나를 공연장 안으로 이끌었다.
" 이번에 공연하는 사람들은 다 소속이 없다더라. 그저 무용을 즐기는 사람들뿐이래. 완전 대박이지! "
" 오늘 스카우트하러 온 사람들이 아주 그냥 판을 잔뜩 치겠네. "
" 그렇지 뭐, 게다가 이번엔 실력 뛰어난 수재들이 한가득이라던데 "
" 야 박여주, 너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말해. 내가 지우오빠한테 금방 찔러놓을게 "
희린의 말에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공연장 전체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줄어들고 정적만이 공연장 안을 채우고 나면, 핀 조명이 켜지고,
" 헐, 시작하나 보다. "
수민이의 호들갑, 여러 사람들의 탄식과 함께 한 남자가 무대 중앙에 위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