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주세요
W.황월영
" 와···· 진짜 멋졌다. "
" 그치? 진짜 다들 실력으로 입소문 자자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번 공연, 볼만하더라 "
" 아니, 실력말고 얼굴 못 봤냐 얼굴. 무슨 공연자들을 얼굴 보고 뽑았는지 다들 대단하던데? "
" 아 그것도 그래. 나 그 엔딩때 센터였던, 그 발레리노. 그 사람한테 눈을 못 떼겠더라. "
" 다들 비율도 대박이고, 실력도 대박이고 얼굴은 제일 대박이고··· 안 그래 박여주? "
" ········ "
" 야 박여주! 정신차려! "
" ··어? 나 불렀어? "
" 그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사람이 불렀는데도 못 듣냐! "
혹시, 뭐. 마음에 드는 인재라도 있었어? 있으면 당장 말해. 나 지우오빠한테 바로 콜때릴수 있으니까. 희린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꽤나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여운이 오랫동안 남네. 내 말에 희린이는 김빠진다는 듯이 치- 하고 혀를 차더니 내 팔뚝을 꼬집었다.
" 야! 너 예술재단 차릴 생각이라며! 이럴 때 주의 깊게 잘 보고 확확 채갔어야지. 이미 실력 있는 사람들 다 떠나고도 남았겠다! "
" 그래 박여주. 유심히 잘 보지 그랬어. 아까 다 캐스팅 제의하려는지 사람들 눈에 열기가 득실득실하던데. "
그래, 이건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난 공연에 잘 집중하지 못했다. 아니, 집중할 수 없었다. 사실··· 공연의 막을 연 현대무용수, 이름 모를 그 사람이 내 뇌리에 박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지금 역시도·· 내 머릿속에 박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바닷속을 연상케 하는 파란 조명 안에서, 인어처럼 부드럽게 헤엄치듯 무대를 누비던 그 남자가. 그 누구보다 차가운 눈빛을 가졌으며, 그 누구보다 뜨거운 눈빛을 가졌던 그 남자가··· 공연 시작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 미친듯이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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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야 애들아. 지우 오빠가 공연자들 대기실 들렀다 가라는데. 가볼까?
모두가 희린이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얼마 안 가 금세 우리를 데리러 온 지우선배가 보였다.
" 오빠!! 오랜만이네. "
" 이야- 이게 다 얼마만이야. 다들 잘 지냈어? "
" 그럼. 선배는 잘 지냈고? "
" 그렇지 뭐, 참. 오늘 공연 어땠어, 괜찮았나? "
우리 기업에서 처음으로 주최하는 자리라 많이 긴장했거든. 근데 공연하시는 무용수분들이 다들 잘 해주시긴 했는데. 관람평이 중요하잖아. 어땠어? 모두들 지우 오빠의 말에 좋은 관람평을 남겼다. 이번 공연 캐스팅, 최고던데? 무용공연 솔직히 지루해서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이번엔 눈 한번 깜빡이는 시간이 아깝더라. 수민이의 방정맞은 관람평에 지우선배가 하하-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이번 공연 주최 담당, 나였거든. 아버지가 그렇게 뭐 좀 해보라고, 해보라고 압박을 주는 바람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너희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안심도 되고. "
서로 쉴 틈 없이 수다를 떨며 이동했을까. 어느새 복도 끝의 공연자 대기실에 다다랐다.
" 혹시 꽤 괜찮게 본 공연자들 있으면 나한테 귀띔해줘. 도와줄테니까 "
뭐 무용수 애인도 괜찮고, 회사의 인재로도 좋잖아? 지우선배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이에 희린이는 웃으며 옆의 수민이를 툭툭 쳤다. 그 엔딩공연 센터- 한번 말해봐! 희린이의 말에 수민이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 그래 맞아 오빠! 그 엔딩때 센터였던 발레리노··· 그 애쉬그레이머리색 남자 있잖아. 그 사람 내 마음에 쏙 들더라! "
그래, 일단 들어가서 말하자. 아 잠깐! 들어서기 전 진서가 물었다. 근데, 이거 무용수분들이 조금 꺼려하시지 않을까? 진서의 말에 지우선배가 걱정 말라며 말했다. 이 공연 나온 사람들 다들 스카우트 위해서, 예술 쪽 사람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그러니까 걱정 마. 선배가 문을 열고 수민이와 희린이. 진서가 대기실로 들어갔다.
" 여주, 넌 안 들어갈거야? "
" 아···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요 "
" 그래. 화장실은 오른쪽 복도 좀 걷다보면 있어 "
네. 금방 갈게요. 문이 닫히고 복도에 기대 심호흡을 반복했다. 나는 소심했고, 부끄러움이 많았기에 또 지우오빠에게 말을 쉽게 건넬수 없었다.
" 저 선배, 그··· 오프닝 공연하셨던 현대무용수분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일분일초가 급했다. 나는 빨리 내 마음을 전한 후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연말이라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이 기간에 오랜시간동안 회사를 비워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재빨리 마음을 전하고 거절당하면 곧바로 회사로, 상대가 수락한다면 회사로 함께 가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할아버지의 따가운 눈초리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 오프닝 공연하셨던 현대 무용수··· 오프닝 공연하셨던 현대무용ㅅ, 아 깜짝이야! "
놀란 내 몸이 주체 없이 뒤로 무너졌다. 멋 좀 부린다고 하이힐을 신었던 게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잘 신지도 않던 구두를··· 괜히 신었다고 후회하며 금세 딱딱한 복도 바닥 위로 추락할거라 믿고 눈을 꾹 감았건만, 별다른 고통이나, 딱딱함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상함을 느꼈던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 헉··· ! "
아,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가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싼 채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코 닿을 거리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 조심하세요 "
말을 끝으로 피곤하다는 표정과 함께 휙 돌아선 남자였다. 내가 몸을 돌리자마자 서 있던 남자에게 내가 자발적으로 놀랐던거였기에 따로 사과인사나 감사인사따위는 필요 없었다. 근데 저 남자···· 내가 그렇게 입안에서 곱씹고 곱씹은 오프닝 무대 그 현대 무용수잖아. 남자는 내게 휑한 뒷모습만 보인 채로 건물 밖으로 급히 나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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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 있었어? "
" 아··· 아뇨. 그냥 저 혼자 넘어져서. 아 맞다, 선배 "
그 오프닝공연 때·· 맨 처음에 나오신 현대무용수 분 말야, 그분이랑 연락 좀 할 수 있을까? 내 말에 선배가 놀란 듯 입을 뗐다. 이야- 이게 웬일이야 천하의 철벽 공주 박여주 눈에 들어오는 무용수가 다 있어? 선배는 진심으로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며 말했다. 나는 괜히 손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 가만보자- 오프닝 때·· 현대무용수면, 아 민현이 형? "
" 이름이··· 민현이야? "
" 응 황민현, 그 형은 나랑 개인적으로도 친하지. 근데 어쩌지··· "
그 형 애인 있는데··· 지우선배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아니! 그런 쪽으로 뵙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요즘 예술재단 쪽에 관심이 있어서, 재단 차리고 무용단 창단하게 되면 그분 스카우트 해가고싶어서··· 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음··· 지우오빠가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 그 형·· 아마 곧 무용 그만둘걸. "
" ······어? "
민현이형, 꽤 어린 나이 때부터 무용 시작했거든. 한때는 제일 잘나가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실력 뛰어난 어린 무용수이기도 했고. 근데 몇 년 전 어떤 나쁜 소문에 휘말리게 되면서 이미지도 저 끝으로 추락하고 오랫동안 함께해온, 잔뜩 믿었던 무용단에서도 쫓겨난 지 오래야. 안타깝게도 그 후로 무용을 좀 멀리하더라고··· 마치 트라우마가 된 것처럼. 그나마 지금 애인 덕분에 무용도 다시 시작하고 트라우마도 좀 떨쳐내 가는 것 같기도 했는데·· 한번 떨어진 이미지 알다시피 다시 회복 어렵기도 한 거 알지? 그리고 또 여전히 좋은 시선보다는 나쁜 시선이 더 많은 상태이기도 하고··· 아마 이번 공연이 민현이 형의 마지막 공연이 될 수도 있을 거야.
" ··········"
" 그 형도 안타깝지, 한때는 무용계의 꽃으로 불렸었는데··· 어두워진 모습 보면 나까지 다 마음 아프더라 "
나도 마음 같아선 우리 재단 사람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은데·· 위쪽사람들이 여간 반대해야 말이지. 선배의 말이 끝나고 나는 선배에게 급하게 인사를 건넨 뒤 차가 주차되어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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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렇게 무대 위에서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 그런 저 끝 어둠 속에 갇혀있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나도 모르게 알아버린 그 사람의 과거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사람과 나는 초면이고,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일 뿐인데···· 그런 사람의 과거에 마음이 아파오는게 문득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래 정신 차리자, 박여주. 넌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저 오늘 처음 보는 무용수일 뿐이야. 그렇게 마음 쓸 필요 없어··· 그렇게 나는 나 박여주, 자기 자신을 다그친 뒤 차에서 무거운 마음을 훌훌 떨쳐내고 차에 시동을 걸려던 참이었다.
건물 뒤편 한쪽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듯한 그 남자, 황민현을 보고 나는 차마 엑셀을 밟을 수 없었다. 여전히 펑펑 내리고 있는 눈 사이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추위에 떨고 있는 남자가 꽤나 안쓰러웠다. 대체 누구를 기다리는지···· 마음이 잔뜩 쓰였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다.
" ········아 진짜. "
분명히 외면하고 출발하려 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추위에 귀가 아려오는 듯 잔뜩 벌게진 귀를 부여잡은 남자가, 손도 시리다는 듯이 몇 번 비비다가 입김을 호호- 불어넣는 남자가 자꾸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해서, 자꾸 내 발을 굳게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한숨을 한번 크게 푹- 쉬어내고 차 뒤편에 비치된 담요와 핫팩을 꺼내 들었다. 아마도 매번 차를 관리해주시는 기사아저씨가 추위에 약한 나를 위해 비치해놓으신 듯 했다.
" 저··· 황민현씨? "
" ······ 무슨일로 "
남자는 나의 등장에 꽤나 놀란것인지, 아니면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며 말했다.
" 공연 관객인데, 지나가다 너무 추워하시는 것 같길래··· "
이거 쓰세요. 남자에게 담요와 핫팩을 건넸다. 남자는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마워요. 라는 감사 인사와 함께 물건을 건네받았다. 나는 주춤거리다 이내 남자의 옆에 조심스럽게 섰다.
" 공연··· 인상 깊게 잘 봤어요 "
솔직히 무용 좋아하기만 하지 잘 알지는 못하는데,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절로 느끼게 해주는 춤사위였어요. 또 눈을 떼지 못하게 멋졌고요·· 이번 공연에 선 여러 무용수들 중에 그쪽이 가장 멋있었어요, 진심으로.
아 미쳤어··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그대로 꺼내 보였다. 남자는 내 말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한번 무미건조한 말투로 고마워요- 라는 감사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 누구··· 기다리세요? "
" 아····· 동생, 기다립니다. "
" 동생분은 공연·· 못 보러오셨나 봐요 "
아뇨, 아마 일부러 안 보러온 걸 겁니다···. 남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 남자의 마지막 공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배로 신경쓰이는 말이었다···· 여전히 쓴 미소를 지은채 끝없이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는 남자가 어딘가 아파 보였다. 감정이 굳은듯한 이 남자에게 자꾸 관심이 갔고, 눈에 생기 없이 어딘가 텅 빈 채로, 공허함을 가진 이 남자를 도와주고 싶었다.
명함을 건넬까···? 캐스팅 제의를 해볼까···? 하지만 남자가 기분 나빠한다면? 남자가 싫어한다면···?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몇 번의 고민을 하다가 이 순간을 놓치면 남자와의 연은 영영 끊길 걸 느꼈기에, 지갑 속 명함을 꺼내 들었다.
" 저기·· 이거 제 명함이에요. 혹시 무용단 입단에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
" ····· 아 저는, "
남자가 아무런 표정 없이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던 그때, 남자의 앞으로 어려 보이는,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남자, 즉 황민현씨의 앞에서 팔짱을 껴왔다.
" 형! 내가 많이 늦었지.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
" 괜찮아, 별로 안 기다렸어. "
" 공연은 잘 끝냈지? 이제 우리 외식하러 가야지! "
남자는 윤재라는 남자가 옆에 서자 금세 환히 웃어보였다. 근데··· 이분은 누구셔? 남자의 옆에선 윤재라는 사람이 내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아···· 민현씨 동생 되시는 분이신가봐요, 저는 ㄴ, "
" 동생이요? 형 또 설마···! "
나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금세 표정을 잔뜩 구겨낸 윤재라는 사람은 남자를 잔뜩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
" 윤재야··! "
남자 역시도 꽤나 당황한 듯이 자리에서 금세 벗어났다. 아·· 아직 답도 못 들었는데 갑작스럽게 홀로 남겨진 나 역시도 당황스러움에 잔뜩 물들었지만 이내 허탈한 웃음을 한번 지으며 주차장에 여전히 시동이 걸린 채로 주차가 되어있는 차로 향했다.
남자는 어느새 저 멀리 가버린 윤재라는 남자를 붙잡으려는 듯이 차가운 눈길 속을 뚫고 점점 내 시야 안에서 사라져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