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이 일기장 01
w. 애쿼머린
2013. 3월 14일 날씨 좋음
날씨가 굉장히 화창한 날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창밖 날씨를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려 일어나자마자 창문으로 시선이 갔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파래 참 예뻤다. 창밖을 보다가 살짝 몸을 일으키는데, 어제 술자리 때문에 몸이 뻐근해 이불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 이불 속에 숨어있다가 마지못해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씻고 나오니 그래도 좀 움직일 만한 게 수업엔 지장이 없을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기며 밖이 추울까 따뜻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외투를 챙겨 집을 나와 학원으로 향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하지만 새파랗고 깨끗한 하늘이 예뻐 기분 좋게 학원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원장님께 힘차게 인사드렸는데, 원장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나를 반기듯 웃으며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하셨다. 원장님도 오늘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으신가? 하고 생각하며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장실로 들어가니 원장님 혼자 계신 게 아니었는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가 내가 들어오자 말소리가 뚝 멎었다. 원장님과 마주 보고 앉아있던 분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쭈뼛쭈뼛 문앞에 서 있으니 원장님이 들어와 앉으라고 하셔서 원장님 맞은편 의자에 앉기 전에 그분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무슨 부탁이 있는 듯한 얼굴을 하던 원장님이 입을 떼셨다.
"아, 일단 두 분 인사부터 하시죠. 이분은 앞으로 민석씨 하고 같이 수업하게 될 선생님이십니다."
"예?"
놀라서 원장님을 쳐다보곤 고갤 돌려 쳐다보니 쌍꺼풀이 진 예쁜 눈이 휘며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루한 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김민석입니다…."
무슨 설명 좀 해주세요. 원장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원장님은 곤란하실 때 짓는 그 특유의 할아버지 웃음을 지으셨다.
"미안하게 됐어요. 민석씨, 루한씨는 새로 오신 선생님이신데 한국어가 아직 서투르셔서 혼자 수업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아서 동갑이기도 하고 민석씨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
"아¨. 네, 저는 괜찮아요."
내가 긍정의 답을 하자 원장님은 활짝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그리곤 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울려 루한 선생님과 자리에서 일어나 내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까지 따라오는 건가 싶어 루한 선생님을 힐끗 쳐다보니 그게 아니라 내 옆 책상이 루한 선생님 책상이었다. 원장님이 아예 나에게 부탁할 작정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제 마신 술이 다시 머리에서 도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도 중국어를 현지인처럼은 유창하지도 않은 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지? 루한씨가 하는 말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아¨. 오늘부터 나도 중국어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고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교재를 챙겨 들면서 루한 선생님께 수업 들어가자며 말을 건네다 못 알아들었으면 어쩌나 싶어 아차 해서 쳐다보니 다행히 알아들으신 것인지 나를 보며 웃었다. 아무래도 학원생이 조만간 늘겠다는 생각을 하며 강의실로 들어섰다. 강의실 맨 끝자리엔 루한 선생님께서 앉으셨다. 괜히 평가받는 것 같아 잔뜩 긴장돼서 불편하게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역시 예상대로 잘 될 리가 없었다. 여학생은 아예 루한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하나라도 서로 더 물어보려 들었다. 수업이 진행이 힘들어 잠시 고민하다가 루한 선생님께 질문할 때는 중국어로 해야 답을 들을 수 있다고 하니 아이들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가 이 내 중국어로 묻는 아이들이 귀여워서 웃어버렸다. 오늘 몸이 별로이기도 하고 수업도 진행이 잘 안 돼서 루한 선생님께 떠넘긴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외국어는 회화도 중요한 거니까 라는 핑계로 넘겨버리며 아이들이 질문하다가 막히는 단어들이나 못 알아들었던 단어들을 답해주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수업이 될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루한 선생님은 갑자기 당황스러우셨을 텐데도 일일이 차근차근 아이들에게 답을 해주셨다. 가끔 짓궂은 아이들에 질문에는 웃으며 넘어가기도 했다. 아이들의 적극적인 반응에 조금 심통이 나 아이들의 답에 툴툴거리듯 답 해주었는데 그 순간 루한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민망함에 굳어있는데 타이밍 좋게 수업의 끝을 알려주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곤 교재를 챙겨 강의실 밖으로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뒤를 힐끗 쳐다보는데 루한 선생님께서 안 보이신다. 나 혼자 뭐하는 짓이지…. 싶어 한참을 루한 선생님께서 오시길 기다리는데 오시지 않는다. 화장실 가신 건가 싶어 정신도 차릴 겸 자판기가 있는 학원 1층으로 가 음료수를 뽑아 마시다가 루한 선생님 것도 뽑아 가려 어느 것을 좋아하실까 음료수들을 훑어보며 고민하는데 복도 모퉁이에서 조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목소리였더라…. 혼자 얘기하는 것을 보아하니 전화인 것 같았다. 괜히 남의 전화를 훔쳐 듣는 것 같아 발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여기 학원 원장 말이야,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원장님의 욕을 들어버렸다. 아니 그렇게 착하신 분인데 왜 욕을?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원장님 욕을 하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아아, 그건 집에 가서 얘기해줄게. 근데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또 집에 김종대 온 거 아니지?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내가 그 새끼 집에 들이지 말라 했지."
그것 외에도 웃으면서 장난치듯 장난스레 욕을 하고, 어렴풋이 들려오는 경상도 사투리에 당황스러워 몸이 굳어버렸다. 아니, 요즘 학생은 도대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저렇게 욕하면 쓰나. 마주치면 혼을 내야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척, 방금 온 척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전화를 끊은 건지 조용해지고 모퉁이에서 보인 사람은
루한 선생님이셨다.
너무 놀라서 몸이 굳어 버렸다. 그러니까 방금 전화통화를 한 사람이…. 루한 선생님? '한국말'이 어눌하신 루한 선생님? 내가 돌처럼 굳어있자 루한 선생님께서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방긋 웃어 보였다. 웃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더 소름이 쫙 돋았다. 원장님 사람 보시는 눈이 언제부터 이렇게 안 좋아지신 거지? 아니, 이건 안 좋아지신 정도가 아니라 없어지신 걸지도 모르겠다. 루한 선생님께서 나에게 어눌한 말투로 수업에 들어가자며 말을 걸었다. 너무 황당해서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루한 선생님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앞질러 가셨다. 나는 그 뻔뻔한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원장님도 저 순진한 웃음으로 속였겠지? 한참을 노려보다가 뒤돌아보시는 루한 선생님에 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로부터 쭉 수업시간마다 같이 수업을 들어갔고, 역시 어느 반이나 다 똑같았다. 관심은 오로지 루한 선생님께로 쏠렸다. 요즘 얘들은 정말이지 잘생기면 장땡인가보다. 사람이 말이야 속을 봐야지…. 루한 선생님께 몰려 서로 질문하려 드는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푹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한 선생님은 참 친절하셨다. 얘들이 못 알아들을까 봐 일부러 말도 천천히 해주시고, 오늘 여태 수업을 루한 선생님과 대화하는 쪽으로 끝냈는데도 루한 선생님은 나에게 힘든 티 하나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에게 얘들이 귀엽다고 했다. 나는 그런 루한 선생이 가식적이라고 느꼈다. 끝까지 웃는 모습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분명 내 욕도 나중엔 저렇게 하시겠지? 계속 신경이 쓰여 자꾸 루한 선생님을 노려보는 꼴이 되었다. 아까는 내가 째려보는 것을 본 학생이 나에게 뭐라고 했더라…. 아마, 나와 루한 선생님을 번갈아 보더니 픽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선생님, 힘내요.' 라고 했던가…. 계속 생각을 해봐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원장님께 슬쩍 말씀드리자는 결심을 하곤 수업을 마치고 느긋하게 교재를 챙겨 느릿느릿 강의실을 나왔다. 내 책상까지 가 교재 정리를 하는 척 루한 선생님께서 가시길 기다렸다. 루한 선생님께서는 얼마 안 가 가져오신 소지품들을 챙겨 들으시고는 먼저 가겠다며 눈웃음을 지으며 예쁘게 인사를 하시곤 학원을 나가셨다. 루한 선생님께서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고 난 후에 잽싸게 원장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순간 생각이 탁 스쳐 갔다.
"원장님…!"
원장님이 조금 놀라신 듯 나를 쳐다보셨다.
"예? …아, 민석씨 아직 안 가셨네요. 무슨 일 있어요?"
말을 하려던 입이 굳었다. 이걸 말하면 원장님이 믿으실까? 지금 루한 선생님 이미지는 잘생기고, 얼핏 본 학력은 입이 벌어질 만큼 좋았고. 게다가 얘들이 수업이 끝나고 친절하다며 활짝 핀 얼굴로 학원을 나간데다, 오늘 첫날이었다. 나는 지금 아무런 증거도 없다. 루한 선생님께서 전화로 원장님 욕을 그것도 한국어로 유창하게 했다고 하면 과연 믿으실까? 지금 말씀드렸다간 나만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저, 그게…."
원장님이 내 대답을 기다리시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아아-, 머리야 굴러가라! 제발.
"아! 그, 저…! 원, 원장님."
"네, 말씀하세요."
"수, 수정 테이프 있으신가요? 아니, 제가 수정 테이프를 다 써버려서요. 하하…."
정말 머리를 굴려 말한 게 고작 이런 핑계라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원장님은 나를 보시며 허허하고 크게 웃으시더니 수정 테이프를 내미셨다.
"여기요, 이거 민석씨 드릴게요. 전 몇 개 더 있어서."
"아…. 감사합니다."
창피함에 눈을 자꾸 내리깔며 수정 테이프를 받아들었다. 원장님께서 계속 웃으시는 바람에 얼굴을 도무지 들 수가 없었다.
"민석씨, 귀여우시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하시던 거 마무리 잘하시고 조심히 돌아가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꾸벅하자마자 원장실에서 쫓기듯 나왔다, 내 빨간 손엔 수정 테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수정 테이프를 노려보다가 꽉 움켜쥐었다.
앞으로 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 가식적인 선생님.
이게 첫글이라니.. |
글을 쓰다보면 늘..거라고 믿어요. ^^ 아 글잡에 구독료 기능이 생겼네요.. 전 걸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 혼자 만족할 수있는 글을 쓰는게 목적이기 때문에 혹은 자급자족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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