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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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보통 연인처럼
"어, 맞는 것 같아요. 결혼 선은요?"
"결혼? 무슨 벌써부터 결혼입니까."
"궁금하잖아요."
"도경수랑 결혼 할 운명이네요, 됐죠. 끝."
카페 알바가 끝나고, 평소 같았으면 얼른 튀어나가서 지금 쯤 벌써 집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인 지금 나는 도경수와 아직까지 카페에 남아있다.
회사 퇴근시각, 6시가 되자마자 우리 카페로 내려온 도경수는 내 퇴근 시간까지 가만히 앉아서 내 얼굴만 빵긋빵긋 쳐다보더니 9시가 땡 되자마자 "끝" 끝을 알렸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운 그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자연스럽게 도경수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앉으면 평소같지만 마냥 평소같지만은 않은 대화를 이었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딴 길로 새, 지금은 서로 손금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확하게 알고있는건지는 몰라도 금세 맛들려 이것저것 캐묻던 내가 뒤늦게 아차하며 결혼운을 묻자 도경수는 얼굴을 못생기게 찌푸렸다.
궁금하다고 손을 한번더 내밀면 보지도 않고, 도경수랑 결혼 할 운명이네요, 하곤, 끝, 하며 내 손을 본인 손으로 덮어버렸다. 손도 무지하게 커서는 내 손은 보이지도 않네.
"밥은."
"먹었죠. 지금 시간이 몇신데."
"난 안먹었는데."
"헐, 왜요? 배 안고파요? 뭐라도 해드려요?"
자연스럽게 밥을 먹었냐는 질문으로 화제를 넘긴 도경수에게 먹었다고 답했다. 아주 잘먹었지, 언니랑 둘이 햇반 4개를 해치웠어, 아직까지 배가 부른 기분인걸?
10시를 훨씬 넘었는데 안먹었겠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안먹었다는 대꾸에 놀라 고개를 주욱 뺐다. 10시까지 굶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찔한 그를 신경쓸 겨를도 없이 얼른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일을 하는 사람이 말이야, 어? 굶고 다니고 말이야. 그러면 써? 어?
"뭐합니까. 나 괜찮아요."
"앉아있어요. 대충이라도 차려줄게요."
"......"
"햄 좋아해요? 깻잎은? 멸치는? 다 먹죠? 그 나이먹고 편식하면 너무한다."
스팸도 얼른 굽고, 계란후라이도 2개 하고, 냉장고에서는 여러 밑반찬들을 바리바리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지이잉- 햇반 돌리는 전자레인지 소리가 가득했다.
밥 안먹었다는 한 마디로 차려지는 밥 한상에 당황한 도경수가 괜찮다고 내 뒤를 졸졸 쫓았지만 별 신경쓸게 못됐다. 가만히 앉아있어.
김종인이 술을 미친듯이 퍼마신 다음 날이면 발휘하던 솜씨를 이 곳에서 발휘할 줄이야. 국이 없는게 걸리지만 나름 있을만한건 다 있을법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뿌듯해.
"안먹고 뭐해요?"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네."
"......"
"어렸을 때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가 차려준 밥 제외하고 여자가 차려주는 밥 처음이에요."
".....죄다 인스턴트 뿐인데..."
"차려준건 ΟΟΟ씨 잖아요. 너무 귀한 밥상 아닙니까."
"....비행기 그만 태우고 얼른 먹기나 해요."
마지막으로 물까지 가져다주고 자리에 앉았는데 도경수는 상을 훑기만 하고,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아, 이 사람 갑부라는걸 깜빡했네. 먹을만한 반찬이 없나?
불안한 마음으로 왜 안먹냐고 물었다. 스팸 구우면서 들고있던 젓가락으로 멸치 몇마리를 씹어먹으며 도경수를 쳐다보니 대뜸 사진이라도 찍고 싶다며 활짝 웃는다.
나,나닛...? 여자가 차려주는 밥은 처음이라며 나를 다정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에 또 가슴이 두근거려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인스턴트 뿐이야.
고개를 도리도리-. 밥 한숟갈을 크게떠서 냠냠 맛있게도 씹는 도경수는 귀한 밥상이니 뭐니, 인스턴트 밥상 차린 사람 쪽팔릴 정도로 비행기를 태웠다.
닥치고 먹으라는 듯이 도경수의 햇반을 젓가락으로 두어번 두드려서야 아무말 없이 밥을 먹기 시작하더라. 정말 안먹는 반찬 하나 없이 이것저것.
나보다 밥 맛있게 먹는 사람 처음 봐. 도경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안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알 것기도 했다. 뿌듯해서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져, 어떡해.
물도 먹으라고 물 잔에 물도 따라주고, 진짜 무슨 엄마 마냥 옆에서 여러가지를 챙겨주다 문득 진작 물었어야 했을 질문이 떠올랐다.
여자가 차려준 밥상이 처음이야? 여자 많이 만나봤을 것 같은 사람이? 괜히 한번 든 생각이
[도경수 여자친구 있더라?]
은지의 문자로 시작해서 도경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세상에, 그러고보니.
".....도경수씨."
"네"
"....."
일단 불러놓고 뭐라고 질문해야 이상하지 않을까 많이 고민했다. 어찌보면 어색해도 우린 연인인데, 연인에게 여자친구가 있냐고 묻는다는게 상식적으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말하라는 듯 날 쳐다보고있던 도경수와 눈이 맞고, 입에 있던 소량의 물이 꿀덕- 넘어가고.
금세 나만 우울해진 분위기에 눌렸다.
"여자친구는요?"
"....큽, 네?"
"......"
"....무슨 소립니까?"
"....,."
"본인이 제 여자친구 아닙니까."
".....아니, 말고..."
"말고, 없는데요."
"......"
"제가 무슨 여자를 둘씩이나 끼고 다니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물 마신다고 잠깐 도경수와 눈이 떨어진 순간 얼른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는요?! 당찬 내 목소리에 당황한 도경수가 먹던 물을 간신히 넘기며 날 쳐다봤다.
김은지가 나한테 문자를 보낸 시기에 맞게 카페에서 간간히 들리던 도경수 애인 얘기, 어떻게 그냥 넘어가? 너도 나도 어이없지만 확인할건 해야지.
생각해보니 여자친구가 있었던 것 같다는 내 말을, 본인이 제 여자친구 아닙니까, 단호하게 끊어낸 도경수 말에 괜히 또 부끄러워 목소리 볼륨을 줄였다. 저 말구요...
말고, 없는데요. 웃음기 하나 없이 부정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의심에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도경수는 물컵에 남아있던 물을 한번에 비워냈다.
"저번에 우리 카페에도 같이..."
"같이 뭐요, 일 얘기한거요?"
"네?"
"소문으로 들었다면 헛소문이고, 직접 봤다면 내 비서겠네."
"......"
"못믿겠죠."
".....예? 아,아뇨 믿는...."
"내가 그 여자랑 이렇게 손 잡는거 봤습니까."
"......"
"내가 그 여자랑 이렇게 뭐, 하는 거 봤습니까."
"......"
"봤어요?"
"....아,아뇨."
굴하지 않고 카페에 같이 왔던 여자 얘기를 꺼내려는데 그 질문이 내 입 밖으로 다 나오기도 전에 도경수는 내 말을 가로채며 눈썹을 찌푸리곤 젓가락을 내려놨다.
들었다면 헛소문이고 봤다면 내 비서곘네, 난 도경수의 구차해보이지 않는 설명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구나. 헛소문이구나. 비서구나.
구태여 알겠다는 대답 없이도 알겠다는 내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친두고 날 꼬실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란건 진작 알고있어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했을테니.
근데 갑자기 또 엉덩이를 들고 내 쪽으로 얼굴을 내뺀 도경수는, 안믿죠, 내가 본인 말을 못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뇨, 믿어요. 믿어 의심치않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믿는다고 대답하려는데 도경수는
내가 그 여자랑 이렇게 손 잡는거 봤습니까, 하며 내 손을 덥썩- 잡고,
내가 그 여자랑 이렇게 뭐 하는거 봤습니까, 하며 내 이마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리곤 멍해진 내 얼굴에 본인 얼굴을 가까이 하며, 봤어요? 했다. 도리도리. 아뇨. 못봤어요. 입가의 라떼 닦아주는거 말곤 못봤어요.
금세 또 빨개졌을 얼굴을 찬 손으로 식히며 순한 강아지 처럼 도리도리 고개만 저었다.
도경수 사장님
"밥 잘 먹었습니다."
"제대로 된 반찬도 없었거든요? 진짜 민망하니까 그만 좀 해요."
"뭐가요, 난 맛있었는데."
"더 잘 차려줄 수 있었단 말이에요..."
"나중에 또 해주면 되잖습니까."
"....."
"집에 재료 만큼은 넘쳐나니까 우리 집에서 밥 한번 해줘요."
".....알았어요, 그 땐 진짜 맛있게 해줄..."
"웬만하면 아침밥으로."
차에 올라타서도 밥 잘먹었다는 말을 그칠 줄 모르는 도경수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만 좀해, 진짜 별 맛있지도 않은 상으로 계속 그런 소리 듣기 민망해 죽겠네.
뭐가요 난 맛있었는데, 하며 내 손을 잡고 흔들흔들, 빵긋빵긋 웃는 도경수를 보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재료만 많았더라도, 시간이 좀 많았더라도!! 너무 갑자기였어! 까짓거 요리 더 맛있게 해줄 수 있었는데!! 한없이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고는 나중에 해달라는 도경수 말에 또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또? 또!! 또 해줄게!!
재료 만큼은 넘쳐나니까 우리 집에서 밥 한번 해줘요, 도경수 말 사이에 껴있는 우리 집이라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땐 진짜 맛있게 해주겠다고, 입술을 깨물고 새끼 손가락까지 들며 다음을 기약하려는데, 웬만하면 아침밥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도경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변태."
"네, 저 부릅니까."
"변태, 변태."
"그만 불러요, 정말 변태처럼 굴기 전에."
어느새 우리 아파트 입구가 보이고 내릴 때가 되면서 차의 속력도 점점 낮춰짐에 따라 가방을 챙기면서 벗었던 신발을 한 손으로 겨우 신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
입은 여전히 조잘조잘 떠들면서 도경수에게 잡힌 한 손만 자연스럽게 놓았다가, 그만 불러요 정말 변태처럼 굴기 전에, 라는 말과 함께 손이 다시 잡혀버렸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응? 하면서 도경수를 쳐다보니 씨익 웃으며, 조심히 들어가요, 하곤 손을 놓음과 동시에 차를 세웠다.
"도경수씨도 조심히 운전해서 들어가세요." 작게 중얼거리고 잠금이 진작 풀려있던 문을 열려는데 이번에는 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아, 정말 못가게 하려고 애를 쓰네, 써.
"보내기 싫은데요."
"......"
문 쪽으로 몸을 들었다가 잠긴 문에 몸을 틀어 뒤 쪽에 있는 도경수를 쳐다보면, 보내기 싫은데요,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날 쳐다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열어줘요" 협박 아닌 협박으로 쿵쿵거리면 도경수는 "내일 봐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느릿느릿 움직여 잠금을 풀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는데요, 뭘. 도경수씨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화해요."
"네."
"문자말고 전화."
"....알았어요."
"기다립니다, 저."
"알았다니까요."
"갑니다."
차에 내린 후 열린 조수석 쪽 창으로 나눈 대화는 꽤 길었다.
그리고 붕- 하며 출구 쪽으로 나가는 도경수의 차도 한동안 서서 지켜봤다.
헤어지기 싫고, 헤어짐이 아쉽고, 만남을 최대한 길게 끌고 싶어하는 보통 연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