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쓰다
세훈x준면
w.BM
새롭게 친구가 된 은경과 준면은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면은 처음에는 은경과 마주하는 것을 꽤 어색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귀는 사이였을 때보다 더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준면과 은경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은경은 요새 준면이 자주 넋을 놓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엄청난 고민거리를 떠안고 있는 사람마냥 축 처져서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사색에 잠긴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은경이 이야기를 할 때면 더욱 더 심해졌는데, 제 이야기를 들어주면서도 간혹 넋을 놓아버려 몇 번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냐며 확인 물음을 던지곤 했었다. 결국 은경은 오늘도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준면에게 확인 물음을 던졌다. 준면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은경을 볼 뿐이었다.
“고민 있지.”
“어? 그런 건 아니고……”
“흐음?”
“그냥… 내 친구 고민 듣고 나니까 나도 같이 고민이 되어서…?”
“그래?”
“어, 어어 응. 치, 친구 이야기인데… 그 친구한테 엄청 오래 된 친구가 있단 말이야. 근데 그 친구가 내 친구한테 고백을 한 거야. 걔는 완전 놀라서, 여태 친구였는데 갑자기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럼 사귀면 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내 친구는 걔를 친구로만 생각했지 한 번도 다르게 생각해본 적 없었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항상 곁에 있었고, 친구의 친구랑 내 친구는 진짜 엄청 오래 동안 친구 사이였으니까. 평생 친구일 거라고, 그 관계의 틀이 깨지지 않고 유지될 거라고 믿었지. 지금까지 둘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둘 사이는 절대 변하지 않았으 니까.”
“음… 그 친구가 네 친구한테 잘 해주거나 하진 않았어?”
“완전 잘 해줬지. 등하교도 항상 같이 하고, 아플 때면 약도 챙겨주고 간호도 해주고, 여행도 같이 다니고… 주변에서는 막 사귀는 사이 아니냐고도 했어. 근데 막상 내 친구의 친구는 애인도 사귀고 그랬었어. 내 친구는 고백 받은 적도 없고, 딱히 얘도 애인 사귀는 거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 친구는 그 친구가 애인 사귀었을 때 어떤 기분 이었대?”
“그게… 내 친구가 걔한테 애인이 있었을 때, 딱 한 번 걔랑 걔 애인이 키스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엄청 울었다는 거야…….”
“…….”
준면이 은경에게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제 친구의 이야기인 냥 포장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작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 때 당시에 세훈에게는 다른 학교 다니는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 날은 준면과 세훈은 각자 약속이 있어서 함께 주말을 보내지 않았던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였다. 사상 최고로 더운 날, 준면은 손 부채질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이 너무 너무 더워서 그날따라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 근처 놀이터에서 준면은 익숙한 형체를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훈이었다. 준면은 반가운 마음에 세훈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세훈의 앞에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준면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세차게 뛰며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괜히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민망해질 것 같아서 발길을 돌리려고 했으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세훈과 여자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 그것을 보던 준면은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도망치듯 그 앞을 지나쳤고, 집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가선 문을 꼭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더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이불 안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날 준면은 참 많이 울었었다.
“너도 세훈이 좋아하는 거네.”
“… 어?”
“그게 어떻게 친구 사이야. 넌 단지 친구라는 틀을 깨고 싶지 않을 뿐이잖아, 안 그래?”
“내, 내 이야기 아니고……”
“그 말을 누가 믿어, 딱 들어도 네 이야기인데.”
“…….”
“두 사람이라면 친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평생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진작 털어놓지, 이 누나가 연애 쪽엔 도사잖아.”
“그, 그러니까…….”
“나 그렇게 편협한 사람 아니야, 괜찮아. 그리고 내가 보기엔 두 사람, 이미 친구사이 아니었어. 더 시간 지체하지 말고 얼른 가서 친구 따위 개나 주자고 말 해.”
은경이 떠밀 듯이 준면의 등을 밀자, 준면은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준면이 망설이는 것 같자, 은경이 빨리 가라는 듯 준면의 등을 두 어 번 내리쳤다. 윽, 가, 갈게! 준면은 후다닥 도서관에서 나와, 세훈이 있을 것 같은 낡은 음악실로 향했다.
넌 단지 친구라는 틀을 깨고 싶지 않을 뿐이잖아.
준면은 음악실로 향하면서 은경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낡은 음악실 앞에 다다랐을 때, 세훈이 유일하게 연주할 줄 아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준면은 음악실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 멈추었다. 은경을 통해서 확인 받게 된 제 진심은, 생각보다 무겁지도 않았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거의 한달 가량 고민했던 제 자신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음악실 문 앞에서 준면은 괜스레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음악실로 들어섰다. 세훈은 준면이 들어온 것을 모르는지 반복해서 그 곡을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면은 부러 소리를 내지 않고 세훈의 뒤에 섰다. 건반 위로 약간 음영이 지자, 그제야 세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에 있는 준면을 본 세훈은 한참을 준면을 올려보다가,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천천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나 이제 그 노래 싫어해, 질려.”
“…….”
“다른 곡 배워와.”
“…… 무슨 곡?”
“그건 나중에. 우린 뭐, 계속 친구니까 언제든 알려줘도 상관없잖아.”
“… 그렇지.”
세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준면은 그 모습을 보며 비실비실 웃음이 세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앙다물며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지속되었다. 잠깐의 정적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준면이었다.
“세훈아.”
“어?”
“친구 …… 그만할까?”
“…… 뭐?”
“뭐,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기도 했었지만 말이야.”
“…….”
“그러니까, 난 여태 모든 친구 관계가 다 이런 줄로만 알고 있었어. 그래서 영원히 너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만 생각했었어. 친구라는 틀이 깨지면, 너와 내 사이도 깨지는 것만 같아서. 난 그게 싫었어.”
“…….”
“너와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고 나서야 깨달았어. 너는 생각보다 나를 많이 아껴주었고, 좋아해주었어 그리고 내 하루에 네가 참 많이 있었다는 걸. 좀 많이 늦었지만 말이야.”
“…….”
“그리고 사실 난 너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마다 이유 없이 우울했었고, 슬펐어. 너는 모르게 혼자 울었던 적도 있었어. 그땐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
“그러니까 세훈아, 우리 이제… 친구 같은 거 그만 하고, 연인 하자.”
조금은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말을 마친 준면이 조심스럽게 세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훈은 제게 내밀어진 준면의 손을 가만히 보다가, 그 손을 마주 잡고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곧장 준면을 끌어안았다. 준면은 갑작스럽게 세훈에게 안기는 꼴이 되어 놀라면서도 곧 씩 웃으며 세훈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쿵 쿵 쿵. 세훈의 심장이 빠른 템포로 뛰는 소리가 잔잔하게 준면의 귓가에 울렸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준면은 부러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제 가슴 한 구석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처음이니까, 어색해할지도 몰라. 실망하지 말고 천천히,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만 해줘.”
“응, 걱정 마. 난 항상 천천히 다가갔으니까.”
세훈의 말에 준면은 싱긋 웃으며 세훈의 허리에 두른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모처럼만에 세훈과 준면이 같이 등교를 했다. 대략 한 달 만에 두 사람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자 제일 놀라며 호들갑스러운 것은 여전히 종현과 민석의 몫이었다. 세훈은 둘째 치고 준면의 양 옆에 서서 둘이 드디어 화해한 거냐며 물어보는 종현과 민석으로 인해 준면은 시끄럽다는 듯 표정을 잔뜩 구겼다.
“화해는 무슨, 싸운 적도 없는데.”
“너희 냉전 상태였잖아!”
“우리가 언제?”
“와 김준면,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 하는 것 좀 봐.”
종현이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 씩씩거리자, 준면은 그런 종현에게 혀를 쏙 내밀어 메롱, 을 하고선 제 자리로 와서 앉았다. 종현은 그런 준면을 보며 괜히 화가 나는지 제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릴 뿐이었다. 준면은 그런 종현을 보며 푸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세훈을 보니, 세훈 역시 종현을 보다가 준면에게로 막 시선을 돌리던 참이었다. 눈이 마주치고 전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웃어보였다. 모든 게 전과 같이 돌아왔다. 관계를 정의하는 말은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BGM. Glee cast - Mine
커쓰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진짜 왜... 항상 10편을 넘기지 못 하는 것인지 ...ㅁ7ㅁ8 제가 그랬었죠, 은경이를 너무 미워하지만 말라고! 이유가 나왔습니다..! 은경이는 엄청 쿨하고 멋진 여자이기 때문이죠 ㅋㅋㅋ 은경이와 이름 같다는 독자님! 만족하시나요? 이런 멋진 성격의 은경이!ㅋㅋㅋ 미드 글리에서 이 노래가 나올 땐 좀 슬픈 장면이었지만, 가사는 사실 정말 정말 예쁘거든요. 전 이 노래를 듣고 가사를 찾아보자마자 딱 커쓰 결말 속 세준을 떠올렸답니다. 아 그리고 커쓰 후속작으로 쓸 글도 지금 2편 중반 가량 썼어요. 시대물인데 우리나라 배경은 아니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연재 시작 전에 알리겠지만 2007년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Blind>를 약간 각색한 글입니다. 아무튼 곧 완결이고 하니... 새로운 글 연재 전에 커쓰 암호닉 하신 분들을 위한 작은 이벤트도 열 계획이니! 기대해주세요! :D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