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어미의 뱃속에서 잉태 된 순간부터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살면서 저지른 죄악에 비례하여 고통받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안녕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도데체 무엇일까.
머저리들의 삶02
"아무래도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종인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말했다. 경수는 자연스레 다가가 옷장에서 알맞은 넥타이를 고른 후 와이셔츠 옷깃을 올려 정성스레 넥타이를 메주었다. 부드럽고 때타지 않은 하얀 와이셔츠를 경수는 응시하다, 서둘러 넥타이 모양을 정돈하고는 서류가방으로 보이는 것을 종인에게 넘겨주었다. 종인은 경수에게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 뒤로 경수가 뒤따라나와 그를 배웅했다.
"다녀오세요."
"굶지마. 중요한 짐은 당신이 좀 챙기고."
가끔 종인은 경수에게 '당신'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언제 들어도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에 경수는 가벼이 목례만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간 밤의 지나긴 정사로 몸 여러 곳이 욱씬거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였다. 그 때, 눈을 감았던 경수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일말의 탄식을 내뱉고는 이불을 걷어차듯이 내팽겨치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모든게 순식간의 벌어진 일들이었다.
"제 코트어딨어요?"
경수가 다급한 듯 가구를 닦고있던 중년의 여인에게 물었다. 중년의 여인이 골똘히 생각하다 대답을 하기 직전까지도 경수는 계속해서 되물음했다. 내 코트, 코트 어딨어요? 제 코드요. 어제 입고나간 코트.
"아, 세탁하려고 저기 바구니에 넣어두었는데요."
중년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수는 그 바구니가 있다는 곳에 달려갔다. 이미 더러운 세탁물들과 엉켜 쾌쾌한 냄새가 났지만 경수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옷들을 마주 헤집어 자신의 코트를 찾았고, 마침내 찾아내었을 때에는 가빠른 호흡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고는 뒤에서 염려하던 여인에게 종인이 주었던 용돈이 들어있다며 얼버무리고는 코트 째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
"그러니깐."
".."
"그러니깐, 내가 그 때 가지 말랬잖아."
"..."
경수가 이미 하얗게 질려버린 백현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백짓장처럼 하얗고 얼음물처럼 차갑기도 하지. 딱한 나의 백현아. 바야흐로 경수가 가득 이 땅덩이 안을 그득하게 메우는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경수는 아침에 종인이 챙겨주었던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고, 금세 젖은 손수건이 풀이 죽어 쳐저있었다.
"나는, 나는 잘 지낼거야."
".."
"네 말대로 나는 정말 잘 살거야."
".."
"우리 또 보자. 현아."
이미 얼이 나간 시신의 앞으로 경수가 말을 해 무얼하겠냐만은, 그것은 감히 정인을 잃어보지 않고서는 엄두내여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은 그저 백현의 귓가에 선명히, 아니 라디오 주파수가 잘못잡혀 시끄러운 잡음이 섞일지라도 자신의 음성이 닿길 간절히 염원하는 경수가 소리내어 말한다. 실은 소리내어 말하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이 안가지만 애절한 것은, 그 둘이 살아생전 아주 돈독하고 깊은 사이였던것은 틀림이 없었다.
"저..화장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네"
초점을 잃은 두 눈에는 지긋이 눈을 감은 백현이 비쳤다. 죽은 이가 눈 앞에 있어도 어쩐지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은 것 같은 경수였다. 마지막으로 경수는 백현의 손을 잡아도보고 머리칼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그 때 몇 명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더 다가와 백현을 천으로 덮은 후 들고가려 했다. 정말 슬프고 애통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했던가. 경수가 아무말도 하지못하고 그대로 흙탕물에 주저앉았다. 또 다른 남자는 경수의 상태를 걱정하며 갈색의 천막이 쳐진 부대 안으로 경수를 모셨다.
"괜찮으십니까."
".."
"백현이는..저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남자 역시 경수와 비슷한 표정을 가진 채 말을 했다. 그 말에 경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남자는 종이 뭉치들이 가득한 곳으로 가 종이들을 헤집었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경수가 그저 바라보기만을 하기를 잠깐, 남자는 그 종이들 사이로 작은 상자를 찾아내었다.
"혹, 자기가 어떻게 된다면 이걸 경수씨한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이걸요?"
"네, 저는 이만 가봐야 겠네요. 가는 길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시간이 갈 수록 날이 더 추워졌다. 이제 곧 겨울인가.
-
자칫 잘못했다간 금세 종인에게 들통나버릴게 뻔했다. 처음부터 무엇인가를 숨기는 기색을 한다면 성난 종인이 화장한 백현의 유골을 와그작와그작 씹어삼켜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어제 저녁의 관계로 그만 코트의 행방 따위는 잊어버렸는데, 운이 좋게도 종인이 없을 때 생각이 났던 것이다. 크기가 작아 티가 나지않아 망정이였지, 정말 하마터면 한바탕 난리를 피울뻔했다. 경수가 미세하게 손을 떨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금세 또 경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찼다. 그 속에는 작은 은반지와 편지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경수가 상자와 편지를 젖지 않게 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울음을 막아내었다. 그리고는 편지를 펼쳐보았다.
'당신 잘 지내지? 내 걱정은 하지를 말어.
나는 잘 지내니깐.
그저 이 나락같은 전장을 당신 하나로 버티며 산다.
이제 곧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나는 매일 자기전에 종전 후 당신과 나를 생각해.
같이 갔던 그 벚꽃나무가 지금은 상처를 입어 사라졌을지언정,
추운 날씨에 꽃잎이 다 떨어져 추한 모습일지언정 그래도 상상해보곤한다.
경수, 나의 경수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당신을 주저없이 연모한다는 걸 알고있지?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오.'
그래. 내게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건 현이, 너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