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해 생각하기엔 어린 나에겐 너무 벅찼다. 주위 사람들의 관심은 오히려 지독한 오만함을 낳았다. 이제 산다는 느낌보단 죽어간다는 느낌이 앞선 나의 젊음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갈 뿐이다.
*
" 놀러 왔어. 나 보고 싶다며. "
내 귀를 간지럽히는 너의 음성은 충분하고도 나에게 과분했다. 내가 언제. 괜히 한 번 시큰둥하게 받아치고는 찌뿌둥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성재가 건네준 물을 작게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해. 짧게 중얼거리며 다시 누우니 성재는 잔뜩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 가슴까지 덮어준다. 학교는. 나의 물음에 성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이고는 내가 마시다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곤 탁, 하고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는다.
" 비 와서 학교 가기 싫어. "
" 이빨 까지 마. "
이창섭이 너 자퇴했다더라. 괜히 아는 체했다가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진짠데. 성재의 낮은 목소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추적추적 빗물로 젖어가는 하늘을 창가 너머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직까지도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찝찝함이 느껴져 몸을 한 번 작게 떨었다. 이래서 여름이 싫어. 창가에 머문 시선을 떼고는 이내 천장으로 옮겼다. 어찌 옆에 성재가 있음에 불구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애써 흐트러지는 정신을 부여잡고는 눈을 느리고 감다 뜨는 성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짧게 한 마디.
" …이제 어쩌려고. "
육성재,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내색은 안 했지 아직 나는 모든 게 벅찼다. 줄에 꽁꽁 묶인 채 움직일 힘조차 내지 않는 개마냥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육성재, 성재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또 뭐가 그리 잘난 맛에 살았는지, 철없던 그 시절이 이제 추억으로조차 남길 수 없었다. 조용히 썩혀가며 흐르던 시간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후회로 남겨질 뿐이다. 그래. 너도나도, 얻은 게 많은 만큼 잃은 것도 많으니까.
" 뭘 어째. 너 몸 관리에나 신경 써. "
" 나 이제 괜찮거든? 졸라 약골로 봐. "
" 약골 맞잖아. 병신아. "
아니거든. 씨발 년아. 실실거리며 약골이라고 씹어대는 성재의 얼굴을 세게 밀어내고는 침대 옆 서랍 위에 성재가 다 마셔 텅 빈 컵을 집었다.
" 물 떠와. "
내가 무슨 머슴도 아니고. 입을 잔뜩 삐죽대며 컵을 받고 부엌으로 가는 성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꼭 좋게 나가려 해도 저런 식이다. 솔직히 오랜만에 봐서 진짜 반가운데. 뭐라 티도 못 내겠네. 요즘 따라 점점 무거워져 오는 몸을 쉽사리 가누기 어려웠다. 주섬주섬 베게 옆에 둔 핸드폰을 집어 액정을 켜니 화면이 설정해두었던 디데이가 눈에 띄었다.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
꿈을 꿨다. 주위는 온통 캄캄했고 그 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한참 어둠 속을 걷고 걷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대로 주저앉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멀리 닿지 않는 시선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도 나와 똑같이 어둠 속을 묵묵히 걸어나갔고 그런 뒷모습이 너무 익숙해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 남자를 뒤쫓았다. 저기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뻥긋할 뿐. 가까워질 듯하면서 더욱 멀어져만 가는 남자에 숨이 가빠 걸음을 멈췄는데 그 동시에 미동도 없이 걸어나가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육성재였다.
*
" 아, 피부 완전 칙칙해. "
" 임현식한테 비비 빌려. "
아, 미친….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이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시간이 갈수록 몸이 바위처럼 무거워진다. 교복으로 빼입은 성재는 조금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이내 마이를 벗고는 넥타이도 느슨하게 푼다. 이제 학교도 안 다니는 새끼가 교복은 왜 입어서…. 베개에 묻은 얼굴을 들어 괜히 한 번 아니꼽게 바라봐주다가 이내 다시 푹, 하고 묻었다.
" 육성재. "
" 응. "
" 꿈에서 너 나왔어. "
" 복권 사러 가야겠네. "
" ……. "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혼자 넘어갈 듯이 웃어대는 성재에 나도 따라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그래. 이제 웃을 일도 없을 텐데.
" 그런데 나도 너 나왔는데. "
" 헐? "
" 내가 존나 컴컴한 데서 혼자 걷고 있었거든. "
" …어? "
" 그런데 뒤에서 누가 쫓아오길래 무서워서 막 걸어갔어. "
" ……. "
" 한참 도망가다가 멈춰서 뒤돌아보니까. "
정일훈, 너더라.
*
시간은 야속하게도 제 시간에 맞춰 제 시간에 빠르게 흐르더라. 성재는 잔뜩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곧게 개어 정리했다. 평소와 다르게 퉁퉁 부은 눈을 한참을 비비며 창가에 시선을 떼지 않는 성재. 어제저녁부터 비가 내리다 오늘 아침에 그쳤다. 축축하디 젖은 그 세상을 밟고 올라 내리쬐는 햇볕은 눈부시게 빛났다. 성재는 시선을 떼어 서랍 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을 집었다. 끄지도 않은 핸드폰은 화면을 비췄고 성재는 눈먼 장님처럼 허공에 대고 뭐라 작게 중얼거렸다. 디데이는 끝났다.
…그러나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