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앞 카페에서 만난 여자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차분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이 내 돈을 보고 다가와 보여주던 아양과 교태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고,
커피 하나를 주문해놓고 앉아서 하는 그 여자와의 대화는 부모님이 원하셨던 것 처럼
큰 언성이 오가지도, 저급한 말이 오가지도 않았고 그저 개울물처럼 흘러갔다.
커피잔이 비워지고 시간이 지나자 여자는 자리를 옮겨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첫 만남에 영화라, 대화할 수도 없고 얼굴을 볼 수도 없는 자리를 굳이 고집하는 것 보면
저 여자도 원해서 나온 자리가 아닌것만은 확실했다.
팝콘과 콜라를 하나씩 들고 들어가서 영화를 봤다.
여자는 집중하는건지, 집중 하려는건지는 몰라도 꿋꿋이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나도 스크린을 보고는 있었지만 그 소리도, 대사도 자막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영화를 보는 140분가량의 시간동안, 내 머릿속은 오로지 원우로 가득했다.
꽤 긴 시간이었기에 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내 머리를 장악했고
아무 생각 없이 방 문을 열어놓고 나온 것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바로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한 끼에 십 몇만원짜리 일식 코스가 예약되어있는 식당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코스요리를 먹으면서, 여자와의 대화를 어찌저찌 이어가면서도 하는 것이라곤
인어와 같이 먹고싶다, 이건 먹을까 저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
오랜만에 본 영화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봤던 영화들을 쭉 회상해보았다.
자폐증을 앓는 6살 여자아이가 카드로 집을 짓는 영화,
미래 모습을 그리라는 미술 수업에서 숫자만 종이 한 가득 적는 아이에 의아해 하던 선생님이었지만
곧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재앙의 사망자였던, 종이 마지막엔 지구종말을 뜻하는 문자가 표기되어있던 영화,
소년과 소녀가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라는 아지트를 만들고 매일 같이 놀지만
소년이 마음을 뺏긴 선생님과 미술관 관람을 하는 사이 소녀가 소년을 찾으러 비밀의 숲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 영화….
그 밖에도 계속 꾸역꾸역 떠오르는 영화들에 결국 집에 도착한 나는 창고방에서 낡은 빔프로젝터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인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우당탕 거리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인어가 곧 빔 프로젝터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 하나 없는 방, 수조에 켜진 조명 마저 내린 뒤 한 쪽 벽을 스크린 삼아 옛날 영화를 하나 틀었다.
나는 수도 없이 보고 또 보고했던 영화였기에 나는 영화보다 인어에게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 불빛으로만 보이는 인어는 제 감정에 꽤 솔직했다.
웃긴장면에서 웃을 줄도 알았고, 심각해졌다가, 깜짝 놀랐다가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닦아내는 인어가
영화보다도 더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다 문득,
인어의 집중한 입술이 너무…
저것까지 가져야 인어가 완벽히 내 것이 되는건데.
잊고있던 소유욕의 불꽃이 또다시 산소를 만났다.
*
영화가 끝나고 민규는 원우를 옆에 둔 채 잠들었다.
푹신한 침대에 포근한 이불도 베개도 없었지만 단 잠을 자는 듯 편한 얼굴이었다.
반면 원우는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몸을 뒤척일 때 마다, 원우가 누워있던 곳 바닥이 반짝였다.
인어의 꼬리에서 비늘이 떨어진다.
원우는 끝 부터 빛을 일어가는 꼬리를 한 번, 바닥에 떨어진 비늘 조각을 한 번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더디게 흐를 것 같다.
"바다로 돌아갈래, 순영아." 하는 내 물음에 너는 선듯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나 바로 부정의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네가 말은 못해도 바다로 돌아가기를 원하는구나.
사실 마음같아서는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너를 계속 보고싶다.
네가 밥 먹는 모습도 노래부르는 목소리도 웃는 얼굴도 다 계속 내 옆에 남아주었으면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네 얼굴에서 점차 웃음이 많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알았고,
네가 바다와 집을, 가족을 많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지만, 나는 네가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비좁은 욕조보다, 편의점 음식보다,
네가 살던 넓은 바다로 돌아가 큰 바다를 누비며 햇살에 빛났으면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인어는 바다에 사는거야."
"… …"
"욕조를 못 쓰니까 불편해, 두 사람이 사는 것도 힘들고. 난 그리 부유하지 않잖아?"
"… …"
"그리고..."
네가 미안해 하지 않게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뱉어본다.
너는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멍하니.
바다를 보던 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말해도 돼.
… 갈게."
우리는 멀리서 바다를 보다가 조금 더 가까이, 모래 사장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신발이 자꾸만 모래에 빠져들어갔다.
파도가 치는 끝자락에서, 신고있던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운동화는 한쪽 손에 들고, 양말은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반대쪽 손은 네 손을 잡았다.
통통하고 따뜻한 네 손을 잡고 한 발자국 더 다가섰고,
발 끝을 흰 거품과 가는 모래가 간질였다.
발목에 닿는 바닷물이 생각보다 차다.
고개를 돌려 너를 쳐다봤다.
네 하반신에 달린 두 다리가 눈에 똑똑히 들어오는데, 너는 왜 인어인지.
밑을 내려다보며 더 걸었다.
발목을 감싸던 바닷물은 종아리와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옷은 이미 바닷물이 흠뻑 스며들었다.
추워서인지, 신발을 든 손이 떨렸다.
그래도 조금만, 조금만 더 너와 같이 있고싶어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고작 한 걸음에 바닷물의 수위가 급격히 높아져 허리를 집어삼켰다.
나보다 조금 더 작은 네가 파도에 휘청일까 잡았던 네 손을 놓고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파도가 치면, 바닷물이 가슴까지 침범했다.
한 걸음 더 가면 물이 어디까지 차오를 지 알 수 없었다.
겁이 났다.
문득 네 쪽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물 속에서 네 머리색을 닮은 은하늘색 꼬리가 빛나고있을 줄 알았는데,
너는 아직 두 다리로 서있었다.
목까지 물이 차올라 발 뒷꿈치를 조금 들어야했다.
파도가 치면 몸이 크게 휘청였다.
너를 꼭 잡아주고 싶었는데,
네가 내 앞으로 걸어와 내 몸을 잡아줬다.
물 속에서 너는 휘청이지 않는구나.
"인간은 물에 빠지면 죽는다던데."
"… 알아."
"이제 그만 와. 위험해. 떨고있잖아 너."
"물이 너무 차가워..."
조금 더 날이 풀리면,
조금만 더 물이 따뜻해지면 그 때 너를…
"석민아."
"응"
"네가 준 선물 다 너희 집에 있다."
"… 어차피 못 갖고 가잖아."
"석민아."
"왜"
"인어의 눈물이 진주라는 얘기는, 들어봤어?"
톡,
하고 진주가 떨어진다.
"왜 울어..."
"나도 선물 주려고. 그리고, 너도 울잖아."
너는 내 손을 가져와 진주를 쥐여주고 나를 끌어안았다.
내내 한기가 돌던 몸에 네 온기가 전해졌다.
"내 이름, 순영이야. 권순영."
호시라고 한 게 거짓말은 아니야.
계속 숨길 생각도 없었고, 내가 먼저 밝히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일찍 알아버린데다가…
우리 만남이 너무 짧네.
그러나 예상보다도 더 갑작스런,
마지막 인사였다.
-자폐증을 앓는 6살 여자아이가 카드로 집을 짓는 영화(카드로 만든 집)
미래 모습을 그리라는 미술 수업에서 숫자만 종이 한 가득 적는 아이에 의아해 하던 선생님,
곧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재앙의 사망자였던, 종이 마지막엔 지구종말을 뜻하는 문자가 표기되어있던 영화(노잉)
소년과 소녀가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라는 아지트를 만들고 매일 같이 놀지만
소년이 마음을 뺏긴 선생님과 미술관 관람을 하는 사이 소녀가 소년을 찾으러 비밀의 숲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 영화(비밀의 숲 테라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