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부제: 색시야!
w. 제 3의 치아
지원이랑 너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단짝 친구야.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겠냐만은, 그래도 가끔씩 둘이서 있을 때 마음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만 빼면 보통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잘 지내고 있어. 물론 가끔씩 다투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보내면서 말야. 우선은 부모님들끼리 워낙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지원이와 넌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또 집도 가까워서 오며 가며 자주 만나기도 해 십년이 넘는 시간들을 함께 하며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든 상태야.
하루는 네 부모님과, 지원이네 부모님들끼리 부부동반 여행을 떠나셨어. 2박 3일 정도로 말이야. 부모님들은 아침 일찍 여행에 출발하시기 전까지, 준비한 짐들을 차에 실으면서도 주방 어디 어디에 음식이 뭐가 있고, 뭐가 있다는 걸 알려주시고 청소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말해주셔. 그리곤 마지막으로 문단속은 꼭 해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약속까지 받아 도장을 여러 번 찍고 난 뒤에야 여행을 떠나셔. 사실 며칠 전부터 듣고 또 들었던 얘기들이라 들리는 말들 족족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너와 지원이는 차가 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저 멀리 작아지던 차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이야.
손을 흔드는 속도가 느려지고, 마냥 조용한 너와 지원이 사이의 정적에 뻘줌해지기 시작한 넌 지원이에게 얼른 들어가자며 말을 건네곤 서둘러 집으로 향해. 갑작스럽게 끼얹어진 묘한 기분도 기분이었지만, 전날 알바를 하는 호프집에 땜빵이 생겨버린 바람에 새벽까지 일을 하고 들어와서도 땀에 절었던 몸이 찝찝해 씻는다며 침대를 뒤로 했던 게 밤을 새버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어. 여행 준비로 설레어 이것저것 준비하는 부모님을 보며 혹시 빠뜨린 건 없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말을 건네면서 괜히 긴장까지 한 탓에 몇 배는 더 피곤함이 몰려오는 걸 느낀 넌 침대 위로 엎어져 감기던 두 눈을 마저 꼭 감곤 잠을 청해.
한편,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집으로 가 버린 너에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던 지원이도 집으로 들어가.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일어나면 꼭 밥을 먹으라며 문자를 보내는 것 또한 잊지 않고 남겨두고.
잠결에 눈을 뜨는 게 버겁지 않고, 되려 개운하단 생각이 들 때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깜빡이며 바라보던 넌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를 들어. 핸드폰은 진작에 전원을 꺼둔 터라 울릴 만한 건 거실의 전화기 밖에 없어. 아직 정신이 몽롱한 네가 일어나는 게 귀찮아 안 받으면 말겠지 싶은데도 따르르릉, 따르르릉 울리는 소리는 더 커지는 것 같고 끊어질 줄을 몰라. 못 들은 척 몸을 돌려 등을 지기까지 했는데 연신 끊임없이 빈 집을 울리는 벨소리가 영 마음에 걸렸던 넌 아직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와 수화기를 잡으려던 순간, 전화가 끊기더니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가 와 있어. 번호를 확인하니 아빠야. 방금 걸려온 전화의 번호는 엄마였고.
「전화.」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만 남겨진 담백한 한 마디에 졸린 눈을 비비던 너는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어. 수화음이 제대로 들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니, 들리는 건 왜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았던 거냐며 엄마의 한숨 비슷한 안심하는 말투가 들려와. 자느라 못 받았다며 서둘러 대답을 내놓은 넌 고개를 돌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 시간을 보니 점심을 훌쩍 넘긴 게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미안함과 멋쩍음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던 넌, 잠시나마 화제를 돌리려 밥은 먹었냐며 물어. 그러자 당연히 먹었다며 대답이 들리고. 딱히 생각나지 않는 더 이상의 말들에 으음, 하고 애매하게 말꼬리를 늘여.
-“너 밥은 먹었어?”
“으으응. 아직.”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밥을 안 먹었어. 엄마가 반찬이니 뭐니 해놓고 왔으니까 좀 챙겨 먹어. 오늘 알바도 안 간다며. 먹고 푹 쉬어.”
“으응.”
-“그리고 시간 나면 지원이도 틈틈이 들여다보고.”
“응?”
-“지원이 곡 쓰면 방에서 잘 안 나오는 거 알잖아. 지원 엄마가 걱정 많이 하더라. 일부러 더 맛있는 것만 해놓은 거니까 혼자서 먹지 말고 같이 먹어.”
“아아…. 응응.”
-“그래, 집에 혼자 있다고 밖에 쏘다니지 말고. 지원이랑 싸우지 말고 잘들 있어.”
“으음. 알았어, 알았어.”
-“오냐. 그럼 끊는다."
“어엉, 재밌게 놀다와.”
지원이의 얘기가 제법 자릴 차지하던 통화가 끝나고 거실에 오도카니 서 있던 넌 방으로 들어가 이불더미 속에서 전원을 꺼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홀드 버튼을 꾹 누르니 전원이 켜지고 나면 다섯 통 정도 되는 부재중 전화와 서너 통의 메시지가 보여. 각각 하나씩 지원이에게서 온 거란 걸 제외하면 모두 부모님에게서 온 거야. 꼭 밥을 챙겨 먹으라던 얘는 자기 밥은 잘 먹고 있는 건지, 통화를 할까 메시지를 남길까 고민하던 넌 곡 작업 중이라던 말을 떠올리곤 바로 망설임 없이 메시지 창을 열어.
「문자?」
한참 술술 풀리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 턱 막혀버린 손과 머리에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댄 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원이가 부르르 떨리는 진동에 깜짝 놀라. 상단바를 확인하니 너에게서 온 문자야. 고작 한 단어로도 대충 의미를 파악해낸 지원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
「ㅇㅇ, 완전」
-「ㅇ밥 먹었어?」
「아직. 이제 먹으려고」
-「나돈데. 같이 먹을래?」
「나 지금 간다?」
-「응응」
네 답장을 마지막으로 끊긴 대화에 멀거니 화면을 바라보던 네가 문득 귀찮음에 핸드폰을 내려두곤 침대에 다시 꾸물거리며 누워. 이불 위로 눈을 깜빡거리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을 겨우 일으킨 넌 대충 머리를 묶은 뒤 현관으로 가 잠궜던 문을 열어두고 욕실로 들어가. 그리곤 칫솔을 꺼내 양치질을 하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집으로 지원이가 들어와. 수건으로 머리를 올린 채로 칫솔을 물고 있던 넌 욕실에서 대충 상체만 앞으로 내민 채 왔냐며 크게 웅얼거려. 그 모습에 히히 웃던 지원이가 욕실 문 앞으로 와선 너를 빤히 바라봐. 생글생글 토끼 웃음을 하고선. 한참 열중해 이를 닦던 넌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려 같이 눈을 마주하고.
“애. (왜.)”
간결한 물음에도 손짓까지 동원하며 아니라고 답한 지원이가 이번엔 입 안 가득 물을 머금은 너를 보고 또 다시 생글거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잠시 머뭇거리던 넌 살짝 몸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려 클렌징 폼을 짜던 네게 지원이가 문득 말을 걸어.
“나도 방금 전에 이 닦고 왔는데.”
“어?”
한참 손에 거품을 묻혀 얼굴에 문지르려던 찰나 들리는 그 말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맹하게 지원이를 바라보니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건지, 방싯거리며 말해.
“텔레파시가 보내졌나 봐, 친구야.”
먼저 밥을 먹자 불러놓곤 밥은 커녕 욕실 앞에서 양치와 세수를 마칠 때까지 지원이를 서 있게 한 게 마음에 걸렸던 넌 금방 밥을 차려주겠다며 식탁에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 가. 그리고는 급한 손길로 발까지 동동 굴려가며 얼굴에 로션을 얼른 콕콕 짜 올려두고 나와.
제 옆에서 바쁘게 오가던 네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원이는 제 앞에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들이 하나씩 늘어가는 걸 볼 때마다 너를 힐끔거려. 뭐가 자꾸 톡 걸려 보이는 게 뭔가 싶었는데 볼과 이마, 턱에 조그맣게 짜진 로션들이 새색시의 연지곤지 같아. 그 생각이 한 번 들고 나니, 지원이의 머릿속엔 ‘너=새색시’ 라는 공식 아닌 공식들이 이리저리 맴돌아. 식탁 한 쪽에 놓은 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가지런하게 짝을 맞춰 놓는 순간에도.
그러다 가만히 너를 기다리는 자신은 꼭 색시 서방님 같다며 뿌듯함에 눈을 빛내던 지원이가 팔을 식탁에 교차해 올려두고는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어 너를 봐. 꺼내는 반찬마다 통에 가득 담겨 있는 걸 보고 놀란 눈이 되었던 넌 얼결에 지원이와 눈이 마주치고. 시선이 맞닿자 잠시 행동을 멈춘 넌 아직 지원이가 입을 열거나 한 것이 아닌데도 그 모습을 보니 지원이가 잔뜩 들뜬 어린아이 같아 웃음이 나. 소풍이나 운동회 전날 설레는 마음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던 그때처럼. 무슨 말을 들려줄까 내심 궁금했던 넌 서둘러 냉장고 문을 닫고 지원이를 바라 봐.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꾹 다문 입은 열리질 않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건 여전한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장난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 가만히 마주보고 생글생글 웃음을 터뜨리던 그때가 생각나 이번에도 별 거 아니겠구나 싶던 네가 밥공기를 챙겨 밥솥 앞으로 가면 대뜸 지원이가 너를 불러와.
“친구야, 친구야!”
“너 지금 되게 새색시 같다!”
의자마저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울리던지. 깜짝 놀라 바닥에 그릇을 깨뜨릴 뻔한 넌 품에 그것을 꼭 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심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에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도 못 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으면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되려 놀란 지원이가 네 옆으로 후다닥 달려와. 멍한 정신에 코앞에서 지원이가 얼굴을 들이밀며 있어도 안절부절 못 하다 고개를 휙 돌리던 다른 때와는 다르게 한참 멀뚱멀뚱 있는 네가 걱정됐던 지원이는 네 품에 있는 밥공기를 뺏어들고는 네 볼을 감싸쥐어.
그러자 지원이 손엔 새카맣게 잊고 있던 로션이 묻고, 새삼 이질적인 느낌에 뒤늦게서야 이게 뭔지 허둥지둥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없는 네 앞에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있는 지원이가 보여.
손에 로션이 묻자 또 한 번 아차 싶었던 지원이는 지원이 대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원이와 마주하고 있는 너는 너 대로. 서로 속으론 열심히 허둥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지원이가 먼저 배시시 웃음을 지어. 그리고는 네 볼을 감쌌던 손을 떼 조심스레 얼굴에 펴발라주기 시작해. 남자애라 그런지는 몰라도 네가 로션을 바를 때와는 다르게 투박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손길이었지만 따뜻하게 오는 그 손길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던 넌 마음을 놓으며 머뭇머뭇 눈을 감아. 이마며, 코, 볼. 턱. 어디 하나 빠뜨린 곳 없이 꼼꼼하게 발라주는 손에 너도 모르게 살짝 더 얼굴을 내밀면 지원이는 너 몰래 방싯대며 웃어.
“네 연지곤지 다 사라지고 있어, 지금.”
“…연지곤지?”
“응. 연지곤지.”
“…….”
“로션 냄새 좋다, 친구야.”
“그치,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이 냄새랑 그 냄새도 좋은데. 섬유유연제 냄새.”
너랑 있으면 그 냄새들만 나. …칭찬이지?
“완전 당근이지!”
자신감 가득한 그 목소리에 푸흐, 웃음을 터뜨린 네가 지원이의 손길이 멈출 때쯤이 되서야 천천히 눈을 떠. 잘 발렸냐는 뜻을 담아 깜빡이며 바라보자, 지원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엄지를 내밀어. 완전, 제대로.
“오, 김지원.”
누가 봐도 뿌듯해 보이는 지원이의 모습에 나보다 더 잘 바르는 것 같다며 칭찬을 건네니 지원이는 마냥 웃으며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밥은 내가 풀 테니까 친구는 가서 앉아 있어. 내가 밥 퍼서 가져다줄게.”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네가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려 지원이를 봐. 네 시선에 익숙한 듯 주걱을 찾아 공기에 밥을 담던 지원이가 배시시 웃어.
“밥 많이 담을까?”
“어어엉. 아니, 아. 그냥, 뭐. 적당하게.”
“적당하게, 응.”
“…….”
“근데 친구야.”
“응?”
“다음에는 하얀 연지곤지 말고, 빨간 걸로 해주면 안 돼?”
동그란 거, 빨간색 연지곤지. 그게 더 새색시 같고 좋아.
* * *
TAT!!
누누슴이 너무 좋쟈나... (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