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22
w.규닝
22. me la me
항상 이맘 때 쯤이면 날씨는 쌀쌀해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호원과 동우의 부름에 별 생각 없이 화투장을 짊어지고 옥탑 위 계단을 오르던 그 때에도 그랬듯이 살을 에는 찬 바람은 여전했었으니까.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마지막 손님이 편의점 밖으로 나가자 마자 들고 있던 바코드를 손에서 내려 놓은 성열이 작게 구비되어 있던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야, 너는 제대하면 아마 다시 편의점 알바나 하고 있을 듯. 입대 날 때까지도 지독하게 저를 놀리고 사라지던 호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아 도리질을 친 성열이 계산대 위로 상체를 엎드렸다. 제대 해도 똑같지 뭐. 니가 할 게 그거밖에 더 있겠냐.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약 오른다. 결국엔 이렇게 또 다시 포스기나 두드리며 카운터를 지키게 되었지만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고. 부루퉁하게 입을 내민 성열이 할 일 없어 끄적이고 있던 호원의 얼굴에 왕 점을 그려 넣었다.
제대 후에 맞는 가을은 훨씬 더 쌀쌀했다. 그것만큼은 아마도, 2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이새끼는 또 전활 안 받아. 도대체가 살아는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 뒤져버린건지."
성열이 먹통인 휴대폰 액정을 괜스레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받는 이 없는 부재중 통화 목록은 죄다 한 사람. 성열이 어제부터인가 막히기 시작한 코를 훌쩍이며 다른 번호를 꾹꾹 눌러댔다. 비교적 짧은 신호음 끝에 연결된 전화 너머는 벌써부터 시끄러운 기운이 물씬 풍겨났다. 다짜고짜 왜! 하며 빽 소리를 지르는 상대의 주위로 술잔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성열이 계산대 위로 볼을 갖다 대며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이호워언.
"남우현이 또 전화를 처 안 받아. 어떡하지."
-넌 나한테 전화해서 남우현 얘기밖에 안 하냐, 개새끼야.
"급하니까 그렇지. 맨날 맨날 나만 구박 받는다고. 니가 이 심정을 알기나 해?"
-…또 언제부터 연락 안 되는데?
"그저께부터."
-미친놈이. 전역 하자마자 까져가지고는. 늘 가던 곳이나 쏘다니고 있겠지.
나도 몇 번 문자 넣어봤는데 답장은 없더라. 끝내는 심심하게 마무리 된 호원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성열이 엎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건 나도 알지. 아는데.
"전화는 받아야 뭘 할 거 아냐, 이래서 중간 역할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본인들보다."
-놔 둬. 지 나름대로 성규형은 상처잖아.
"……."
-나같아도 성규형 이름 나오는 건 달갑지 않을 것 같은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병신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성규형의 성 자만 꺼내도 미친놈처럼 죽이려 드니까 그렇지."
-당연한거야.
"……."
-그 새끼한테는 당연한 반응인거라고.
비교적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모양인지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소음으로부터 차단 된 공간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성열은 직감적으로 호원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전화기 저편은 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싶더니 몇 초의 정적 끝에 어어,하는 음성을 가져다 주었다. 성열이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담배?"
-어. 장동우 없을 때.
"언제까지고 모를 것 같냐, 걔가. 눈치 하나는 나보다 빠른 앤데."
-장동우는 신경 꺼.
"그러다가 언제 한 번 걸려서 파토가 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신경 끄라고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호원은 동우라는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재수 없는 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2년 전엔. 성열이 어깨 맡으로 휴대폰을 끼워 넣어 고정시키고는 풀어진 신발끈을 조여 묶었다. 아아 네네, 신경 끕죠. 건성으로 뱉은 대답 이후에는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 묶은 후에도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호원이 피우고 있는 담배 연기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것만 같아 입을 다문 성열이 마찬가지로 그 침묵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우의 눈을 피해 즐기는 담배는 전화 통화 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을 정도로 달콤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괜한 입을 삐죽이던 성열은 아,하며 들려오는 전화기 저 편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왜?"
-끊어봐. 남우현 왔다.
"남우현이 왔다고? 거기 뭐 하는 자린데?"
-그냥 신입생 환영회야. 근데 저 새끼, 이미 한 잔 하고 온 것 같은데.
"아, 그 병신."
-끊어. 얘기 하고 올게.
건들건들거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단호해져 있었다. 끊겠다는 말과 함께 정말로 가차없이 끊겨버린 전화에 실소를 터뜨리며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낸 성열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대체가 한 놈도 제멋대로인 놈들이 아닌 새끼들이 없어. 딸랑,하는 출입문 종소리와 함께 들어선 손님을 힐끔거린 성열이 계산대 구석으로 꺼진 휴대폰을 밀어 넣었다.
*
"너 인생 쫑났냐."
호원이 우현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진 술자리에 뒤늦게 합류한 우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무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호원이 낸 기척에 헤실거리며 웃고 있던 우현의 입꼬리가 더욱 유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고개를 들어올려 삐딱하게 굳어진 호원의 얼굴을 올려다 본 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쫑이야. 제대도 했으니까 이제 진짜 인생 시작인거지."
그런 의미로, 한 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앞에 놓여있던 술의 병목을 움켜 쥔 우현이 호원의 앞으로 그것을 들이밀었다. 그에 호원은 나즈막히 눈썹을 찌푸렸다. 가관이네. 화장실에라도 간 것인지 마침 비어 있는 우현의 옆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호원이 우현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힘주어 빼내었다.
"1차로 어디 갔다 왔냐?"
"유지연네."
"…어디서?"
"걔네 집."
"미쳤어?"
갑작스레 언성을 높여버린 것은 실수였다. 호원은 우현의 입에서 연쇄적으로 터지는 무책임한 말들에 입을 떠억 벌렸다. 그렇게 죽자고 피해다니던 유지연까지도 제 발로 찾아다닐 만큼, 딱 그만큼 돌아버렸나보다. 호원이 대책 없이 꾸벅거리는 우현의 뒷통수에 대고 주먹질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에 실실거리며 접힌 눈이 다시금 호원을 향해 틀어졌다.
"유지연 예쁘지."
"니가 진짜 돌은거야, 미친 새끼야. 제발 정신 좀 차려 줄래? 맨날 니 뒤치닥거리나 하러 돌아다니는 장동우는 생각 안 하고 이게 진짜."
"내가 돌긴 왜 돌아."
"이성열은 왜 안 만나주는데."
음성마저도 비틀거리는 우현의 말을 단칼에 자른 것은 호원이었다. 우현이 비실비실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굳혔다.
"걘 왜."
"애가 매일같이 전화 하면 좀 받아주고 하는 거야. 니들 둘이 싸운 것도 아니잖아."
"이성열 얘기는 꺼내지 마, 그 새낀 뭐만 하면."
뭐만 하면. 호원에게 술병을 뺏기기 전에 따라 놓았던 소주 잔을 들이킨 우현이 제 입술을 닦았다. 뭐만 하면 김성규, 그러니까…김성규 얘기란 말이야. 역시나 성규의 이름을 꺼내기 전에 입을 멈칫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호원은 성규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 멈추었던 우현의 입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실실거리던 우현의 눈빛이 번뜩이며 호원을 향한 것은 한 순간이었다. 성규 형. 뚝뚝 끊기듯이 뱉어진 말은 짧았지만 우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호원이 경계 태세로 돌변한 우현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마찬가지로 그 눈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얘기는 들어야 할 거 아냐."
"상관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성열, 만나 보라는거라고. 이성열이 우리 중에 제일 먼저 제대 했고, 제일 먼저 성규형 소식 들은 놈이니까."
"상관 없는,"
"듣기 싫어도 피하지 마. 다음 번에 이성열 연락 오면 꼭,"
"상관 없다고 몇 번 말해야."
ㅡ들어 처 먹을 거냐고, 개새끼야. 끝이 날카로워진 목소리와 함께 유리 병이 테이블 위로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에 건배 제의를 시작하려던 모양이었는지 잔을 높게 들어올리려던 모두의 눈이 그 곳을 향해 모였다.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줄고, 간간히 웅성거리는 소리만 그들 주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호원은 또 다시 저의 눈을 피하고 있는 우현의 옆모습에 제 눈을 고정했다. 방금 전까지도 유지연네 집에서 1차를 하고 왔다던 우현의 옷깃에 눈을 두니 보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디서 묻어온 것인지는 본인만 알겠지, 속으로 감추어 넣은 옷깃의 흙 자국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결국엔 건배 제의를 시작하는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호원이 올곧은 눈빛을 잔에 고정하고 있는 우현을 지나 호프 밖으로 몸을 틀었다.
라이터를 켜니 보이는 것은 그 불빛 만큼이나 밝은 네온사인 간판들이었다.
* * * * *
「오늘도 너 대신 옥탑에 갔다 온 건 나랑 장동우다.」오후 11:08
4차를 향해 일어서겠다는 일행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겨우 도착한다는 곳은 한강 어귀였다. 그렇게나 퍼마셨는데 이제는 그다지 취기가 오르는 느낌도 아니었기에 마뜩찮은 기분으로 주저앉은 벤치에서 휴대폰을 확인한 우현의 인상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이제는 2년 전 김성규만큼이나 보기 싫은 건, 질리도록 같은 이름만 계속해서 들춰내고 있는 이성열. 우현은 지긋지긋한 이름 세 글자가 연달아 보내오는 김성규라는 이름에 손가락을 놀려 휙휙 액정을 내렸다.
「성규형 얘기 면전에 대고 꺼냈다가 너한테 칼 맞기 싫어서 카톡으로 말하는거야.」오후 11:08
「그래, 씨팔. 난 찌질하니까.」오후 11:08
「질린다 진짜.」오후 11:09
「나도 이제 마지막이야」오후 11:09
「듣기 싫을 거 아는데」오후 11:09
「전해줄 거 있으니까 내일 연락하면 재깍 나와라.」오후 11:10
「물론 성규 형 관련.」오후 11:12
실시간으로 연락을 확인하던 우현이 사라질세라 재빨리 덧붙여 온 마지막 말엔 꽤나 다급함이 묻어났다. 벤치 위로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빈 캔맥주들을 바닥으로 쓸어내자 청량한 소리가 한강 둔치로 울려 퍼졌다. 그렇게 빈 의자 위로 제 다리를 올린 우현이 등받이에 힘없는 팔을 얹었다. 성규 형 관련. 성열의 마지막 문자를 소리 내어 따라 읽은 우현의 입이 결국엔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는 내가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애써 너를 각인시켜 내려는 이들이 많아 힘든데. 2년 전이나 후나 혹은 아주 먼 미래나 너는 내게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되었다는 게 이만큼이나 실감이 나서.
「답장을 해, 개새끼야 진짜.」오후 11:16
요즘따라 더욱 흔하게 들어먹고 있는 욕지거리에서마저도 네 목소리를 떠올린다면, 이건 아마.
평생을 따라 갈 후유증이라는 것을 예고한다는 의미일까 생각했다.
*
"야."
"뭐."
"넌 진짜, 중요한 거 받으러 왔다는 새끼가…."
성열의 아침 업무를 마비시킨 것은, 허겁지겁 편의점을 오픈하고나서 청소 준비에 돌입하기도 전 모습을 드러낸 우현이었다. 카운터 안에서 포스기에 넣을 동전더미를 분주히 뜯어 넣고 있던 성열이 질린다는 얼굴을 하며 우현을 마주했다.
대충 뒤집어 쓴 후드에 보이는 대로 신고 나왔을 게 뻔한 삼선 슬리퍼까지. 또, 간밤에 늘었는지 건성으로 붙인 볼 옆의 밴드는 그야말로 대충 '만나러 와 줬다'하는 느낌을 풍겨내고 있었다. 방금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개새끼야. 성열이 잔뜩 떫은 표정을 하고서 우현의 심드렁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예의는 좀 갖출 생각은,"
"줘."
"쥐뿔도 없구나."
"줄 거 있다며, 빨리 내놔. 들어가서 다시 잘거야."
우현이 터져나오는 하품을 간신히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간밤에 밤을 설쳤다는 건 곧 죽어도 말하기 싫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디 편한 복장을 하고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씨팔, 전해줄 게 있었으면 진작에 그렇다고 말이나 할 것이지. 우현은 밤새 뒤척여 충혈된 눈으로 몸을 일으켰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성열의 아침 오픈 시간. 까치집이 진 머리는 후드를 뒤집어 써 그나마 가린 채 집을 나선 우현에게는 낯선 아침의 공기였다. 그렇게 찾아 온 편의점에서 맞이한 성열의 얼굴은 그야말로 얄미워서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 올리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른 우현이 최대한 무심한 말투로 용건을 꺼내었다.
왜 하필 그 중요하단 얘기를 밤 늦게 해서 사람을, 결국엔 이를 으득 간 우현이 성열의 앞으로 다짜고짜 손바닥을 내밀었다.
"달라니까."
그런 우현에 어이없어 입꼬리를 당겨 올린 성열이 헛웃음을 쳤다.
"안아달라고?"
"안 줄거면 그냥 가고."
"아, 잠깐."
기달려, 미친놈아. 결국엔 동전 뭉치를 서랍 안으로 내던진 성열이 툴툴거리면서 손을 털었다.
이게 얼마만에 만난 남우현이야. 여전히 삐딱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현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가방을 뒤지려던 성열이 입을 삐죽였다. 저한테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싸가지 없는 태도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냥 내가 만만한 탓이겠거니 한다.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비싼 남우현이 먼저 걸음을 해주신 건 대단한 일이지 않는가. 가방을 뒤적거리다 말고 작게 툴툴댄 성열이 끈질긴 눈으로 저의 행동 반경을 훑고 있는 우현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입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완결 |
은 몇 화일까요? p.s ☞오늘도 성규 없는 현성글이시라 미아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