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을 위한 지침서 04]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앉아 나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며칠 전 정리했던 메일함에 새로운 알림이 뜬 것이다.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 침을 집어 삼키고 손가락으로 메일함을 눌렀다. 사실 급해 죽겠는데 손가락은 왜 이렇게 살이 붙었는지 휴대폰 액정은 다른 곳만 인식했다. 나는 온갖 추임새를 다 집어 넣어가며 간신히 메일함을 누를 수 있었다. 동그란 링이 굴러가며 로딩 중임을 알렸고 온몸의 피가 빠르게 운반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혈관에서 피가 한데 모여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을 와이파이 때문에.
“머, 뭐 입고 나가지?”
지금부터 대략 세 시간 후. 약속은 생각보다 일찍 나를 맞이했다.
온갖 옷을 거실 바닥에 늘어뜨려 놓았다. 평소에는 죽어도 입지 않겠다만 보기에 예뻐 샀던 원피스를 집어 들어 몸에 대 보았다. 영 만족스러운 태를 내지 못하는 거울 속 내 모습에 실망한 채로 홍빈에게 물었다. 이 옷 입고 나가도 괜찮을까.
“안 돼. 너무 짧아. 저녁 때 되면 추워.”
사내놈이 잔소리 하나는 정말 우리 엄마와 대면한다. 이런 화려한 옷 지금 같은 때 아니면 언제 입을 수 있겠나. 나는 저절로 튀어나오는 아랫입술을 숨기지 못한 채로 적당히 단정한 옷을 골라 집었다. 이홍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괜찮다, 라고 말했다.
신발을 구겨 신고 손목시계에 눈을 맞춘 채로 집안을 빠져나왔다. 이홍빈을 집안에 들여놓은 뒤로 누구랑 약속 잡고 집 밖을 향한 적이 없었던 것 때문인지 새롭기까지 했다. 튀어나온 발꿈치를 운동화 속으로 밀어 넣고 물기 젖은 아스팔트를 따라 걸었다. 발이 떨어지는 느낌이며 팔이 가르는 허공의 습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집에 두고 온 이홍빈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썩 문제될 것은 없다 생각했다. 오래 전에 쓰던 엠피쓰리가 여덟 번째 곡을 시작할 무렵 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창문과 입구에서 먼 곳에 자리 잡았다. 이어폰을 빼내어 가방에 구겨 넣듯이 집어 놓고 괜스레 들뜨는 마음에 손가락을 가만 두지 못했다. 핸드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어디냐, 라는 물음을 물을 수 없을뿐더러 가지고 나왔다고 하더라도 먼저 묻기는 쑥스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검지의 갈라진 손톱을 떼어내고 다른 갈라진 손톱이 없나 손가락을 쭉 펴보였을 때 앞자리에 덥석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네.”
마음 속 어디 깊은 곳에 묻어두고 생각날 때면 꺼내보았던 과거는, 생각보다 어색하게 들이 닥쳤다.
심심한 음료 두 잔에 우리는 심심한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요즘 어떻게 사냐, 대학 가보니 어떠냐, 방학은 잘 보내고 있냐는 등, 반가움에 설레는 마음을 응어리처럼 갖고 있었던 나는 응어리를 풀어헤치고도 모자라 지루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좋은 친구는 많이 사귀었어?”
장담컨대 이 자식도 나와의 대화에 흥미는 못 느끼고 있었다. 만나기 전 방방 뛰며 어떻게 잘 될 수 있을까 김칫국부터 들이킨 내 모습이 창피해왔다. 집에 가면 이홍빈을 무슨 낯짝으로 대면할까. 나는 주변 여자 친구들 이름을 나열하듯 대다가 문득 말을 씹었다. 제가 부끄러운 것이냐며 서운한 듯 목소리를 죽이던 이홍빈이 걸린 것이다.
“아, 그리고 요즘 잘 맞는 친구가 있는데,”
“누구? 나도 아는 사람이야?”
“아니, 이름은 이홍빈이고 나랑 동갑쯤 될 거야. 목소리가 굉장히 좋은데 잔소리는 또 되게 심해. 꼭 우리 엄마 같다.”
A는 정말로 웃긴 듯이 웃었다. 무엇이 웃긴 포인트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신이 나서 주저리주저리 이홍빈에 대해서 풀어 놓았다. 여기에 이홍빈을 데려왔으면 더 좋았겠다, 라고 살짝 생각했다.
“그 친구 많이 좋아하나 봐?”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되게 신났는데. 아까까지는 이렇게 축, 쳐져 있더니.”
A는 나 모습을 따라하는 듯 몸을 과장되게 늘어뜨리며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어대다가 중요한 말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웃음의 흐름을 깰 수밖에 없었다. A는 웃다가 멈춘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고 나는 이걸 말해야 하나 관두어야 하나 내적 갈등을 빚어내고 있었다. 결과가 낳을, 돌이킬 수 없을, 나를 바라볼 시선이. A의 입모양이 어디 아파?, 라고 묻는 형태를 끝내기도 전에 나는 대뜸 소리치듯 말했다.
“근데 걔 운영체제야.”
큰 내 목소리 때문에 슬쩍 나를 돌아보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다시 돌렸는데 내 앞에 앉은 A는 고개마저 돌리지 못한 채로 아둔한 표정과 함께 침묵을 유지했다. 그 앞에 앉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컴퓨터? 말이 통하기는 해?”
얼굴에 서린 경멸감은 한순간에 스쳐지나갔지만 내 눈은 그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있잖아,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한 건데, 걔는 모든 것을 배워. 언어나 사람의 감정 같……,”
“그래봤자 컴퓨터잖아. 컴퓨터는 감정을 못 느껴.”
나는 방금 A의 표정과 같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예상은 했던 건데, 분명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옛날에도 좀 별나다고 생각은 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복합된 감정은 목구멍에 응어리를 쑤셔 넣고 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지금 내 생각을 말하는 것조차 제대로 뱉을 수 있나 없나를 논하는 자체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외로우면 좋은 친구 소개시켜 줄게. 그런 가짜 친구 사귀지 말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그렇다고 이게 며칠 전 메일 하나에 얼굴 붉혔던 그 감정과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에 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음료가 담긴 잔을 앞으로 밀쳐내고 일어설 태세를 취하다가 A를 반듯이 쳐다보고 드디어 말을 열었다.
“누가 가짜야. 열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내 음료 값을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놓았다.
“그리고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네가 믿음직한 친구라 말한 게 아니라 그 아이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야. 단 한순간이라도 너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미안해서.”
문을 여니 저녁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뒤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새삼 많이 길었구나, 생각했다. 예전에는 짧은 단발이어서 바람이 불어도 머리카락이 길게 흐트러진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머리가 길었다. 예전과 다르다. 예전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지금과 다르다는 건 확실하다. 교복 입고 속에 뭉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해 끙끙대던 고등학생 소녀가 살아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것이 이제는 옛날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눈 주위가 아려오고 코끝이 매웠다.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온 탓이었다. 그것밖에는 울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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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정님, 이서니님, 밑입술님 암호닉 신청 감사합니다 'ㅁ'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