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도 처음부터 이런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다. 나름 알아주는 대학에서 성규를 만나 호감을 느껴, 정말이지 큰맘먹고 커밍아웃을 하게 되고, 성규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며 시작하게 된 풋사랑이었다. 그렇게 2년을 교제하던 중 같이 살게되었고, 서로에게 끔찍하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다 대학 졸업 즈음, 취업을 한 성규와는 달리 번번히 떨어지는 면접, 학자금 대출빚과 그에 따른 이자에 한참 시달린 우현이 우연히도 사이버도박에 현혹되어 간간히 하던 도박에 맛이들려, 이제는 하다하다 실전에까지 나가 어마어마한 거액으로 도박판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거기에서 진 빚이 자그마치 1억이었다. 1억. 겜블러들의 현란한 손놀림이 몇 번에 오고가는 금액이 수 억, 수 십억이라니. 성규에게 그 빚을 들켰던 그날 밤 성규는 예상과는 달리 같이 빚을 갚아나가자며 우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우현에게 주었고, 낮에는 회사에,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그의 빛을 갚겠다는 일념하에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래도 이 엿같은 세상에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성규를 깡그리 무시라도 하겠다는 듯이 빚은 작아지기는 커녕 그대로였다. 그래서 시작한 매음질이었다. 더 엿같은 사실은 그렇게 고생하는 성규만 믿고 일을하지 않는 우현이였으며, 아직까지도 우현은 성규가 기숙사가 달린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줄로만 알고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세상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공평이란 것은 그들에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존재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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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규에게는 비밀이였지만 우현은 한달 정도를 애인대행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 친구 녀석이 꽤 돈벌이가 된다고 말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모아가도 도저히 이런일로 돈을 버는 것은 저만을 바라보며 눈이 휘어지는 웃는 성규 생각에 더 이상은 못할짓이라 마음먹고는 그만두었다. 그 한달간 매주 월요일이면 집에오는 성규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였는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우현이 정말 열심히 일을 해야 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일년 동안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다 해봤던 것 같다. 돈이라는게 정말 웃기게도 쓸때는 어디다 썼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날만큼 헛되이 소비하지만 벌때는 돈의 출처가 명확했으며, 그 댓가로 받는 금액은 매우 짰다. 정말 오로지 성규만을 생각하며 열심히 산 우현이였다. 이제라도 제 죄값을 이렇게라도 치른다면, 그로인해 성규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용서해주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일년 반이 지난 지금 성규 몰래 봐둔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냈고, 곧 있으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현은 성규를 암흑같던 시간 속에서 꺼내 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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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부터 새벽에 택배 분류작업을 하는 우현이 갑작스레 많아진 물량에 월요일 새벽부터 화요일 새벽 때까지 풀타임으로 일을 해야했다. 수당은 조금 더 많이 쳐준다는 사장의 말에 혹했던 것이다. 그는 골똘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사장에게 급해서 그런데 가불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사장은 어쩐히 흔쾌히 흰 봉투에 수당을 넣어 그에게 건냈다. 아마 이틀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며 고생한 그에게 조금의 연민이 느겨진 탓일까. 우현이 내일 뵙겠다며 인사를 건낸 후 어제 새벽에 챙겨둔 통장을 가지고 은행으로 향했다. 아직 은행문을 열기에는 30여분 정도 여유가 있었기에 그리 급하게 가지는 않았다.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꽤나 한적한 은행에 들어선 우현이 은행원에게 정확히 송금해야 할 금액을 건내는 우현의 손이 가늘지만 오랫동안 떨렸다. 그간의 고생이 물로 다 씻겨진 했다. 은행원이 통장을 돌려주며 희맑은 웃음을 보일 때, 우현 역시 입꼬리를 크게 올려 웃어보였다. 다시 가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입금사실을 곧 알게될 김사장에게 전화를 걸려 핸드폰을 꺼냈는데 뜻 밖의 문자와 와있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던 회사의 통보문자였다. 한 달전 별 생각없이 그냥 넣어봤던 원서였는데, 오늘은 정말 뭘해도 되는 날인가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째 찜찜하기도 하고 곧 깨어날 꿈같아 두렵기도 했다. 우현이 문자를 확인하고는 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우현이가 왠일이야, 왜 또 재미 좀 보시게?"
"입금했어.확인해."
더는 그 작자와는 얘기를 섞고 싶지않아 용건만 말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은 우현이였다. 이제 완전히 끝이구나, 더는 빚더미 속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나, 그리고 성규. 행복할 우리. 우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러다 월요일이면 집에오는 성규가 생각나서 혹시라도 집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집 문을 열고 나오는 성규를 볼 수 있었다. 우현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려다 놀래켜 주려고 앞을 향해가는 그의 뒤를 쫒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가 이상했다. 표정은 금방 울기 직전의 표정이였고, 출근길인데도 정장이 아니였으며 출근을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회사방향이 아니였다. 정말 이상했다. 곧 무슨일인가 터질것같이 우현의 가슴이 갑자기 일렁이기 시작했다. 우현은 성규를 좇아가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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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이 성규의 일터에 들어섰던 순간, 정말 수십여년 동안 이 고생을, 아니 그 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으며 일해도 되니 다시 시간을 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이럴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자기같은 대역죄인이, 그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에게 화가났다. 나는 단순히 내 웃음을 흘리며 여자를 꾀내는 일을해도 속이 뒤틀려 곧 제생각에 그만두었는데 그간 외간남자와 함부로 몸을 섞었던 그에게 부아가 치멀었던 것이다. 도저히 우현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완전히 제 정신을 잃은 그가 도저히 저지르면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분명 자신도 알고있다. 곧 분명 후회한다는 것을. 성규에게 미안해어쩔주 몰라할거라는 것을. 그래도 그 순간에는 서로 몸을 섞어서라도 그가 자신의 영역의 것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도중에 멈췄지만. 집에 와서는 신발을 안까지 신고들어온 우현이였다. 완전히 얼이 나가있었다. 왜 모든 것을 적당할 수 없을까. 적당히 좋다가, 적당히 나쁘다, 적당히 살다 갔으면 좋을 인생이겠지만 완전히 오르락 내리락 제 멋대로인 인생이었다. 그리고 안방에 들어온 우현이 성규가 쓴 탁상위 쪽지를 발견했다. 그래, 너는 나를 끝까지 노름뱅이애인으로 밖에 생각안하는 구나.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도 나는 결국 그자리 그대로겠지. 변하지 않을 거야, 나는. 성규야. 내가 아무리 살겠다고 발악해봐도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나를 싫어해, 나를 원망해. 지금의 너처럼. 미안해 미안해 성규야.
우현의 마지막 순간조차 그 가늘게 떨리는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도 그의 인생은 행복으로는 마무리 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대하던 빚 청산도, 취업도, 그리고 성규도 전부 다 막을내렸다.
부치지 못한 편지 |
'짠, 놀랐지. 오늘 네 생일이잖아. 태어나줘서 고마웠어. 우현아.' -네가 떠난 다음 해의 2월 8일에, 성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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