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쓰는 일기
by. SEIGE
글잡 "롕" 님의 "모범생이지만 속으로는 여주 씹어삼키고 남은 황민현 × 팔랑거리는 여주" 썰을 바탕으로 한 내용입니다 :)
https://instiz.net/writing/6049585
# prologue
Aso - Sleeping In ft. Harris Cole
“되게 신기하다.”
“응?”
“오빠랑 이렇게 길게 연애하고 결혼할 줄 몰랐는데.”
방안을 가득 메운 석양을 등진 여주가 민현의 얼굴을 훓었다. 나른한 시선과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현의 모습은 다정하게 다가와 일 없어도 보고 싶을 때 만나는 사이 해도 되냐고 물어온 열일곱 그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여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던 순간이었다.
처음 민현에 대한 여주의 감정은 여느 여자애들과 같이 단순한 동경에서 시작한 짝사랑이었다. 여주 역시도 공부에서는 뒤지지 않았지만 학교에 한 명씩 있는 모범생 민현은 여주에게는 다소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라고 느꼈다. 제가 뿜어내는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민현을 끌어들이는 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게 친구들과 장난치고 우당탕탕 학교생활을 하는 여느 또래와 다름없는 아이였다.
민현과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열심히 학교생활을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여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기계를 다루고 뜯어보는 것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 없었다. 걸음마와 말을 겨우 뗀 시절부터 제 엄마에게 등짝을 두들겨 맞는 일이 있더라도 뭔가 고장나면 꼭 뜯어서 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기계 덕후” 여주에게 온갖 방송 장비가 있는 방송부는 순전히 어서 오시라고 손짓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이 기나긴 사랑의 시작점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여주는 알지 못했다.
방송부에 입부하면서 이상하게 여주는 혼자 방송실에서 일하는 날이 많았다. 명분은 여주가 기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어쩌고 하는 것이 방송부장 옹성우가 주장하는 바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주는 그저 내가 좀 기계를 잘 다루나 싶어 으쓱할 뿐이었다.
“미친 새끼, 아무리 그래도 요새 드라마에서도 이런 설정은 욕 먹거든?”
“아 귀엽다. 그걸 믿어? 우리 기계덕후 아가씨 어떡하면 좋냐. 다른 새끼가 채가기 전에 얼른 데려가야 되는데.”
“그래서 언제 사귈려고 병신아.”
“새끼가 안 그래도 힘든데 불난 집에 부채질 하지 마라.”
“근데 여주 방송부에서 일 하는 거 보니까 니가 여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더라.”
“그치, 존나 귀여워서 잡아먹고 싶ㅇ...악!”
이거 또 시작이네, 1절만 해라 미친 새끼야. 오늘도 성우는 시도때도 없이 여주를 잡아먹고 싶다는 학생회장 민현을 뻥 걷어차며 니새끼 때문에 맨날 여주 혼자 떨어뜨리는데 여주가 언제까지 모를 것 같냐는 요지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민현 역시 여주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반듯한 겉모습과 다르게 속으로는 꽤 오래 전부터 여주가 자기 품에서 흐느꼈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좀처럼 가까워질 기회를 찾지 못했던 터였다. 여주가 학생회에 들어오길 바랐지만 본능적 기계덕후인 여주가 방송부에 가입하자 애꿎은 방송부장 탓을 하며 어서 여주와 만날 명분을 만들라고 성우를 들들 볶아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디 방송부장 뿐이겠는가. 여주와 친한 친구들 역시 민현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학생회장 황민현과 1학년 병아리 김여주 이어주기 프로젝트에 울며 겨자먹기로 동참해야만 했다.
여주는 그런 민현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민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들에 대한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학생회 일을 도와주는 것부터 시작해 카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바빠서 서로 얼굴을 못 볼 때면 괜히 주변인들에게 투덜거렸다. 학교 행사로 바빠 민현을 잘 만나지 못해 절친인 지훈에게 투덜거리던 어느 날, 민현은 점심시간에 혼자 방송실에서 음악을 틀고 있던 여주를 찾아와 다정하고도 확실하게 훅 하고 들어와 버렸다.
우리 일 없어도 보고 싶을 때 만나는 사이 할래? 길고도 깊은 사랑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여주 방송부 할 때 기계덕후 같아서 많이 귀여웠는데.”
“그럼 지금은?”
“말해도 돼?”
“뭔데.”
“네가 어른 되고서부터는 되게 섹시해졌단 거?”
아 어떻게 변태같은 건 고등학교 때랑 똑같아 황민현, 여주가 민현의 노골적인 멘트가 민망했는지 민현의 두 볼을 꼬집었다. 그렇지만 진심이야,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각자 다른 캠퍼스에서의 대학생 시절을 거쳐 서로의 일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들을 함께 보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사랑하고 있다는 게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열일곱 열여덟의 풋풋한 급식이였을 때에도 이미 알 것은 다 아는 민현 덕분에 어른의 연애애 눈을 떴지만, 정말 어른이 되어서 하는 어른의 연애는 급식이 시절의 연애와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여주도 먼저 적극적으로 스킨십이나 관계를 위해 먼저 다가오기도 하고, 어른스러워진 서로의 몸을 느끼며 몸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들이 좋았다. 처음 사귈 때부터 바깥에서 데이트하는 날보다 서로의 집 혹은 학교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해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서로에게 집중하기 좋은 공간에서 만나고 감정을 나누는 순간들이 소중했다.
“좋아해요.”
처음 자신에게 안길 때의 그 고백을 나긋하게 말하는 여주의 모습이 민현에게는 귀엽고도 농염하게 느껴졌다. 여주를 안기 전 민현은 좋아한다는 말이 이렇게 야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알기나 했을까. 평소에도 수줍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여주였지만 그 밤 자신에게 처음으로 안긴 여주가 달뜬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며 좋아해요, 라는 말을 힘겹게 뱉어냈을 때 민현은 여주에게 영혼을 바쳐야겠다 생각했다. 꽤 오래 전부터 귀여운 여주가 제 품에 안겨 흐느끼길 바랐던 민현이었지만 가쁜 숨과 함께 그 수줍은 사랑고백을 하던 순간의 여주는 그의 생각 이상으로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존재였다.
“응, 오빠도 많이 좋아해.”
민현을 향해 느리게 다가오는 여주의 입맞춤이 철없던 시절부터 긴 시간을 이어온 두 사람의 연애가 끝나는 순간을 알렸다.
인사 |
안녕하세요! 글잡에서 썰을 몇 번이고 읽다가 되게 풋풋하고 귀여운데 어른 같은 느낌이 저를 글쓰기로 이끌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썰의 내용을 보고 왠지 얘네들은 어른이 되어도 서로 좋아하고 결혼까지 할 것 같아서 함께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이미 써 놓은 내용들이 많은데 좀 더 다듬어서 하나씩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