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맥과대 김준면과 음탕한 도경수'의 후속입니다.
신新 인류의 사랑.
* 쑥맥과대와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 ep.1 운수 나쁜 날 -
[ 대통령은 지난 20일 동성결혼 법안에 서명해 대한민국은 25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SNS에 소식을 공유하며… ]
[ 어제 오후 1시 경에 의사당 앞에서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300여명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피켓을 들고 행진…]
[ 한편 과연 이 정도의 사회적 파장을 저지할 수 있는 대책이 있는 지 의문이라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적지않습니다. SBC뉴스, 김슬… ]
[ 신나는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동성결혼 합법화의 지지 단체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퍼레이드를…]
20XX년 9월 20일, 대한민국이 25번째로 동성결혼을 인정했다. 세계 최초로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는 2000년 네덜란드, 이후 2003년 벨기에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2005년에 캐나다와 스페인이, 2009년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2010년에는 포르투갈과 아이슬란드, 아르헨티나, 2014년에는 영국이 동성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했다. 그 후로 점점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국가가 유행처럼 늘어나더니 대한민국도 그 반열에 올랐다. 동성 부부의 혼인 신고율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그리고 스무살 김준면과 도경수는, 혼인신고서 작성 일주일 전 헤어졌다.
그 후 9년, 지금.
* * * *
반짝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 무지개빛깔 샹들리에. 잔잔한 음악. 굵직한 상아 기둥들. 호텔 입구부터 커피숍까지 가는 내내 엘레강스에 럭셔리하고 섬세하지않은 곳이 없다. 위축되지않으려고 일부러 고개를 뻣뻣히 세웠다. 어깨도 당당하게. 손발도 척척. 하지만 눈알은 이리저리 도록도록 쉴새없이 굴러가는 중이다. 듣기론 이런 곳은 커피 한 잔에만원 가까이 하던데. 썅... 미친거지, 미친거야.
“너 왜 갑자기 과묵해졌어? ”
앞서 걷던 영진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휙 뒤돌아봤다. 다행히 경수는 잘 따라오고 있는 중이다.
“선배는 내가 뭐 맨날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애인 줄 아나…”
“암튼 잘 해. 부친이 꽤 유명한 식품제조업 하다가 소유 부동산이 대박나서 졸지에 돈방석앉은, 말 그대로 졸부 집 셋째 딸이야.”
어디서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셋째 딸은 물어도 안 보고 데려간다고.
“알 만 하네. 그러니까 이런 호화스러운 호텔 커피숍에서 약속을 잡으셨겠지.”
“시끄러. 표정관리 잘 하구.”
인상펴고 활짝. 활짝 웃어. 영진이 손가락으로 경수의 볼을 쭈욱 잡아올렸다. 부드러운 우드 패턴의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원두 냄새가 물씬 풍긴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카라멜 냄새도 곁들어나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자 영진이 팔꿈치로 툭툭 치며 눈치를 준다.
“저기.”
영진은 슬쩍 손가락을 들고 한 테이블을 가르켰다. 터질듯 빵빵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 빗살무늬 토기처럼 갸름한 얼굴형, 짙은 쌍커풀, 오똑을 넘어서 뾰족하게 솟은 코. 아따, 첫인상 한번 징그럽네.
“슬미씨!”
이름은 그럭저럭 예쁘구만. 경수가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다가온 여자가 반갑게 영진을 끌어안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눈이 휘어지게 웃는 여자에게서 옅은 담배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덮으려고 뿌린건지, 아니면 냅다 들이부은건진 몰라도 역할 정도로 독한 향수 냄새가 났다. 저 여잔 지금 자기가 되게 존예이고 세련된 줄 알겠지? 쯧쯧. 속으로 혀를 차며 두 여자 사이에 서있던 경수에게 여자는 시선을 옮겼다.
“아아, 이 분이 그… 후배분?”
“응. 경수야, 인사해.”
슬미가 경수를 위아래로 스윽 훑었다. 나쁜 눈빛이 아닌 걸로 보아, 버릇인 것 같았다. 영진이 먼저 인사하라는듯이 쳐다봤지만 경수는 먼저 허리를 굽히지않고 서있다가 손만 슥 내밀어 악수를 건넸다. 도경수에요. 무뚝뚝한 인사에 여자가 한 템포 늦게 악수를 받았다.
“전 이슬미에요.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아메리카노 괜찮죠? 시럽은 안 넣었어요. 원두의 본연의 테이스티를 해치는 것 같아서 별로라.”
발음 완전 똥인데 왜 저리 영어를 섞어쓰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웃음소리마저 경박하고 괴기스러웠다. 경수는 화일철을 테이블에 얹어놓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 커피에 시럽 넣어야되는데... 게다가 아메리카노는 써서 싫어하고. 라떼나 카라멜 마끼아또, 모카같이 달콤한 걸 좋아하는데 다른 메뉴는 가격이... 메뉴판을 곁눈질로 훑는 경수의 허벅지를 영진이 살짝 꼬집었다. 슬미에게 집중하라는 뜻이다.
“얘가 진짜 센스하난 끝내줘. 이번에 그 국회의원 딸내미 드레스 디자인도 얘가 한거구. 그치?”
영진의 말이 틀린건 아니지만 국회의원 딸내미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해준게 마치 여태 해왔던 값진 커리어와 작업들을 묻히게 만드는 것 같아 별로다. 오히려 그 딸내미 드레스 작업 과정과 결과물이 제일 맘에 안 들었는데! 사사건건 참견하고! 예의없고! 매일 작업실에 찾아와 지켜보고! 개년! 영진은 분명 경수를 띄어주기위해 과한 오버를 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영진언니한테 많이 들었어요. 론칭한지 1년 좀 더 되셨고, 그 쪽 계통에서 제법 알아주는, 떠오르는 신예라구.”
‘제법’ 이라는 부사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칭찬인 것 같으면서도 기분더럽게 만드는 부사, 제법. 그저 말없이 웃어넘겼다. 여자는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기시작한다.
“영진언니가 말했겠지만 제 결혼식이 정말 러블리하면서도 사랑스러웠으면 좋겠거든요.”
러블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핫하면서도 뜨겁고 소프트하면서도 부드러운거?
“페이는 얼마든지 드릴테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드레스를 만들어주세요. 아, 혹시 턱시도도 가능할까요? 허즈밴드한테 입히고 싶은데.”
지랄. 허즈밴드는 무슨. 아휴, 빨리 커피나 마시고 일어나야지싶다. 서빙되어나온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들이마셨다가 다시 몰래 뱉었다. 웩! 오지게 쓰네. 타이어 삶은 물 같다. 이런 게 무슨 팔천원씩이나 한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경수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려댔다. 액정에 뜬 이름은 ‘z존멋찬열z’ 이다. 박찬열 이 자식. 나 몰래 또 바꿔놨네. 그나저나 찬열은 지금 스튜디오에서 촬영 진행중일텐데? 전화를 무시하자 받을때까지 할 모양인지 계속 전화가 울려댄다. 결국 슬미가 먼저 받으라는 식으로 손짓을 해보였다. 잠시 실례한다며 커피숍을 나와 넓은 홀을 가로지르며 전화를 받았다.
“나 지금 고객이랑 미팅중이야, 왜.”
- 언제 끝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방금 만났고 아직 구체적인건 시작도 안했으니까 대략 두세시간은 더 있어야할 것 같다.
“두세시간? 정확히 모르겠다. 촬영은 잘 되가고?”
- 그것땜에 전화했음. 지금 당장 스튜디오 올 수 있어?
지금? 당장? 고개를 돌려 영진과 슬미가 있는 커피숍을 보며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어려울 것 같은데… 저 여자는 경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 분명 자존심이 상해 기분나쁜 티를 팍! 낼 여자임이 분명했다.
“갑자기 무슨일인데? 급한일이야? ”
- 여기 싸움났다. 존나 피터지게.
신성하고 아름다운 웨딩 스튜디오에서 싸움? 그것도 존나 피터지게? 경수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종종 신혼부부들이 장시간 촬영을 하다가 예민해져서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하다가 고성이 오고가는 경우는 종종 있다만, 피터지게 싸움? 몰상식한 것들! 박찬열 피곤하게 생겼네.
“아, 짜증. 니가 알아서 적당히 말려봐.”
- 니는 내가 여태까지 가만가만 지켜보고만 있었을 것 같냐? 말려봤는데 이게 그냥 싸움이 아니걸랑. 어어, 어!!! 조명!! 조명!!!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스튜디오 상황이 폰 너머로 들려왔다.
“야, 기다려. 금방 갈께.”
- 되도록이면 빨리빨리!
썅. 오늘 일진 사납네. 싸울꺼면 몰래 차에 가서 싸우던가. 아님 집에 가서 싸우던가 남들 다 보는 웨딩스튜디오에서, 그것도 정성껏 디자인한 멀끔한 드레스를 입고 싸워제낀단말야? 개년놈들. 전화를 끊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나싶어 서둘러 다시 커피숍으로 향했다. 자리에 영진이 없었다.
“영진 선배는 어디…”
“언니 잠깐 화장실 갔어요.”
“정말 정말 죄송하고 경우없는 건 잘 알지만 제 샵에 문제가 생겨서 급히 가봐야할 것 같아요.”
“예?”
여자가 얼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고객인 날 두고 뭐? 감히? 니가? 하지만 어쩌랴. 불난 건 이쪽보단 스튜디오가 더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가방을 챙기며 화일철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화일철안에 제 명함 들었구요. 그거랑 같이 여태까지 작업했던 드레스랑 스냅샷 들어있으니까 영진선배랑 상의하셔서 연락주세요. 그럼 또 뵈요!”
“저기, 저기요!!”
경수의 깔끔하고도 군더더기없는 태도에 여자는 아무말도 못하고 인사를 마친 경수가 유유히 문을 향해 가는 걸 멍하니 지켜만 봤다. 영진에게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본다는 문자를 남기고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뒤늦게 자신이 영진의 차를 얻어타고왔음을 깨달았다.여기서 스튜디오 가려면 한참인데. 택시비 왕창 깨지게생겼네. 시불.
*
[강남의 한 고가도로]
“준면씨. 이 드레스는 머메이드 라인인데 어때? 마른 체형이 입기에 딱이래.”
“…….”
“엠파이어라인도 우아하긴한데 너무 힘없어보이고 또...”
조수석에 앉은 희연이 하이톤으로 열심히 떠들어대지만 준면은 눈길은 커녕 대꾸조차 제대로 해주지않고 묵묵히 운전만 한다. 눈치가 없는건지, 아니면 준면의 냉랭한 반응에 이제 인이 박힌 건지 희연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 맞다맞다. 내 정신 좀 봐. 결혼식 드레스보단 약혼 기념여행가서 입을 드레스를 먼저 봐야하는데.”
“…하아.”
약혼기념여행이라는 말에 한숨을 쉬며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차안으로 강하게 불어온다. 어두운 갈색 머리칼이 정신없이 흔들렸지만 다시 정리하지않고 미간만 팍! 찌푸린채 악셀을 좀 더 힘주어 밟았다. 이렇게 '너와는 결혼, 하물며 약혼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데 질리지도 않나. 자존심도 없나...
희연은 준면이 동성애자인건 커녕, 이미 오래전 혼인신고를 할 뻔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두 양가의 부모님이 만나 호호하하껄껄거리며 상견례도 한데다가 만약 입밖으로 그 얘길 누설했다간 절벽에서 콱 떨어져죽어버릴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어머니의 강력한 언질도 있었고 이번에도 니 마음대로 하다간 연끊을 각오하라던 아버지의 진지한 한마디가 진담 반 농담 반 같진 않았었다. 그냥 진담 그 자체!
그런 부모님은 조그만 금융업을 하는 아버지를 둔 희연과 준면을 서둘러 후다닥 결혼시키려 하셨다. 준면의 부모님은 아들이 동성인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공부만 하느라 여자를 만나지못해서이고, 아들의 '동성애'를 고칠 수 있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는 고지식한 관념의 사람이었다. 여자를 만나면 달라지겠지, 결혼하면 달라지겠지. 하지만 준면은 동성애가 정신병이 아님을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간, 결국 그저 모든 일이 다 부모님들의 뜻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배알이 꼴렸다. 게다가 희연은 준면이 딱 혐오하는 여자의 표본이었다. 일명 '척'하는 걸 좋아하는 여자. 있는척,잘난척,귀척,예쁜척 등등...
“준면씨가 약혼식은 하도 질색하길래 약혼 기념여행으로 일정 체인지했으니까 좋게좋게 가는거다? 헤헷.”
우웩. 헤헷이란다. 자신의 어깨를 쓰윽 쓰다듬는 손길에 준면은 마음같아선 멀쩡한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싶어졌다. 흥얼거리며 잡지를 계속 뒤적거리던 희연이 더 들뜬 하이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머! 이 브랜드 잡지에도 탔네? 하긴. 입소문을 많이 타긴했지. 준면씨 이 브랜드 알아?”
잡지를 집어들어 보여줘도 대꾸가 없자 희연은 아무런 내색없이 다시 쫑알쫑알댔다.
“1년전?인가 아무튼 론칭한지 얼마안된 웨딩 브랜드인데 브랜드명이 뭐였지...맞다, 디오꾸띄르. '아직 론칭한지 얼마 안 되어 샵은 국내 한 곳 뿐이지만 드레스를 꾸준히 생산, 관리할 수 있는 제작실이 있어 항상 최상의 드레스 컨디션을 유지한다' 흠. 뭐 론칭한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겠네. 이 잡지 믿을만한건가?”
그러던말던. 준면은 희연의 하이톤 목소리가 듣기싫어 이어폰을 껴볼까하다가 사고가 날까싶어 이어폰 대신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혔다.
“이 남자가 CEO겸 총괄 디자이너. 29살밖에 안 됐는데 안목이 장난아닌가봐. 드레스도 직접 디자인에 제작하고 조만간 편집숍도 낼 계획이래. 가격이 다른 웨딩샵처럼 비싸지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있다고는 들었는데 난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 그만큼 가치가 없어지는거같아서 별로더라. 디자이너 이름이 도경, 꺄악!!!”
갑자기 끼어든 배달 오토바이에 서둘러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뒷차가 안전거리를 꽤 넓게 유지하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다중으로 추돌사고가 날뻔했다. 배달오토바이는 잠시 비틀하더니 미안하다는 손짓 딸랑 해보이며 다시 제갈길을 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준면도 다시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어머머! 저 오토바이 뭐야 진짜! 흐유, 간 떨어지는줄 알았네. 어머? 내 잡지 어디갔지?”
급정거하며 손에서 날라간 잡지는 핸들 위쪽 유리밑에 깔려있었다. 안그래도 방금 사고날뻔한것때문에 예민한데 잡지까지 짜증나게... 준면은 인상을 팍 쓰고 조심히 손을 더듬거려 잡지를 꺼내 희연에게 건넸다.
“어디까지 읽었지. 아아, 여기다. 디자이너 이름이…도경수! 얼마 안 된 신예, 꺄악!!”
이번엔 차가 완전히 갓길에 멈춰섰다. 유리에 머리를 콩 부딪힌 희연이 울상을 지은채 갑자기 멈춰선 준면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가,갑자기 뭐야, 준면씨?! 아야야, 피나는거아닌지 몰라! 아휴, 아파...”
“…잡지, 잡지 줘봐.”
희연의 손에서 잡지를 빼앗듯이 가져가 꼼꼼히 들여다보더니 희연의 안전벨트를 푼다.
“미안한데 택시타고 가라. 내려.”
“뭐? 택시? 갑자기 내리라니 무슨,”
“빨리!”
정색하며 목소리를 높히자 희연은 울며겨자먹기로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린다. 희연이 내리자마자 준면은 미련없이 세게 악셀을 밟았다.
“…도경수.”
잡지에 적힌 '도경수'와 짧은 인터뷰 사진. 그 얼굴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이 되살아난다. 아득하다.
*
“꺄악!!! 야, 이 썅년아!!!!!!! 이거 안 놔?!!!”
“닥쳐!!!”
경수가 다급히 들어선 스튜디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난장판이었다. 넓직한 촬영스튜디오에 여자의 비명소리와 말리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그대로 웅웅 울렸다. 부리나케 달려온 경수는 이마의 땀을 닦을새도 없이 서로 할퀴고 머리채를 잡고 있는 두 여자에게 달려갔다. 턱시도입은 남자는 신랑인데 그럼 이 여자는 뭐지? 예비신랑은 두 여자를 뜯어말리다 뜯긴건지 턱시도의 여기저기가 툭툭 뜯어져있었다. 신부가 입은 드레스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아, 저 소재 비싼건데...
“다,다들 진정진정! 잠깐 놔봐요, 잠깐만!”
이미 말리고 있던 찬열이 뒤늦게 경수를 보고 인사를 하려다가 여자가 휘두른 주먹에 멀찍히 떨어져나갔다. 힘약한 여자 스태프들과 코디들은 차마 달려들어 말리진 못하고 몇몇 안되는 남자스태프들이 뜯어말리고 있었지만 싸우는 두 여자 모두 잔뜩 격앙된 탓에 어디선가 초인적인 힘이 뿜어져나오는 것 같았다. 이미 촬영소품은 무기로 쓰인지 오래고 커튼은 찢겨나갔으며 소파는 벌러덩 밑바닥을 보인채 드러누워있고 넘어진 조명의 유리파편들은 그대로 널부러져있었다. 주위 상황을 살핀 경수는 띵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 개년들! 저거 다 변상 안 하면 죽여버릴거야!
“야, 무슨일이야 이게?!”
싸움은 스태프들에게 맡기고 터진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는 찬열에게 다가갔다. 여자 스태프가 가져온 연고를 받아든 찬열이 길쭉한 손가락을 들어 한 사람씩 가리키기 시작했다.
“여자는 예비신부. 턱시도 입은 남자는 당연히 예비신랑. 그리고 저 여자는 신랑의 전 여자친구인데 엊그제 떡을 쳤대. 남자가 양다리. 웃긴 건 남자가 잘못했는데 왜 두 여자가 난리래. 으으, 쓰라려.”
“하아...”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뱉은 경수는 검은 머리칼을 한번 쓸어올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가 찌질하고 마음에도 안 들어 한 대 쳐주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참기로 했다. 아이고, 골이야. 둘 다 머리채를 잡고 있어서 무리하게 당겨봤자 절대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경수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손에 커다란 가위를 들고 나타났다.
“가위는 왜?”
“저 년들이 정신 못 차리고 저러니까. 정신 차리게 해줘야지.”
서늘한 눈빛으로 몇번 숙닥숙닥 가위질을 하더니 서로 머리채를 부여잡고 안 놓아주는 두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거침없이, 숭덩숭덩. 설마하던 스태프들이 일동 경악하며 숨을 죽였다. 여자의 생명인 머리카락을!!! 분명 머리채는 잡고 있는데 빳빳히 당겨오는 힘이 없자 서서히 두 여자의 고개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머리카락 뭉치가 나폴나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제 정신 좀 차렸어요?”
“야, 이 미친새끼야!!!!”
“꺄아악!!!”
두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이번엔 동시에 경수에게 달려들었다. 머리채가 세게 잡히자 빡이 돈 경수는 덩달아 지지않고 두 여자의 머리채를 동시에 휘어잡았다. 이 미친년들이!!
“이새끼가! 이거 안 놔?!!”
제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는 이유로 이번엔 신랑이 끼어들어 경수의 멱살을 잡아뜯기시작했다. 거기서 경수는 또 한번 빡이 돌기시작했고 찬열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두 여자의 손을 떼어냈다. 또 다시 여자끼리 싸움이 붙었고 추가로 경수와 남자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 새끼가 미쳤나! 어디서 남의 여자한테!!”
“그래! 나 미쳤다 어쩔래!! 남의 샵에서!!! 이 지랄을 떠는데!!! 안 미치면 정상이냐!! 시팔!!”
평소 조용조용하던 경수의 톤이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하자 남자는 쫄았는지 힘으로 경수를 제압하려들었지만 주변에 뜯어말리는 통에 경수의 멱살을 또 한번 휘어잡는걸로 그쳤다.
“뭐,뭐!?!? 시팔?!?”
“시팔이라 했다!!! 뭐 어쩔래!!! 니가 내 성격모르나본대!!! 너 나 잘 못 건드리면 살인나 이 새꺄!!!”
“이 쥐방울만한 새끼가 진짜!!”
남자가 주먹을 쥐고 경수의 얼굴을 향해 치켜드는데 누군가가 그 팔을 세게 움켜잡았다. 맞을 생각에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경수는 주먹이 내리꽂아지지않자 살며시 한 쪽 눈을 떴다. 눈 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의 등판이 참 듬직하고 넓은게 어디서 본 듯 한데...
“너,넌 뭐야!!!”
“……”
“아! 아아...”
말없이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신랑의 무릎이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간다. 움켜쥐고있던 팔을 내팽겨치자 분한 듯이 째려보다가 이내 두 여자를 뜯어말려 신부가 아닌, 전 여자친구를 데리고 바람처럼 휙 사라졌다.
“……”
그제서야 스튜디오가 잠잠해졌다. 바닥에 철퍽 주저앉은 신부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비통하게 엉엉 울어댄다. 아무도 말을 하지않은채 뒷수습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뻗친 머리와 구겨진 멱살을 정리한 뒤 눈 앞에 서있는 남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아무말없이 잠시 서있다가 도망치듯 스튜디오를 뛰쳐나왔다. 도경수!! 이름을 부르며 다급히 따라오는 구둣발소리가 들리자 따라오지 못하게 좀 더 빠르게 달음박질했다. 하지만 그에 맞춰 뒤따라오는 속도도 빨라졌다. 가슴이 아플정도로 심하게 두근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9년만에 보는 준면은, 여전히 무시무시하게 잘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