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인류의 사랑은 푸켓여행이 하이라이트라 앞 부분은 빠르게 쉭쉭 전개할게요!
- ep.2 재회 -
“…아! 아파.”
“그러길래 잘 뛰지도 못 하면서 왜 도망을 가.”
“……”
공원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폴폴 풍겼다. 평소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운동과 의절한 경수는 달리다가 방지턱에서 스텝이 꼬여 거리에 대자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바닥에 쓸려 피가 송글송글 맺혔다. 아파, 살살 좀 해. 손바닥에 조심조심 소독약을 뿌리는 준면에게 낮게 투정을 부렸다. 어색해죽을 맛이다. 도경수 이 한심한 놈. 왜 하필 거기서 넘어지고 난리야...아니지. 어차피 좀 더 달렸어도 준면에게 잡힐 모습이 훤했다. 학교다니던 내내 운동은 잘했으니까. 자책하며 쓰라림 플러스 쪽팔림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꼭 지 성격처럼 꼼꼼하게, 마치 응급실에서 처치받은것처럼 편의점에서 산 거즈와 반창고를 꽁꽁 붙혀줬다.
“다 됐다.”
반창고 껍질과 소독약을 다시 비닐봉지에 넣은 준면이 조금 천천히 경수를 마주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보고싶었어. 똘망똘망한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샵…어떻게 알았어?”
잡지에서 봤어. 인터뷰한거랑 니 사진보고 알았어. 그 말에 경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곰곰히 생각했다. 분명 면상 사진 넣는다는 말은 없었는데.
“나 이제 간다.”
그 눈빛을 먼저 끊어버린 경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왔던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어깨를 잡아오는 손에 걸음은 끊기고 말았다.
“얘기…좀 하자. 간만인데.”
뒤돌아 보이는 준면은 옅게 어색 가득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경수는 웃지않았다. 담담하다못해 냉랭한 표정이다.
“지금은 별로.”
마주보고 싶지가 않아, 아직. 그 말에 준면의 손이 천천히 어깨에서 떨어졌다. 미련없이 돌아선 경수는 조금 빠르게 걸었다. 타박타박. 더이상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지않는다. 돌아볼까? 아냐. 그냥 걸어 도경수. 돌아보지마. 아무리 궁금해도 돌아보면 안돼. 스스로 끝없이 다짐하면 걷다가 결국 골목을 돌기 전, 참지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
김준면은 아직 그 자리에 서있었다.
*
다시 돌아온 스튜디오는 아직 어수선하긴했지만 아까보단 정리가 되어있다. 그나저나 신부가 보이질않는다. 대걸레대를 들고 지나가던 스태프를 잡고 물었다.
“아까 그 신부는 어디갔어요?”
“저희가 잘 달래고 달래서 일단 집에 보냈어요. 기물파손한거랑 드레스 변상에 대해선 말 안 꺼냈고요, 연락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요. 수고해요.”
한낮에 마라톤 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에 위치한 개인작업실로 향했다. 작업대엔 스케치 용지들이 어지럽게 펼쳐져있고 바닥엔 천쪼가리와 실밥들이 군데군데 뿌려져있다. 구석탱이에 널찍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눈가를 벅벅 문댔다. 아, 손 쓰라려.
“……”
김준면...'언젠간 우연히 만나겠지'하고 생각은 했었는데 막상 만나고나니 되게 껄끄럽다. 이별한지 햇수로 9년. 준면은 경수의 첫사랑이었고 경수 역시 준면의 첫사랑이었다. 워낙 말수가 없고 조용조용한데다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교류한다는 것 자체에 큰 부담과 에너지 소모를 느꼈던 경수는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았다. 그렇다고해서 음침한 아우라를 풍기며 다녔던건 아니였고...
아무튼 초등학교를 졸업할때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이모가 사는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됐다. 말로만 듣던 뽀송뽀송한 서울애들. 그 틈에 껴있자니 아무리 기를 써도 위축되고 혼자만 겉도는 느낌이었다. 공부마저 못하면 시골에서 온 촌놈에 꼴통취급까지 당할까봐 성적은 그럭저럭 상위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서울애들은 갓 시골에서 올라온 놈이 상위권 성적이라는게 고까웠는지 못마땅하게 굴었고 중학교 1학년 2학기가 되었을때 서서히 겉으로 티를 내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왕따? 뭐, 그렇다고 울고불고 학교가기싫다고 떼쓰고 그러진 않았다. 그 또래의 다른 애들보다 성숙해서 '어휴, 병신들. 마음대로 하라지'하며 신경 안 쓰고 제 할 일하며 학교생활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처음으로 준면을 만났다. 준면과 같은 반이 되고 반장이 된 준면은 정직하고 착한데다가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하고 잘생기기까지해서 모든 사람이 좋아했다. 다른 남자애들이 이제 막 배운 욕을 쌍스럽게 구사할때 준면은 아침마당 아나운서처럼 옳고 곧은 말만 사용했다. 그런 준면은 주변 애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볼 만큼 경수에게 살갑게 굴었다. 담임 선생님한테 부탁해 자리를 바꾸지않나 굳이 가는 길이 반대인데도 같이 하교하자며 늘 옆에 딱 붙어걷질않나.. 경수는 처음엔 그저 자기가 혼자 지내는 모습이 불쌍해보여 그러나보다하고 넘겼다. 그러면서도 준면이 싫진않았다. 귀찮게 굴지도 않았고 딱 할말만 하고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고.
‘나 할 말 있어.’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식날이었다. 여느때처럼 같이 하교를 하는데 준면이 경수를 잡아세웠다. 그때 살았던 아파트 입구의 놀이터로 기억한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첫눈이 굵게 변하고 온 사방이 하얗게 뒤덮히던 때였다. 갑자기 할말이라니? 준면이 둘둘 말아준 목도리에 얼굴을 부비며 준면을 빤히 쳐다봤다.
‘…나 방학때 미국가. 아, 평생은 아니고 잠깐 방학동안만.’
‘그래? …아쉽네. 같이 못 놀겠다.’
‘……’
그때 준면은 오줌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다가 결심한듯 주머니에 쏙 들어가있던 경수의 손을 꺼내잡았다.
‘가기 전에 말할게.’
‘뭐를?’
‘나 사실 너 좋아해…것도 되게 많이.’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중학교 2학년 밖에 안 된 놈이, 같은 남자에게 저런 고백을 하다니. 용기넘치는 놈. 경수는 때아닌 고백에 아무말도 못하고 멍만 때리고 있었다.
‘나…이상해보여?’
‘아니. 평소 김준면으로 보여.’
‘…너는…어,어,어때?’
추워서 얼어있는 입이 덜덜 떨렸다. 그 모습이 바보같아서 비실비실 웃었다.
‘나도 좋아, 너.’
참 쉽게 사겼던 것 같다. 너무 군더더기없어서 이래도 되나싶을정도로. 아무튼 경수와 준면은 그 후로 좋게 좋게 고등학교 3학년까지 비밀스러운 연인관계를 이어갔지만 고3 졸업식날,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한 일이 터졌다. 졸업식이 끝나고 사진 찍,
- Because I’m happy ~Clap along if you feel~ ♬
아 쒯!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깜짝 놀라 눕혔던 몸을 퍼드득 일으켰다. 영진 선배에게 걸려온 전화다. 아마 갑자기 휙 가버린걸 질책하는 전화겠지. 안 받으면 받을때까지 하시는 분이라 한숨을 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선배, 진짜 미안,”
- 야 이 자식아!!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전화를 받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른다. 스피커폰을 안해놔도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이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걔 그냥 다른 데 알아본대. 중간에 내 입장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냐?]
“아휴, 진짜 미안미안. 내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게. 사랑해요. 끊어!”
뭐라 더 말을 못하게 전화를 뚝 끊었다. 오늘 일진 더럽게 사납다.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최대한 몸 사려야지. 소파에서 일어나 작업실 문을 닫았다. 자동으로 삐리릭하며 문이 잠기고 쓰라린 손바닥을 문지르며 1층 홀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네. 오늘 미팅은 더 없죠?”
“두 시간 뒤에 한세연 고객님과 미팅있으세요. ”
“아, 그래요? ……그거 박찬열씨가 만날거니까 미리 연락 좀 해줘요. 그럼 수고해요.”
박찬열도 공동대표니까 상관없겠지. 원래 제 할일을 남에게 넘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컨디션으로는 도저히 미팅 못 할 것 같다. 손바닥도 까졌고 구남친도 만나고. 게다가 스튜디오에선 맞짱도 뜨고. 맞짱이 끝나니 마라톤도 하고. 으으. 하루길다 길어. 샵에서 나와 바로 옆 건물 까페로 들어갔다. 빨리 입안에 단 걸 집어넣고 싶어서 아이스 라떼에 시럽을 다섯번이나 넣었다. 라뗴를 쪽쪽 빨며 주차장에 세워놓은 미니 쿠퍼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하아…”
집까지 운전하기 진짜 귀찮다…
* * * *
자켓을 벗어 조수석에 던지듯 내려놓은 준면이 모든 창문을 다 내리고 조금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
경수가 자신을 보던 그 눈빛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자신은 너무 반갑고 기쁘고 다시 설레이는데 경수는 그런 일말의 감정조차 들지않는걸까? 섭섭하고 서운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경수에게 그런 감정을 요구할 수 없다.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안 그랬다간 어디론가 소리소문없이 잠적하고도 남을 인물이었으니깐.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향하는데 자켓 주머니에서 벨이 울렸다. 이 상황에 하필 걸려온건 희연이다. 또 짜증이나기 시작했다.
“…왜.”
[준면씨,준면씨! 우리 그 약혼여행있잖아~ 아무래도 아까,]
“제발 그냥 알아서해. 나한테 묻지말고.”
투박하게 전화를 끊고 배터리까지 분리했다. 경수를 다시 만난 지금. 희연이 너무나도 밉게 느껴진다.
*
“알아서 하랬으니까, 뭐. 상관없겠지? 그나저나 다 마음에 드네.”
'디오꾸띄르'를 검색한 희연은 한참 블로그와 사이트를 탐색 중이었다. 분위기와 작업샷들이 하나같이 희연에 마음에 쏙 든다. 마음을 굳힌 희연은 사이트를 통해 알아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미팅 예약 좀 하려는데요. 모레쯤이요.”
아무래도 약혼여행 촬영은 꼭 이 스튜디오에서 해야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