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네요 땅이 젖고 산이 젖고 나무들이 젖고 나는 그대에게 젖습니다 어느 유명한 시의 구절처럼 나는 그대에게 젖어들었지요. 아니 그대가 나에게 젖어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젖어든 그대는 어느새 내 마음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나뭇잎에 물이들기 시작했고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도 물들어갑니다. 오늘도 설레어요, 그대 생각에. 링거를 끌고나와 병원에 꾸며진 작은 정원으로 갑니다.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가 여기서 뭐해-"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 온 그대가 내 두손을 잡고 나를 일으킵니다. "희철쌤.." "춥다, 들어가자. 으이그 가디건이라도 입고나오지" 흰 가운을 입은 그대는 오늘도 멋있습니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간질거림에 여전히 그대에게 잡혀있는 한쪽 손을 괜히 꼼지락 거려봅니다. 춥다니요, 그대와 함께할땐 언제나 따스한 기운이 내 주위를 맴도는걸요. 어렸을때부터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일년에도 몇 번씩 입원을 해야했지요. 스물 둘인 지금도 입원중입니다. 그리고 삼년 전, 스물 일곱의 의사선생님 김희철을 만났습니다. 그때의 김희철도, 서른살의 김희철도. 언제나 눈부신, 내 마음에 젖어든 한 사람. "아가 잠은 잘 잤어?" 병실 침대에 날 앉힌 그대가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치며 물어옵니다. 손을 들어 가만가만 머리를 쓸어주며 다정하게 내 눈을 바라보는 그대가 좋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대가 싱긋 웃습니다. 웃을때 하트모양이 되는 그대의 입술을 멍하게 바라봅니다. 길게 파이는 보조개도 눈에 들어옵니다. 두근거려요, 그대의 모든것이. 스물 둘의 박정수를 서른의 김희철은 아가라고 부릅니다. 처음엔 박정수 환자였던 호칭이 박정수씨, 정수야, 그리고 아가로 바뀐걸 보니 제법 많은 시간을 그대와 함께 했나 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시간동안 꽁꽁 숨겨왔던 마음을 이제는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 요 며칠 동안 깊이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해도 될까 매일 밤 망설였기 때문이지요.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날 따뜻하게 해주는 그대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삼년동안의 사랑이 나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길. 좋아해요 김희철은 바쁩니다. 아침에 잠깐 본 이후로 하루종일 보지 못했습니다. 침대에 앉아 발을 꼼지락거립니다. 애꿎은 침대시트를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합니다. 좋아해요. 입안에 머금고 있을 뿐인데 온 몸에 녹아드는 달콤함에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잘 할 수 있겠지요? 희철쌤 좋아해요. 많이. 이 말. 침대에서 내려와 링거를 끌고 문앞까지 갔다가 다시 뒤를 돌아 옷장으로 갑니다. 먹색 가디건을 꺼내 어깨에 걸치고는 꼭대기 층에 있는 실내정원으로 갑니다. 아직 8시밖에 안됐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긴 의자에 앉아 또 한번 되뇌어 봅니다. 좋아해요.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아가 어디야] [저 실내정원이에요] 문자에 답을 하면서도 마음이 떨려옵니다. 심호흡을 하며 애써 진정시킨 마음은 김희철의 얼굴을 보자 다시 쿵쿵거립니다. 내 옆에 앉아 날 바라봅니다. 그렇게 쳐다보면 나 정말-.. "저기.. 쌤" "응 아가" 좋아해요 "좋아해요" 많이 "많이" 하루종일 연습한대로 내 마음을 전해봅니다. 예쁜 편지지에 정성을 담아 연필로 꾹꾹 눌러쓰듯 그렇게 정성들여 내 마음을 말했지요.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가디건의 소매자락을 만지작 거립니다. 부끄러움에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아가 나 봐봐." 큰 손이 내 볼을 감싸옵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언제나 다정한 그대의 눈빛. 지금도 그 언제나와 같은 눈이면.. 나 조금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아가-" 다정하게 날 바라보던 눈이 감기고 웃을때 하트모양이 되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감싸옵니다. 얼마안가 쪽 소리가 나며 떨어진 입술에 이제서야 정신이 듭니다.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지요.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나도 고개를 숙인채 큭큭 웃습니다. 행복합니다. 나와 그대가 같은 마음이었다는게. "연애하자. 우리 연애하자 정수야"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나 달콤해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대가 감싸고 있는 양볼을 부풀렸다 푸우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싫어? 한숨 쉬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부끄러워서.." 싫다니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좋습니다. 고개를 번쩍들고 도리질 치는 날 보며 그대는 한번 더 크게 웃습니다. 나도 좋아, 좋다 아가. 달콤한 말은 덤입니다. 그대가 나에게 젖어듭니다. 나도 그대에게 젖습니다. 쪽쪽 이마에 눈에 코에 볼에 차례차례 입을 맞춰 오는 그대가 따뜻합니다. 입술에 쪽쪽쪽 잘게 여러번 뽀뽀하더니 갑자기 깊숙하게 입을 맞춰 오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고개를 틀어 내 입안 전체를 감싸오는 그대의 목을 감싸 안습니다. 그대와의 첫키스는 참 달았습니다. 삼년을 참아 온 마음이 안타깝지 않을 만큼. 사랑합니다,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