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님! 왜 이러십니까.. "
" 아이참, 백현이 너도 참 딱딱하구나. 몰래 나가는것이 그리 무서우냐? "
몰래 나가는 것은 둘째치고 이 차림새가 문제입니다! 백연의 말에 백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현이 지금 입고있는 옷은 여인네들의 복식이었다. 길고 넓은 소맷단에 화려한 꽃모양이 수놓아져있는 노란 빛깔의 의상은 하얀 백현에게 아주 어울렸다. 왜그러느냐.. 아주 잘어울리는데.. 색깔이 맘에 안드는 것이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얄밉게 웃는 백연의 모습에 백현은 뒤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머리도 곱게 풀러 옆쪽을 살짝 꼬아 뒤로 넘겨 작은 진주 장신구로 고정을 시켰는데 그 모습 퍽 명문가 아가씨 같아 이질감이 없었다.
" 누님, 아버지께 들키기라도 한다면 분명 경을 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제발 장은 혼자 구경하십시오! 아니면 단이라도 데리고 가시던가.. "
" 에이, 이 딱딱한 것! 네가 태어나고 저 뒷채에 갇혀 바깥구경을 못한 것이 이제 거의 17년이 다 되간다! 너는 억울하지도 않느냐? "
" 누님.. 그것은 제가.. "
" 네가 쌍생의 아이라서? 또 한명의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눈을 감지 않았느냐! 아버지도 참으로 무심하시다.. "
어느새 눈물을 지어 소매폭으로 눈물을 닦는 백연을 보며 백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현나라가 세워지고 백현의 아버지는 무관으로써 나라 건국에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첫째 딸 백연이 태어나고 가문을 이을 사내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을때 마침 백현의 어머니인 항부인이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나 태어난 아이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현나라에서 쌍생은 가문을 멸하게 한다는 좋지않은 징조였다. 거기다가 악재는 겹쳐 어렵게 태어난 아들이 쌍생인것도 모자라 둘중에 한 아이가 울지도 못한채 태어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
당연히 백현은 액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 칭해졌고 차마 자신의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 정 많은 백현의 아버지는 집안의 뒷쪽에 작은 별채를 지어 백현을 그곳에서 키우게 했다. 다행히 항부인이 또 다시 아이를 잉태하여 셋째아이는 아들을 순산하였다. 하지만 백현은 밖에 나가지도 못했고 쭉 뒷채에 갇혀 곧 가까워져 오는 자신의 생일까지도 혼자 외로히 보낼 것이라 그리 생각했는데 갑자기 백연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백현에게 여인네의 옷을 주며 입으라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싫다싫다하던 백현도 이리하면 몸 아픈것도 덜해지고 액운도 가신다더라 하는 말에 솔깃해 여인분장을 해버렸는데 곱게 분까지 바르고 입술연지까지 칠하자 밖에 나가자니... 백현은 뒤로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 누님.. 울지마세요.. "
" 나는 네가 이리 여기서 있는 것이 안쓰러 그런것이다.. 사내의 복장을 하면 나가는 도중에 종들에게 다 들킬것이 아니냐! "
" 그렇지만 누님.. 이 차림은 제가 너무 창피합니다.. "
" 뭐가 어때 그러느냐! 아주 어여쁘다.. 그것도 아주 어여쁜 명문가 아가씨같다, 내 여동생이라 해도 믿을 것이야! "
백연의 꼬임에 백현은 이미 살랑살랑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다시는 못나가볼텐데.. 백연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현의 손을 덥썩 잡은 백연은 뒷채를 밝혀주던 촛불을 후하고 끄곤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어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
" 누.. 아니, 언니! 좀 천천히 가십시오! 다리가 아픕니다.. "
" 참말로 느리구나.. 뭐가 아프다 그러느냐! "
" 여인네의 신발이지 않습니까! 전 이리 굽이 높은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
여인네의 신발이 이리 높고 아픈 것이었다니 백현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백연은 그런 백현을 잡아 끌었다. 이것들은 보거라 백현.. 갑자기 백현의 이름을 부르던 백연은 인상을 찢부리고 곰곰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누.. 아니 언니? 왜그러십니까? 그런 백연이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된 백현은 백연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걱정했지만 꼼짝도 하지않았다.
" 그렇지! "
" 악! 참으로 놀라지않았습니까!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셔요.. "
" 백현이라는 이름은 너무 사내아이같다, 잠시동안 네 이름은 백아다 백아. 변백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
" 아니 무슨 이름마저도 그리 바꾸시면! "
" 그러니 잠시라고 하지않았느냐.. 백현이라 하면 너무 사내아이같지않느냐?, 알겠지? 너는 지금부터 변장군님댁 둘째아가씨 변백아 이니라? "
백연의 말에 백현은 거의 울기직전이었다. 고집스레 그리해야한다 고개까지 끄덕인 백연이 백현의 어깨를 잡고 뚫어질듯 쳐다보자 백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여장에 이름까지 여인네 이름이라니..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한숨을 푹 쉬자 백연은 백현의 손목을 잡아끌어 걷기 시작했다.
백현이 당황스러움을 뒤로한 채 처음 나와서 본 세상은 너무나 반짝거렸다. 알록달록 이쁘게 달려진 연등과 이리저리 바쁘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새콤달콤한 과일냄새가 좋았고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놓고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마저도 너무 정답게 느껴졌다. 새삼 이런 세상을 자신은 모르고 살았구나 라는 생각에 백현은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가두었어도 매일 찾아와 얘기를 나눠주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웃음지었다. 백아야! 이것을 보거라 참으로 어여쁘지않느냐? 백연이 보여준것은 여인들의 머리 장식품이었다. 눈까지 반짝거리며 말하는 백연을 보자 백현도 기분이 좋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예, 참으로 어여뻐요. 언니에겐 이것이 잘어울릴듯한데.. "
한참을 눈을 굴려 구경을 하던 백현이 푸른색 자수정이 알알히 박힌 머리 장신구를 들어 백연을 향해 돌아보자 백연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백연이 없다. 순간 당황한 백현이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백연을 찾기 시작했다.
" 아까 아씨 옆에 계시던 그 아씨라면 다른 것을 보신다며 술시에 대문앞에서 만나자 하시곤 가셨는데... "
" 아... 정말입니까? "
" 예, 참말이지요. 아씨께서 장신구 구경을 하시느라 대답까지 하셔놓곤 정신이 없으셨나봅니다. 하하 "
사람좋게 웃는 상인을 따라 미소지은 백현은 당황스러움에 다리를 동동 굴렀다. 장신구 구경에 빠진 것은 자신이지만 그래도 이리 여기에 세워놓고 가버리는게 어디있나 싶어서 백현은 입을 삐쭉거리기까지 했다. 이리되면 자신은 혼자가 아닌가.. 역시 천방지축 누이의 심성은 어쩔 수없다 싶어 백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머리 장신구를 내려놓은 백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까 누님이 조금 챙겨준 돈이 있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손에 꾹 쥐고만 있는데 순간 누군가와 부딪힌 백현이 뒤로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가지고 있던 주머니도 놓쳐버리고 무서움에 눈을 꼭 감았다 뜨는데 눈 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 괜찮은것입니까? "
" 아... "
고개를 들어 바라본 남자의 생김새는 참으로 사내다웠다. 키도 크고 덩치도 제법 있는 것이 백현이 항상 꿈꿔오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한참을 남자를 바라보던 백현이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흙바닥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을 잡자 백현의 조그만한 손이 남자의 손에 폭 잡혀버렸다. 여기는 너무 복잡한거같은데.. 이리저리 한적한 곳을 찾던 사내는 백현의 손을 꼭 쥐곤 장소를 찾은 것인지 그곳으로 이끌었다.
몸이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작은 골목에서 남자와 마주한채 숨을 고르고 있던 백현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 말하는데 문득 백연이 준 주머니가 없어진것을 깨닫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울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쩜 좋아.. 작은 백현의 속삭임을 들은 것인지 남자가 상체를 숙여 백현과 얼굴을 마주한다.
" 왜.. 그러십니까? "
" 그것이.. 주머니가 없어졌습니다.. 그곳에 돈이 들어있는데... "
" 아.. 저랑 부딪히셔서? "
남자의 말에 백현은 눈을 크게 뜨고 아니라며 손까지 저었다. 저의 부주의지요.. 그 모습에 남자는 풋하고 미소를 지었고 그런 남자를 백현은 어이없다는듯이 바라봤다. 내가 물건이 없어진 것이 이 사내는 그리 즐거운것인가.. 야속한 마음에 백현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 얼마정도를 잃어버리셨습니까? "
" 저도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장에 온다하여 언니가 쥐어준 것인데.. "
백현을 보며 미소를 지은 남자가 겉의복을 살짝 들어 주머니를 꺼내 백현의 손에 쥐어주었다. 제법 묵직한 것이 큰 돈이 들어있는거같았다. 이게 무슨..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를 바라본 백현이 입술을 꼭 깨물자 남자가 웃어보였다. 저때문에 잃어버리신것이니 보상하는 것입니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긴장한 백현은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남자에게 주머니를 들이밀었다. 이리 큰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잃어버린 돈은 이것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단호한 백현의 표정에 남자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백현의 손을 내렸다.
" 제 이름은 찬열입니다. "
" 예? 그것을.. 어찌 제게... 알려주시어요? "
" 성함을 알려주신다면 제가 나중에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가겠습니다. "
" 제.. 이름이요? "
백현은 머뭇거렸다. 찬열이라는 이 남자는 자신이 여인네인줄로만 알텐데.. 어쩌면 오늘이 지나고 나중이 된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머뭇거리는 백현을 보는 찬열의 눈빛은 참으로 따스했다.
자신이 태어나 사는 동안 이리 하얗고 얇은 여인네는 처음 본 것같았다. 노란 복식이 잘어울렸고 조그마한 머리를 자꾸 쓰다듬어주고싶었다. 꼭 깨물어 빨개진 입술은 아름다웠고 입술선은 유려했으며 머릿결 또한 고왔다. 어찌하여 이런 여인을 자신이 처음 봤는지 명문가의 여식이라면 분명 자신이 보았을텐데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 백아... "
" 응? "
" 변백아 이옵니다.. "
수줍게 속삭이는듯한 그 이름을 찬열은 중얼거렸다. 변백아.. 변씨라면 변장군 집안의 여식이란 말인가? 어쩐지 좋은 집안의 여식인 티가 난다 하였는데 변장군에게 이리 어여쁜 여식이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찬열이 한참을 뚫어져라 보고있었을까 백현은 그의 눈빛에 어쩐지 가슴이 뛰는듯하여 가슴팍을 꼭 쥐었다.
그 순간 골목 안에서 뛰쳐나오는 아이가 백현의 등을 밀었고 그대로 찬열의 품안에 쓰러지게 되었다. 아.. 백현의 팔뚝을 꼭 잡은 찬열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향긋한 분내음과 백현의 향기라 생각되는 달큰한 냄새가 찬열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두근거리기는 백현도 마찬가지였다. 너른한 가슴팍에 안겨버린 꼴이 되어서는 꽉 잡힌 팔뚝이 데인것마냥 뜨거웠다.
" 안.. 다치셨습니까? "
" 예.. 덕분에.. "
낮게 내려앉은 찬열의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떤 백현이 맞닿은 몸을 떼곤 다시 반대쪽 벽에 찰싹 붙었다. 붉어진 뺨을 들킬까 싶어 백현이 손등으로 꾹꾹 누르는데 찬열은 그런 백현의 모습도 아주 어여뻤다. 꼭 수줍은 꽃같았다. 제게 있는 수많은 여인들이 화려한 장미같았다면 백현은 소담한 연꽃같았다.
둘 사이는 아주 조용했지만 마음은 그리 조용하지못했다. 백현은 쉴새없이 뛰는 가슴에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것만 같았다. 후하고 숨을 내쉰 백현이 고개를 들어 찬열과 눈을 마주했다. 내 이 사내를 또 볼 수 있을까.. 떨리는 눈으로 찬열을 바라보던 백현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곤 제 품에 달려있던 청빛 노리개를 찬열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시 만나면.. 돌려주시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 백현이 그대로 찬열의 주머니를 가지고 멀리 뛰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한건지 한참을 뛰어 대문앞에 서있는 백연을 마주하자 자각이 되었다.
" 어머,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붉은 것이냐? "
" 예? 어.. 뛰어서 그런가 봅니다! "
백현을 수상적게 보던 백연은 새초롬하게 칫소리를 내곤 백현의 손목을 잡아 다시한번 발뒷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고양이마냥 뒷채로 걸어들어갔다.
***
한참을 백현의 뒷모습과 노리개를 번갈아 바라보던 찬열은 노리개를 손에 꼭 쥐었다.
" 전하, 이제 그만 궁안으로 들어가셔야 됩니다. "
" ..... 내게 딸린 비가 몇명이지? "
" 비는 아직 두분이십니다. "
언제부터 지키고 서있었는지 뒤쪽에서 나타난 종인이 조용히 말했다. 변장군을 불러들여, 결혼준비를 해야겠군. 아주 성대하게.. 눈을 감고 노란 백현의 잔향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