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환]
한빈아 전화받아.
제발..
[시간]
상대방이 받지 않아 음성 소리함으로 연결됩니다. 삐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멈추면 이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김한빈, 왜 이럴때만 안 받는거야.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알고있었다. 김한빈이 받지 않을 거란 것을. 그래도 이 전화만큼은 받아줬으면 했다. 까만 핸드폰화면이 조용했다. 이러는거 미련이겠지. 지금 한빈이는 일하느라 바쁠 것이다. 어쩌면 상사에게 쪼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는 한빈이지만, 이번에 이상한 상사가 들어왔다고 했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에서 시작되는 얇은 튜브선이 흔들렸다. 큰 수액옆에 달린 항생제, 그 자그만 병은 어느새 비어있었다. 갈아야겠다.
김진환 환자!
때마침 저기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약 먹을 시간이에요! 간호사였다. 얼른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입안 어딘가가 썼고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너는 점심시간도 바쁘구나 한빈아. 나는 이제 정말로 칭얼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빈이도 많이 힘들텐데 나까지 약하게 굴면 안되니까. 김한빈은 분명 나한테 힘들다고는 못하고 뒤에서 끙끙댈것이었다. 간호사가 급하게 달려와 내 손을 끌었다. 추운데 왜 나왔어요. 나는 한빈이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받았으면 나 힘들어, 보고싶어, 라고 징징대는 통화가 될게 뻔했다.
이미 상태가 많이 안좋아요. 왜 이태까지 안왔던 거에요?
안 아팠어요? 그때, 담당의사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었다. 나는 MRI 사진을 보고있었다. 배 중간에 하얀 것이, 동그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큰일날뻔했는데, 괜찮으세요? 무감각한 내 표정에 의사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무통증은 아니에요. 나는 꽤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생각했다. 안 아프기는. 너무나 아파서 오히려 아픈게 아닐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간호사가 당장 병실을 예약했다고 옆에서 말했다. 나는 목에 걸린 숨을 뱉어냈다. 시선을 사진에서 뗄 수가 없었다. 암. 저게 암이구나. 그 극심한 고통이 몰아쳤던 잠시 전의 상황이 문득 떠올랐다. 집에서 나는 분명 아무 일도 없었었다. 평소와 같았고, 한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없는 티비채널이나 돌리면서. 근데 갑자기 고통이 찾아온 것이었다.
....어, 윽! 으으..! 악, 하, 아으으....!!
누군가 긴 창을 가지고 배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집은 비어있었고, 나밖에 없었다. 배가 뚫린 것만 같았다. 피와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오는 듯한 통증이었다. 나는 바닥을 기며 고통속에 신음했다.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온몸이 떨렸다. 아무도 없는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이러다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그렇게 한참을 고통속에 뒹구다가, 나중엔는 한빈이, 한빈이를 떠올렸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겨우 잡았다. 단축번호 1번 김한빈. 전화창을 여는 것뿐인데도 1시간 가까이를 썼다.
윽, 흐, 흐윽..악, 아아아..
1번을 누르고 전화를 하려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한빈이에게 먼저 알리지는 말자. 안그래도 마음은 여린애인데 얼마나 놀라겠어. 안그래도 나 때문에..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이제까지 극심한 통증속에서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마구 흘렀다. 나는 119에 전화를 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살려달라고만 소리치니 구급대원은 위치추적테니까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했다. 주변 큰 병원에 연락을 준다고 했다. 그러고 전화가 끊겼다. 고통은 가시지 않고 계속 커져만 갔다. 왜 이렇게 아픈거지? 나 뭐 잘못된 건가? 눈앞에 핸드폰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어둠이 찾아왔다가 물러났다가도 했다. 이제 엠뷸런스가 올테였다. 다행이었다. 정신이 끊기기 전에 전화해서.
김진환! 진환이 형!
아침만해도 깔끔했던 한빈이의 정장차림은 다 흐트러져 있었다. 뛰어라도 온건지 겉옷은 손에 걸쳐있었다. 흰 셔츠위의 넥타이가 한빈이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형,아파? 어디가 아픈거야? 괜찮아? 왜 말도 안했어..! 한빈이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이것저것을 물었다. 같은 병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않고 대뜸 침대에 걸터앉았다. 걱정하는 듯한, 정신없는 눈빛은 병원복을, 손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 괜찮, 그때에 한빈이의 손이 볼에 닿았다. 손이 따듯했다. 아냐...괜찮대. 갑자기 그런거야. 나는 왜인지 부끄러워져 시선을 떨궜다. 손목위의 튜브선과 바늘, 테이프가 보였다. 그리고 침대위의 한빈이의 다리가 보였다.
형 진짜..
울먹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빈아? 한빈이는 울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괜히 마음이 아파왔다. 니가 왜 그런 표정을 하는거야.. 그 표정은 네가 나를 처음 봤을 때 지은 것과 같았다. 내가 살려달라고 했을때 네가 보였던 그 표정. 그때에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빗방울은 자꾸만 옷을 적시는데 나는 잘 곳이 없어 마냥 헤매고 있었었다. 그래. 분명 비가 오고있었다. 그때 내가 너를 보지 못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너는 우산을 하나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요, 저 부탁 하나만 하면 안될까요..?'
'...?'
'조금만, 저 조금만 살려주세요..'
점심도 약도 그저 대충 먹었다. 윽, 복부에 또 통증이 일었다. 이제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게 온 몸으로 느껴졌다. 배 중앙에서 시작된 통증이 점점 몸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저번에 말한게 3개월 남았댔지. 나는 다시 날짜를 세었다. ....한달. 이제 한달이었다. 속이 뒤집히는 듯해 헛구역질이 났다. 눈물이 마구 났다. 한달.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 고통속에 나는 병원복을 꽉 잡았다. 어느새 끙끙대는 소리를 듣고 온 간호사가 문을 열었다. 손에 진통주사가 들려있었다. 한달남은 말기 환자에게 보통 진통제를 쓸리는 없다는것은 이미 알고있었다. 저거 아마 마약성분도 들었겠지.
윽, 으으! 시..싫. 악, 아아,
제대로 된 말이 나올리가 없었다. 간호사는 조금만 참으세요 하고선 내 팔을 잡아 들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약같은건 지긋지긋했다. 시간을 갉아먹기만 하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팔에 꽂아 넣었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따라 왜이렇게 애같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알고 또 예상하는데도 왜 이리 다 부정하고 싶을까.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건 알고있었다. 진통제가 금방 몸에 퍼졌다. 고통이 가신 자리에 급하게 오르내리는 숨소리만이 남았다. 또 눈물이 났다.
....한빈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제 널 정리해야 할지도 몰라. 그 날 이후에 병원에 있은지도 이제 1년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은 닳아가고 있었다. 한빈이에게 다시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화면에 뜨는 부재중 20개. 아까 점심시간 그 뒤에 계속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미안했다. 한빈이는 나 때문에 정말 필요한 것을 뺀 모든 월급을 병원비로 내고있었고 나 때문에 더 쉴새없이 주말까지 일하고 있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전화도 눈치보면서 했을게 뻔했다. 그냥 문자 하나만 해도 괜찮은데. 그 때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진환이 형! 나 이제 형 보러 가고있어.
한빈아
밥은? 약은 잘 먹었어?
...으응.
오늘 내가 뭐 사가게?
음..맛있는거?
어떻게 알았어. 좀만 기다려.
응. 천천히 와 운전 조심하고..
알았어. 형. 보고싶어.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고서야 알았다. 한빈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는걸. 간호사가 상태를 체크하러 병실에 들어왔다. 또 아프셨다면서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이제 습관에 가까웠다. 거짓말 마요. 간호사가 말했다.
'형 우리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자꾸 이렇게 나올꺼야?'
저번이었나. 나한테 왜이렇게 잘하냐고, 한빈이에게 소리 친 적이 있었다. 한빈이의 주머니에서 병원비가 적힌 종이를 발견한 날이었다. 꽤 유능한 직장에서, 높은 직위에 올라 있는 한빈인데도, 그애의 월급보다 병원비가 더 컸다. 나는 무서웠다. 나 때문에 한빈이가 힘들어 할까봐,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을까봐 걱정이었다.
'병원비? 형이랑 결혼할꺼니까 괜찮아.'
한빈이는 따듯했다. 내가 살아온 삶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윽,흐...한빈아..한빈아..
..그런데 너는 어쩌다 나를 사랑하게 된거야. 난 너한테서 뺏어가기만 하는데. 한빈이가 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빈아, 너는 언제까지 나를 찾아올 수 있을까. 나는 남은 시간보다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모든 것을 놓고 마냥 기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시 잡아야했다. 나는 한빈이에게 절대 말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빈아 나, 죽기 싫어, 더 살고 싶어. 마음속에서만 하는 이말을. 나는 앞으로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