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sychic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은 김성규를 포함해 모두 80명이었어.”
“….”
“알아들어? 누군가는 네 재수 없는 애인새끼의 자리를 메꿨을 거란 말이야.”
“….”
“잘 봐둬. 이게, 우리가 빠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야.”
현재까지 확인된 시체 80구, 141명의 부상자. 처참히 무너진 공항의 모습을 내비치는 화면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자막으로 지나치는 사망자 명단에 익숙한 이름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폴리스라인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어쩌면 지금 느끼고 있을 참담한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남은 삶을, 어쩌면 영원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성규의 목숨을 대가로 빼앗은 누군가의 삶. 그는 어머니, 아버지, 누군가의 형제, 자매, 애인…수도 없는 관계의 존재에 얽혀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현은 밀려드는 괴로운 생각을 삼키고 애써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눈을 감았다. 성열이 태우는 매캐한 담배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오는 것도 같았다.
타임 패러독스, 뒤바뀐 죽음.
“회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하룻강아지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도전으로 볼 수도 있겠지.”
조금 전 벌어진 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창한 날씨에 늦은 봄바람이 열린 창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우현은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아늑한 방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요한 햇볕이 슬그머니 다가와 곱게 잠든 침대 위의 성규를 비춰 내렸다.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포개고서 미동도 없는 그 모습이 마치 숨이 멎은 것만 같아서 우현은 괜한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을 성열의 시선이 따랐다.
“그렇겠지. 넌 멍청하니까.”
실컷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나풀대는 성규의 머리칼을 조심히 쓸어 넘기던 투박한 손이 안쓰러운 왼뺨의 흰 거즈 위로 내려앉았다. 우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벌어진 상처에서 새어나온 옅은 피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라져갔다. 조용히 기도를 외우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죽게 두었더라면, 그 자리에, 그 순간에 가지 않았더라면. 싸늘한 시체로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면,
“살 수 없었을 테니까.”
“너 그런 얼굴로 그런 토 나오는 말을 잘도….”
성열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내가 말해서 뭣해. 습관적인 생각이 뒤따르고, 다음은 늘 그렇듯 하염없는 후회들로 들어찼다. 우현과 공항으로 향하던 길, 여행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행복하게 웃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맑게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조막만한 머리통,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르는 길을 함께하려는 노부부의 애틋한 모습, 출장 가는 남편을 배웅하던 아내, 딸을 유학 보내며 눈물짓던 나이 지긋한 부모…. 누구였을까. 성열은, 우현은, 그리고 성규는 그들 중 과연 누구의 삶을 빼앗았을까.
-
텅 빈 대기실이 익숙하지 않아서 성규는 허전한 뒷목을 쓱쓱 매만졌다. 얼마 전 우현과 함께한 휴가지에 팩스로 날아든 일방적인 사표를 수리하고 난 상담사무소의 낡은 프론트는 계속 빈자리인 상태였다. 후임 비서가 나타나기도 전에 인수인계를 거부하고 잠적해버린 탓이었다.
“사람 참, 그렇게 안 봤는데.”
겨우 몇 달이지만 그래도 함께 지낸 날이 꽤 있답시고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며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했던 것인지 되짚어보는 성규였다. 워낙에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탓에 지나가는 어느 날에는 분명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 게 빤했다. 괜한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리며 탁자 위의 시든 화분을 쳐다보았다. 물을 꽤 잘 주었는데 어째서 갈수록 노랗게 변하기만 하는지, 애부터 시작해 키우는 것이라면 질색을 떠는 성규에겐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몰라. 죽든지 말든지.”
성난 표정을 찡그리며 상담실 문을 열어 재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친 문이 다시 성규의 어깨를 떠밀었다. 으아, 작은 신음을 내지른 성규가 비틀비틀 간신히 중심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창피함에 붉어진 목을 큼큼거리며 빠른 동작으로 가방을 벗어 내렸다.
“많이 늦으셨네요.”
“엄마야!”
“…저도 반갑습니다.”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던 사내는 이내 픽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이성종입니다.
“김성규…선생님이시죠?”
“….”
“제가 실례했나요? 문이 열려 있었는데….”
하다하다 문까지 열어두고 가?
겨우 삭혀가던 전 비서에 대한 분노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낀 성규가 성난 얼굴을 씩씩거렸다. 내내 생글생글하게 웃으며 대꾸하던 성종도 한순간에 시무룩해져서는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저는 선생님께서 열어두신 줄만 알고….”
“아뇨, 아니에요. 일단…편히 앉으세요.”
뒷목을 주무르며 성규가 한 손으로 자리를 권했다. 미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던 성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서 자몽하고 키위, 알로에, 망고…다 들고 오긴 했는데….”
“….”
냉장고가 없네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말을 중얼거린 성종이 탁자 아래에 있던 종이박스 같은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얼핏 보아도 꽤 엄청난 양이어서 성규는 못내 속으로 저걸 대체 언제 다 먹지? 라는 생각까지 했다. 한참 성종이 그것들을 정리하는 동안에 번뜩 정신을 차린 성규가 빠르게 코트를 벗고 가운을 집어 들었다. 습관처럼 푹 찔러 넣은 손끝에 꼬깃꼬깃한 종이뭉치가 거슬렸다.
“이호원, 오전 11시….”
마치 오래된 기도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입속에서 새어나오는 말에 그제야 성규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를 수 있었다. 아. 그 남자.
“네, 그 사람이요.”
주스를 정리하는데 정신이 팔린 줄 알았던 성종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이 남자가 환자라니. 아니, 워낙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겉은 멀쩡한 사람들이긴 했었다. 마치 처음 손님을 받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성규는 신이 나 있는 성종을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반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흘끔흘끔 눈을 마주치던 성종은 어느새 빤히 눈을 쳐다보며 픽픽 바람 빠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물여섯이에요.”
“….”
“이름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성종입니다. 직업은 없고, 작은 병을 하나 앓고 있어요. 밖에…나갈 수도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는 병이요.”
어느새 즐거운 기색이 싹 가시고 시무룩해진 얼굴을 보며 성규가 금방 표정을 굳혔다. 가엾게도 그는 몹쓸 병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은 광장공포증을 의심해볼 수도 있었다. 사람을 대할 수 없다면 대인기피증, 결벽증 또….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되었나요.”
“….”
조심스럽게 반대편 의자에 걸터앉은 성규가 물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두 눈을 내리깐 채 붉은 자몽주스를 종이컵에 담아 내밀었다. 눈치를 보며 받아든 성규는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탁자 위에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굳은 표정을 보아 선뜻 말을 해줄지는 의문이었다.
“괜찮습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아주 오래 전에…갑자기 작은 말소리 같은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말소리요?”
“사람들의 생각이요.”
태연한 얼굴이 무심한 말을 내뱉었다.
“….”
“거리에 나가면 너무 시끄러워서…견딜 수가 없어요. 사람이 많은 곳은 정말 끔찍할 정도라서.”
공황장애? 성규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요.”
“….”
“또 미래를 보기도 하고….”
“성종씨 그건….”
“또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