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안녕!
오랜만이지?
미안해, 너무 늦어버렸다.
그런데 조금만 있으면 연말도 돌아오고 그러다보니까
회사내에서 일도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지 뭐야.
게다가 이번에 나는 해외로 출장까지 나왔거든.
시차적응 때문에 지금도 정신이 없어....
아무튼 잡담은 각설하고, 너무 늦어서 미안해!
반성하고 있으니까 너무 화내지는 말아줘.
그럼 오늘도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음, 연말이라 바쁘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망할놈의 일 때문에 오세훈과 거리가 엄청나게 멀어진 일이 있었어
음, 지금 어떻게 된건지 이야기를 찬찬히 해줄테니까 한번 들어봐.
일단 나와 오세훈이 함께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는건 다들 알고 있을거야.
그렇지?
일을 하다보면 얼굴을 마주할 일도 많아지게 되잖아. 더군다나 같은 공간에 있다보면.
나와 오세훈도 그런 편이야. 아니 그런 편이었지.
하지만 너무 바빠지다보니까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어지더라고.
당연히 다른 사원의 자리에 가서 노닥거릴 시간도 자연스레 없어지게 되고 말이야.
처음에는 일이 많아서 조금 짜증도 났지만 그래도 조금 기쁜것도 같았어.
아무리 애인이 좋다고들 한다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같은거잖아?
자유라기엔 내 자신도 너무 바빴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현상이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 바쁜 현상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까 사람이 조금씩 초조해지더라고.
알잖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물론 우리 둘의 몸이 멀어졌다는건 아니야. 거리적으로는 예전과 다름없이 가까웠으니까.
책상 두어개만 건너면 보이는데 결코 멀어진건 아니지.
다만 서로 카톡을 할 시간이나 같이 점심을 먹을 시간, 같이 퇴근도 못하다보니까
함께하는 시간이 자꾸만 적어지는거야. 그에 따라 조금씩 마음도 멀어지는 기분이고.
물론 오세훈 그 녀석이 미워지거나 그런건 아니야.
애초에 서로 얼굴을 마주할 상황이 제한되어있는데 미움받을 일을 하는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어?
다만 조금 서운한감이 없잖아 생기더라고.
인간이라는게 참 간사해서 한결같이 무언가를 받다보면 그 무언가에 자신도 모르게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있거든.
너희들도 알지? 예를들면 수능날 엄마가 도시락에 넣어주는 작은 편지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는게 인간의 심리인데
매일같이 카톡을 보내주거나 끼니는 챙겼냐며 전화를 걸어주던 상대가 어느날부터 그러한 행위들을 일체 끊었다고 생각해봐.
물론 오세훈 그 녀석이 전화나 카톡을 전혀 안한건 아니야.
다만 그 주기가 너무 뜸해졌다는게 문제지.
게다가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건 시간도 너무 새벽녘이라 내가 곯아떨어졌을때라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한달이 넘는 시간동안 대화를 일체 못한거나 다름없었던거야. 그러다보니 자꾸만 초조함이 생기더라.
난 내가 그런 타입인줄 몰랐거든. 워낙에 무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와서.
연애에 있어서 조금 메말라 있다는것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절대 사랑싸움으로 초조해 할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해왔어.
하루는 일을 다 마치고 달력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어.
사실 나에게는 묘한 버릇이 하나 있거든. 계집애같다고 놀려도 할 말이 없을정도로 조잡한 버릇 말이야.
그날 그날 있었던 일 같은걸 달력에 간단하게 메모해놓은게 그런 버릇인데
오세훈 그 녀석과 시간을 함께 보낸날에는 작은 별을 한개씩 그려놨단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연인이니까 조금은 신경을 써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야.
그런데 달력 한면을 주욱 훑어봐도 별표를 그려놓은 흔적이 안 보이더라고.
그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어. 아, 오세훈과 나는 진짜 한달이 넘는 시간동안 서로 멀어져 있었구나.
일이라는 장벽 때문에, 서로 시간적으로 너무 여유가 없어서.
생각을 해보면 그 녀석과 눈을 마주친 순간도 적잖게 있었어.
그런데 그 순간마다 매번 눈인사를 몇번 하고 스쳐간게 전부였거든.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니까 후회하게 되더라.
아, 그때 한마디라도 일을 빌미삼아 걸어볼걸 그랬나.
오세훈 그 녀석도 나한테 같은 이유로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건 아닐까.
내가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서 유난을 떨고 있는걸까.
일방적인 마음이라며 불안해하던 녀석인데, 정말 이렇게 있어도 괜찮을걸까.
요 며칠 사실 그 녀석이 야근을 여러번 해서 그런지 얼굴이 야위어 있었거든.
그걸 보니까 마음이 괜히 불편하더라고. 이렇게 바쁜시기에 야근은 필수사항일뿐만 아니라
그 녀석만 야근을 하는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데, 실처럼 사람을 묶어놓는 관게라는게 사람의 심리를 그렇게 가지고 놀더라.
분명히 다른사람이었다면 당연한 일이라며 넘어갈 일을 오세훈이니까 자꾸만 신경쓰게 되더라고.
그 녀석이 뭐라고. 그냥, 그 녀석의 일방적인 요구로 급하게 묶여버린 인연일 뿐인데.
그래도 사람 마음이 마냥 그렇지만은 못하더라. 내가 모질지 못한건지, 아니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도 조금씩 변해버린건지.
그 날도 평소와 다를바 없이 너무나도 바쁜 날이었어.
임원직들이나 짬밥이 좀 된 선배들이나 동료들은 다 퇴근해버리고
나는 업무들이 조금 남아서 퇴근 시간이 늦어져버렸거든.
일을 다 끝내고 나도 퇴근 준비를 하려고 책상 위에 올려뒀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자켓을 걸쳐입는데
저 멀리 책상에서 아직 컴퓨터가 켜져있더라고. 단순히 동료중 하나가 야근을 서나보다,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그 자리가 오세훈 그 녀석의 자리였던거지.
잠깐 기다렸다가 그 녀석을 보고 말이라도 하고갈까, 아니면 그냥 먼저 가버릴까.
사실 고민을 했었어. 하지만 야근 하는사람 붙잡아두고 힘 뺄 이유 뭐 있나, 싶어서 그냥 발걸음을 옮겨버렸지.
엘레베이터 앞까지 가면서도 혼자 계속 고민을 했던것 같아.
다시 되돌아가서 오세훈 그 녀석에게 얼굴도장이라도 찍고 갈까.
자느라 문자에 답장을 못해서 미안하다며 캔커피라도 하나 건네주고 가야하는건 아닐까.
오만생각이 다 들어서 엘레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려있는줄도 몰랐어, 그 당시에는.
그리고 그 엘레베이터 안에서 누가 걸어나오는지도.
"뭘 그렇게 중얼거려요?"
너무 놀래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서류가방을 내던질뻔했어.
생각해봐, 혼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귓가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상황 말이야.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보니까 오세훈 그 녀석이 손에 커피를 들고 서 있더라고.
격한 반응에 되려 놀랐는지 어정쩡한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이야.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중얼거려요?"
"어디 갔다와?"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가 들려있는걸 확인하고도 저런 질문을 내뱉다니.
정말 한심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오새훈 그 녀석도 내가 한심하게 보였겠지. 으.
"방전 됐거든요.
이번주에 야근만 세번째예요."
저 말을 하면서 자기 눈가를 두어번 비비면서 웃는데
참, 같이 웃어줄수도 없고 안쓰럽더라.
그래서 그냥 그랬어.
"어쩌냐, 그렇게 바빠서..."
"선배야말로 어떡해요?
나 없으면 누가 퇴근길에 지켜주나."
보통때 같으면 신경 끄라며 쏘아붙여줬겠지만
이상하게 평소와는 다른 대답을 내뱉어버렸어.
조금 미안해서였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까 반가워서 그랬던걸까.
"너야말로.
퇴근길에 누가 과자 사준다고 따라가면 안된다."
저 상황에서도 조금은 안심했던것 같아.
아, 같은 회사라서 다행이다.
이렇게 얼굴이라도 보고 잠깐이라도 말을 섞을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사람이 안심하다보면 방심하기 마련이잖아?
나도 방심을 했던거지. 방심을 해서 실수로 그 녀석의 손을 잡아버리고 말았어.
오세훈 그 녀석도 놀랐는지 몸을 움찔 굳히더라.
그냥, 그 녀석이 너무 반가워서 몸이 멋대로 움직여버렸나봐.
어색한 상황에 나도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어버린거 있지?
"어, 야근때문에 힘들텐데.
수고하고, 나 먼저 퇴근한다."
내 행색을 보면 10살짜리 꼬마아이라도
아, 퇴근하는 회사원이라는 사실을 짐작할수 있을텐데
왜 하필이면 저런 쓸데없는 말을 내뱉어버린건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내뱉은 말을. 게다가 손은 왜 제멋대로 움직여서...
그냥 저 상황 자체를 회피하고 싶었어 당시에는.
너무 창피했거든.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서 엘레베이터 안으로 도망치듯이 발걸음을 옮겨버렸어.
어색하게 손인사를 하는것도 잊지 않고 말이야.
그 녀석도 멍하니 내가 가는 모양만 보고있나 싶더니 갑자기 엘레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오더라고.
방금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녀석이 다시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걸 보고 나는 당연히 물어봤지.
아니, 그러려고 했어. 다만 말이 끊겨버려서 질문을 던지지 못한거지.
그 녀석이 갑자기 무작정 엘레베이터를 따라서 들어오더니
날 끌어안아버린거야.
몇마디를 덧붙이는것도 잊지 않고 말이야.
"말로만 힘내라고 하지 말고
불쌍한 애인 방전 됐다는데 충전 좀 해주고 가지.
왜 이렇게 매정해요, 선배."
분명 몰래카메라가 우리 모습을 다 보고 있었을텐데
당시에는 머리가 굳어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냥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어, 어.... 하는 이상한 소리만 반복적으로 내뱉었거든.
그러다가 허공에 멈춰서있는 손이 불편해서 그 녀석의 허리에 일단 손을 올려두기는 했지.
"전화는 왜 안받았어요?"
"너 전화 몇시에 있는지 기억나?"
"잘 모르겠는데. 야근중에 걸었던것만 기억나요."
"...새벽 3시 48분."
"와, 분단위로 외웠어요?
기분 좋은데요?"
"엉뚱한걸로 좋아하지마."
저 말을 하는데 왠지, 마음이 조금 아팠어.
가까이 있는데 쓸쓸함이 자꾸만 느껴지니까.
무덤덤한 편인 나도 쓸쓸함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는데
조금 예민한 저 녀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손으로 등을 토닥여줬더니 웃으면서 그러더라고.
"저 애기 아니예요."
맞으면서. 덩치만 큰 애기.
이렇게 대답해줬더니 또 웃더라.
바보같이, 차라리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웃는 얼굴에 서운함이 배여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그냥 나도 따라서 웃어버렸어.
"저 안 보고싶었어요?"
"미운정이 무섭기는 하더라."
"나 밉다구요?"
"밉긴해도, 보고싶더라.
나 너 보고싶었어."
저 말을 내뱉는 동시에 뱃속에 나비가 들어앉은것처럼 자꾸 웃음이 터져나왔어.
민망해서 그랬던 거겠지, 아마도?
나도 잘 모르겠어. 그 정확한 이유는 말이야.
어쩌면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 녀석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가서
옆구리가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트렸던걸지도 모르고.
아직까지도 의문점으로 남아있는 상황이야, 웃음의 이유 말이야.
더 웃긴건 오세훈 그 녀석도 똑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그 녀석이 웃으면서 그러더라."
"와, 진짜 애인이 좋긴 좋네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방전 됐다니까 충전도 화끈하게 해주시고.
이래서 연애를 하는건가."
하여간 오세훈 그 녀석도 말장난 치는걸 참 좋아한단 말이야.
그래서 그냥 웃고 넘기려는 찰나에 그 녀석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울상을 짓더라고.
보고 있던 나도 덩달아 심각하게 변해서 물었지. 혹시 무슨일이라도 있는거냐고.
"왜 울상이야?
일처리 하는데에 문제 생겼어?"
"아, 그건 아닌데요."
답지않게 말꼬리를 길게 늘리더라고.
난 말꼬리 늘리는거 정말 싫어해서 얼굴 찌푸리면서 다시 물었지.
"그럼 왜 표정이 그 모양이야?"
"큰일났어요."
"그러니까 무슨 큰 일?"
표정이 심상치 않아보여서 그런지 나도 긴장하게 되더라고.
오세훈 그 간 큰 녀석이 큰일이라고 칭할만한 일이면 정말 대형사고일테니까.
아무리 이름뿐인 애인사이라지만 상대방이 회사로부터 쫒겨나는걸 구경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없을거 아니야, 안 그래?
그런데 그 녀석의 대답은 허무맹랑하기 그지 없었어.
아니 엄청나게 니글거리는 대답이었다고 해야할까.
"자꾸 더 좋아져서요.
이러다가 사고라도 치면 어떡하지."
"어우, 너 방금 그 말 진짜 느끼했던거 알지?"
"전 선배가 방금 한 말에 엄청 상처 받은거 알죠?
왜 내 진심을 늘 몰라주는걸까, 사람 섭섭하게."
"무릇 사람은 담백해야 진국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그 담백한 사람은 찾으셨어요?
못찾은것 같은데, 이참에 나 같은 사람한테도 관심 좀 가져보는건 어때요?"
"내가 누누히 말하지만 넌 진짜 종잡을수 없는 녀석이야."
"선배야말로.
난 원래 까무잡잡하고 모델처럼 길쭉하고 늘씬한 사람 좋아하는데
어쩌다 선배한테 빠져서는."
"뭐래. 저번에는 작고 애교많은 타입이 좋다면서?
그새 또 바뀐거야?"
"그건 선배 기분 좋으라고 선배의 특징들만 골라서 이야기 해준거죠."
"뭐래, 내가 어딜봐서 작고 애교가 많아?
너 눈이 이상한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남자다운데.
키도 너에 비해서만 조금 작을 뿐이지 여자들 옆에 서면 큰편이거든?"
"에이, 선배가 몰라서 그렇지 선배 은근히 애교 많아요.
특히 술 들어가면 엄청.
그리고 여자 옆에서 크면 뭐해요. 결국에 옆에 서 있는건 난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 녀석과 나는 늘 티격태격 다투면서 하루를 마무리해.
하지만 이런 틀에박힌 일상도, 서로에게 멀어졌던 한달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곱씹아보니까
참 고맙고 행복한 시간으로 다가오더라. 아직까지 내가 그때 그 녀석과 주고받았던 말들을 기억하는걸 보면 알수 있잖아, 안 그래?
하지만 일에 의해 약간의 쓸쓸함을 동반한 거리감을 느끼면서 배운게 하나 있어.
있을때 잘하자. 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람은 너무 간사한 동물이라고.
늘 똑같은건 받다보면 받는것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것인지 망각하고는 해.
내가 늘 귀찮다고 생각했던 오세훈 그 녀석의 문자나 전화가 소중하게 느껴질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연애는 배려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수적으로 겪는 성장통인것 같기도 해.
아파하고, 슬퍼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다보면 결국에는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성장통으로 변모해서
개개인을 한뼘정도 더 자라게 만들어주는 촉진제와 같은 역할을 하거든. 마치 거름을 받아 자라나는 연약한 묘목처럼 말이야.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을 거름으로 삼고 먼 훗날 지금보다 더욱 견고하게 자라있을 내 자신과 오세훈 그 녀석도
그땐 그랬지, 하며 사원하게 웃음을 터뜨릴만한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