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도조차 해보지 않습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도운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한숨을 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정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시도할 가치가 없으니까요. 내겐 지금 당장이 더 중요해요. 어차피 나는 하루살이나 다름없는데."
"그래서 하루가 지나면 모든 걸 잊어버리는 그 병신 같은 병을 언제까지 방치할 건데요?"
"병원에 가도 소용없을 거 알잖아요. 어느 의사도 내 병의 이름도, 원인도 모를테니까. 난 그냥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단호한 투로 말하는 연정에게는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 그대로, 지금 그대로가 딱 좋은 듯보였다.
도운은 바로 그 점이 답답했다. 남들이 누리는 행복의 반의 반도 누리지 못하는 주제에, 불행한 주제에 그게 딱 제 분수에 맞다고 말하는
연정이 바보같았고 안쓰러웠다.
*
연정이 보이는 증세는 기묘하고도 이상스러웠다.
날이 밝아 눈을 떠보면 연정은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철없던 열아홉, 수능을 끝마치고 나와 친구와 후련함에 얼싸안으며 기뻐하던 날.
그것이 연정의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날이다.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연정의 기억 속에는 그날 이후로는 어떠한 것도 없다.
원했던 대학은 붙었는지, 풋풋했던 스무살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붕 떠버린 5년의 시간.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그 세월동안 연정이 무엇을 했는지 연정 또한 모른다.
어쩌면 바로 어제까지도 연정 자신은 멀쩡했을지도, 라며 자조할 뿐.
눈을 떠보니 연정은 낯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사실 연정의 침대였어도 낯설었겠지만.
이제야 깼느냐며 묻는 도운의 얼굴도, 거울속에 비치는 연정 본인의 얼굴도 한없이 어색했다.
19살과 24살. 5년 사이에 연정은 얼굴도 체형도 한층 성숙해진 상태였다.
"여기가 어디죠?"
당황스러워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연정의 모습에 도운은 그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나는……양도운이에요. 당신은 유연정, 지금은 2014년 10월이고.
오늘은 당신과 내가 만난 지 딱 2주가 되는 날입니다."
"네? 그쪽이랑 제가 아는 사이……예요? 우리가 구면이었던가요? 아니, 것보다… 지금이 2014년이라고요?"
말도 안 된다는 듯 연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정은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더듬어가며 도운의 말을 천천히 되짚었다.
연정의 기억은 2009년에 멈춰있을 터였다.
도운과 연정이 처음으로 마주한 그 날부터, 연정은 매일 2009년 수능을 봤던 날에 기억이 멈춰있곤 했으니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젠장, 물론 이 상황은 내가 더 답답하지만요.
그쪽은 아마 지금이 2009년 수능날 직후인 줄 알겠지만 그로부터 5년이 흘렀습니다.
연정씨는 지금 24살입니다. 연정씨가 91년생이라는 게 사실이라면요.
나는 2주 전에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연정씨를 주웠고 그때도 당신은 지금이 2009년인 줄 알고 있었어요."
"2주 전에 내가 길거리에서 울고 있었다고요?"
도운의 입에서 기계적으로 흘러나오는 말들이 영 신뢰가 가지 않는지 연정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 의심을 이해한다는 듯 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그리고 당신은 매일 아침마다 저와 이 이상한 짓을 반복했어요. 연정씨는 일어나면 저를 기억하지 못했고 여전히 기억은 2009년에서 멈춰있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기이한 병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랬어요.
이 얘기를 연정씨에게 하는 것도 열흘이 넘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반복하다보니 툭 치면 흘러나올 정도네요."
"그러니까…… 내가 그쪽을 만나고서도 열흘이 넘도록 고3 이후의 일들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심지어 어제, 그저께 있었던 일도 모두 잊고요?"
"이해 잘 하시네요."
도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지친 듯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었다.
연정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었다.
듣도 보도 못했다. 이런 이상한 병도 있단 말인가? 도무지 현실성이 없어 믿기지가 않았다.
허나 믿고 싶지 않아도, 도운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잊어버리지 말아달라고, 아주 간절히.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요?"
"장난이었으면 하는 건 저입니다. 물론 이런 악질적인 장난은 질색이지만, 차라리 장난인 편이 더 낫겠어요.
연정씨는 나랑 있던 모든 일을 전부 잊어버렸잖아요. 마치……나 혼자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라고요.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나만 갖고 있다는 게."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요. 저는……. 저는 분명 어제 수능을 봤었고…어,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수능은 죽 쒔지만…
물론 친구들이랑 놀기는 아주 즐겁게 놀았지만요. 그러니까……."
도운은 횡설수설하는 연정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연정은 본인이 당황한 나머지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놨다는 걸 깨달았는지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이상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지금. 모든 게 다 너무…… 낯설어요."
"이해해요. 눈을 떴는데 5년 뒤고 하루마다 기억이 리셋된다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니까요."
"그럼 나는… 내일이 되면 오늘 일도 잊어버리는 건가요?"
"……아마도."
충격을 받았는지 연정은 잔뜩 굳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런 연정을 바라보던 도운이 연정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위로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도운이 연정의 손목을 잡아끌며 씩 웃었다.
"음, 그러면 일단… 밥부터 먹어요 우리."
바로 이 날이, 도운과 연정이 만난 지 2주 째 되던 날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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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잡은 처음이에요! 팬픽/일반소설 구분됐다는 소식 듣고 달려왔는데 아직은 글이 별로 없네요 ㅠㅠ
아무튼 반갑습니다!! 아 근데 제목..어렵네요. 제목이 제일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