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94,000자의 매우 긴 줄글입니다. 이야기는 느리게 흘러가는 편입니다.
• 해당 글에 나오는 닝은 제가 임의로 부여한 서사를 갖고 있습니다. 고증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라토리자와에 대한 개인의 해석을 다수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글을 읽기 전, 이 점 유의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총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전도 존재합니다. 이는 수정을 거쳐 차근차근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Keyword는 챕터와 같은 방식으로 각 이야기를 나누는 선이기도 하지만, 해당 키워드 이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는 다양한 장치가 있습니다. 끝에 이를 해석하는 구간을 첨부하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Keyword 1 고난 |
긴 머리의 여학생이 가방끈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 거대한 건물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정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다른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느껴졌다. 할 수 있다. 걱정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모두 이겨낼 수 있다는 다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인 뒤에야 고개를 치켜들고 등을 꼿꼿하게 편 채로 자신감이 실린 걸음을 옮겼다.
별 일 아니니까. 내게는 이런 일 따위 정말 별 일 아니니까.
미야기 현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미야기에서 산 햇수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유년기에 한국으로 넘어가 초등학교까지 그 곳에서 졸업한 뒤, 아빠를 따라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이어갔다. 계획대로라면 그 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은 물론, 대학까지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
인생이란, 계획에서 어긋나기 일쑤라는 가슴 아픈 현실을 그녀는 일찍이 몸소 체험하고야 말았다. 말 못할 사정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닝은 불만이 많았다. 자신의 기억은 한국에서 시작되었고, 근 3년간은 영국에서 살아왔건만, 이제와서 어떻게 일본에서 적응하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반발하더라도 제 처지가 나아지는 것은 아닌지라 닝은 고분고분 비행기를 타고 미야기에 도착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엄마가 저를 기숙사제 사립 고등학교로 보내주었다. 제 교육을 위한 결정인지, 아니면 순전히 저를 기숙사로 보내고 싶어 등을 떠민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닝도 집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타고난 머리와 더불어 평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덕에 입학 시험 정도는 가뿐하게 통과한 그녀는 당당히 시라토리자와 학원 입학장을 손에 거머쥐었다.
짐을 내려놓기 위해 정문에서 기숙사 배정을 받을 때에는 룸메이트 없이 혼자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전산 오류 덕이니 운이 좋다며 웃어보이는 이름 모를 선생님의 말에 닝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모르는 사람과 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물론 좋았다. 결코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가장 쉽게 첫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방도가 제 손아귀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닝은 조금 ... 절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 중 하나로 적응력을 당당하게 꼽을 수 있었다. 오래간 살던 한국 땅을 떠나 영국으로 넘어가 살던 중에도 닝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었다. 차별이라거나 문화 차이로 인해 이해 못 할 일들을 목격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당연하게도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잘 살아남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살아남기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적응력은 딱 그정도에 불과했다.
싹싹하니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덕에 닝은 장소를 불문하고 어른들에게 예쁨 받았고, 잘난 능력 덕에 우상화 되기 일쑤였지만, 결코 친구만큼은 사귀지 못했다. 집순이 기질 탓이라고 제 자신에게 변명하고는 했지만, 그 속의 이유는 더 복잡한 편이었다.
그녀는 항상 작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작은 체구의 소동물을 닮아 있었다. 그에 반해 성격은 그다지 온순치 못했다. 닝은 헤프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는 곧 평소 무표정한 얼굴로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여자아이에게 먼저 다가설만한 용자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그녀의 꽤나 털털하고 솔직한 성격이 드러난 덕에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다가왔지만, 닝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
관계를 시작할 때면 언제고 선부터 그었고, 그 이상 친해지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았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계의 타인과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학교 밖에서 놀자는 제안에는 언제나 NO를 답으로 내놓았다. 뒤늦게 마음을 연 닝이 그러한 약속에 응할 준비를 한 채 기대하는 눈으로 기다려봤자 더 이상 그녀에게 제안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부정의 답이 돌아오고 마리라고 모두가 오래간 치부해온 탓이었다.
닝은 차차 경험을 쌓으며 어떻게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후였다. 영국 생활 3년 차에 도출 해낸 결과였으니까.
적응력이 뛰어난 그녀는 그렇게나 다양한 경험을 하며 예쁨 받는 방법은 배웠지만, 정작 사람을 사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이왕 새로운 환경에 또 다시 홀로 떨어진 김에 내 힘으로 친구를 만들어보자! 하는 당찬 포부를 스스로에게 소리쳐 보아도 종국엔 그 방법을 몰랐다. 닝은 조잘거리며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고, 아직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 또한 즐기지 않았다. 그러니 늘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축에 드는 편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른 아이들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문제는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닝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웃어주는 인간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입학식을 위해 자리에 앉았을 쯤에는 이미 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재 외국에서 왔대!
그건 맞는데, 저 그래도 여러분과 국적이 같단 말이죠 ... 같은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정말 국적만 같을 뿐이지,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니까. 주위에 앉은 학생들이 모두 저를 일종의 환상의 동물인 양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다. 동물원의 호랑이 정도가 더 어울리려나.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찬 시선들에 닝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에게 호기심을 품었던 이들이 겨우 다잡았던 용기를 꿀꺽 삼켜내는 순간이었다.
2반이 적힌 팻말 뒤로 열을 맞춘 아이들끼리 벌써 안면을 트고 식이 진행되는 동안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슬쩍 제 옆자리로 시선을 흘기니 제 옆에 앉은 남학생은 이미 몸을 돌려 앉아 저들 뒤에 앉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어렵다는 시라토리자와의 입학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읽기와 쓰기에는 통달한 닝이었지만, 빠르게 말을 잇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보아도 고작해야 학교 시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구나- 어리짐작만 할 수 있었다.
아 ... 돌아가고 싶다. 이왕이면 한국으로.
*
겨우 지루한 식을 버티고 반으로 향하게 되면, 좋은 자리들은 다른 아이들이 먼저 차지 해버린 탓에 닝은 어쩔 수 없이 선생님과 마주보는 가운데 열의 맨 앞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금껏 항상 앞자리를 고수해 온 모범생이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뒤에 앉고 싶었는데. 그녀는 괜스레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아냈다. 그래도 짝꿍이 생겼으니 말 정도는 섞어 볼 수 있으려나? 침을 꿀꺽 삼킨 닝이 살짝 옆으로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곧 헛된 희망임을 깨닫곤 괜히 제 필통을 만지작거렸다.
두꺼운 안경, 몸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 문제집에 쳐박은 얼굴. 저와 대화해보고 싶다는 의지라곤 단 한 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난 홀로 사는 인생이 운명인 것이야.
결국 닝은 하루종일 노트만 필사적으로 받아쓰며 친구 하나 없이 기숙사에서 매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딱 하루만 버텨낸다면 제게 말을 걸어줄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었는데.
학교란 정글과도 같다는 구절을 한국에서 살 당시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던 닝은 시라토리자와에서의 일주일 만에 뼈저리게 느꼈다. 단 하루만에 형성된 묘한 무리들 사이에 제가 끼어들 만한 곳은 없었다. 경계심 또는 두려움. 둘 중 하나를 담은 시선들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굳이 철판을 깐 채 다가 가고픈 마음도 없던 그녀는 석식을 위해 매장에서 사온 도시락을 들고 기숙사로 향했다. 그래. 공부만 하면 되지, 뭐.
그렇게 두근거려야 할 새학기의 첫주는 닝의 당찬 포부만 무너트린 채 끝났다.
고향에서의 학교 생활은 참 ... 별났다. |
Keyword 2 시작 |
아침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16년의 짧은 일생동안 단 한번도 그녀의 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귀를 찌르는 소음에도 깨지 않은 닝은 5분 뒤 알람이 다시 한 번 울린 후에야 꾸물거리며 눈을 꿈뻑거렸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알람을 끈 그녀는 다시 베개 위로 엎어졌다.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기숙사라는 존재는 쓸데없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뛰어가면 지각은 면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결국 5분이 더 흐른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킨 닝은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가볍게 무시하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잠이 많은 그녀에게 아침밥은 사치였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씻고 나온 닝은 전날 밤 다림질을 해놓은 교복을 꾸물거리며 입었다. 엄연히 학교 안에 있었지만, 여전히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냥 평생 자고 싶다.
무의미한 소망을 중얼거린 닝이 가방을 어깨에 매며 갈색 로퍼에 발을 구겨넣었다.
새학기는 신입생에게 친절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는 닝에게 유독 못된 것이지만. 그래서일까, 재잘재잘 떠들고 깔깔 웃어대며 저들의 반으로 향하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공항 가고 싶다, 그런 생각 따위나 하면서.
닝은 1교시 수업 종이 치기 5분 전에 반에 도착했다. 한창 모두의 대화가 클라이맥스를 향할 시간대인 탓에 그 누구도 문에는 시선을 안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일부러 시간을 맞춰 온 것이었다. 시라토리자와 학원은 영국의 고등학교에서 겪은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지만, 자신의 초등 시절과는 나름대로 유사한 편이었다. 그 덕에 그녀는 첫 주의 수업들은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적응 못 했지만.
가방을 탁 소리 나게 바닥에 내려놓은 닝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친해져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의 친구가 보낸 메세지에 그녀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 닝의 일본 적응기 2 주차. 과연 오늘은 어떤 고난을 맞을까요! ]
쓸데없이 게임 문구마냥 발랄한 문자는 물음표 대신 느낌표로 끝을 맺었다. 결국 고난을 맞는다는 건 이미 확실한 전제인걸까. 고난 따위는 없을거라 반박하는 문자를 보내보았지만, 저 스스로도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혀를 내미는 이모티콘이 답으로 돌아왔을 때 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당겨 문 닝은 수업 종이 친 뒤에도 시선을 핸드폰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몇 분 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릴 때서야 핸드폰을 내려놓은 그녀는 눈을 반짝였던 지난주와는 달리 시큰둥한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여느때와 다를 바 없는 지루한 말들로 종례를 연 선생님은 곧 작은 상자를 교탁 위에 내려놓았다. 닝의 눈썹이 옅게 찌푸려졌다. 설마.
"오늘은 자리를 바꿀거예요. 다들 친한 친구들과 같이 앉아 있다는 건 알지만,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어보자구요!"
교실 이곳저곳에서 아쉬움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저는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도 친구가 안 생겼는데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 한 닝이 본인 앞에 있으니 먼저 뽑으라며 상자를 내미는 선생님에 불편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제일 먼저 손 끝에 닿은 종이를 꺼냈다.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하얀 종잇조각을 펼쳤다.
「 1-E 」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에 고개를 들어보면, 이미 상자는 한 학생에게서 다른 학생에게로 넘어가는 중이었고, 선생님은 칠판에 자리배치도를 그리고 있었다. 행마다 숫자를 써 넣고, 열마다 알파벳을 쓰는 모습에 닝은 자신의 자리를 쉬이 찾아내었다.
책상 안에 넣어놓은 몇 개 되지 않는 교과서를 책상 위로 올리고, 가방을 다시 등에 진 채로 교과서들을 품에 안으면 고작 1주일 만에 책상을 쓰레기통으로 만든 이들이 보였다. 저것도 재능이지. 저들과 같이 기숙사를 쓰는 가여운 사람들의 고역에 대한 상상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창가의 맨 뒷자리로 향해 교과서들을 쿵 소리와 함께 책상에 내려놓았을 때에도 제 옆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시끄러운 양아치가 올 바에야 차라리 제 첫 주의 짝꿍이었던 말 없는 범생이가 또 제 옆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과 함께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교과서를 새로운 책상 안에 넣어놓은 뒤 닝은 핸드폰을 집어들어 10분 전에 도착했던 친구의 메세지에 답을 보냈다.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던 탓에 그녀는 제 옆자리의 주인이 찾아왔을 때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 그 학생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까진.
"안녕!"
다정한 목소리에 닝이 시선을 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학생이 웃으며 스포츠 크로스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처음이었다, 이 학교에서 선생님들 말고 제게 먼저 말을 걸어준 사람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닝에 남학생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답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뒤늦게나마 배시시 웃었다.
"안녕."
나지막한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곧 닝의 얼굴에 피어있는 미소를 보곤 같이 웃어주었다.
"세미 에이타. 넌?"
그가 내민 굳은 살 박힌 손을 잠시간 쳐다보기만 하던 닝이 조심스럽게 제 작은 손으로 맞잡았다. 짧게 악수를 한 그녀가 시라토리자와 학원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닝, 닝이라고 해."
"그래, 닝."
싱긋 웃어주는 얼굴에 닝은 새 친구를 사귄 것 같다는 생각에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아내지 못 했다.
점심 때 까지는.
두 사람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매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세미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총 세 번의 쉬는 시간 동안 계속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작해야 그럼 이번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사는 거냐, 다른 나라들은 어떻냐, 3개국어를 할 줄 아는것이냐 등의 꽤나 뻔한 질문들이긴 했지만 ...
매점에서 산 모카빵과 오렌지 주스를 품에 안고 기숙사로 걸음을 옮기는 닝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세미가 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총 2개국에서 살다 와서 일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3개국어 기능자라는 사실 뿐이고 저가 세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계속해서 미야기에서 살아 온 남학생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냥 저가 바보같이 김칫국을 마신 것 뿐이었으니까. 또.
주스와 빵을 다 먹은 뒤에도 30분 가량 남은 점심시간에 닝은 꿍한 얼굴로 침대에 드러누웠다가도 곧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숙제나 미리 해놓자.
그녀가 점심시간을 5분 정도 남겨놓고 다시 교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여전히 시끌벅적한 아이들이 새롭게 배정받은 자리에서 떠들고 있었다. 제 옆자리에는 세미가 혼자 턱을 괸 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던 그녀는 점심시간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판단하곤 별 말 없이 의자에 몸을 앉혔다. 묵묵히 가방에서 공책과 필통을 꺼내고 있자 그가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봤다.
"어. 밥 잘 먹었어?"
"응, 너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럭저럭."
닝은 그렇냐며 굳이 이야기를 캐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사귀려면 말을 많이 해야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저는 이미 꺼내놓고 싶은 이야기들은 이미 모두 한 터였고, 더 이상 제 얘기를 하고 싶지도, 그의 이야기를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인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렇다고 궁금하지도 않은데 궁금한 척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말실수는 하고 싶지 않고.
닝은 괜히 할 일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친구도 많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한국의 친구가 괜히 원망스러워졌다. 그 때, 세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점심은 뭐 먹었어?"
뭐 먹었냐니, 기묘한 질문에 닝이 눈을 바쁘게 깜빡거렸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세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뷔페잖아."
아. 그녀는 괜히 부끄러워져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세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껏 한 번도 카페테리아에서 안 먹은거야? 그럼 밥 어디서 먹었어?"
"기숙사에서."
"기숙사? 끼니를 다 매점 음식으로 때웠다고?"
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은 도시락 사 먹어. 오늘은 빵이랑 주스."
세미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키워냈다. 잠시 말을 고르듯 입만 달싹이던 그가 겨우 내놓은 것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걸로 배가 차?"
"응."
미심쩍은 얼굴로 닝을 쳐다보던 세미가 알림이 울린 핸드폰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번주 내내 그렇게 먹었다고?"
닝은 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왜?"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왜냐니? 뻘쭘하게 혼자 시끄러운 카페테리아에서 먹고 싶지 않았다. 제겐 관심도 없던 엄마가 갑자기 귀 아프게 떠들어대던 이지메의 피해자로 낙인 찍힐까봐. 자신의 선택의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예민하게 굴면 안된다는 사실 또한 아주 잘 아는 닝은 괜히 속으로만 길게 중얼대며 말을 골랐다.
"아는 사람 없어서 굳이 급식실에서 먹기 그랬어. 그렇다고 어차피 매점에서 사올 거 밖에서 먹기도 싫고."
나름 말을 고른다고 고른건데, 결국엔 친구 없어서- 라고 실토하는 꼴이 되어버려 괜히 뻘쭘해졌다. 물론 이 반 아이들 중 제가 혼자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서도 놀란 얼굴을 한 세미를 보니 조금 낯 부끄러워졌다. 혼자라는 사실이 딱히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달아오르는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 하게도 세미는 갑자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답을 내주었다.
"미안하네. 나랑 같이 먹자고 하고 싶은데, 부 애들이랑 늦게 먹어서 그러자고도 못 하고."
부? 동아리 얘기하는 건가? 무엇보다도 세미가 무슨 동아리에 들어있는 걸까 궁금해지던 찰나였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수학 선생님이 들어왔고, 반의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닝은 세미의 옆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다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
Keyword 3 배구 |
"배구부? 배구부가 있어?"
수학 시간이 끝난 뒤에는 이해가 안된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세미에게 설명을 해주느라 닝은 결국 정말 묻고 싶던 말은 물어보지도 못 한 채 쉬는 시간이 끝나버렸다. 안절부절 못 하는 얼굴로 쓸데없이 몸을 불리는 호기심을 꾹꾹 참아내던 그녀는 그 다음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배구부. 입학 시험이 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닝은 이 곳에 운동부도 있을거라곤 생각을 않았었다. 그런 호기심에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오히려 세미가 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시선을 돌려주었다.
"우리 학교 강호야. 나도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왔는데?"
"강호? 그게 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닝의 모습에 세미는 새삼 그녀가 이 곳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운동에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큰 경기들이 있어. 인터하이랑 봄고가 그 두 개. 우리 학교는 왕자라고 불릴 정도로 잘 하는 강호야. 지금으로서는 미야기 현내 최강이지."
"그 정도로 잘 해? 그럼 에이타도 엄청 잘 하겠네?"
눈을 반짝이는 그녀에 세미가 우쭐해했다. 자부심으로 가득찬 얼굴을 본 닝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특기생으로 들어왔으니까, 잘 하지. 게다가 우리 학년에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녀석이 있어서, 앞으로 더 잘 될거야."
"그 사람이 누군데? 유명해?"
"중학교 때 최강 스파이커였어. 스파이커가 뭔지 알아?"
운동에 대해 전혀 무지할 거라는 생각에 그가 물었지만, 닝은 오히려 그 질문에 콧방귀를 뀌었다.
세미의 어리짐작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들을 한 손에 꼽아보라 하면, 운동은 그 중 한 자리를 꾸준하게도 꿰차는 항목이었다. 그 중에서도 공놀이는 더더욱 싫어했다. 이유는, 못 해서. 달리기는 그래도 꽤나 잘 해서 한 때는 계주에도 나갔었는데, 구기 종목에는 정말 쥐약이었다. 농구니 야구니 하는 운동들은 룰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아 구경하는 것조차 꺼렸다. 그냥 골 넣고 홈런 치는 모습에 남들따라 박수를 칠 뿐.
하지만, 그런 닝이 유일하게 구경하기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배구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독 이해하기 쉬운 종목이었다. 누가 잘 하고 누가 못 하는지도 보기 편했고, 선수들이 느끼는 쾌감을 저도 같이 느끼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스포츠였다. 올림픽이 열리면 유일하게 응원하는 팀 없이 입을 벌리고 티비를 쳐다보던 경기들이 바로 배구였을 정도로.
그랬던 스포츠에 더더욱 애착을 가지게 된 계기는 놀랍게도 영국으로 유학을 갔을 당시였다. 7~9학년을 다녔던 고등학교도 유독 배구에 기량을 보여준, 그러니까 세미가 말 하는 전국 대회와 비슷한 대회에서 상을 잘만 타오는 그런 학교였다. 그래서 홈 경기를 치룰 때가 많았고, 집에 돌아가 자는 것이 제일 좋은 닝조차 방과후에 남아 구경하며 배구에 대한 애착을 키웠었다. 그렇다고 배구를 잘하게 된 건 아니지만 ...
"내가 운동은 못 하지만, 배구는 좋아해."
"정말?"
"다른 스포츠들은 다 이해 안 돼서 안 보는데, 배구는 구경하는 거 좋아해."
제 말에 세미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루의 마지막 수업을 위해 들어오는 국어 선생님에 대화는 끊어졌지만, 세미는 종례가 끝날 때까지도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아쉽다. 연습 구경 오라고 하고 싶은데, 감독님이 깐깐해서 안되겠네."
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본인이 더 시무룩하게 한숨을 내쉬던 세미는 크로스 백을 어깨에 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난 진짜 뛰어가봐야 해서, 이만. 내일 봐."
손을 흔들어 보이는 세미에 닝이 느릿하게 짐을 챙기며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정하네.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는 닝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쩌면, 정말로 새로운 친구를 사귄걸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다시금 피어났다. |
Keyword 4 동아리 |
그 다음주 쯤의 닝은 세미 에이타를 당당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다. 여전히 매점 음식을 사들고 기숙사에 올라가서 밥을 먹었고, 말을 섞는 사람도 세미 뿐이었지만, 그녀는 만족스러웠다. 착하고 다정한 그와는 말이 잘 통했다. 가끔 신나서 말을 하다가도 닝이 따라잡지 못 해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면 불평 없이 흔쾌히 다시 사근사근 얘기해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자율 연습이라며 가끔은 체육관으로 향하는 대신 카페테리아로 저를 데리고 가 밥을 같이 먹어주기도 했다. 참고로 뷔페는 끝내주게 맛이 좋았다. 역시 비싼 값을 하나보다.
세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침 운동을 위해 6시 쯤 기상을 한댔다 (그 말에 닝은 기겁을 했다. 자기는 7시 반에 일어나는데!) 그리곤 점심시간에 잠깐 연습을 한 뒤에 느지막하게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와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또 다시 체육관으로 향한단다. 정식 훈련의 유무를 떠나서 주말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틀 내내 체육관 행. 닝은 온통 운동으로만 가득 차 있는 그의 하루에 눈살을 찌푸렸다.
"숙제는 언제 해?"
"늦게까지 연습하는 게 아니니까. 몇 시간 정도 감독님이 계시다가 그 다음에는 자율 연습이야. 때에 따라 다르긴 한데, 보통 그래. 그래서 적당히 하다가 공부하러 빠지는거지."
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대단하네. 난 그렇게 병행 못 할 것 같아. 잠만 자도 힘든데."
도저히 세미와 같은 생활을 하는 제 자신은 상상하지 못 하겠다 닝이 단언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도통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그 주 금요일에 담임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에게 동아리 신청서를 나눠주며 부 활동을 선택해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제출하라 공표하셨다. 닝은 하얀 신청서를 가만 내려다봤다.
"동아리 안 해도 돼?"
세미를 쳐다보며 묻자 누군가와 문자를 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부 선택하고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도 돼. 보통은 공부하려고 도서관으로 간다더라. 2, 3학년들 중에는 그 시간에 학원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도 하고."
기숙사 있는 사립인데도 학원 다니는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별 고민 없이 슥 슥 서류를 채워나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세미가 닝의 손을 멈추며 물어왔다.
"동아리 안 들어가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대답을 내놓기라도 하듯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침대가 좋아. 딱히 하고 싶은 부활동도 없고."
막힘 없이 서류를 채워나가던 닝은 이유를 작성하라는 구간에서 멈췄다.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걸까. 잠시 고민하다 세미에게 물어봤지만, 그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선생님에게 물어봐봤자 1학년인데 동아리를 들어가보는 건 어떻냐는 대답이 돌아오겠지. 그녀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다 어깨를 으쓱이며 파일에 넣었다.
어차피 다음 주 금요일까지 내면 된다고 했는데, 뭐.
*
"너 배구부 들어올래?"
닝이 당혹감이 선연히 드러나는 얼굴로 세미를 올려다봤다. 오늘은 자율연습이니 밥을 같이 먹자며 운동장을 내다보는 벤치에 앉아 매점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을 야무지게 먹으며 동아리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아직도 귀가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쓰지 않았지만, 신청서는 금요일까지 내면 되었기에 아직도 방에 얌전히 누워 있다는 말에 해답이랍시고 돌아온 질문이었다. 그녀가 운동에는 젬병임을 어제 체육 시간에 한 농구로 이미 본인 눈으로 확인 했으면서 웬 되도 않는 물음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닝이 검지로 본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배구부를?"
그제서야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음을 깨달은 세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선수 말고 매니저."
"매니저? 그런 게 있어?"
"있는 학교도 있고, 없는 학교도 있고. 우리는 없는 학교들 중 하나야. 내가 알기론 매니저가 하는 일은 드링크를 탄다거나 일지랑 동아리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수건이랑 조끼 빨래 그리고-"
"그냥 귀찮은 일 대신 해주는거네?"
뜨끔했는지 움찔 몸을 떤 세미가 머쓱하게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 매니저가 지식이 있으면 자율 연습도 도와준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감독님 눈에 드는 사람이어야 매니저가 될 수 있어서, 매년 자리가 오픈은 됐는데 결국엔 다 불합격 통보 받았다더라."
닝은 조용히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려보였다.
"그래서 올해도 오픈인데, 너는 왠지 합격할 것 같으니까 한 번 신청해보는 건 어떻나 싶어서."
대꾸 없이 유부초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닝을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던 세미는 끝내 답이 돌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그새 다 먹은 빈 플라스틱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도시락을 옆에 내려놓고 이온음료를 꺼내려던 찰나, 그녀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니저 없는 지금은 그 일 누가 하는데?"
"일지랑 일주일마다 내는 활동 보고서는 주장이. 드링크는 우리 1학년들끼리 하고, 빨래는 2학년 선배들이 대충 하는 것 같아."
"대충?"
"냄새 안 나고 깨끗하니까 제대로 하시겠지."
닝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자 세미가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런 얼굴 하지마. 괜히 찝찝해지니까."
"뭐, 그래. 그럼 그게 다야?"
"응. 생각보다 별 거 없지?"
"그렇네, 그럼 매니저 없이도 할 수 있겠네, 뭐."
그새 마지막 남은 유부초밥을 다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에 세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고르듯 입을 달싹이는 그를 발견한 닝은 조금 웃기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없이도 살아남지. 그렇긴 한데, 있으면 좋잖아. 어차피 너 귀가부이기도 하고."
"음-"
그녀는 빈 도시락 통을 닫으며 뚜렷한 답을 내주지 않았다. 조금 기가 죽은 세미가 닝의 무릎에 올려진 플라스틱 덩어리를 집어 제 것과 함께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으로 향해 그것들을 버리고 온 그가 다시 벤치에 털썩 앉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닝이 곧 웃어버렸다.
"매니저 들여오려는 다른 이유가 있구나?"
"에?"
"일 처리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을 거 아냐. 보니까 나름 체계적으로 잘 하고 있구만, 뭘."
태연한 얼굴로 또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 세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친해진 지 고작 2주도 안 된 인물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눈치가 더럽게 빠르다는 것.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이었는데.
"배구부 매니저에 대한 로망같은 게 있달까."
"로망?"
순식간에 구겨지는 얼굴을 본 세미가 손사래를 쳤다.
"이상한 거 말고, 감독님이랑 코치님말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로망. 분위기 메이커라고 해야 되나. 아까 멘탈 관리라고 얘기 했었잖아, 우리는 진지하게 하는 거고 프로 생각 하는 사람도 많아서 엄격하기도 하고, 분위기가 딱딱하단 말이지. 뭐랄까, 코트 위에서 생사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또래의 누군가가 있어주면 좋잖아."
"운동부 보고 꺄르륵 대는 애들 많던데, 그런 것처럼 그냥 여자 매니저에 대한 로망은 아니고?"
세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것도 있고."
친해진 이래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은 닝이 미소를 머금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난 딱히 남들이 상상하는 로망의 대상대로 안 생겼을 뿐더러, 분위기 메이커가 될만큼 쾌활한 편도 아닌데. 괜찮겠어?"
"넌 야무지게 잘 할 것 같아. 선생님들이 예뻐하니까 합격할 가능성도 높고. 그리고, 굳이 내 입으로 말하자면-"
세미가 본인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식으로 꾸물거리다 겨우 다시 말을 이었다.
"분위기 메이커 할 정도로 쾌활한 성격은 아니더라도 솔직히 너 로망의 대상 맞아. 비교해주자면, 여자애들이 구경하면서 꺅꺅거리는 운동부 애들 정도."
그녀가 믿기지 않다는 듯 진실을 뱉어내라는 눈으로 세미를 올려다봤다.
"내가?"
"그래, 너."
세미는 왜 그녀가 제 말에 의구심을 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 로망의 대상이라고 말 하자마자 기분 좋아져서 한 번 해보겠다 선언 할 것 같았는데. 닝이 제 이상형이라거나 제가 첫 눈에 반한 상대는 아니지만,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예쁜 사람이었다. 분위기도 있고, 목소리도 나긋한 애가 공부도 잘 하고 소신도 있는데. 겸손한 건지, 아니면 정말 못 믿는건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겠다는 얼굴로 축구부가 나와 연습하고 있는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닝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냥 생각해봐. 이번주 안에 할 지 안 할 지 답 주면 좋고."
"생각해볼게. 매니저면 배구 하는 거 볼 수 있으니까 관심은 가는데, 그거 하면 나도 매일 아침 나가야 돼? 공부 할 시간 뺏길 정도는 아니지?"
세미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는 말에 홱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햇살에 그의 갈색 눈이 밝게 빛났다. 강아지 같아. 닝이 조금 많이 신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얼굴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아침에 안 나와도 될거야. 일찍 나와봤자 시즌 중에 7시? 그리고 배구부원들 중에도 입시 준비하는 선배들 있어. 선수가 아니라 매니저니까 더더욱 부 활동에 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고."
닝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생각해볼게."
닝은 세미에게 제안을 들은 그 날 밤, 한참을 고민하다 끝끝내 엄마에게 상담 문자를 보냈다. 웬만해서는 혼자 해결하길 좋아하고 애초부터 그 무엇이든 엄마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부활동을 한다면 3년 내내 하는 선수들처럼 저 또한 그렇게 헌신하고 싶었다. 어차피 들어갈거면, 최선을 다할 예정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프로 준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고 - 그건 조금은 부담이 되는 생각이긴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내고 1시간 쯤 지났을까. 아주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 알아서 해. ]
괜히 문자했네. 침대에 누워 핸드폰 화면을 구겨진 얼굴로 쳐다보던 닝은 곧바로 엄마와의 메세지 창을 끄고 라인을 들어갔다.
유일하게 제 메신저에 이름을 장식하고 있는 이 곳에서 만든 첫 친구.
더 많은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기회까지 직접 손에 쥐여준 친구.
저를 꼬드기기 위해 면접 따위의 이야기는 쏙 빼놓고도 단순히 신청서를 넣는다고 합격 여부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흘린 허술한 친구.
[ 배구부 들어갈게. ] [ 아까 아직도 동아리 신청서 안 냈다구 했잖아, ] [ 거기에 귀가부라고 쓴 거 배구부로 바꾼 다음에 담임 선생님한테 내면 돼? 아니면 확정 아니니까 하고 싶다고만 쓰면 되나? ] [ 면접은 있는 거 맞지? 또 숨기지 말고. ]
아직 연습 중인지 답이 돌아오지 않아 닝은 5분 간 핸드폰 화면만을 쳐다보다 몸을 데굴 굴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올려놓은 비닐봉지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다 포도맛 사탕을 뿌듯한 얼굴로 찾아낸 그녀는 포장지를 까 입에 쏙 집어넣었다. 맛있당- 다시 기분이 좋아져 노트북을 꺼내 제 취향인 노래를 틀고 가방에서 과학 노트를 꺼냈다. 기분이 좋을 땐, 가장 싫어하는 과목을 해도 그나마 잘 풀리는 법이라고 그녀는 제멋대로 결정했다.
30분 쯤 지났을까. 숙제를 열심히 하면서도, 이 놈의 과학은 제가 왜 들어야 하는거냐 궁시렁대던 닝이 지잉- 지잉- 하고 우는 제 핸드폰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되는 양 그녀는 미련 없이 샤프를 내려 놓았다. 전화라도 온 듯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뒤집어 보니 세미의 라인이 보였다. 자칫하면 긴급상황이라도 생긴 줄 알 정도로 다급한 속도였다.
[ 진짜! ] [ 진짜 한다거? ] [ 아 그러너ㅜ거ㅓ어렁 ] [ 미안. 친구 놈이 까불었어. ] [ 그, 잠깐만. ] [ 내일 아침에 교무실로 가서 사이토 코치라는 분한테 제출하면 돼. ] [ 신청 이유는 뭐, 너 쓰고 싶은대로 쓰고. ] [ 자세한 건 신청서 갖다 낼 때 알려주신대 ] [ 고맙다 ㅠㅠ ] [ 근데 면접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 ]
분위기가 딱딱하다고 그렇게 투덜대더니. 세미의 친구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오타들에 닝은 키득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재밌겠네. |
Keyword 5 확신 |
교무실 앞에 멈춰 선 닝이 괜히 옷 매무새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혹시 몰라 토요일임에도 늦은 밤에 방 바닥에 앉아 다시 다림질까지 깔끔하게 해 구김 없이 반듯한 채였다. 리본을 조금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던 그녀가 마침내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텅 빈 교무실 안에 들어서자 신청서를 내며 인사를 드렸던 사이토 코치가 제게 손짓을 했다. 좋은 인상을 위해 옅은 미소만을 머금은 닝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책상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공간에는 뒤로 넘긴 백발의 노인이 팔짱을 낀 채 앉아있었다. 사이토 코치가 가리킨 곳에 있는 빈 의자에 몸을 앉힌 그녀는 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분명 세미가 얘기하던 감독이겠거니 했다. 딱 봐도 깐깐해보이는 인상이 어쩌면 면접을 보려다가도 돌아간 학생이 한 둘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고보니 인기많은 배구부 매니저가 되고자 한 사람이 저 뿐일리 없었다. 하지만, 한 번 하겠다 결심한 것은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기에 이왕 시작한 일 제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기싸움 정도야 뭐, 속으로 코웃음 친 닝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이 쪽은 배구부 감독이신 와시죠 탄지 감독이에요.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 패스하고, 자, 그럼, 간단하게 자기소개 해줄래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감독과는 달리 그 옆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이토 코치에 닝도 살풋 웃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닝, 1학년이에요. 유년 시절은 모두 한국에서 보내고 중학교 생활은 영국에서 해서 처음으로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어요."
"오, 그런데 말 되게 잘하네요?"
"꾸준히 공부했어요."
별로 가정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닝이 눈웃음을 지어보이자 그 의도가 전달되기라도 한 듯 사이토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시죠 감독은 여전히 미동 없이 그녀를 가만 쳐다보고만 있었다.
"배구부에 신청하게 된 이유는 친구 추천이라고 했는데, 조금 더 설명해줄래요?"
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원래는 귀가부를 하겠다 써 낼 예정이었는데, 친구가 이번에 배구부 매니저를 뽑고 있는데 한 번 해볼 생각이 없냐고 먼저 물어봐줬어요. 지금껏 배운 것 중 하나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건데, 인맥도 쌓고, 추억도 만들고, 무엇보다도 최강으로 유명한 배구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운동은 못 하긴 하지만, 유일하게 관심 있는 스포츠가 배구라서 한 번 도전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신청했어요."
"친구한테 들었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매니저가 되면 혼자 다 하게 될 텐데, 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제가 약해보여도, 일 하나는 빠릿빠릿하게 잘 한다 칭찬 받아온 몸이었다. 닝은 미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혼자 하는 일에는 익숙한 편이라서 괜찮아요. 그리고 매니저로서는 혼자겠지만, 감독님도, 선생님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배구부원들도 모두 뭐가 필요하고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 아시니까 매니저 선배가 없어도 모두에게 배워가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닝 양이 배구부의 필요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나요?"
만족 이라는 단어를 한 번 곱씹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장까지는 어렵죠. 특히나 시작에는 많이 미숙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딜가도 일도 잘 하고 싹싹하다고 예쁨 받아왔어요."
닝은 그 순간 본인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에서 새어나온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근 몇 분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의 미소는 햇살을 연상케 할 정도로 밝은 얼굴이었다.
"게으른 편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타인을 위한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해진다고도 말 할 수 있거든요. 중학교 때 학생회 일도 해본 적 있어서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성적 보셨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필요하다면 동갑내기들 공부 정도는 거뜬히 도와줄 수 있어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보이는 닝에 사이토 코치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두 사람이 질문을 던지고 또 답을 건네받는 동안 내내 말 없이 구부정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던 와시죠 감독은 사이토 코치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호기심에 할 일은 아니다. 강한 녀석들만 있는만큼 더 높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어. 그만큼 필사적으로 하고 있고, 오히려 네가 방해가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하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어오는 감독에 닝은 곧게 눈을 마주쳤다. 일침이라도 두는 척 하지만, 이미 반말이 그녀의 심기에 거슬린 상태였다. 무엇보다 방해라는 단어가 특히나 거슬렸다. 이러나저러나 매니저 신청을 받겠다 한 사람은 본인이고, 면접까지 하겠다며 여태껏 앉아있어 놓고 방해라는 말이 왜 나오는거지? 애초에 동아리 매니저라는 자리에 사명감까지 달고 해보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모두 호기심으로 시작하는거지.
토를 달려면 끝도 없이 말을 내뱉을 수만 있을 것 같아, 그녀는 공격적인 말은 모두 덜어낸 답을 꺼내보였다.
"배구를 오래간 해오고, 하늘만을 바라보며 뛰는 배구부의 노력을 매니저가 따라잡을 수야 없겠죠. 목표부터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제가 매니저가 되어 배구부에 합류하게 된다면 저는 0이 아닌 플러스만을 목표로 할 겁니다. 제 도움이 얼마나 미미한 효과를 불러오던 간에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는 불러오게 노력할거예요. 인정 받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 제가 호기심으로 들어오냐에 관한 사항은 문제가 될 수 없으리라 자부해요."
눈웃음을 지어보인 닝이 다시 허리를 곧게 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졸업 할 때까지 계속해서 해나갈 예정이에요. 지금이야 제게는 고작 부활동이지만, 경기를 뛰는 부원들을 도와가다보면, 가족으로 여기게 될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저는, 가족에게 피해 주는 행위를 제일 싫어해서 말이죠. 방해의 염려는 안 하셔도 돼요."
닝의 눈빛은 모로보나 포식자의 것이었다. 탈락 통보를 받아도 대수롭지 않게 나갈 것이라는 무심함과 정말 나에게 합격 통보를 안 하고 배길 수 있냐는 자신감이 섞인 태도. 겸손하게 손을 모은 채 정갈하게 앉아있었지만, 몸에 익은 분위기는 가릴 수 없었다.
잠시 간의 정적과 함께 닝을 가만 쳐다보고만 있는 와시죠 감독에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사이토 코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했어요. 오늘 와줘서 고맙고, 결과는-"
"언제부터 나올건가?"
닝을 돌려보내기 위해 인삿말을 건네는 코치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때였다. 코치의 말을 뚝 잘라먹고 끼어드는 조금은 노쇠하지만 여전히 강단 있는 목소리에 닝이 시선을 와시죠 감독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면접을 보면 기운이 빠질 것 같아 오늘은 쉬고 내일 밀린 노트 정리를 할 계획을 세운 터였다. 제 대답에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한들, 억지로 제 마음에 들지도 않는 답을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부활동이 내 인생은 아니니까.
"음, 월요일 방과 후부터 시작하는 게 제일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두 곧은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럼 그때부터 나와라."
닝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상쾌하게도 웃어보였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월요일 날 뵙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지만 자신감 있게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작은 여학생의 뒤를 두 선생의 시선이 따랐다.
"역시 구경만 하러 올 학생같지는 않죠?"
"우리는 강한 녀석들만 있는 곳이다. 매니저라 해서 예외는 없어."
간결한 답과 함께 어슬렁 어슬렁 걸음을 옮기는 와시죠 감독의 뒷모습에 대고 사이토 코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
Keyword 6 노동 |
난생 처음으로 상쾌한 기분과 함께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뜬 터였고, 오늘부터 부활동 시작인데 긴장되냐는 세미의 물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가로저은 뒤였다. 오전 내내 별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던 닝의 속은 점심 때 뒤집어졌다.
이유는 다름 아닌 배구부원들 때문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교무실을 나서던 순간 세미에게 합격 소식을 전한 탓일까. 물론 언제 말하든 문자로 이야기가 전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연습을 위해 세미와 함께 체육관으로 가겠다는 핑계로 복도에서 마주친 배구부 1학년들에 그녀가 어색한 뒷걸음질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행동에 더 당황한 세미가 어버버거리다 밥 맛있게 먹어! 하고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닝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물론 자신이 지원한 동아리가 배구부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배구 선수들은 다들 키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고 1인데 어떻게 저렇게 클 수가 있지?
닝은 축구부가 뛰어다니는 운동장이 보이는 곳에 앉아 빵을 입에 쑤셔넣으며 중얼거렸다. 저들을 향한 것도 아닌데 어째 따가운 시선에 흘깃거리는 축구부의 눈초리를 알아채지 못한 그녀가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지금껏 친하게 지내온 세미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평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근데, 막상 여섯 명의 장정들 앞에 한 번 서 보니 그 위압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 볼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사실 느껴지는 시선으로만 따지면 올려다보려다가 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상상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더 많다니. 떼거지로 모여 있는 곳에 내가 직접 발을 내딛다니! 작은 키를 가져 매일 궁시렁거리던 닝에게는 세상에 이런 고난이 따로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쯤, 다시 교실에 들어갔을 때에는 홀로 자리에 앉아있는 세미가 보였다. 저를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밝아지는 얼굴에 그녀가 다급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너 아까 왜 도망갔냐고 세미가 물을 틈조차 주지 않은 닝이 위기감이 가득한 눈으로 먼저 선수쳤다.
"다 그렇게 키가 커?"
그 물음에 일전의 사건의 의문조차 풀어낸 세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심각한 얼굴로 웃지 말라는 닝의 속삭임이 들리지도 않는지 끅끅대던 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어. 아마 내가 작은 편이지?"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한 닝의 얼굴에 세미는 수학 선생님이 들어온 뒤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 해 결국 홀로 반 밖으로 쫓겨났다.
*
"내가 기다리지 말고 다들 먼저 가 있으라고 했어."
세미의 구슬림에 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잔뜩 굳어진 얼굴은 펴질 생각을 않았다. 그녀만 모르는 얼음공주라는 호칭이 왜 반 내에서 붙여진 건지 깨달은 세미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모두 이런 사소한 고민들을 기반으로 했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학교가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다들 착하지? 하고 물어오는 닝을 내려다보며 세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착하지. 근데, 다들 무뚝뚝한 편이라서."
그 말에 얼굴이 차갑게 굳어버린 닝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나도 무뚝뚝한 편이라고 다들 말했었는데, 그러면 친해지는 건 포기해야 하는걸까? 좋은 추억 따위 못 쌓는걸까? 이미 닝의 불안감에 대해 오후 내내 들어왔던 세미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넌 할 수 있어."
"맞아, 할 수 있어."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닝이 말은 쉽지 하고 꿍얼거리는 소리는 모른 체한 세미가 체육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땀 냄새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 앞에 보이는 사이토 코치와 와시죠 감독 앞에 부담스럽게도 열을 맞춰 서 있는 배구부원들의 모습을 발견한 닝은 차마 원래 체육관 냄새가 이렇게까지 별로냐는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솔직히 세미에게서 이 구역질 나는 냄새가 안 나는 건 기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코치와 감독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세미를 따라 허리를 접어 인사한 닝은 다른 1학년들의 (감히 어리짐작했다.) 옆에 가 서는 그를 조금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오늘부터 매니저로 일하게 된 닝이다. 1학년이고 우리는 원래 매니저가 없었으니까 다들 잘 도와주도록."
사이토 코치의 말에 저에게 내리꽂히는 시선들에 닝은 세미에게로 눈을 돌렸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조금 안심 했을까, 잠시 듣지 않고 있던 사이에 갑자기 배구부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대로 굳어버린 닝은 인사를 받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저보다 어린 사람도 없는 건 물론, 믿었던 세미마저도 저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도, 저와 얼굴 하나는 차이 나는 키를 가진 큰 덩치들의 남학생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모습도 너무 어색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사이토 코치가 저를 살짝 건드리는 손길에 닝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내가 받아줘야 그만하는거구나. 살짝 헛기침을 하는 닝에 다들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예쁘게 웃어보였다.
"1학년인 닝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알 수 없는 이유로 제 얼굴에 내리꽂힌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닝이 살짝 코치를 올려다봤다. 옷들부터 갈아입으라며 손으로 탈의실을 가리키는 코치에 덩치 큰 장정들이 우르르 탈의실로 향했다. 닝은 저를 돌아보며 웃는 세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보니 아직 훈련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헛기침을 해 냄새를 뿌리치려 애썼다. 원래 이런가 싶다가도, 그럼 점심 이후에 환기도 안 시킨걸까 싶어졌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제안을 안 한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고민할 쯤, 코치가 감독과 이야기를 마쳤다.
"그럼, 해야 할 일들 몇 가지를 알려줄게요."
닝은 코치가 말 해주는 것들을 열심히 작은 수첩에 받아적었다. 세미가 일전에 전해준 정보가 있어, 무엇을 예상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세세한 사항들을 듣다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일지라는 것도 결국엔 부원들 관찰 사항들을 모두 적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유의하라는 점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는 주장이 본인도 연습을 하고 있는 선수이다 보니 자세하게는 적지 못 하는 탓임이 분명했다. 매니저의 입장인 제 시점에서는 왠지 더 자세하게 적어야만 할 일을 제대로 마무리했다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사이토 코치는 이제 막 들어와서 잘 모를테니 걱정 말고 주장에게 물어봐가면서 하라 했지만, 닝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높은 인간이었다. 제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일 따위는 봐주지 못 했다. 제가 한 번 해볼게요- 라고 말 한 그녀는 곧바로 다용도실에 들어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비품들을 정리하다 말고 몸을 풀고 있는 부원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토 코치에게 달려갔다.
"배구에 대해서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긋나긋한 말투는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성량이 작은 탓에 바쁘게 움직이는 부원들은 듣지 못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와시죠 감독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고개를 갸웃거리는 닝을 쳐다봤다. 사이토 코치는 고민하며 참고할만한 영상들을 추천했고, 정 자세하게 살피고 싶다면 읽어볼만한 책들도 몇 가지 알려주었다. 열심히 끄덕거리며 모두 받아적은 닝이 걸음을 돌리려다 말고 다시 멈춰 섰다.
"저, 배구부에 할당된 예산이 따로 있나요?"
"그렇다만 ..."
"그럼 필요한 것들 사와서 영수증만 드리면 돈 환급받을 수 있는거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코치에 그녀는 밝게도 "알겠습니다-!" 답 하곤 또 다시 오도도 뛰어 다용도실로 향했다.
닝은 정리가 오랜 시간 이어지자, 저가 일요일부터 나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를 조금 하고야 말았다. 세미가 처음 이야기를 했을 때는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나보다고 치부했건만, 정리정돈을 하다 보니 방 전체를 뒤집어 엎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젠장.
세미의 말에 의하면 배구부는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는 일이 많다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심시간은 물론 쉬는시간동안 혹시 몰라 숙제를 모두 끝내놓은 제 자신을 다시금 칭찬했다.
그녀는 첫 날이었음에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몇 개 없는 창문들을 모두 여는 것으로 다용도실 청소를 시작했다. 종이 상자를 잔뜩 끌어모은 닝이 비품을 분류해가며 상자에 넣곤 가벼운 것은 들고, 무거운 것은 바닥에 질질 끌어가며 구석에 모아두었다.
생각보다, 아니, 누가보아도 어마무시하게 더러운 다용도실은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상자를 구석에 쌓아둔 그녀는 저를 흘깃거리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걸레를 모아 부엌으로 향했다. 참 별게 다 있구나 싶었다, 그럴바에야 청소업체나 부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생각없이 교복 그대로 입고 온 스스로를 원망하며 젖은 걸레들을 품에 안고 다용도실 문 앞에 철퍽 소리를 내며 떨구었다. 아까 끌고 오지 않은 청소기의 먼지를 열심히 닦아내면서도 닝은 꿍얼거렸다.
배구부 매니저가 하는 일이라고는 뒤치다꺼리 몇 번 하는 줄 알았는데. 비싼 학교의 유명한 동아리였으니 이 정도는 다 관리 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허울 좋은 환상일 뿐이었어! 귀가부를 선택했다면, 지금쯤 책이나 읽으며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겠지. 닝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소매를 걷었다. 다음부터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와야겠다. 머리끈도 챙기고. 까먹는 바람에 머리를 머리로 묶은 채였다.
진공청소기로 깔끔하게 창고만큼이나 큰 것 같은 다용도실 바닥을 청소한 그녀는 잔뜩 쌓아놓은 걸레들로 찬장들과 선반들을 하나하나 닦아 나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씩씩거리며 다용도실을 빠져나온 닝이 먼지투성이인 걸레들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빨래건조대를 따로 안 빼놨다는 사실을 걸레를 다 빨고 나서야 깨달은 그녀는 또 젖은 걸레들을 가득 안고 다용도실 앞에 대충 던져놓았다.
"저기, 닝 양?"
갑작스러운 사이토 코치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옷이 젖었으니 여벌의 옷이 필요하지 않냐 물어오는 얼굴이 보였다.
닝은 잔뜩 젖은 블라우스를 내려다보며 갈아입는 게 좋다 판단하여 고개를 끄덕이려다 머뭇거렸다. 다용도실이 저런데, 이 곳에서 이루어진 빨래를 어떻게 믿지...? 저 시커먼 남학생들이 참 부지런하다 생각하던 제 과거를 무참히 후회하던 참이었거늘.
잠시 고민하던 닝이 곧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속의 하얀색 반팔과 민소매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는 사이토 코치와는 달리 서브 연습을 위해 벽에 붙어 서 있던 부원들의 동공이 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트에 걸려버리는 공에 뭐 하는 거냐며 세미에게 소리를 지르는 와시죠 감독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세미는 다시 자리를 잡았지만, 닝에게로 시선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볼 것도 없는데, 뭘 보나 몰라. 저도 모르게 눈을 데굴 굴린 닝이 블라우스를 벗어 가방에 걸쳐두곤 상자 더미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보다는 꾸준히 운동하는 배구부원들 몸이 더 볼 게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어렵게 건조대를 발굴해낸 그녀가 이를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나마 샤워실 덕인지 냄새가 조금 덜했으나 여전히 땀내가 진동을 하는 장소였다.
마땅히 놓을 곳이 없어, 샤워실과의 경계쯤에 있는 구석에 걸레를 널어놓은 닝은 어느새 뻐근해진 목을 돌렸다. 내일 근육통이 올지도 모르겠네. 내 방도 이렇게 열심히 치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잠시 회의감을 느끼던 닝이 곧 눈살을 찌푸렸다. 내 방은 애초부터 이렇게 더럽지도 않지. 흥. 새침하게 콧방귀를 뀐 닝은 불편한 로퍼를 벗었다. 내일은 꼭 기숙사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거라는 다짐을 다시금 다졌다.
"닝 양, 오늘 다 할 생각이에요?"
체육관을 떠나려던 사이토 코치가 한 시간이 넘도록 차곡차곡 잡동사니 정리를 하고 있는 닝에게 염려스럽게 물었다. 그 옆의 와시죠 감독이 먼지에 쌓여있던 전과는 달리 반짝거리다 못 해 상쾌한 바람까지 불어오는 다용도실을 눈으로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자신감이 붙은 닝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미리 끝내야죠! 아 그러고보니, 내일 필요한 것들 좀 사와야 할 것 같은데, 늦게 와도 괜찮나요?"
사이토 코치가 답하기도 전에 와시죠 감독이 답지 않게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닝의 웃음이 한층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봬요!"
꾸벅 인사를 한 닝은 다시 몸을 돌려 스툴에 올라가 찬장의 물건들을 마저 정리했다. 30분 쯤 더 흘렀을까, 겨우 정리를 마무리 한 그녀가 뿌듯한 얼굴로 다용도실을 훑었다.
다양한 운동부들이 들락거리는 공용 창고까지는 뭐 어쩔 수 없고. 흠- 닝은 고민하며 세탁실의 세제를 살폈다. 냄새 구려. 누가 산거람. 혀를 찬 닝이 다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링크 통이 저거 뿐이면, 하루에도 더 필요할 때마다 다시 타야되는건가? 굳이?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내일 사러 가야 할 물품에 피쳐를 추가하고 있을 쯤이었다.
"저기, 드링크는 혹시-"
사이토 코치가 1학년이라 이야기해줬던 뾰족뾰족한 빨간 머리의 남학생이 문 틈새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하지만, 불편한 치마를 입은 채로 하얀 양말이 먼지로 물들 때까지 고된 노동을 하고 있던 그녀의 눈에 무엇 하나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관리를 이렇게 개판으로 해놓고 지금 나에게 드링크를 요구하는 거냐는 짜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저와 키 차이가 한참 나는 작은 동갑내기 친구를 보고도 움찔한 남학생은 아무것도 아니라 얼버무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갔다.
드링크가 필요했으면, 저가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본인들이 탔어야지. 그러고보니 에이타가 드링크는 1학년 책임이라고 했었던가.
오늘 같은 날 제게 요구 하는 이가 나온다면 드링크 통을 친히 던져 드리겠다는 다짐을 한 닝이 아까 일지라며 사이토 코치가 보여준 너덜너덜한 공책을 놓아둔 벤치로 향했다. 공책도 사야겠네. 어차피 비품 값으로 청구할 건데 뭐.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대충 페이지를 넘기며 일지를 훑던 중이었다.
"닝-"
익숙한 목소리에 닝이 고개를 들었다. 세미만을 기대하고 쳐다보았건만, 제 앞에 모여 있는 덩치들에 그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들 사이로 보이는 2, 3학년들이 코트 위에서 연습을 하는 동안 1학년들이 온 것 같았다.
"그 드링크 말이야," 닝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 타는 법 아냐고 ..."
처음으로 보는 진지하게 짜증이 난 듯한 닝의 눈빛을 마주한 세미가 진정하라는 듯 손사래를 치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코치님이 알려주셨어."
사이에 자리를 한 칸 띄운 채 벤치에 앉는 세미와 다른 1학년 몇 명과 거리를 둔 채 서 있는 이들을 번갈아 본 닝이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시선 속 숨겨진 의문을 눈치 챈 그가 입을 열었다.
"땀냄새 나잖아."
환기를 시켜서 그나마 나아진 상태였지만, 그의 말을 듣고 의식하니 또 코를 찌르는 냄새에 닝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 환기 좀 시켜야겠더라. 제일 일찍 오는 사람이 보통 몇 시에 와?"
1학년들이 일제히 숨을 고르고 있는 가장 덩치가 좋은 남학생을 쳐다봤다. 검은색에 가까운 진녹색 머리의 남자애는 저랑 동갑이라기엔 굉장히 듬직해보였다. 뭐, 중학생으로도 오해받는 저가 하는 말이니 신빙성 떨어지긴 한다만. 연습 경기를 하고 있는 2, 3학년들을 보고 있는 남학생을 아까 본 빨간 머리의 남자애가 툭툭 건드렸다.
"와카토시 군- 아침에 몇 시에 오냐고 닝쨩이 묻잖아-"
특이한 말투네. 말도 없는 애들 사이에서 유독 활기 찬 빨간 머리의 말에 와카토시 군이라는 남자애가 제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간의 정적 후 그가 입을 열었다.
"6시 반에서 7시 쯤에 온다."
꽤나 묵직한 목소리에 신기해하기도 잠시, 곧 그가 말하는 시각에 가뜩이나 큰 닝의 눈이 더욱 크기를 키워냈다. 왜, 왜 이렇게 일찍 오지? 에이타는 6시에 일어난댔는데. 세미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보이는 그가 처음으로 얄미워보였다. 콧방귀를 뀐 닝이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6시 반쯤에 올게."
그 말에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검은 머리의 남자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일찍 올 필요는 없어."
"나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영 심각해서 안되겠어."
"심각-?"
빨간머리 남자애의 물음에 닝은 시작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무릎 위에 펼쳐져 있는 일지를 잠시 내려다 본 그녀가 주인 모를 이름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보니까 이름들이 뭐야? 나 에이타 밖에 모르는데."
세미를 보며 묻자 빨간 머리 남자애가 제일 먼저 나서서 흥미롭다는 얼굴로 씰룩 웃어보였다.
"난 텐도 사토리- 미들 블로커야."
블로커가 또 세분화 돼 있었어? 코트 위에는 고작 6명 밖에 없는 스포츠에 뭐가 그렇게- 사념을 그 쯤에서 끊어낸 닝이 줄줄이 이어지는 자기소개에 다시 집중했다.
"오히라 레온, 윙 스파이커야.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아까 놀란 얼굴을 하던 남자애가 인자하게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겉모습은 진녹색 머리의 남자애만큼이나 위압감 있어보이는데 누가 들어도 다정한 말투였다. 1학년인데도 선배같달까. 곧 이어 갈색의 반곱슬 머리를 한 남자애가 가볍게 소에카와 진이라 소개했다.
"야마가타 하야토, 리베로야. 잘 부탁할게."
진갈색 머리의 남자애가 타올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인사했다. 리베로가 쟤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린 닝이 다시 진녹색 머리의 키가 큰 남학생을 올려다봤다. 말 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그들 중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윙 스파이커다."
아, 처음에 에이타가 말하던 그 강한 스파이커구나. 그 생각에 미치고 나서야 닝은 본인이 청소만 하느라 정작 배구부가 배구를 하는 모습은 구경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손에 쥐인 일지의 페이지를 팔랑거리며 넘겨보던 닝이 옆에 내려놓았던 개인 수첩을 꺼냈다.
"그, 내가 배구를 그렇게 잘 아는 게 아니라서 공부 좀 해보려고 하는데 코치님이 이거면 된다고 했거든- 이거말고 더 봐야 할 만한 거 있어?"
닝이 수첩을 펼쳐 보여주자 그 큰 녀석들이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곤 작은 공책의 글씨들을 쳐다봤다. 눈살을 찌푸리던 세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 언어인데?"
닝이 다시 제 수첩을 내려다봤다. 아차. 그녀는 그제서야 저도 모르게 발음대로 한국어로 적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하나하나 읽어주었다. 다들 그거면 됐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닝이 수첩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2, 3학년들의 연습게임을 마무리 하려는 건지 라스트-! 하고 주장이라던 3학년 선배가 소리를 지를 때, 하야토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해?"
눈을 꿈뻑거리며 그를 쳐다보던 닝이 잠시 고민했다. 어쩔 수 없었다, 사용 빈도에 따라 편리함이 달리하는 것은. 일본어나 한국어는 사실 가끔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이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계속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연습이 되고는 있지만, 한국어는 그게 아닌지라 따로 잔뜩 사온 책들을 읽고 있었고, 영어는 지난 3년 간 매일같이 사용해온데다가 그 전부터 배워왔기에 어쩌면 제일 편한 언어일지도 몰랐다.
조금 많이 복잡한 제 인생만큼이나 매일 같이 사용하는 말조차 복잡한 편이었다.
"영어가 제일 편해. 그 다음이 한국어고, 그 다음이 일본어. 모르는 단어가 좀 많아. 빠르게 말하면 못 알아듣기도 하고."
신기하다며 영어 해보라는 텐도의 말에 닝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뭐라 해야될지 모른단 말이지.
제게 궁금했던 질문들을 다들 하나씩 던져오기에 닝이 성실하게도 답해줄 쯤이었다. 유일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우시지마가 어딜가도 시선이 집중될만한 묵직하면서도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럼 왜 이 곳에 온 건가?"
무표정한 얼굴 탓에 닝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내지 못 했다. 너무나도 덤덤한 투에 시비를 거는 건지, 아니면 정말 호기심 어린 질문인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답을 내놓지 못 하고 곧게 내려오는 그의 시선을 마주치고만 있자, 텐도가 말 없는 두 사람 탓에 조금은 굳어버린 분위기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불편할텐데 왜 미야기로, 그것도 사립으로 왔냐는 거야-"
그제서야 이해를 한 닝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텐 최선의 선택이었어."
짧은 대화를 나누던 중 처음으로 다들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국어도 좀 배울 겸 말이지."
의문점 투성이인 답을 다시 한 번 무마하는 말을 내뱉자 수긍하고 넘어가는 이들도, 여전히 궁금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닝은 여전히 저를 궁금하다는 듯 살피는 시선을 피해, 창 밖을 살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어버린 시각이었다. 오늘은 먼저 가볼게, 다용도실 청소가 힘들었어서. 싱긋 웃어보인 닝이 가방을 챙기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일전에 벗어놓은 블라우스를 팔에 걸친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2, 3학년들에게 먼저 가보겠다 인사를 하곤 1학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미에게는 특별히 생글 웃어준 닝이 체육관을 벗어날 때까지 텐도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쫒았다.
"신기한 애네-"
물음표를 띄운 얼굴로 굳게 닫힌 체육관 문을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최선이라는 건 이 곳이 최강이라는건가? 이 곳이 공부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곳인가?"
그의 진심어린 궁금증이 담긴 어투를 유일하게 눈치챈 텐도가 알 수 없는 음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럴수도-"
우시지마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이었지만, 1학년들을 부르는 주장의 목소리에 곧 그의 호기심은 흐트러졌다. 세미는 처음으로 의문스러운 얼굴을 한 그를 가만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고, 텐도는 우시지마의 태도를 눈여겨 보며 어슬렁 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
Keyword 7 동경 |
삐이- 삐이- 삐이-
영국에서 살 적에는 화재경보기가 오작동을 하여 고막이 터져라 시끄럽게 울려대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럴 때면 저는 아는 욕 모르는 욕 다 끌어다 모아 아무도 없는 천장에다 삿대질해가며 성질을 내다 결국 베개로 귀를 막으려 애썼었다. 설마 그 소리를 자발적으로 알람으로 설정하는 날이 오리라 닝은 상상도 못 했었다.
오전 5시 30분.
처음으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끙끙 앓으며 꺼버린 닝이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오전 5시 35분.
알람이 다시 울리자 닝은 핸드폰을 들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더듬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마침내 소리가 꺼지자 그녀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오전 5시 40분.
또 다시 귀를 찔러오는 소리에 닝이 실눈을 떠 알람을 껐다. 딱 1분만. 다시 눈을 감았다.
오전 5시 42분.
시계를 확인한 그녀는 시간이 애매하니 3분만 더 자자며 눈을 다시 감았다.
오전 5시 44분.
늦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뜬 닝이 시간을 확인하곤 아직 1분이 남았으니 괜찮다며 또 눈을 감았다.
오전 5시 45분.
또 다시 고막을 터트릴 기세로 알람이 울어댔다. 아악-!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비명을 내지른 닝이 인상을 구긴 채 핸드폰 알람을 껐다.
살면서 이렇게나 일찍 일어나 본 적은 처음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직 어둑어둑한 하늘에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카토시라는 애도 에이타처럼 아침 운동으로 로드워크를 한 뒤에 체육관으로 간다고 했었다. 더 정확하게는 모든 배구부원들이 로드워크로 하루를 시작한다 했었지. 보통 30분이 넘도록 한다는데, 그럼 걔는 벌써 밖에 나가있다는걸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현실에 닝은 몸을 부르르 떨며 칫솔을 집어들었다.
미리 체육복을 책상에 고이 접어 올려두고 운동화도 꺼내 놓은 닝이 개학 이래 처음으로 제 긴 머리를 높이 묶어 올렸다. 어제는 바보같게도 머리끈을 안 챙기고 간 바람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노동을 했었던 터라,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전 날에 배구부원들이 저를 쳐다보던 건 여자애라서가 아니라 쪼그만 애가 귀신산발을 하곤 땀 범벅이 된 채로 빨빨거려서가 아닐까 싶어졌다. 새벽인 탓에 쌀쌀한 날씨를 대비해 져지를 블라우스 위에 걸친 닝은 아마 그 추측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예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숙사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제자신을 내려다 본 닝이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삐쭉거렸다. 나도 고등학생다워 보이고 싶다. 키도 커서 성숙한 성인처럼 보이고 싶은데, 나는 영 아니네. 잠시 고민하듯 여전히 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애는 포기하지 뭐. 가볍게 결론을 낸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어쩌다보니 빨리 준비를 끝낸 탓일까. 체육관이 시야에 걸릴 쯤에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고작 6시 18분이었다. 내일은 10분 더 자도 되겠네. 즐거운 깨달음과 함께 닝이 체육관의 거대한 철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당기려던 순간, 철컹- 하는 소리와는 달리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약해서 그런가?
눈을 바쁘게 깜빡거리던 그녀가 두 손으로 잡고 온 몸에 힘을 주어 잡아 당겨보았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인상을 찌푸린 닝은 체육관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했다. 한참을 노려보고 있던 그녀가 뒤늦게 열쇠구멍을 발견하곤 아차했다. 잠겼구나.
가장 먼저 오는 부원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환기 시켜놓을 작정이었는데, 결국에는 와카토시라는 애를 기다려야겠구나. 입술을 말아 문 닝은 살랑 바람이 불어오자 맨 다리가 시려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소매로 다리를 따뜻하게 만들려 애쓰며 제발 그 부지런한 남자애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저 멀리 정문 쯤에서 보이는 기다란 인영에 닝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확히 6시 30분이었다.
신기해. 조금은 동경이 담긴 눈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기다란 인영을 따랐다. 열쇠를 가지러 가는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를 벗어났던 인영이 제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날이 추운 탓에 바닥에 앉지도 못 하고, 다용도실의 악몽이 떠올라 벽에 등을 기대지도 못한 채 불편하게 쭈그려 앉아 있던 닝의 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우시지마의 눈과 마주쳤다.
"왜 그러고 있는거지?"
져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추워서. 그래도 너가 시간에 딱 맞춰서 와서 다행이다. 잠겨 있을 걸 생각 못 하고 나왔거든."
열쇠를 넣고 돌리던 우시지마가 닝의 말에 슬쩍 시선을 내렸다가 져지로 감싼 상체와는 치마만 덜렁 입은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도 반바지만 입은 채라는 사실은 잊은 듯 했다.
"왜 치마만 입은거지?"
"이따 또 갈아입기 귀찮아서. 애초에 기다려야 할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
아무런 대꾸 없이 문을 연 그가 닝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고맙다는 표시로 예쁘게 웃어준 닝이 여전히 냄새는 나지만 따뜻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창문은 모두 닫아 놓은 듯 보였다. 그녀는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판가름을 내지 못 했다.
들어오면서 문을 다시 닫으려는 듯 문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그를 눈치챈 닝이 급하게 돌아섰다.
"잠깐!"
그대로 굳은 우시지마가 저보다 한참 작은 닝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표정이 아예 없어서 좀 무서운 앤가 싶었는데, 단 몇 초간의 대화만으로 그녀는 의구심이 들고야 말았다. 얘, 사실 저 표정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인걸까. 잠시 고민하던 닝이 여전히 닫혀 있는 다른 쪽 문을 몸으로 밀어 열었다.
"나 환기 시키려고 일찍 나온거거든. 그러니까 문도 열어놔야 돼."
"왜 하는거지?"
"냄새 안 나? 나는 어제도 여기 땀 냄새 너무 심해서 표정 관리 못 했었어 ..."
닝의 말에 냄새를 맡아보기라도 하듯 몸을 체육관 안 쪽으로 기울였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가만 체육관 안 쪽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갑자기 그녀의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큰 덩치가 다가오자 움찔한 닝은 제 얼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가 곧 떨어져 나가는 우시지마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키워냈다.
"뭐, 뭐 한거야?"
"냄새가 나는지 확인한거다."
"... 나한테?"
"체육관에 땀 냄새가 밴 건 맞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서 잘 몰랐었다. 근데 너랑 비교하니 확실히 차이가 나는군."
이제서야 닝의 말이 납득이 된 건지 그가 문을 활짝 열어주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그 자리에 굳어버린 닝은 새벽의 싸늘한 공기가 다시 제 맨 다리를 괴롭히고 나서야 나머지 창문들을 열기 위해 발을 뗐다.
사람 놀라게 만드네. 탈의실 문 너머로 사라진 우시지마를 힐끗 쳐다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한 애야.
닝은 세탁실로 향해 어제 부원들이 저 대신 빨아서 건조기에 넣어놓은 타올들을 꺼내 품에 안은 채 코트로 향했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갤 바에야 어차피 들고 나올 거 연습 하는 거 구경이나 하면서 하자는 생각이었다.
항상 이 시간에 오는 거면 잠 좀 자게 앞으로는 대신 환기 시켜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던 닝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냄새나는 환경에서도 잘만 있던 사람들한테 시켜봤자였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지 뭐.
수건을 몇 개 개지 않은 참에 탈의실 문이 닫히고 묵직한 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앉아 있던 닝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처럼 검은 반팔에 보라색 반바지를 입고 있는 우시지마가 배구공이 든 카트를 끌고 있었다.
하루에 연습만 세번. 연습복이 도대체 몇 개인걸까?
쓸데없는 사념에 빠져있던 그녀가 바닥에 공을 튀기며 손을 푸는 그의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혼자도 연습할 수 있어?"
순전한 호기심에 물어보자 우시지마가 한 손에 공을 쥔 채로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는 수건을 개면서도 닝의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몇 초 간 기다렸지만, 답이 없는 그에 닝은 시선을 내렸다. 답 안 해주려나- 싶을 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우시지마가 다시 공을 바닥에 튕겼다. 닝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저를 향해 있었다. 그렇구나- 형식적인 답을 한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답을 않는 동안 이미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탓이었다. 제일 먼저 온다는데 벌써부터 공을 들고 있으면 가능하겠지, 하는 어림짐작에 가까운 정답.
"너는 배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건가?"
공이 규칙적으로 튀기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기계적으로 타올을 개던 닝의 손이 멈칫했다. 목석이라도 된 양 그의 시선이 여전히 제게 멈춰 있었다. 닝은 다시 타올을 개기 시작했다.
"경기를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는 알아."
"근데 왜 매니저를 하겠다 한 거지?"
"배우려고."
닝이 열 줄 이상 정도는 거뜬하게 써내릴 수 있는 이유들을 그렇게 한 단어로 함축시켰다. 구구절절 떠들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굳이 따지자면 가장 적합한 대답이었다. 배구를 배우려고, 사람을 배우려고, 문화를 배우려고, 사회생활을 배우려고, 이 곳에 대해 배워가려고.
우시지마는 간결한 대답조차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곤 마침내 닝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튕기던 공을 오른손에 쥔 그가 두 발짝 물러났다.
수건을 개던 닝이 호기심에 손을 멈추고 시선도 그의 몸에 고정을 시켰다. 서브 하려나? 어제는 결국 구경을 제대로 하지도 못 한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따랐다. 바닥을 흘깃 쳐다본 그가 공을 하늘 높이 띄웠다. 와, 엄청 높아. 저걸 어떻게-
묵직한 목소리, 묵직한 발걸음, 근육으로 가득차 두툼한 몸. 하늘을 바라보고 튀어오르는 배구인데 저 묵직한 사람이 얼마나 높이 떠오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은연 중에 했었다.
그가 뛰어오르는 순간, 그런 생각 따위는 마치 독수리가 어떻게 날아 오르냐 묻는 것과도 같은 어리석은 질문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눈이 휘둥그레 해질 정도로 높이 떠오른 그가 엄청난 굉음이 나도록 강하게 공을 내리쳤다. 빙글빙글 돌던 공은 눈으로 따르기 버거울 정도로 순식간에 네트를 가로질러 바닥에 내리꽂혔다. 네모난 선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공이 창문보다 높은 지점의 벽에 다시 한 번 부딪히곤 바닥으로 추락했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에서 우시지마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닝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저걸 리시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팔 부러지는 거 아냐? 닝이 심각하게 고민을 할 쯤 우시지마는 새로운 공을 집어들었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목격했는지 자각할 수 있을 틈도 주지 않은 그가 다시 한 번 공을 하늘 높이 떠올렸다. 닿을 수 있을까 고민스러운 높이를 단숨에 따라잡은 그가 공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바닥에서 튀어올라 체육관 2층의 관중석을 보호하는 울타리에 부딪힌 배구공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손 안 아파?"
무의식 중에 내뱉은 말이었다. 점프서브를 엄청나게 무서운 기세로 두 번이나 선보인 그는 아직 공은 쳐보지도 못 했다는 듯이 땀 한 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채 새로운 공을 집어들고 있었다. 닝에게로 시선을 돌린 우시지마가 덤덤하게 되물었다.
"아파야 하는건가?"
슬쩍 본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은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 아프면 다행이고."
고개를 끄덕인 우시지마가 공을 잡고 다시 선에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할 일이 있음을 자각한 닝은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시선을 내리지는 않은 채였다.
이번에는 공 대신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랐다. 스프링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몸과 다시 바닥으로 착지할 때 살짝 위로 올라간 검은 셔츠가 그의 탄탄한 몸을 조금 드러내었다 다시 가리었다.
"독수리,"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모든 배구선수들이 그처럼 스파이크와 서브의 모호한 선을 달리는 점프 서브를 넣지는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렇게 무섭게 강한 스파이크도 처음 보았다.
한편, 우시지마는 당연하다는 듯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너무 멋있다. 닝이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배구공에만 집중한 탓에 그녀의 작은 속삭임을 눈치조차 못 챘다. 어제 2,3학년들의 경기 중에도 저런 굉음은 안 났는데. 닝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치, 몇 년 전 처음으로 덕질을 하게 된 연예인을 발견했을 때와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제가 하던 일까지 까먹곤 넋을 놓은 채 그가 혼자 서브 연습을 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쟤, 굳이 연습이 필요한가? 그런 안일한 생각이나 하던 중 데구르르 굴러온 배구공이 져지로 덮은 그녀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닝이 제 무릎에 올려져 있던 마지막 타올을 예쁘게 접었다. 옆에 차곡차곡 쌓아둔 타올 탑에 마지막 조각을 올린 뒤, 수건들을 벤치 위로 옮겼다. 져지를 허리에 묶은 그녀가 제게 굴러왔던 배구공을 들었다.
괜히 공을 한 손에 올려 보았지만, 몇 초 버티지 못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배구공을 닝이 다시 집어들었다. 손 엄청 크구나. 하긴, 에이타도 손이 크지.
배구공들이 담겨 있는 카트에 공을 넣는 찰나 그가 새로운 공을 갖고 가기 위해 다가왔다. 그녀에게로 시선을 한번 던진 우시지마는 닝이 방금 집어넣은 공을 한 손에 쥐었다.
"너, 엄청 멋있다. 엄청 잘해."
닝의 반짝거리는 눈을 마주한 그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난 원래 잘 한다."
어린 아이가 잘 하는 것을 자랑하듯 자부심이 줄줄 흐르는 말에 닝이 기분 좋게 웃어버렸다. 되려 제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명시했다는 듯이 물음표가 잔뜩 묻어있는 눈빛에 대충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잘난 줄 아는 잘난 사람. 꾸밀 줄 모르고 허례허식 없이 말 하는 사람. 어째 악의 없이 촌철살인을 하는 유치원생이 떠올랐다.
"그런 것 같더라."
기분 좋게 웃은 닝이 나머지 공들을 줍기 위해 몸을 돌렸다. 가볍게 좌우로 흔들리는 포니테일을 가만 주시하던 우시지마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좋대?"
닝이 익숙한 목소리에 활짝 웃어보였다.
"그냥-"
세미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온 건지 옆의 텐도와 레온이 닝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배구부 하길 잘 했어. 오전동안 공을 주우며 연습을 구경한 닝이 내린 결론이었다. 역시나 우시지마의 스파이크가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세미가 토스한 공을 내리찍는 그를 구경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귀가부했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 했네. 이래서 배구부가 인기 많은가봐.
토스를 잘 했다며 칭찬받는 세미에게 밝게 웃어준 닝은 내일도 반드시 일찍 일어나리라 다짐했다.
*
"닝, 어디 가?"
하야토가 체육관과는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닝을 불러세웠다. 전 날처럼 2반 앞에 모여든 장정들 덕에 1학년들끼리 다 같이 체육관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린 닝이 지갑을 흔들어보였다.
"매점."
"매점엔 왜?"
세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스 사가려구. 아침을 안 먹어서 점심 늦게 먹을거면 뭐라도 마셔놔야 할 것 같아서."
"아침까지 거르며 일찍 나올 필요는 없다. 문은 나도 열 수 있다."
그래 그래- 우시지마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텐도에 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원래 아침 안 먹어. 먼저 가 있어!"
그녀가 손을 훠이훠이 내젓곤 매점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레온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침을 안 먹는다고? 알고 있었어?"
"아니," 세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 딱 맞춰 오니까 항상 뭐라도 사먹고 오는 줄 알았지."
"그래서 작은건가?"
우시지마의 물음에 한 소리 하려던 세미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남학생 다섯이 한 자리에 멈춰 닝이 사라진 곳을 가만 주시했다. 이러다간 계속 서 있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 텐도가 다른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점심 때 우리가 많이 먹이면 되지-"
그 사소한 한 마디를 듣지 못 했던 닝은 이상하게도 점심 연습이 끝나자마자 저를 카페테리아로 떠미는 손길들의 이유를 알지 못 했다.
딱 본인의 양에 맞게 밥을 퍼왔건만 제 급식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는 우시지마와 하야토의 시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레온과 세미 사이에 앉은 닝이 묘하게 갇힌 듯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서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는 세미에게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침도 안 먹고 그걸로 배가 찬거야?"
닝이 제 급식판을 내려다봤다.
"응. 왜?"
충격을 받은 듯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닝이 고개를 돌려 보자 놀란 얼굴의 텐도가 보였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저보다 양이 많았지만, 텐도의 양과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아니, 충격 받을 건 3인분 분량을 급식판에 채워넣은 와카토시와 레온의 급식판 아냐? 왜 나한테 그러지?
"나 군것질 하잖아."
"너 여태까지 뭐 먹었는데."
"주스. 잠깐, 너네는 다 운동을 하는 애들이고, 난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사람이잖아."
그 말의 효력은 없는 듯 보였다. 하야토가 고기 반찬을 제 식판에 옮겨주는 동안 레온이 밥을 덜어주는 꼴로 확실해졌다. 인상을 쓴 닝이 한 마디 하려던 순간, 묵직한 한 마디가 날아왔다.
"먹어야 더 큰다."
그대로 굳어버린 그녀가 우시지마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무덤덤한 얼굴이 누가봐도 악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에 걱정이 묻어나와 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큰 녀석들이 작은 저한테 더 크라고 밥을 올리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기만 하는 그녀는 새 친구들을 사귄 게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분간 해낼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에이타조차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어나는 급식을 보고도 오히려 고기 더 올려주라며 채근하고 있으니 ... 산처럼 쌓인 고기와 두 배로 불어난 밥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닝이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했다.
이걸 먹어주었다간 저녁 때도,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3년 내내 당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남기자니 아까운 건 둘째치고 다 먹을때까지 부담스럽게 쳐다볼 것 같은데. 침착하게 선택지들을 따져보던 닝이 가방에 넣어두었던 지갑을 꺼내들었다.
"흐응- 어디 가려구?"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들려오는 텐도의 물음에 닝이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게스 몬스터니 어쩌니 하더니, 촉 더럽게 좋네.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든 그녀가 의자를 뒤로 밀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점 가려구-"
가방까지 어깨에 지는 모습에 세미가 닝의 팔을 붙잡았다.
"밥 먹고 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긴 그녀가 어마무시한 양으로 불어난 제 급식판을 내려다봤다.
"안 먹어. 너네나 먹고 커라. 그리고 나 성장판 닫혔어! 크고 싶어도 안 크거든!"
가뜩이나 키 작은 거 서러운데! 조금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우시지마를 째려보며 말한 닝은 가볍게 세미의 손을 떨어트리곤 걸음을 옮겼다. 하야토와 레온이 허망한 눈으로 주인 잃은 급식판을 내려다봤다. 그럴 줄 알았어- 얄밉게 말 한 텐도가 닝의 몫인 고기 중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 그래도 먹고 가는 게 맞겠지?"
세미의 물음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점에서 뭘 먹겠다는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우시지마를 쳐다본 세미가 고기를 제 식판으로 덜어냈다.
"뭐든 본인 양에 맞게 먹겠지. 내가 너무 얕봤어."
이따 말 안 섞어주는 건 아니겠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세미와 그렇냐며 묵묵히 밥을 다시 먹는 우시지마를 번갈아본 레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점심 안 거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네."
도시락을 맛나게 사먹은 닝이 초코우유를 입에 문 채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하던 참이었다.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를 들은 그녀는 세미가 온걸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보이는 덩치 큰 남학생들에 사레가 들릴 뻔하여 작게 기침을 하곤 다시 시선을 들었다. 잠깐 나와보라는 듯 손짓을 하는 세미를 닝은 미심쩍은 얼굴로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자마자 무언가 잔뜩 든 검은 봉투를 손에 들려주는 레온을 올려다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 심심하면 먹어-"
조심스럽게 제 어깨를 토닥이는 하야토의 말에 닝이 봉투 안을 살폈다. 먹어본 적 없는 빵, 과자들 그리고 샐러드가 들어있었다. 매점에 가면 거들떠 보지도 않던 야채덩어리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
세미가 조심스럽게 묻자 잠시 고민하던 닝이 인상을 풀었다. 분명 내가 이거 좋다고 하면 맨날 사오겠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가 샐러드 통 두 개를 봉투에서 꺼냈다.
"나 야채 싫어해."
"골고루 먹어야 한다."
솔직해서 좋고, 맞는 말만 해서 좋긴 한데 너무 뼈가 아팠다.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린 닝이 샐러드 통을 우시지마의 손에 안겨줬다. 별 말 없이 고분고분 받는 모습 때문에 피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그럼 너 먹어. 난 안 먹을래."
"그래."
그 말에 그녀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큰 샐러드 통이 그 큰 손에 쥐여지니 작아보이는 모습도, 큰 장정 다섯이 제게 뭐라도 더 먹으라고 둘러싸고 있는 지금 상황도, 저 먹이겠다고 매점에 우르르 몰려간 그 상황도 너무 귀엽고 웃겼다.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닝을 다섯 명이 가만 내려다봤다.
"이건 심심할 때 먹을게. 그래도 굳이 나 음식 먹이려고 안 해도 돼. 잠이 더 좋아서 아침 거르는 거 뿐이고 다른 끼니는 놓치지도 않는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너희들처럼 먹으면 살만 찐다?"
"닝쨩은 살 좀 쪄도 될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 하는 텐도에 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지금이 좋아. 어쨌든 고마워. 종 치기 전에 얼른 가."
세미의 소매를 잡아 끌어당긴 닝이 다른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이따 봐-! 인사를 하는 하야토와 텐도, 웃으며 손을 흔드는 레온과 샐러드통은 소중하게도 손에 쥔 채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시지마에게 말갛게 웃어준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교실로 들어섰다.
"에이타, 너까지 거들면 어떡해."
"너 아침 안 먹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그랬을거야."
작게 웃음을 흘린 닝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
"뭐가?"
"챙겨주는 것도, 배구부에 들어오라고 말 해준 것도."
가만 그녀를 쳐다보던 세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가 좋은 사람이니까 매니저 합격한거고 쟤네도 초면에 챙기려 드는 거야."
기분좋게 웃은 닝이 크림빵을 하나 꺼내들었다.
"먹을래?"
*
"혼자 가도 되겠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물어오는 레온에게 닝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무거운 건 몇 개 없어. 그리고, 그 감독님이 너희들 중 한 명 같이 보내주시긴 한대?"
닝의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굴린 그녀가 기숙사로 올라가보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무거우면 전화해. 정문까지라도 나갈게."
세미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린 닝이 고개를 끄덕이곤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미리 꺼내놓은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이층침대 사다리에 걸어놓았던 에코백을 어깨에 걸었다. 부피를 차지하는 것은 고작해야 디퓨저들과 섬유유연제 뿐이었으니 하나로 충분할 터였다. 지갑을 주머니 대신 에코백 안에 집어넣은 닝이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기숙사를 나섰다.
필수 비품들 중 딱히 사와야 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스포츠 용품 같은 걸 어디서 사와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닝의 쇼핑리스트는 무게니 어쩌니 하며 더 안절부절 못 하던 제 친구들의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정말 별 거 없었다.
네임택, 블랙 마커, 물 피쳐, 디퓨저, 섬유유연제, 일지로 사용할 새 노트, 그리고 코치님이 추천해 준 배구 책 두어권. 사실 섬유유연제가 조금 무거울 것 같긴 했지만, 뭐, 뒤치다꺼리 하는 매니저로 살아남으려면 힘을 조금 길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내로 나간 닝은 쇼핑에 그다지 오랜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계획한 것만 사고 쿨하게 나오는 소비습관 덕에 그녀는 1시간도 안되어 필요한 것들을 모두 구매했다.
그중에서 제일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건 디퓨저들. 탈의실에 놓을 로즈퍼퓸, 다용도실에 놓을 리프레싱 에어, 부엌에 놓을 시트러스 과일 향, 체육관 이곳저곳에 숨겨놓을 에이프릴 프레쉬 네 종류를 모두 사 에코백에 담았을 쯤, 닝은 조금 후회했다. 너무 많이 샀다고.
체육관은 물론이고 부실마저도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더러운 다용도실이 부실이란다, 말도 안돼.) 크기가 크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갔다. 물론 액체의 무게를 간과한 제 잘못이었다.
다시 학교까지 가는 데에는 30분 가량 더 걸릴 예정이었다. 세미는 전화를 하라 이야기했지만, 탈의실의 사물함에 핸드폰을 넣어놓는 주제에 뭔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다. 한숨을 푹 내쉰 닝은 한 손에 디퓨저 박스들이 정갈하게 담겨있는 봉투를 들고 책들과 섬유유연제가 자리를 차지한 에코백을 고쳐맸다. 다음부터는 친구들의 말을 더 귀담아 들어야겠다 생각하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닝이 소매로 대충 닦아냈다. 분명 봄인데, 왜 이렇게 더운걸까. 무게 탓에 손을 아프도록 짓누르는 봉투를 다시 손목에 건 그녀가 낑낑거리며 운동장을 겨우 가로질렀다. 분명 처음에는 학교가 크고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학교가 큰 건지 모르겠다.
굳이 이렇게까지 넓을 필요가 있나?
다행스럽게도 체육관 문이 열려 있었다. 문이 닫혀 있으면 발로 쾅쾅 찰려고 했는데. 머쓱하게 코를 훌쩍인 닝이 얼른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벤치에 앉아있던 하야토가 닝을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왔다.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와중에도 디퓨저 봉투를 내동댕이 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기에 그녀는 마다 않고 봉투를 내밀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닝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저기 구석에 놔줘. 고마워!"
싱긋 웃은 닝이 져지를 벗어 대충 벤치에 올려두곤 지갑에서 영수증을 꺼내며 사이토 코치와 와시죠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꾸벅 인사를 한 그녀가 뭘 사왔냐 물어오는 코치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마트에서 사온 섬유유연제, 노트 등이 적힌 영수증은 고개를 끄덕이며 클립보드에 붙인 코치가 그 뒤의 디퓨저 영수증에 눈을 꿈뻑거렸다.
"이거, 왜 산 건가요, 닝 양?"
닝이 오히려 본인이 더 이해 안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어제까지만 해도 숨도 못 쉴 정도였어서요. 지금도 냄새가 너무 깊숙히 배여 있지 않나요?"
커다란 문을 열어놓았음에도 맡아지는 이상한 냄새에 닝은 굳이 맡아보려 한 제 자신을 자책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곤란해 보이는 코치의 표정을 그녀가 가만 살폈다. 유명 브랜드에서 사온 디퓨저가 쌀 리는 없었지만, 효능을 위해 기꺼이 지불한 터였다. 코치가 조심스레 감독에게 영수증을 보여줄 때서야 닝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산으로 충당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제가 사비로 사는 걸로 해둘게요. 어차피 저만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산을 쓰기엔 아까웠지만, 막상 학생이 지불한다 하니 더 당황한 코치가 와시죠 감독의 눈치를 보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바닥에 끌리는 운동화 소리와 공 튀기는 소리만 들으며 서 있던 중 드디어 감독이 입을 열었다.
"가서 물건 정리나 해라."
그 속 뜻을 눈치챈 닝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엄청 깐깐하다더니 의외로 쿨한 편인가보네. 주기적으로 디퓨저를 사비로 살 필요가 없어졌음을 깨달은 닝은 기분좋게 에코백을 들고 세탁실로 향했다. 원래 사용하는 듯 하던 섬유유연제는 딱 1회분 정도 남아있었다. 내일부터는 새거 써도 되겠네. 새로 사온 섬유유연제를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는 곧 부엌으로 향했다.
여태 연습을 하며 각자 가져온 물로 때운 것인지 아직 사용하지 않은 드링크 통들이 식기세척기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물 피쳐를 꺼내 새로 닦은 뒤 건조대에 엎어놓은 닝이 에코백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던 네임택들과 마커를 꺼내들었다. 핸드폰으로 찍어놓았던 배구부 명단을 보며 네임택에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정갈한 손글씨로 모두의 이름을 쓴 그녀가 드링크 통의 밑 부분에, 하지만 잘 보이는 곳에 이름표를 붙이고 그 위에 얇은 방수 테이프를 덧댔다.
설거지를 한다해도 연습을 하다보면 모두 함께 원샷을 하지 않는 이상 다 똑같이 생긴 통들이 섞일 법도 한데 여태 잘도 버텼다 싶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의 물통을 마시면서도 여태 모른걸까 궁금해졌다. 갑자기 3학년 선배들이 많이 불쌍해졌다.
일단, 드링크부터 타야겠다고 결심한 닝이 찬장에서 드링크 분말을 꺼냈다. 팔이 좀 아프겠네. 내일 근육통이 올 것만 같은 예감에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곧 드링크 전용 물통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10개는 족히 넘는 드링크 통에 앓는 소리를 낸 닝이 일단 분말을 사이토 코치가 말해준대로 분배해 담았다. 뚜껑을 다 닫은 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살짝 부엌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젠장, 다들 체육관을 도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까 하야토한테 미리 도와달라고 할 걸. 입술을 당겨 문 닝이 손목을 풀고 물통을 집어들었다.
다 섞었다.
그리고 팔이 아파왔다.
매니저 일 하면서 평생 할 운동 다 하는 것 같네. 드링크 통을 다섯 개씩 나누어 체육관 구석의 책상 위에 모두 옮겨놓았다. 이름택을 못 볼까 싶어 일부러 잘 보이도록 돌려 놓은 닝이 바닥에 놓여져 있는 디퓨저가 든 봉투를 들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섰다.
점심 때 열어놓았던 창문 탓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창문을 닫은 닝은 드링크를 피쳐에 더 타놓기 전에 먼저 부엌에 놓으려고 산 디퓨저를 꺼냈다. 잠시 고민하다 작은 간이 식탁에 꽃스틱 두개를 꽂은 통을 올려두었다.
예쁘다.
뿌듯한 얼굴로 향을 맡아본 닝이 곧 피처에 물을 부었다.
드링크를 탄 뒤 컵에 조금 따라 마셔본 그녀는 맛있게 잘 탔다며 제 자신에게 칭찬을 하며 피처를 들고 부엌을 나섰다. 감독님과 코치님이 자율 연습을 마저 하라며 자리를 떴는지, 드링크를 올려둔 책상에 우르르 몰려 있는 무리가 보였다.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쓰러지지 않게 책상 밑에 피쳐를 내려놓은 닝이 물통을 집어가는 1학년들을 조용히 지켜봤다.
어련히 잘 가져갔겠거니 싶었던 순간, 그의 이름보다 한 글자 짧은 이름이 적힌 네임택이 붙은 드링크 통을 입에 대고 있는 우시지마가 시야에 걸렸다.
"와카토시."
그가 물통을 내려놓고 닝을 내려다봤다.
"그거 ... 사토리 물통인데 ..."
물통을 살피는 그에 닝이 네임택을 가리켰다.
"아, 몰랐다."
잠시 굳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곤 손을 가로저었다.
"아냐, 그냥 마셔. 사토리가 입 댄 것도 아니고, 이따가 다시 마실 때 네 이름 말고 사토리라고 적힌 걸로 마셔야 하는 것만 기억해둬."
문득 깨달음을 얻은 닝이 뻣뻣하게 굳은 채 옆에서 2학년 선배가 떡하니 오히라 레온이라고 적힌 물통을 가져가는 모습을 목격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름표 붙인 거 안 보여요? 다들 설마 아무거나 집어간거예요?"
뒤늦게 이름표를 확인하는 부원들에 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내가 분명 눈에 잘 보이게 놓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우시지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눈을 동그랗게 키워낸 닝이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아냐, 그럴 수도 있-"
그 와중에 물통을 다시 바꾸려는 선배들을 본 닝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입을 댔으면 그냥 마셔야죠. 어차피 설거지 할 때 뚜껑은 바뀌니까 리필해서 마실 때 바꿔 먹을까봐 붙인거잖아요! 날 그렇게 쳐다봤자 나보고 어떡하라고?"
덩치만 컸지 애들이 따로 없네. 머쓱하게 다시 처음에 집었던 드링크 통을 손에 쥐는 꼴에 닝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강호라더니, 생각보다 별 거 없군요."
실망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은 닝이 디퓨저나 마저 세팅해야겠다며 부엌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선배들이 어버버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본인 물통을 잘 찾아 마신 세미가 하야토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는 물통을 사용하고 있는 텐도를 쳐다봤다.
"그건 예상 못 했네?"
"흐응- 그냥 목이 말랐단 말이지- 근데, 닝쨩 생각보다 강하네! 선배들한테 화도 내고-?"
옆에 서 있던 레온은 아마 닝이 짜증을 내던 모습보다는 그 뒤의 말이 더 충격이었을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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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명 같은 수업을 듣는데, 왜 이렇게 다른거지?"
세미가 영어 선생님의 빠른 수업을 따라잡지 못 해 스펠링이 틀리고 지렁이들로 가득차버린 자신의 노트와 필기체로 깔끔하게 쓰여진 닝의 노트를 번갈아 보았다. 새로 사온 배구 서적을 꺼내던 닝이 고개를 들었다.
"난 영어가 편하니까."
세미는 굳이 국어 노트마저도 그녀의 것이 더 깔끔하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점심 연습을 건너뛰어도 된다고 이야기 한 사이토 코치에 세미는 분명 일찍 점심을 먹을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다. 내내 심각한 얼굴로 시계를 쳐다보던 그를 보며 수업 내내 키득거렸던 것을 또렷히 기억하고 있던 닝이 책을 내려놓았다.
"내가 매점에서 점심 사올까?"
세미가 눈을 반짝이며 닝을 올려다봤다.
"많이 사와. 내가 돈 줄게."
"됐어."
닝이 세미의 머리를 헝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을 잘 못 하는 저 대신 항상 선수 쳐 먼저 고른 세미는 꼭 본인이 돈을 먼저 내기 일쑤였다. 저야 당연히 고맙다 말하며 잘 받아먹었지만, 그 빈도가 요즘 들어 점점 늘고 있었다. 이번에 지금까지 얻어 먹은 거 다 갚을 정도로 왕창 사줘야지! 닝이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매점에 바구니가 없는 게 아쉽네- 어느새 매점을 동네 마트로 여기게 된 닝이 오렌지 주스와 초코 우유를 손에 쥐고 냉장고 앞에 섰다.
참치 김밥이랑 빵 사가야겠다. 두 손에 음료들을 쥐고 품에 김밥 네 줄을 안은 그녀가 빵 코너 앞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진열대를 노려봤다. 빵을 집고 싶은데, 남는 손이 없었다. 어쩌지. 그렇다고 계산대에 올려두기에는 괜히 불안했다. 닝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닝쨩-"
구세주! 닝이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익숙한 두 얼굴에 환하게 웃어보였다.
"사토리, 와카토시."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이는 텐도에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네자 그 옆의 우시지마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혼자 왜 그렇게 빵들을 노려봐-? 빵들이 무서워한다-"
"하야토 같은 소리 하지 마. 빵도 잔뜩 사가려고 했는데, 손이 꽉 찼으니 어째야 하나 싶어서."
시무룩하게 말하는 닝에게 텐도가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의외로 허당이네- 도와줄까?"
그 말에 닝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너희도 뭐 사려고 온 거지? 도와주면 내가 사줄게!"
발랄하게도 말 하는 닝에 텐도가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정말?"
"괜찮다."
빵들로 손을 뻗던 텐도가 낮은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눈을 흘겼다. 두 사람의 상반된 답에 닝이 배시시 웃어버렸다. 둘 다 보이는 모습과 속이 똑같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둘이 극과 극 같은데 제일 친하다는 사실도.
"맛있는 것들로 대신 골라주기까지 하면, 당연히 사줘야지."
능청스러운 닝의 말에 텐도가 신난 목소리로 "좋아-!" 하고 답했다. 이만큼? 이- 만큼? 물어오며 작은 품에 잔뜩 올려주는 그에게 닝은 더 올려달라 재촉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고개를 기울이는 텐도와는 달리 그 옆의 우시지마는 한 발짝 옆에서 조용히 닝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힉-"
작은 품 안에 넣을 수 있는 최대량의 빵을 짊어진 채 제 몫의 크림빵은 입에 문 닝이 위태롭게 계산대로 향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아기 강아지를 보듯 우시지마와 텐도가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계산대에 잔뜩 늘어놓았음에도 매점 직원은 익숙하다는 듯 큰 봉투를 꺼냈다. 삑-삑- 거리는 바코드 소리를 뒤로 한 닝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웃는 얼굴로 둘을 올려다봤다.
"나 계산하는 동안 먹고싶은 거 골라 와."
"왜 사주겠다는거지?"
그녀가 우시지마를 올려다보며 한 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가 사주고 싶으니까."
얼른 골라오라며 손짓을 한 닝이 다시 계산대 쪽으로 몸을 돌리곤 지갑을 꺼내들었다. 등을 떠미는 텐도를 따라 우시지마도 빵 코너로 되돌아갔다. 초코빵을 집어드는 텐도를 그가 가만 쳐다보았다.
"친해지고 싶은거야, 닝쨩은. 특히 와카토시군이랑 말이지."
"나 말인가?"
"뭐- 와카토시군은 말이 없으니 친해지기 어렵잖아?"
어깨를 으쓱인 텐도가 어느새 묵직한 검은 봉투를 품에 안고 있는 닝에게로 움직였다.
"그렇지? 친해지고 싶은거지, 닝쨩?"
닝은 눈을 깜빡이며 텐도가 무슨 말을 하려는건가 고민하다 곧 활짝 웃어보였다.
"응, 친해지고 싶어서지."
고개를 끄덕인 우시지마가 텐도와 같은 빵을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세미와 나누어 먹을 음식만 한아름 안고 있던 닝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분량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한 번에 4인분을 잘도 해치우는 우시지마의 위장에 대해서는.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현금을 내밀며 다른 한손으로 봉투를 뒤적거렸다.
"고마워-
손을 흔들며 나가려는 둘의 셔츠 자락을 잡은 닝이 빵 몇개를 집어 둘의 품에 안겨주었다. 여전히 풍부해 보이는 검은 봉투을 손목에 건 그녀가 어리둥절한 두 사람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맛있게 먹어!"
드디어 손을 흔들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어보인 닝이 꼬르륵거리는 배에 교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뒤늦게 고맙다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우시지마는 금세 사라져버린 인영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사그라든 틈을 타 조금 늦게 카페테리아로 향하려던 참이었지만, 간식 정도로는 영향을 받지 않는 위장을 가진 그는 텐도가 비닐봉투에 닝이 쥐여준 빵을 담는 동안 하나를 꺼냈다. 크림빵 봉투를 뜯어 입에 문 우시지마와는 달리 텐도는 태연하게도 봉투를 달랑거리며 카페테리아로 걸음을 옮겼다.
"병아리 같아- 안 그래, 와카토시군?"
빵을 우물거리는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익숙하다는 듯 텐도도 채근하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다. 순식간에 빵 하나를 해치운 우시지마가 두 사람이 카페테리아에 거의 다 왔을 쯤에야 답을 내놓았다.
"고양이같다."
먼저 문을 열고 발을 들이는 그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텐도가 자연스레 대꾸했다.
"고양이를 닮긴 했지-!"
*
"닝 양, 잠깐 교무실로 와줄래요?"
종례가 끝나고 가방을 챙겨 세미와 함께 반을 나서려던 닝이 우뚝 멈춰섰다. 어차피 저는 옷을 갈아입고 갈 예정이긴 했다만. "네-!" 활기차게 답을 한 그녀가 세미에게로 몸을 돌렸다.
"늦는다고 말 하라고? 그래-"
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선수 치고는 가보라며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 닝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따 봐."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닝이 기다려주고 계시던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만, 그녀는 곧 걱정할 게 뭐 있겠냐는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2층에서 1층의 교무실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을 얌전히 기다리지 못 한 닝이 결국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거예요?"
"응? 아, 별 건 없고 사이토 선생님께서 네 동아리 신청서를 이제서야 주셔서 말이지."
닝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제 배구부 매니저로 일 한 지 2주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굳이 강조해보자면, 2주 동안 주말에조차 체육관에 출석 도장 찍으며 일 했다는 뜻이다.
체육관에는 퀴퀴한 땀 냄새 대신 저가 사온 디퓨저 향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고 드디어 모두가 물통의 이름표 제도에도 익숙해진 기간. 3학년 주장인 야쿠모 료쿠 선배를 별 생각 없이 료쿠 선배! 라고 불렀다가 요비스테에 관한 강의를 장장 1시간이나 듣기까지 했단 말이다 - 1학년들에게 왜 친하지도 않은 내가 그렇게 불렀는데도 아무렇지 않아했냐니까 외국에서 왔으니 그러려니 했다고 말 해줬다.
다정한 에이타가 배구공만 집으면 표정이 변한다는 것도, 사토리가 보기보다도 더 장난기 많은 녀석이라는 것도, 레온이 3학년 선배들보다도 인자하다는 것도, 하야토는 분위기를 얼리는 개그를 던지는 재능이 있다는 것도, 와카토시가 사실 제일 순둥이라는 사실도 모두 알아낸 기간인데, 이제와서 동아리 신청서를 냈다고?
하다하다 주장이 쓰던 일지도 이제 같이 쓸 수 있을 정도로 벼락치기로 배구 공부도 했고, 심지어는 지난 주 동아리 활동 보고서도 내가 썼는데!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어이가 없어 점차 구겨지는 닝의 얼굴에 선생님은 너털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사이토 선생님께서 배구부 명단에 네 이름을 올리긴 하셨는데, 내 명단에는 귀가부로 적혀있어서 말이지. 그냥 형식 상 간단한 서류 하나만 작성하면 돼."
"아, 다행이네요."
속 뜻이 다 드러나는 눈으로 쳐다보는 주제에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려보이는 닝을 내려다 본 선생님은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선생님이 말씀 해주신대로 정말 형식 상의 간단한 서류였다. 제일 어려웠던 칸이라면 사이토 코치의 한자를 따라 쓰는 일이었을 정도로. 그래도 성의라도 보이고 싶어 가입 이유라던가 하는 칸에는 번역기까지 돌려가며 성심성의껏 길게 썼지만. 뿌듯한 얼굴로 10분만에 서류를 완벽하게 작성해낸 닝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곤 교무실을 나섰다.
얼른 옷 갈아입고 가야겠다. 화장실에 들러 불편하게 옷을 갈아입은 닝은 교복을 접어 가방에 넣으려다 눈살을 찌푸렸다.
"두고 왔나?"
가방을 아무리 뒤적거려도 보이지 않는 일지에 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거면 그냥 기숙사에서 갈아입을 걸.
분명 어젯밤에 내용을 몇 개 추가하곤 그대로 책상에 올려둔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에이타가 제가 늦을 거라고 미리 얘기해둔거겠지. 어차피 왜 교무실에 불려갔는지도 모르니까 그 엄격한 와시죠 감독이 왜 늦었냐 물어도 대충 얼버무리면 될 일이었다.
오늘같은 날 두고 와서 다행이네. 혀를 찬 닝이 기숙사로 걸음을 재촉했다.
에이타한테 주말 아침에는 로드워크 같이 뛰어도 되냐고 물어볼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명색이 배구부 매니저인데 이렇게까지 저질 체력인 건 양심에 찔렸다. 기숙사에서 체육관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것도 뛴 거라고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숨을 고르며 조금은 느리게 걸음을 옮기던 닝이 굳게 닫혀있는 체육관 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방과 후의 정식 연습 시간 때는 날이 조금 쌀쌀할 때가 있어 문을 닫을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해가 따사롭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날도 길어져서 이렇게나 밝은데.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쉰 닝이 두 손으로 철 손잡이를 잡았다. 항상 우시지마가 한 쪽을 먼저 열어주어 그 옆의 문을 몸으로 밀기만 했지, 당겨 연 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첫 날에 문이 안 잠겨있었다 해도 문을 못 열었을 것 같다.
온 몸에 힘을 실은 그녀가 뒤로 넘어질 기세로 힘겹게 문을 열었다.
후-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지만, 공 튀기는 소리도 운동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하는 작은 잡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무슨 생각으로 배구를 하는거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너무나도 명백한 호통 소리. 실수 한 부원을 다른 이들이 연습하는 동안 따로 불러서 혼내는 건 봤었는데, 이건 또 처음이네.
한국의 친구에게 처음 배구부 매니저가 되었다고 문자를 했을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 운동부는 군기 엄청 잡는다던데. 진지하게 프로 노리고 하는거면 더 그렇지 않아? ]
사립이다 보니 솔직히 말해 위계질서가 딱딱하게 잡혀 있는 편이라고 닝은 말 할 수 있었다. 부원들끼리는 아니고, 감독과 부원들 사이가 많이, 불편했다.
유일하게 별 생각 없이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이웨이가 분명한 텐도 사토리. 어른 공경의 의미로 영국에서도 그러했듯 저조차 감독을 성으로 불렀는데, 사토리는 탄지군-이라고 불렀다. 아직 면전에 대고 하는 꼴은 못 보긴 했지만.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져보니 체육계에서는 물리적 체벌을 가하는 사례가 생각보다 더 많았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까지 그런 장면을 목격한 적도, 그 누구도 무엇이 무서우니 더 힘내자는 류의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에이타도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고.
그 탓에 닝은 사열종대로 감독 앞에 서 있는 부원들을 보고도 그저 싸늘한 분위기에 움찔 했을 뿐,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괜히 분위기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죄송합니다- 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주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몸을 돌렸다.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며 세미가 언급했던 '분위기 메이커'의 의미를 곱씹던 순간이었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온 순간,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기 위해 꽉 쥐었던 손의 힘이 풀렸다. 탁 소리를 내며 벤치로 떨어진 닝의 가방으로 시선이 몰렸다. 닝은 순간적으로 눈 앞을 스치듯 떠오르는 과거의 어느 기억에 어금니를 꽉 물었다.
고개를 홱 돌리자마자 보이는 장면에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씩씩거리며 무어라 화를 내고 있는 감독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갔던 얼굴을 다시 바닥으로 숙이는 주장 선배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점점 더 차게 굳어버리는 얼굴과는 달리 닝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와 악. 그 둘만을 오롯이 속에 품은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이토 코치가 이 자리에 부재한다는 사실은 닝의 화를 더욱 돋궜다. 그가 오늘 출근을 했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부원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의 시선으로 따랐다.
"왜 사람을 때리세요?"
차분하지만, 냉랭한 목소리에 주장이 시선을 닝에게로 옮겼다. 평소의 나긋한 어투와 활기찬 목소리에만 익숙해져 있던 부원들은 미지의 감정을 품은 그녀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씩씩거리는 얼굴의 와시죠 감독이 닝에게로 몸을 돌렸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가서 할 일이나 해라."
닝의 시야 끝에는 세 번째 줄에 선 세미와 하야토가 온갖 손짓 발짓을 하며 저를 말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슬쩍 눈으로 그 둘을 흘긴 그녀가 움직일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지금 제 할 일 하는 중인데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와시죠 감독을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그 공간에 있는 인물들 중 가장 키도, 체격도 작은 이인데도, 어째 더 높은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매니저는-"
"매니저의 의무 1 순위는 선수 관리, 귀가 아프도록 들었어요."
그 무엇도 들지 않은 눈으로 감독을 올려다보는, 어쩌면 내려다보는 시선은, 독수리의 것임이 분명했다.
"감독이 아니라, 선수 관리요. 제 눈 앞에서 배구부 주장이 맞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죠?"
체육관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3학년들의 시선은 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2학년들이 감독을 살피며 사이토 코치가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점차 조여오는 것만 같은 공기에 세미와 하야토가 불편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레온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닥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바쁘게 감독과 닝을 번갈아 보는 텐도 앞에 서 있는 우시지마는 미동도 없이 한 사람만을 주시했다.
"훈련의 일부다."
그 말에 닝은 헛웃음을 흘렸다. 한 쪽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빨개진 주장의 뺨을 눈으로 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감독이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운동을 했던 사람이기에 그 힘이 결코 약할 리는 없었다. 이런 걸 훈련이라고.
"지금 돌아가지 않을 거면 매니저 그만둬라."
실소를 흘리는 닝의 모습에 감독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전의 화는 식은 듯 했지만, 새롭게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건지 감독의 목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매니저 퇴출, 그 한 마디에 모든 부원들의 눈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닝은 되려 코웃음을 치며 인상을 구긴 채 감독을 쳐다보았다.
"그만둔다 해서 아쉬울 사람은 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아시지 않나요? 뭐, 어디 한 번 새로운 매니저 얻어보려 애써보세요. 신청도 몇 명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저처럼 제대로 하는 사람도 없을텐데."
답이 없는 감독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도대체 선배가 뭘 했길래 귀한 집 아들이 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뺨을 맞아야 하죠? 부모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얼굴을 왜 감독이 함부로 쳐도 되는건가요?"
얼굴이 구겨지며 눈에 띄게 화를 참으려 애쓰는 와시죠 감독의 모습에 닝이 인상을 풀었다. 안쓰럽다는 듯 축 내려앉은 눈썹과는 달리 그녀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왜요? 저도 한 대 치시게요? 하긴, 고작해야 공 하나 잘못 쳤다고 사람 뺨을 때리는데, 하극상 부리는 절 안 때리고는 못 배기겠죠. 때려보세요."
닝이 한 발짝 다가섰다. 창문 새로 내리쬐는 햇살을 반사시키는 갈색 눈에는 악의가 반사되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 대단한 체벌이라는 거, 분노 조절 못 해서 저지르는 망나니 짓이 아니라고 인정해 드릴테니까, 쳐보시라구요."
그녀는 작았다.
배구공도 두 손으로 쥐어야만 할 정도로 작았고, 깡총 뛰어봤자 세미의 키를 넘지 못 했다. 부원들의 허벅지가 그녀의 허리만했고, 걷기만 해도 위태로워보일 정도로 작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 곳에 그녀보다 큰 존재는 없었다.
제 할일이라면서 방금 전에 손찌검을 한 감독의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은 설사 맞는다 한덜 아무렇지도 않게 광기 어린 웃음을 지을 것만 같았다. 매니저는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는 것뿐이라 이야기하던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씩씩거리며 닝을 내려다보던 와시죠 감독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내쉬었다. 감독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도 굳은 채 서 있는 부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연습해라."
단호한 말투에 모두 일사분란하게 코트로 돌아갔다.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닝."
어느새 귀에 익은 묵직한 목소리에 그녀가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발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그들의 시선 또한 느껴졌다.
"드링크가 필요하다."
잔뜩 일그러졌던 닝의 얼굴이 느리게 평온함을 되찾았다.
의도는 알고 있다.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라는 것. 하지만, 정말 불필요한 마찰일까? 부실로 시선을 돌리는 우시지마에게 그녀가 무어라 답 하려던 찰나, 누군가의 바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이스팩 갖고 왔습니다."
감독에게 작은 아이스 박스를 보여준 사이토 코치가 닝을 쳐다봤다.
냉동실에 얼음은 없다는 사실은 닝도 알고 있었다. 굳이 얼음을 안 넣어놨다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필요할 때가 있을텐데, 왜? 그리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된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무언가 말 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사이토 코치를 괘씸하다는 눈으로 흘긴 그녀가 작은 아이스 박스를 채갔다.
"드링크 금방 준비할게."
우시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어른에게는 그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은 닝이 아이스 박스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발로 살짝 열려 있는 부엌 문을 걷어 찬 그녀가 아이스 박스를 대충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불편하게 비틀렸다. 냉동실을 열어 아이스 팩을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박스 안에 남아있던 하나를 집은 닝이 부실에서 작은 손수건을 집어와 아이스팩을 돌돌 감쌌다.
그새 토스-스파이크-리시브 세트 연습을 위해 체계적으로 줄을 서 있는 모습에 그녀는 아이스 팩을 더 꽉 쥐었다.
"선배."
세미에게 셋 업을 하라 말하곤 스파이크 줄에 서 있던 주장에게 다가간 닝이 잘 감싼 아이스팩을 건넸다. 고맙다는 의미로 생긋 웃어준 그가 아이스팩을 집어 붉게 부어오른 왼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을 빤히 올려다보던 닝이 홱 몸을 돌려 드링크를 타러 가려던 순간,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앞으로는 이런 일 있어도 그러지 마라. 감독님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러다 너 쫓겨나면 어떡하냐."
가볍게 말을 마무리하는 그에 닝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선을 넘을까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런 건 아까 말했다시피 제 의무예요. 선수 관리 하는데, 제가 감독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깨를 으쓱인 닝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3학년 리베로가 리시브를 하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던 하야토가 걱정스레 안위를 물어오자 손을 내저었다. 공의 마찰음이 시끄럽게 울리는 와중에도, 모두가 닝의 작지 않은 한 마디를 들었다.
"내 의무야, 너희들 보호하는 건." |
Keyword 9 지능 |
닝은 그 다음 날에도 그 다다음 날에도 체육관에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문을 열고, 드링크를 타고, 세탁기를 돌렸다. 매일 마지막까지 남은 부원들과 - 거의 대부분의 경우 1학년들이었다 - 함께 늦은 밤까지 체육관에 남아 있다가 정리를 도운 그녀는 기숙사에 돌아가면 바로 잘거라 궁시렁거리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텐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직 매니저 일 하는거야-?" 하고 물으면 닝은 태연하게도 되물었다.
"안 할 이유는 뭔데?"
부원들 모두가 또 다시 사건이 터질까 마음을 졸였다. 감독과 닝의 대면보다는 일방적인 매니저 퇴출 통보를 우려하고 있었다. 와시죠 감독을 가장 오래간 봐온 3학년들이 염려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밑의 후배들도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중간고사 시즌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들은 해사하게 웃으며 안녕-하고 인사해오는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닝은 타고나길 똑똑했다. 배구도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이제는 일지를 홀로 작성하고, 듣기는 미숙한 일본어도 글쓰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 했다. 검토해달라며 국어 숙제를 세미에게 내밀 때면,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미야기 토박이 아냐? 하고 물어오는 그에게 닝은 그저 웃어보였다. 번역기를 써서 그런거라고 그녀는 말 했지만, 맞춤법을 틀리는 것 말고는 그다지 고칠 것은 없을 정도로 타고난 모범생이었다.
닝은 자신의 암기 능력과 작문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딱히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수학조차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설명해주는 것만을 듣고도 이해했고, 그렇지 못했다 한덜 숙제를 하며 스스로 배우는 사람이었다.
숙제와 노트 정리 외에는 딱히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그녀는 체육관에 부원들만큼이나 오래 진을 치고 있기 일쑤였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거나 노트북으로 배구 영상을 보고 있거나 일지를 적는 모습만 봐온 배구부원들이 닝이 공부를 잘 한다는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세미 에이타를 제외하고는.
중간고사를 2주 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5월에는 인터하이 전, 연습경기가 두 개 예정되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합숙이라고 사이토 코치가 공지를 내렸다. 닝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헤아리지 못 한 채 주말에 가면 수업은 안 놓치겠지? 따위의 고민이나 했다.
그녀가 사이토 코치의 경고 아닌 경고를 이해한 건 다음 날 아침, 세미가 나 좀 도와달라며 영어 노트를 얼굴에 들이밀었을 때였다.
"나 영어만 점수가 안 나온단 말이야. 고등학교 첫 시험인데, 망하면 안돼."
고작해야 고등학교 첫 시험인데 왜 망하면 안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굳이 공부하겠다는 그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하지만, 닝의 의아한 시선을 읽어내기라도 했다는 듯 세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점수 안 나오면, 연습 경기 못 가."
"음? 너희 특기생으로 들어왔잖아. 그런 제약도 있어?"
"시라토리자와잖아. 배구만 한다고 되는 거 아니야."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몇 점 넘어야 되는데?"
"... 70."
닝이 가뿐하다며 어깨를 으쓱이자 세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될지 몰라. 그렇게 시험 봤다가 큰 코 다친다."
한 마디 반박하려던 닝이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도와달라고 해놓고,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않아?"
움찔 몸을 떤 세미가 고분고분 노트를 펼쳤다.
세미는 어떻게든 2주 안에 점수를 올려야 한다며 매 쉬는시간은 물론이고, 점심을 먹고서도 곧바로 닝을 교실로 끌고 갔다. 그녀는 그저 그가 공부를 하기 위한 열의가 가득하겠거니 치부했지만, 그 속은 조금 더 이기적인 편이었다.
닝이 공부를 잘 한다는 사실은 그밖에는 알지 못 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친구들이라 해도 저 녀석들이 알게 된다면-
"닝쨩- 나 뭐 좀 물어봐도 될까?"
훈련이 끝나고, 추가 연습을 하는 대신 닝을 도서관으로 끌고 가려던 세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그런 그의 타들어가는 속은 눈치채진 못 한 닝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거?"
"수학 말이야- 와카토시 군이랑 내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지."
"수학은 레온이 잘 하잖아."
세미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닝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텐도는 오히려 세미의 불편함이 재밌다는 듯 흥얼거리며 대꾸했다.
"레온 군은 하야토 군이 이미 질문을 산더미같이 쌓아놨단 말이지- 본인도 공부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도와주지 못 할 것 같다더라고! 마침 미라클 걸 닝쨩이 공부를 잘 한다고 에이타 군이 말 했었던 게 기억난다고 가보라길래 온거야-"
이상한 호칭에 눈살을 찌푸리는 닝 옆의 세미는 그 말에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지난 주, 레온과 이야기를 하다 닝이 공부를 잘 해서 항상 노트를 빌려 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레온은 과학만 공부를 더 하면 된다고 하길래 안심했었지. 그래, 그랬었지. 그 말이 설마 이렇게 돌아오리라곤 그는 상상도 하지 못 했었다.
무료 과외 선생님의 수업을 더 이상 혼자 듣지 못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순간, 닝이 세미의 속을 헤아리기도 한 양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에이타, 다른 사람 도와준다고 너 못 도와주는 거 아니거든? 네 옆에서 책이나 읽고 있는 대신 수학 복습하는 거랑 똑같은데 뭘."
세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닝, 텐도 그리고 우시지마와 함께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날 이후로 네 사람이 도서관에 함께 틀어박혔다. 닝은 책을 읽다가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곧바로 공부를 도왔다. 우스갯소리로 과외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농담을 던지니 진지하게 "줄 수 있다." 하고 답 한 우시지마 때문에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장난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 다음 날 세 사람이 매점을 싹쓸이 해 제 손에 쥐여주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자면 닝이 아예 얻는 것이 없진 않았다. 일전에 글씨체가 프린트라도 한 듯 깔끔한 우시지마의 필기를 본 닝이 "나 네 국어 노트 좀 보면 안돼?" 하고 물었었다. 그렇게 얻어낸 그의 노트는 정말 교과서마냥 반듯해 닝은 그것으로 국어 공부를 대신했다.
일주일 뒤에는 레온과 하야토가 합류했다. 그 때부터는 공부가 정말 본격적으로 변해버렸다. 따로 공부하는게 싫어 우시지마의 글씨체나 따라 써보거나 책을 읽던 닝도 어쩔 수 없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질문들에 대답해주며 복습하게 됐다.
"나 공부는 항상 전 날에 했는데."
"입학 시험 때도 그러진 않았을텐데?"
레온의 말에 닝은 조소를 지었다.
"입학 시험 때 난 밤도 안 샜어."
그들은 그녀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비롭게도 주말에조차 공부를 돕던 닝은 중간고사 바로 전 날인 일요일 날, 기숙사에 틀어박힐 예정이라 문자했다. 어차피 이틀 전부터는 각자 알아서 암기에 미쳐 살았으니 다들 흔쾌히 그러라 답했다. 그리고 닝은 마법같이 월, 화의 방과후 연습에도 나오지 않았다. 공부 때문이었기에 코치도, 감독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월요일, 결과가 나왔다.
"닝! 나 해냈어!"
영어 밑에 떡하니 쓰여 있는 75라는 숫자에 닝이 환히 웃어보였다.
"열심히 했잖아, 잘 했네!"
기분좋게 웃으며 머리를 헝클여오는 닝의 손길에 세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잘 봤나보네?"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인 닝이 뿌듯한 얼굴로 자랑스레 말했다.
"과학이랑 국어가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는거라서. 그래도 국어는 와카토시 덕 좀 봤고, 수학도 얼떨결에 복습한 덕이지."
세미가 대답은 않은 채 손가락을 까닥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성적표를 건네준 닝은 일전에 사온 초코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성적표를 눈으로 훑은 세미의 입이 느리게 벌어졌다. 아쉽다는 국어와 과학의 점수는 각각 93, 95. 나머지 과목들은 97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수학과 영어는 100이라는 세자리 숫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닝에게 성적표를 돌려주지 않은 세미는 점심 때 만난 1학년들의 눈 앞에 숫자들이 적힌 종이를 팔랑거렸다.
"닝, 공부 엄청 잘 하는구나?"
"역시, 미라클 걸 닝쨩한테 일찍이 도움을 청하길 잘 했지!"
아는 것만 대충 했는데도 80이 나왔다는 텐도의 말에 닝이 자랑스럽다며 박수를 쳐 주었다.
"아 맞아. 까먹고 있었는데, 와카토시 덕분에 국어 점수 잘 나왔다? 노트만 구경했는데도 시험지 받았을 때 아는 게 엄청 많던 거 있지? 고마워!"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닝을 우시지마가 가만 내려다보다 손을 긴 머리칼로 뻗었다.
"나도 고맙다."
가볍게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닝의 웃음이 한 층 밝아졌다.
*
합숙은 이사카와 현의 사루카와 공업 고교와 나가노 현의 카모메다이 고교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두 학교 모두 주부 지방에 있는지라 사루카와 공고에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합숙 연습을 진행하기로 했다. 두 학교 모두 매니저가 없는데, 혼자 괜찮겠냐는 주장의 물음에 닝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걱정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해야죠. 찾아보니까 카모메다이는 이번에 감독이 바뀌었더라구요?"
그 말에 주장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닝은 합숙이라는 것에서 딱히 기대한 것은 없었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바로, 우시지마의 힘이 정말 다른 학교들과 견주어도 압도적일 지 직접 보고 싶었다.
중등 시절에조차 우시지마는 이름 꽤나 날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매번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팀의 에이스는 사실 우시지마가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적이기도 했고. 물론, 배구 공부를 하면서 그녀는 왜 와시죠 감독이 그를 주전으로 내놓을지언정 아직 에이스의 자리는 주지 않았는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컨트롤 면에서는 탁월하다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뭐, 컨트롤이고 뭐고 어차피 힘으로 밀어 붙이는데 무슨 의미겠냐만은.
닝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가장 바쁘게 움직였다. 다른 학교들의 벤치 행 1학년들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수건이랑 조끼 준비 좀 도와줄래요?"
그리곤 그들이 말을 걸 틈도 주지 않은 채 쌩하니 드링크를 타러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유는, 빨리 일을 마무리 하고 연습 경기 마음 놓고 구경하고 싶어서. 나름대로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 땀이 나도록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닝은 본인 때문에 시라토리자와가 다른 학교들과 기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이 알지 못 했다.
닝은 점차 뜨거워지는 날씨에 체육복 반바지에 하얀 반팔과 배구부 져지를 입곤, 배구부 일을 할 때만큼은 길게 늘어트렸던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채였다. 그녀가 팔랑거리며 걸어다니는 모습이 갓난 아기 사슴처럼 위태로워 보이긴 했지만, 그만큼 시선을 끌기엔 최적인 인물이었다.
수건만 개면, 편하게 구경 할 수 있다! 닝이 스스로를 격려하며 커다란 체육관의 한 쪽 끝에서 반대편으로 뛰어갈 때면 최소 두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길고 얇은 목선이라던가, 반짝이는 눈빛이라던가, 해사한 웃음 따위는 어쩌다보니 홍일점이 된 닝에게 시선을 더욱 끌어 모았다.
티는 안 나더라도 닝이 배구부원들에게 주는 애정만큼이나 그들이 그녀에게 되돌려주는 애정 또한 크기가 어마무시했다. 고로, 배구부의 보호자 겸 비타민 역할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닝을 향한 시선들을 눈치 챌 때면, 가장 먼저 발견한 자가 머뭇거림 없이 바로 으르렁거렸다.
한편, 이유를 알 리 없는 닝은 둘째 날의 시라토리자와 연습 경기를 구경하던 중 어째 많이 공격적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두 학교는 방어적이었고 저들은 스파이커에게 몰아주는 공격적인 전략이었지만, 유독 심했다. 그 중에서도 기싸움이 특히나 심했고.
카모메다이를 2:1로 이긴 뒤, 닝이 타올을 나눠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초반부터 너무 힘 뺀 거 아니에요?"
"아, 그거야 닝쨩이-"
무어라 말 하려던 텐도의 입을 세미가 손으로 꽉 막아버렸다. 내 얘기가 왜 나오나 싶어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하야토가 끼어들었다.
"장기전으로 넘어가면 안되니까, 한 번 시도해본거야."
딱히 전략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닝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의 손아귀에서 텐도가 풀려났음을 눈치채고 그나저나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냐 물으려던 찰나, 레온이 드링크 통을 내밀었다.
"저기, 드링크 좀 더 줄 수 있을까?"
피쳐를 깜빡하고 주방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닝이 고개를 끄덕이곤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드링크를 다시 리필하는 동안 그녀는 일전의 사건에 대해 까먹어버렸고 시라토리자와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텐도, 무슨 말을 하려던거지?"
"아, 와카토시군은 바보네- 저기, 저 녀석들이 자꾸 닝쨩을 쳐다보잖아."
"그게 어떻다는건가?"
"음흉하다고. 생각해 봐, 저기 저 불순한 의도가 가득해보이는 쟤가 닝쨩을 채가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그저 다른 팀원들에게 맞춰주었을 뿐이었던 우시지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자 텐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였단 말이지- 조금, 많이 신난 얼굴로 텐도는 흥얼거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세미와 레온은 왜 텐도가 게스 몬스터라 불렸는지 그 날 밤,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자율 연습을 위해 체육관에 몇몇이 모여 있던 참이었다. 그 중 시라토리자와의 1학년들은 당연스레 남아 있었다. 닝은 좋은 기회다 싶어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드링크 분말 충분하게 챙겨왔는데, 타 줄까?"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들을 눈에 담은 닝은 얼마 전부터 머릿속에 맴도는 외국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Tonight, I'm-a fight Till we see the sunlight Tick-tock on the clock But the party don't stop, no
신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6개의 드링크를 모두 탄 닝이 쟁반을 쓸까 고민하다 모두 품에 끌어안았다 - 쟁반을 굳이 찾기 귀찮았다.
부엌을 나서자마자 우시지마와 레온에게 토스를 올려주는 세미가 보여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조금 들뜬 걸음으로 걸은 탓에 드링크 통을 하나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런. 세미 에이타 가 적혀 있는 물통을 주워야 하는데 손이 없어서 어쩌나 싶을 쯤 카모메다이 연습복을 입은 남학생이 하나 다가왔다.
"도와줄까?"
굳이 소개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첫 날에 대뜸 "바이쇼 테이카라고 해!" 하고 손을 내밀어 와 얼떨결에 일을 돕게 된 다른 1학년들과도 악수와 통성명 모두 하게 된 주범이었다. 그 때부터 계속 말을 걸어 와 귀찮았는데, 도와주겠다며 손을 뻗는 그에게 인상을 찌푸릴 수도 없는 꼴이었다.
"아니. 이건 내가 들 수 있고, 그것만 주워줄래?"
고개를 끄덕인 그는 흔쾌히 닝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바뭐시기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에 시선을 집중했다. 에이타, 내 새끼, 너무 잘 해. 레온도 참 대단하단 말이지. 그리고 와카토시는 역시-
반대편에 서 있던 하야토가 움직일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리꽂히는 공에 소리를 질렀다.
"생각 할 시간은 주라고!"
"경기 중에는 그럴 시간 없다."
맞는 말이기에 할 말을 잃은 하야토가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키득거린 닝이 드링크 통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세미의 드링크 통은 내려놓지 않은 채 저를 쳐다만 보고 있는 바이쇼에게로 닝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을 덥석 잡아오는 그에 기겁을 하며 손을 뺐다.
"통 달라고."
인상을 구긴 그녀가 드링크 통을 홱 채갔다. 괜히 찝찝해 슬쩍 소매로 통을 이리저리 닦아냈다. 그런 닝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 지 바이쇼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 저, 혹시 라인 좀 알려줄 수 있을까?"
같이 연습 할 수 있겠냐는 카모메다이 1학년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드링크를 마시러 오던 시라토리자와 1학년들이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제일 먼저 회복한 텐도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려던 세미를 멈춰 세웠다. 얼굴을 무표정하게 굳힌 닝이 싸늘한 시선으로 바이쇼를 올려다봤다.
"싫어."
멀뚱멀뚱 서 있는 하야토가 시야의 끝에 걸린 닝이 드링크 통 중 하야토의 것을 집어 건넸다. 두 발짝 멀리서 눈을 깜빡이던 그가 잽싸게 드링크 통을 집어들며 고마워- 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다가오는 다른 이들에 떨떠름하게 미안- 하고 답을 한 바이쇼가 그를 부르는 1학년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매정하네- 그렇게까지 단호할 필요가 있었나?"
건네지는 드링크 통을 받아들며 묻는 텐도에 닝이 눈을 데굴 굴렸다.
"싫으니까 싫다고 한 거야."
"그래도 말이지, 상냥하게 말 할 수 있었잖아?"
묘한 질문에 닝은 가만 텐도를 올려다보다 드링크 통이 주인들을 잘 찾아간 덕에 비워진 자리에 몸을 앉혔다.
"난 귀찮은 일은 안 해. 그리고 내가 상냥하게 군 적을 본 적은 있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고민하는 텐도에 닝이 그럴 줄 알았다며 얼른 코트로 돌아가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우리 공부 도와주는 게 상냥한 거 아니겠어?"
어떻게든 좋은 말 한 마디라도 해주려는 레온에 그녀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상냥한 게 아니지.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해준 것 뿐이니까."
그 말에 저를 벙찐 채 바라보고 있는 세미의 시선을 느낀 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어, 쟤네 기다리잖아. 얼른 가 봐."
닝이 억지로 제 옆에 앉은 하야토의 등을 밀자 그제서야 코트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내 새끼들- 이라고 그녀는 그 날 처음 중얼거렸다. |
Keyword 10 애정 |
와시죠 감독이 배구부에 애정이 있는걸까?
단순히 자신이 키우는 '팀'이 아니라, 자신이 키우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닝은 체벌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질문에 당연히 그런 것 같다고 답을 할 수 있었다. 뭐, 굳이 안 나와도 되는 일요일날도 나와서 저들끼리 배구하고 있는 녀석들을 누가 안 아끼겠냐만은, 그래도 가끔 떠들썩해지는 그들을 놔둔다던가, 특히나 텐도가 탄지군이라고 그를 일컫는 것을 듣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모습에 당연히 그렇다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체벌을 목격한 뒤에는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냥, 자신이 키운 팀이라는 사실만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저 전국 8강은 기본으로 찍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인터하이 전국 4강전에서 이나리자키에게 패배하고 돌아가는 중에도 그 생각 뿐이었다.
엄청 잘 한건데. 왜, 칭찬을 안 하지?
닝은 아무런 말도 없는 감독과 수고했다-라는 말 한 마디만 남긴 코치 대신 자신이 축하해주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 날, 닝은 잠깐 기숙사에 들러야한다고 둘러댄 뒤 점심시간에 홀로 매점으로 향했다. 잘 먹는 배구부는 퍼먹는 아이스크림 한 통씩 사줘도 가뿐하게 클리어 할 것 같았다.
석식 전이니까 더 잘 먹겠지 뭐. 그리 판단한 닝이 그새 다 팔렸는지 비어있는 막대 아이스크림이나 빨아먹는 아이스크림 구간과는 달리 재고가 넉넉히 남아있는 통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쓸어담았다. 꽤나 무거운 봉투를 산타클로스마냥 어깨에 짊어진 그녀가 체육관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 막 인터하이 경기가 끝난 터였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봄고 준비를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되는 훈련을 닝은 내내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봤다. 평소 부 활동을 할 때마다 잘 웃는 편이긴 했지만, 유독 생글거리고 있는 아이를 보곤 사이토 코치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눈을 반짝인 닝이 어린 아이마냥 헤실거렸다.
"네!"
간결히 답하곤 활동 보고서 써야겠다며 유유히 가버리는 그녀를 딸내미 보는 양 코치가 가볍게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월요일이기에 곧바로 탈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선배들을 흘깃 쳐다보곤 밖으로 나서는 코치와 감독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닝은 속으로 빨리 나가라, 빨리 나가라- 중얼거렸다. 발을 동동거리던 그녀가 체육관 문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문 뒤에 살짝 숨어 감독과 코치의 인영이 검은 점이 될 때까지 기다린 그녀가 홱 뒤돌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하야토에게 다급하게 손짓했다.
"문 좀 닫아주라."
하야토가 반대편으로 가 문을 닫는 와중에 힘겹게도 문 손잡이를 잡아 당기고 있는 닝의 가여운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대신 한 손으로 문을 닫아주었다.
"왜 그래?"
세미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닝이 해맑게 답했다.
"어제 경기 잘 마친 기념으로 내가 아이스크림 사왔지!"
"아이스크림? 뭐 사왔는데?"
"하겐다즈- 그냥 다 쓸어와서 무슨 맛 있는지는 몰라. 선배들은 씻으러 갔으니까 취향대로 못 고르는 거지 뭐. 기다리구 있어!"
활기차게 말한 그녀가 신난 얼굴로 부엌으로 달려갔다. 구석에 보관해두던 아이스 박스에 잔뜩 담아 질질 끌고 나온 닝이 일회용 숟가락 더미를 내밀며 말했다.
"선착순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달려오는 텐도와 세미와는 달리 나머지 네 사람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뚜껑을 열며 닝의 머리를 헝클인 세미가 벽에 기대 앉았다. 바닐라 맛을 고른 레온이 그녀가 건넨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몰래 사는거야?"
"당연하지. 4강 진출 축하 선물!"
말갛게 웃어보이는 닝을 가만 내려다보던 우시지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굳이 축하 할 이유가 있나?"
우시지마의 말에 텐도가 혀를 차며 검지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거라고, 와카토시군."
아이스크림 통을 손에 쥐여주는 텐도에 우시지마가 "고맙다." 나지막히 전하며 닝이 건네는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굳이 할 이유는 있지."
아이스크림 통 뚜껑을 연 그가 닝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4강 진출, 당연한 일 아니잖아? 감독님이나 코치님이나 말 한 마디 없길래, 뭐라도 해주고 싶었어. 굳이- 축하하고 싶었던 건, 내 새끼들 예뻐서."
"내 새끼들?"
"내가 아낀다고."
의아한 얼굴의 우시지마를 올려다보다 말고 급하게 눈을 피한 닝이 가서 벤치에 앉으라며 세미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완전범죄의 꿈이 아깝게도 2, 3학년들까지 다 같이 퍼져 앉아 아이스크림 한 통씩 끼고 먹던 중, 두고 간 물건을 가지러 돌아온 사이토 코치에게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한 마디 잔소리 하기도 전에 닝이 교소를 지으며 남은 아이스크림 두 통과 숟가락 두 개를 집어 코치의 손에 쥐어주었다.
"점심 때 사 놨던 게 아까 생각이 난 거 있죠? 감독님이랑도 같이 맛있게 드세요! 열심히 코치해주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까지 꾸벅한 닝은 체육관 문이 닫히자마자 웃음을 지우곤 몸을 돌렸다.
"큰일 날 뻔 했네."
한숨 돌렸다며 무표정하게 벤치에 앉으며 핸드폰을 꺼내드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하야토가 레온에게 작게 속삭였다.
"닝이 제일 무서운 사람인 것 같아. 어쩐지 무가 닝만 보면 그렇게 서운한-"
"그러다가 닝이 왜 무서운 지 알게 된다. 조심해."
"..."
*
닝은 호불호가 명확하게 그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아침이 싫었고, 밤이 좋았다. 여름이 싫었고, 겨울이 좋았다. 집이 싫었고, 배구부가 좋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만큼이나 싫어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도 없이 많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손찌검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무슨 연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믿지는 않았다. 때로는 맞아도 싼 인간들이 있었고, 가끔은 저가 직접 한 대 쳐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에는 물리적 폭력보다도 더 무서운 행위가 널려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정도의 이상주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부감이 있었다. 굳이 누군가 상대를 때릴 때 나는 마찰음이라던가 아프게 부어오른 살이라던가 상처라던가 하는 것들을 싫어했다. 그 중 뺨을 때리는 행위를 가장 싫어했다. 어느 날의 장면이 겹쳐져서.
그렇기에 닝은 주장이 와시죠 감독에게 맞는 꼴을 보고도 - 듣고도 - 그냥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다면, 보호해주고 싶었으니까.
그 날 이후로는 누군가 실수라도 할 때면,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감독에게로 움직였다. 다행히도 그 날 이후로 그가 손을 든 적은 없었지만, 고작 제 몇 마디 때문에 그의 오래된 교육 철학이 바뀔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심하는듯 싶어져서, 그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을 놓고 있던 날들 중 하루였다, 그 날은.
춘고를 앞둔 9월의 어느 가을 날이었다.
그 날의 피해자는, 세미와 우시지마였다.
사유? 굳이 단어를 몇 개 골라보자면 자존심과 자부심이 그것일테다.
세미는 실력이 좋았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세터로서 뽐낼 수 있는 기교들을 감독이 불허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훈련 중이라지만, 스파이커에게 공을 넘기지 않는 판단이, 감독이 좋아하는 전략과는 반대되는 결정이, 그의 심기를 거슬린 것이다. 그런 일이 유독 그날따라 무의식 중에 반복되었으니 일종의 반항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닝이 감독의 편을 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렇다면 감독이 최강의 무기 쯤으로 여기는 우시지마는 무슨 문제에 걸려 들었냐 하면, 유독 그날따라 정신을 못 차렸다. 평소답지 않게 실수를 꽤나 했다. 컨디션 난조가 분명했다.
닝은 감독에게 그 둘이 불려가는 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세미의 플레이 스타일일뿐이었다. 항상 잘난 놈 하나에게만 몰아주는 건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한계는 있었으니까.
우시지마에게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인간은 실수를 하는 생물이었으니까.
그게 정말 손까지 들 일일까? 체벌의 이유로서 정당화 될 수 있는 일일까?
닝의 답은 언제나 '아니오'였다.
그렇다 해서 또 덤비고 싸울 수는 없었다. 저는 분명하게 저번에 제 의견을 표명했었고, 지금도 바로 옆에서 불이 튀기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감독은 아랑곳 않았으니까.
이를 바득 갈며 얼굴을 구긴 닝이 부엌으로 향해 아이스 팩과 혹시 몰라 연고와 면봉까지 쟁반에 올렸다. 그녀가 문 너머로 사라진 사이에 끝난건지 둘은 어느새 벤치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세미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코트위의 다른 부원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우시지마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미는 저들을 쳐다보고 있는 닝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 했다. 두 사람의 옆에서 드링크를 마시고 있던 텐도가 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서야 고개를 까닥이며 탈의실로 향하는 닝을 세미와 우시지마가 따랐다.
소리가 나도록 쟁반을 벤치에 내려놓은 그녀가 손수건으로 아이스팩을 감싸 세미에게 건넸다.
"내가 언제 한 번 미친 척 하고 뺨 때릴거야."
닝이 화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 하며 나머지 아이스팩을 우시지마의 뺨에 대주었다.
"너 그러다 학교에서 쫓겨나."
"졸업할 때 치고 갈거야."
"정말 할 수 있겠어?"
실소를 흘리는 세미에 닝이 어이없다는 뉘앙스로 눈을 굴렸다. 세미의 얼음팩을 내려, 연한 살갗이 거칠게 변한 것을 확인한 그녀가 연고를 옅게 발라주었다.
"할 거야. 내가 정말 못 할 것 같아?"
"똑같은 사람이 되면 안된다고 말 했던 사람이 너였던 것 같은데."
미소를 머금은 세미의 다정한 말투에 겨우 참았던 한이 어린 눈물이 닝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혔다. 우시지마조차 이를 발견하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당황한 세미가 무어라 덧붙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본인도 맞아봐야 정신차릴텐데. 지금 당장 이 쟁반 갖다 던져버리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부추기지 마."
세미보다도 우시지마의 볼이 더 많이 부어올라 있음을 확인한 닝이 눈살을 찌푸리며 벤치에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세미가 뺨이 화끈거리는지 다시 아이스팩을 올리려는 손을 제지한 그녀가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조금 있다가 올려. 드링크 시원하라고 피쳐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놨으니까 그거 마시고."
알겠다는 듯 웃어준 세미가 닝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쓰다듬곤 탈의실을 나섰다.
별다른 말 없이 제 지시만을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 있는 우시지마의 반대편에서 그녀는 속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에 말 할 곳이 없다는 사실도, 설사 말한다 한덜 별 다른 변화도 없으리라는 사실도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우시지마는 시라토리자와의 부속 중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을 마주했다.
"중학교 때도 이랬어?"
답을 않은 채 그녀의 곧은 시선을 마주하기만 하던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다."
조금 속물적인 생각을 해보자면 시라토리자와 학원은 모두 돈이 어느정도 있는 집안의 학생들이었다. 물론 이름 난 정재계의 자제들은 도쿄로 가겠지만, 미야기의 시라토리자와도 돈 있는 사람들이나 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돈 많은 집안의 아이들에게는 이런 체벌 따위 일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다. 배울만큼 배운 어른들이 공립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아가며 오는 곳이니 인터넷에 떠도는 그런 일들은 없을 줄 알았다.
이성의 교육을 해야 할 어른들이 손을 들어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 닝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지자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우시지마가 물어왔다.
"왜 화를 내는거지?"
"뭐?"
"왜 당연한 일에 화를 내는거지?"
닝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체육계의 체벌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처음 해주었던 오랜 친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게," 그녀가 그의 왼뺨을 가리켰다. "그렇게나 당연한 일이야?"
우시지마가 우직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입꼬리를 불편하게 떤 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 서서는 왼뺨에 대고 있는 아이스팩을 내리게 했다. 부어있던 볼이 조금 가라앉은 채였지만, 여전히 붉은 색과 살짝 일어난 피부에 그녀가 인상을 구겼다. 새 면봉에 연고를 소량 짠 닝이 그 뺨에 약을 세심하게도 발라주며 말했다.
"내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배운 게 몇 가지 있어. 그 중 하나가 입 꾹 다물고 감내해서는 바뀌는 게 없다는 거야.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지속적으로 얘기가 나와야 돼, 해당 규칙이 얼마나 오래간 존재해왔냐 따위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지 않으니까."
우시지마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민트 향의 숨결이 약하게 볼을 스쳤다.
"이 학교가 강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체벌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참아가며 배구를 하려고 하는 학생들의 끈기와 열정 덕분이야. 다른 애들한테도 몇 번 얘기했었지만, 이 곳에 오는 것부터 이미 실력을 인정받을 만한 일인데, 왜 이게 당연한 일로 치부되는거야?"
연고의 뚜껑을 닫으며 멀어지는 닝을 그는 대꾸 없이 시선으로 따랐다. 다시 맞은편의 벤치에 털썩 앉은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도 체벌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잠시 정적을 지키던 우시지마가 느지막하게 답했다.
"시라토리자와는 오래간 이 자리를 지켜왔다.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
와시죠 감독이 이 곳의 감독이었던 기간은 꽤 오래되었으니 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괜히 분해진 닝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냥 선수를 고르는 안목이 좋은거뿐이야. 그리고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어. 좋은 경기들이었다고, 좋은 추억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고교 시절을 만들어주는 감독이 좋은 감독이지, 끝나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감독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프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옆에 내려놓았던 아이스팩을 집어든 우시지마가 그녀에게 이를 건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또 괜히 분해진 닝은 아이스팩을 쟁반에 내려놓으면서도 작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화를 삼켰다.
"너도 가서 물 좀 마시고 얼른 연습해. 또 맞을라."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고개를 끄덕인 우시지마가 문으로 향하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면봉을 구석의 쓰레기통에 버리곤, 물건을 정리해 쟁반을 집어들던 닝이 아직 나가지 않은 그를 발견한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요한 거라도 있나? 그리 생각할 쯤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너가 온거다."
"어?"
"이제 우리들은 너를 떠올리게 될 것 아닌가."
저를 돌아보며 하는 말에 그녀가 눈을 꿈뻑거렸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짙은 눈빛은 그의 진심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반년 가까이 매일같이 봐왔으면서도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저에 대해 무어라 말 한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선배들조차 어딜가도 살아남을거라느니 어떻다느니 말 할 때조차 한 마디 거든 적 없던 그의 말에 닝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러려나?"
다시 한 번 본인의 의견을 되새겨주듯 고개를 끄덕인 우시지마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먼저 탈의실을 나섰다.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털썩 벤치에 주저앉았다. 쟁반 위의 아이스팩을 가만 내려다보던 닝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눈치 없다고 놀리던 텐도도, 초배구바보라 일컫던 레온도, 배구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저도 모두 틀렸었다. 배구공만 쳐다보는 사람도 아니었고, 눈치 없는 인간도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그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보지 않는 것 뿐이었고, 그저 과묵한 성격이었던 것 뿐이다. 좋은 말 못 하는 사람도, 나쁜 말만 골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내뱉을 뿐.
그러니까, 방금 그 말은 진심인거고-
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다른 사람이 해준 말이었다면 그저 웃어넘겼을테다. 소중하게 속에 담으면서도, 말을 참 예쁘게 해준다고만 생각했을테다. 하지만,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말을 예쁘게 꾸미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만을 담은 채 건네는 사람이라서, 더 타격이 컸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라서, 묵직한 목소리로 들려온 말이라서, 진지한 눈빛이라서 그런거다. 제 얼굴이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것은. 딱 그 뿐이다.
우시지마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을 뿐, 그를 향한 제 의견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고 닝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식히려 애썼다.
그렇게 몇 분 동안이나 벤치에 앉아 속을 진정시킨 그녀가 뒤늦게 탈의실을 나섰다. 왜 이렇게 늦게 나오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하야토에게 닝은 손을 내저어 보이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
Keyword 11 복선 |
"에이타 군은 어디가고 혼자 와?"
텐도의 물음에 닝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어떤 여자애가 얘기 좀 하자 그래서 걔랑 갔어. 오긴 온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젓가락을 집어드는 닝과는 달리 하야토의 눈이 휘둥그레 크기를 키워냈다.
"누구?"
"말하면 알아?"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닝에 하야토가 시선을 피했다. 키득거린 그녀가 밥을 입에 넣곤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렸다.
"키는 ... 좀 크고 검정색 단발이었어. 순하게 생겼어. 예쁘더라."
"와, 세미세미 여자친구 생겨서 오는 거 아니야?"
텐도의 능청스러운 말에 닝은 그럴 수도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부럽네- 중얼거리는 하야토에 레온이 격려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되려 더 슬퍼지기만 했지만. 자연스레 점프 주간지로 흘러가는 주제에 닝이 저도 한 번 봐보고 싶다 이야기 할 쯤이었다.
"에이타 왔네?"
레온의 말에 손을 붕붕 흔드는 텐도와 하야토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가볍게 눈인사만을 건넸다.
"그래서 고백은 받아줬어? 예쁘던데!"
닝의 물음에 세미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지도 몰랐는데 뭘."
"근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와카토시군이었으면 '너가 누군지 모른다' 하고 그냥 왔을텐데."
"난 못 해, 그런 거."
너무 단호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밥을 입에 우겨넣는 세미를 뒤로 한 채 하야토는 텐도의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듯한 우시지마 성대모사에 끅끅거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덤덤한 얼굴로 묵묵히 벌써 3인분 째 잘만 먹고 있는 우시지마의 옆에 앉은 레온은 그저 허허 웃으며 방관자마냥 구경했다.
한편, 신나서 한 술 더 뜨고 있는 텐도 옆에 앉아 있는 닝은 홀로 상념에 빠져버리고야 말았다.
방금 에이타가 고백을 받고 왔는데, 대뜸 와카토시라면- 하는 가정을 한다는 건, 그도 받았다는 걸까? 고백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우시지마를 눈으로 슬쩍훔쳐 본 그녀가 다시 시선을 하얀 밥에 고정시켰다.
하긴, 고백 안 받는 게 이상하긴 하지. 이미 1학년 주전으로서 벌써부터 최강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에 유명세도 타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다고 했었지. 운동하니까 몸도 좋고, 잘생겼고, 공부도 평균 이상, 게다가 부잣집 도련님이기까지 한데 인상이 무섭고 어떻고를 떠나서 들이대는 사람이 없을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닝, 너 밥한테 원수라도 진거야?"
레온의 우려스러운 말에 닝이 생각의 끈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제게 몰려 있는 시선들에 밥을 태워버릴 듯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입술을 당겨 물었다.
"배불러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속이 더부룩했다.
"반도 안 먹지 않았나?"
바로 앞에서 흘러 나오는 묵직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닝이 우시지마를 올려다봤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하게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이상해."
그녀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주머니에 넣은 뒤 식판을 들었다.
"나 음료수라도 사올게."
"괜찮은거야?"
세미의 걱정 어린 말에 닝이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냥 카레가 느끼해서 그런 것 같아. 금방 갔다 올게!"
저 스스로도 이해가 안되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닝의 뒤를 모두 시선으로 따랐다. 어련히 괜찮을거라며 고개를 돌리는 세미와 달리 텐도는 눈을 반짝였다. 불안하다는 시선으로 본인을 흘깃거리는 레온과 하야토를 가뿐하게 무시한 텐도가 다시 전 날 본 드라마로 주제를 돌렸다.
사이다를 산 닝이 매점을 나섬과 동시에 뚜껑을 땄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속이 이상한 게 아닌가?
다시 급식실로 돌아 온 그녀가 울상이 되어 있자 세미가 먼저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체한거야?"
"모르겠어."
"엥?"
그녀가 사이다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내 괜찮다가 5분 전부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질리가 있나? 배가 아프지도 않은데?"
"그걸 우리한테 물으면 어떡해."
레온의 어색한 미소에 닝이 눈을 반짝였다. 그 시선을 마주한 그가 되레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키워냈다.
"그치, 네 말이 맞아. 있지, 나 보건실 가 봐야겠어. 소화제라도 먹어보는게 맞는 것 같아. 나 먼저 가볼게. 에이타, 쌤한테 말 해줘!"
잽싸게 인사를 한 닝이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들쳐매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육상 잘 하겠는데?"
"지구력 없어서 단거리 잘 할 듯."
소에카와와 하야토가 한 마디 씩 주고 받는 사이, 텐도가 기분좋게 흥얼거렸다.
"닝쨩은 의외로 허당이네-"
"어?"
세미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텐도는 곧바로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닝이 사라진 방향을 유심히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내리는 우시지마를 흘겨본 텐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내내 배가 아팠는데도 밥을 먹고 나서야 눈치 챘다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네."
*
닝은 결국 소화제를 얻어내지 못 했다.
이유는, 체한 게 아니라서. 마음 한 켠으로는 보건 선생님의 말이 사실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반으로 돌아갔다. 영 이상한, 아니, 이상했던 속의 원인은 여전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왤까? 하고 세미에게 물어봤지만, 굶지는 말고 이따 매점에나 들르라는 말만 돌아왔다.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닝은 오후 수업 내내 뒤집어지지도, 아프지도 않은 속에 또 다시 의구심을 품었다.
계속 저가 괜찮은 지 확인하려는 세미에게 아무래도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았나보다고 대충 얼버무리려던 찰나였다. 체육관으로 같이 가기 위해 다른 친구들을 만나자마자 속이 간지러워졌다.
다들 아직도 속이 안 좋냐, 그래서 저녁은 먹겠냐, 뭐라도 먹어라, 물어대는 목소리들 속의 "괜찮은건가?" 하고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또 뱃속이 불편해졌다. 복통의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왠지 그다지 파헤치고는 싶지 않은 마음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이따 저녁 맛있게 먹으면 되지 뭐."
언제나처럼 부엌, 세탁실, 그리고 부실을 바쁘게 오가던 닝은 석식을 먹은 뒤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코치와 감독이 없는 체육관은 언제나 분위기가 다정했다. 무뚝뚝한 인간들 천지였고 떠드는 애들은 고작 텐도랑 세미 뿐이었음에도 닝은 그 순간이 가장 좋았다.
늦은 밤, 선배들은 하나 둘 떠나고 또 1학년들만이 남아 있었다. 물 먹는 하마도 아니고 드링크를 고래 마냥 몸에 붓는 것 같은 이들을 위해 드링크 대신 생수를 피쳐에 담아온 닝이 무겁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본인만 아는 노래를 또 흥얼거린 그녀는 따로 가방에 챙겨 다니는 책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한국 소설이었다. 어젯밤에 읽다 만 부분을 편 닝이 한두 줄 눈으로 훑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세미가 공을 레온이나 우시지마 둘 중 한 사람에게 띄워주면 방향을 텐도가 예측해보고 막지 못 하는 공은 하야토가 리시브하는 순의 자율 연습이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시선이 자연스레 한 사람에게로 움직였다. 자각도 하지 못 한 채였지만, 언제나와 같았다.
학교의 상징인 흰머리수리처럼 날아올라 강하게 내리찍는 스파이크. 자리는 예측했으면서도 두려움에 팔을 뻗지 않는 텐도와 하야토의 모습을 보며 닝은 작게 웃음을 삼켰다.
"어? 왜 물이야?"
"고래 마냥 드링크만 들이붓는 거 몸에 안 좋아."
고개를 끄덕인 하야토가 물통을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아직 기숙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텐도는 닝의 옆에 와 앉았다. 손에는 책을 든 주제에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다시 코트로 돌아갔다. 하야토처럼 물통을 집어 탈의실로 향하는 레온과는 달리 나머지 둘은 공을 집어 들었다.
세미가 먼저 공을 하늘로 띄웠다. 요즘 점프 서브를 연습한다고 했다. 하늘로 떠오른 공은 꽤나 안정감 있게 세미가 의도한 동선대로 움직였지만, 선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젠장, 그 뒤로 들리지 않는 비속어를 그가 읊조렸다.
공이 든 바구니에 기대며 세미가 뒤로 물러나자, 우시지마가 선은 보지도 않은 채 간격을 맞춰 섰다. 공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향하는 시선, 탄력 있게 튀어오르는 몸, 빠르게 공을 내리치는 손.
이마에 늘러붙는 머리칼이라던가 살짝 벌어진 입이라던가 헐떡이듯 바쁘게 움직이는 가슴과는 달리 다시 땅을 밟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다. 경기 중에는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지지만, 지금은 꽤나 유순해 보였다. 무언가 물어보는 세미에게 그가 또 간결하게 답해주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진짜 잘생겼구나.
가슴께가 조금 아파왔다.
"닝쨩- 책은 안 읽는거야?"
텐도가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도 못 챘던 닝이 뒤늦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책을 내려다봤다. 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장난기 많은 요괴처럼 반짝이는 그의 눈을 닝은 보지 못 했다.
"와카토시군이 멋있어 보이는걸까-?"
뒤를 늘려가며 말 하는 그 때문에 공을 집는 우시지마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이 움직였다.
"아니면, 좋아하는걸까?"
다급하게 눈을 돌리려던 닝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새빨간 거짓말이 모두 들통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또 불편해졌다.
텐도의 성취감에 올라가는 입꼬리에도 닝은 '뭐래.' 라는 간단한 대꾸를 내놓지 못 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말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흐음- 정말인가보네?"
텐도가 히죽 웃었다.
"연습이나 해. 아니면 씻던가, 왜 굳이 앉아있는거야."
눈을 가늘게 뜬 닝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알아냈잖아? 그것도 재밌는 걸로."
그의 태연한 말에 닝의 얼굴이 괜히 또 달아올랐다. 나 진짜 와카토시 좋아하나봐. 문득 떠오른 생각에 책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닝은 맞는 것 맞다, 아닌 건 아니다, 단호하게 말 하는 편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그게 자신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고, 그 주제가 첫사랑일지도 모른다면 더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일전에 속이 더부룩했던 이유도, 그 이후에 우시지마를 마주치자마자 괜찮아졌던 위가 또 잔뜩 불편해진 이유도, 계속 그를 따라가는 시선도, 간지러운 가슴께도 모두 더 이상은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인정해야만 했고, 저보다 먼저 제 감정을 눈치 챈 텐도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면 더욱이 빨리 이실직고 해야만 했다.
"아무한테도 말 하지 마."
"그건, 사토리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걸로-!"
닝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요망한 걸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텐도 사토리를 요괴로 일컫던 몇몇 속삭임이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요물같은 성격은 요괴보다 더 했다.
"텐도!"
"노력해볼게-"
누가 들어도 노력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의 말이었다. 저가 성으로 부르니 조금 눈치는 보는 게 분명했지만, 딱 그 뿐이었다.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며 조소를 지어보인 닝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독과도 노발대발해가며 싸운 저에게 덤빌 깡은 없겠지 뭐.
한숨을 힘빠지게 쉬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면, 흥겨운 듯 가볍게 우시지마와 세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저에게 생글 웃어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텐도를 한번 더 쏘아 본 닝은 내내 한 페이지에만 머물러 있던 책 대신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내가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좋아한다는거지? 하지만, 제 이상형과 부합하지 않는 걸?
저는 잘생긴 남자가 좋았다. 키 크면 좋고, 몸 좋으면 더 좋고. 외모 취향은 사나운 인상. 착한 사람보다는 그냥 솔직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이상형을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좋아했다. 하지만,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
부정할 수 없는 표현의 나열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작해야 단점이라면, 눈치가 없다 정도일 뿐인데, 그녀로서는 딱히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정말 눈치를 안 보고 할 말을 할 뿐이었고, 때로는 조금 상처 받을 지 몰라도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사탕 발린 거짓말보다는 사람이 발전하게 할 수 있는 진실이 더 좋았다.
괜히 마음을 부정하려다 더 좋아져 버렸다.
닝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떡하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얼굴들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판단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느닷없이 가방을 싸는 닝을 발견한 세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가려고?"
몸을 돌린 닝이 한 쪽에 놓여 있는 드링크 통을 빤히 쳐다봤다. 하루는 괜찮겠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에 괜찮냐 물으려던 찰나 그녀가 가방을 어깨에 맸다.
"나, 그,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응. 그- 어, 정리 좀 대신 해줄 수 있을까?"
미안하다는 얼굴로 얼버무리는 닝에 텐도가 먼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지만서도 고마운 마음은 매한가지였기에 닝은 별 말 없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면, 음-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어, 내일 봐!"
그리곤 체육관 밖으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리는 닝에 세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텐도, 너 닝이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아까부터 애가 좀 불안해보이던데."
텐도는 그저 입꼬리를 당기며 웃어보였다.
"별 거 없어. 그나저나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말이지- 이상하네."
공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우시지마가 물었다.
"왜 지금 가야 한다는거지?"
"내 말이."
"모르지-"
의미심장한 얼굴의 텐도에 눈을 가늘게 뜨는 세미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자신의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
"뭐- 오늘은 우리가 설거지를 하게 되겠네! 레온군한테 도와달라고 해보자고-!" |
Keyword 12 짝사랑 |
짝사랑이란 생소한 감정이었다.
현재 닝이 속에 담고 있는 감정을 빗대어볼만한 경험을 굳이 하나 꼽아보자면, 연예인 덕질을 열심히도 할 시절이겠다. 하지만, 그 때는 애정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지, 가까워지고 싶다는 류의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자는 바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각자가 되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동안이나 고민하며 잠을 설치던 닝은 자신의 감정을 깨우친 그 날 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빠져 들었다.
그녀가 겨우 아침에 일어나 내린 결정은 단순했다. 눈 안 마주치기.
절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과묵한 인간인지라 딱히 말을 자주 섞지는 않았으니 은연 중에 좋아한다 흘려버릴 걱정은 딱히 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대화를 할 때면 꼭 눈을 맞추는 것이 습관인 제가 나지막한 한 마디를 건네오는 우시지마의 얼굴을 쳐다보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굳어버릴 것이 뻔히 그려졌다. 그렇다고 제 마음 하나 숨기겠다고 모르는 척 안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좋아하니까. 내가 저 애를 전보다 더 깊은 의미로 좋아하고 있으니까,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막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고 겨우 인정하고 받아들인 존재가 그 버거운 마음을 숨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짓말 못 하는 닝에게는 마주치기만 해도 크기를 불리는 첫사랑을 품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었다.
우시지마의 옆에 있기만 해도 자꾸만 벌렁거리는 심장에 슬쩍 한 발짝 멀어졌다.
어쩌다보니 카페테리아에 가면 항상 우시지마와 세미의 사이에 껴 있거나 그를 마주하고 앉는 꼴이 되어버려 최소한 대각선의 자리에라도 앉을 수 있기 위해 애썼다. 물론, 익숙하다는 듯이 저를 위해 옆 자리를 비워 놓는 세미나 의도적으로 가까운 곳에 앉히는 텐도 때문에 그의 옆에 앉게 되면 팔이 닿을까 싶어 식사에 집중도 안 됐고, 그와 마주앉게 되면 식판에 코를 박고 먹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문제는 눈덩이 마냥 불어났다. 사람은 조종해도 감정은 조종할 수가 없었다. 도통 제어가 안됐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그를 시선으로 따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몸집을 잔뜩 키워내고 있었다. 어쩌다 저를 향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마주쳐버리는 눈에 닝은 브레이크라는 단어조차 잊어버렸다.
더 좋아진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만큼 좋아했던건지조차 분간을 못 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순간에는, 이미 모든 애정이 눈물마냥 눈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시지마에게 타올 하나를 건넬때면 과하게 뻣뻣해지는 손도 모자라 그를 바라볼때면 반짝이는 눈빛 따위가 모두 적나라하게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나마도 저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 싶을 때만 마음 놓고 구경했지만, 그런 닝의 기묘한 행동들을 그녀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눈치를 못 챌리가 없었다. 나름대로 학교 내에서 가장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세미가 닝의 변화를 눈치채는 건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춘고 예선을 앞둔 어느 날 아침, 미리 체육관 정리를 하고 세미와 함께 매점에 들렀다가 반으로 올라가던 중 그가 물어온 질문을 아예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 하리라 비는 것은 진실로 고작 희망에 불과했으니까.
"너, 와카토시 좋아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닝이 세미를 살짝 올려다봤다. 예상을 했다고 해서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으음- 배구 할 때 멋있긴 하지-"
이런, 말 끝을 너무 흐렸나. 그런 자조적인 생각 따위를 해보았자 입을 열기도 전부터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우와- 진짜네? 너 거짓말 진짜 못 한다."
세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뭐가 진짜인지 물어볼 생각도 않은 닝이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설마 사토리가 말 한거야? 내가 분명 말 하지 말라고-"
"뭐야, 텐도도 알아? 어쩐지-"
요즘 수상해 보였다느니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느니 떠들어대는 그의 옆에서 닝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른 채 넘어갈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제 입으로 먼저 내뱉어버렸다는 깨달음에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망했어."
이런 식이라면 배구부 전체가 알아차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다행히도 눈치 없는 우시지마는 절대 모를 터였지만 누군가 흘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특히 텐도, 이번만큼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아직 여기저기 떠들어대지 않은 것 뿐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복도의 중심에 우뚝 멈춰 서버린 닝의 등에 손을 얹은 세미가 키득거리며 그녀를 밀었다.
"걱정 마. 걔는 너가 직접 말 하기 전까지 죽어도 눈치 못 챌테니까."
"그래 ... 그리고 누가 나 대신 흘려버리는 바람에 차이는 건 시간 문제지."
그 솔직한 인간이라면 휘황찬란한 리본으로 장식된 말과 함께 거절할 리도 없었다.
"좋아해!" 하면 "난 안 좋아한다." 라고 답 할테고,
"나랑 사귀자!" 하면 "싫다." 라고 답 할 남자였다.
대뜸 사귀자 말 해도 이유를 묻는 물음보다는 일단 본인 의견부터 말 하고 보는 그런 솔직함. 뼈 아픈 진실이라도 거짓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악의 없는 순수함이 가장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생각만 해도 가루가 되어 버리는 멘탈에 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반으로 들어섰다. 내내 말 없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몸을 자리에 앉히던 세미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왔다.
"왜 차일거라고만 생각해?"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서, 배구 바보가 연애에 관심은 있겠어?"
시라토리자와의 학생들은 대체로 자존감이 높은 편이었다. 세미도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터져나오는 자신감이 느껴졌었고, 어디 가서 스스로를 깔아뭉갤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중 우시지마는 유독 근거 있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자긍심이라고나 할까, 이유 없지도, 무의미하지도 않은 것이라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뭐, 그것도 다들 자존감이 높으니 서로서로 오구오구하는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약점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었고 그만큼 스스로에 대해 잘 알았다. 우시지마가 결코 본인의 감정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모른 체 할 사람 같지도 않았다. 가장 본능을 잘 따를 사람들을 꼽아보자면 텐도 다음 갈 수준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좋아한다고 자각도 못 한 채로 일단 쫓아다닐 성정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애초에 이성에 관심은 가지냐는 것. 나중에 배구공이랑 결혼한다 해도 놀라우지 않을 정도로 배구를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실소를 흘린 닝이 한숨을 짧게 내쉬며 책상 위로 엎드렸다.
닝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세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가 들이대보면 뭐라도 되지는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럴 성격은 아니라는 걸 일찍이 알게 되었기에 제 의견은 꿀꺽 삼킨 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
아무리 그 눈치 없는 배구 바보 우시지마 와카토시라 해도 너는 좋아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세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좋아할 뻔 했던 것처럼. 며칠 전, 애정이 드러나다 못 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와카토시를 바라보고 있는 너를 알아채기 전까지는, 너를 좋아했던 것처럼. |
Keyword 13 기대 |
인터하이 예선 때도 느꼈었지만, 춘고 예선은 긴장감이랄 것이 딱히 없었다. 예선의 예선에서 마주친 죠젠지 고교, 그리고 결승에서 마주친 다테 공고. 그래도 다테 공고는 블로킹이 대단했으나, 딱 그 정도였다.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내 대표 결정전일뿐이니 전국과 비교해서는 안되긴 했지만.
긴장감 없이 두 세트를 순식간에 따내버리는 경기들에 닝은 손에 땀을 쥐지 않았다. 그저 눈을 반짝이며 우시지마를 구경했다.
당연히 선배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배구부 모두를 내 애기들이라고 일컫길 즐기는 그녀는 모두의 플레이를 관찰하며 일지를 작성했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한 사람에게로만 향하는 시선은 어쩔 수 없었다.
배구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스포츠이기에 우시지마 덕이라고 할 것은 승리보다는 '쉬운' 승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1학년일뿐인 그의 인상적인 플레이 탓에 모두 그에게 한 마디씩 건넸다.
그 상황자체가 어찌나 부담스러웠는지.
당연히 우시지마에게 칭찬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이번만큼은 뭐라도 한 마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경기가 끝난 직후에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못 하던 닝은 떠들썩해진 분위기 속 훈련 중 휴식을 취할 때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 진짜 잘 했어!"
고작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숨을 골랐는가.
그런 칭찬을 건네는 와중에도 눈은 마주치지 못 하고 그 옆의 벽에 내리꽂은 닝의 시선과는 달리 우시지마는 한 사람만을 온전히 눈에 담았다.
"고맙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한 마디에 또 심장이 멋대로 날뛰었다.
*
"유스?"
가뿐하게 현내 대표로 전국 진출권을 얻어낸 시라토리자와, 전국 경기가 한 달 쯤 남은 시점에서 사이토 코치가 훈련 직전에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우시지마가 유스 후보로 뽑혀 합숙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야기에 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배구 공부하면서 얼핏 봤던 것 같았는데,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아하니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듯 했다. 그래도 여전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옆에 서 있던 레온이 대신 설명을 내어주었다.
"고등학교 1, 2학년들을 대상으로 국가대표 후보의 후보를 뽑는거라고 보면 돼."
"아."
그제서야 이해 한 닝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잠깐, 그러니까, 1학년인 우시지마가 국가대표 후보의 후보가 (영 어감이 이상했다) 되었다는 건데 ... 잠시 눈을 깜빡이던 닝이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로드워크를 가기 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텐도가 닝의 말을 듣곤 히죽 웃었다.
"와카토시군이 뽑힐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말에 닝은 납득을 하긴 커녕 더욱 이해가 안된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당연하다 해서 그 의미도 가벼워지는 건 아니잖아. 다들 그렇게 넘어갈거면, 내가 나중에 축하 선물로 맛있는 거 사줄게!"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마냥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 해맑게 말 한 닝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실로 향했다.
"우와- 와카토시군, 닝쨩한테 데이트 신청 받은거야?"
텐도의 능청스러운 말에 세미가 실소를 흘렸다. 하야토가 왜 그러냐 묻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우시지마에 텐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따로 사주겠다잖아, 그게 데이트 아니면 뭔데?"
"그런가."
그렇게 딱딱히 답하는 그에 텐도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째 감이 오는 상황에 그저 상황을 살피는 레온과 하야토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텐도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닝이 맛있는 걸 사주겠다 이야기 하면, 데이트라고 부르면 되는건가.
"빨리 빨리 안 움직이냐!"
감독의 외침에 모두 그제서야 체육관을 벗어났다.
한편, 드링크를 타던 닝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약속을 해버렸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친구간의 약속이라고 말 하기엔, 사심이 무의식중에도 너무 가득 실려버린 발언이었다. 홧홧해지는 얼굴에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아냐, 기회는 잡으랬어, 그치만 ... 드링크를 타는 내내 닝은 자기 합리화를 하려 애쓰며 횡설수설해댔다.
그 날 만든 드링크는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으려 해 결국 모두 버려야만 했다. |
Keyword 14 이해심 |
유스 후보 합숙은 5일이나 진행되었다.
5일이나!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국가대표니 어쩌니 하는 상황에서 5일은 오히려 짧은 편이지 않나- 싶었지만, 닝에게는 5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우시지마를 구경하며 정리를 해야 될 때까지 앉아있었으니, 체육관에서의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묘하게 처진 분위기를 티내고 싶지 않아서 닝은 배구부 일이나 공부에 더 집중했다. 괜히 다른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토요일 아침, 머리를 높게 묶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닝이 운동화를 신곤 기숙사를 나서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나오는 중? ]
[ 가는 중 ]
간결히 답한 닝은 체력을 아낄 겸 급하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운동을 일체 안 하던 닝이었지만, 가끔 바람도 쐴 겸 체력도 기를 겸 주말에는 아침에 세미와 로드워크를 가볍게 뛰었다. 기록을 재며 뛰는 것도 아니었기에, 세미도 가벼운 몸 풀기 삼아 흔쾌히 그녀와 함께 했다.
별 말 없이 학원 주위를 한 바퀴 쯤 돌았을까, 세미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너 와카토시 못 본다고 요즘 시무룩한거야?"
시무룩? 그 정도였나? 본인이 어떤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는 지 잘 모르는 닝은 잠시 말을 아꼈다.
"그런 것도 있고 ... 음-"
딱히 자세한 답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말투에 세미가 닝을 내려다봤다. 궁금하지만, 그렇다 해서 텐도처럼 파고드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려던 찰나였다.
"애초부터 고백할 생각 같은 건 안 하긴 했었는데, 막상 와카토시가 합숙을 가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 마음을 접는 게 좋겠다 싶을 정도로."
"에? 갑자기 왜?"
고등학교의 풋풋한 첫사랑으로 남길 거라며 고백 할 생각은 없다는 닝의 말이 뚜렷하게도 기억났다. 그래도 안 좋아하려고 기를 쓴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무의미하게나마 감정을 감추려 애쓸 뿐. 이러나 저러나 정말 우시지마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티가 나긴 했다.
"유스, 결국 국가대표라는거잖아. 아무리 후보의 후보일 뿐이라 해도 매니저 되면서 수도 없이 많은 경기들을 찾아보다 보니까 와카토시 말고는 누가 하겠나 싶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뭔가 나랑은 다른 세상 사람이구나- 싶어졌어."
닝이 쓰게 웃었다.
"미련하게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마음을 접어보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달까."
세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닝을 멍하게 내려다봤다.
"그, 다른 세상 사람이라니?"
"국가대표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 그만큼 새로운 경험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텐데, 이 세상에 멋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그에 비하면 뭐라도 되나 싶은 거 있지. 나, 친구로서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연인으로서는 ... 딱히 매력 없잖아?"
세미는 벙찐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걸, 뭐라고 답 해줘야 하는거지? 차마 네 앞에 가서 직접 말은 못 하고 서성이는 남학생들을 몇 명이나 쫓아냈는지 모르겠어. 주장, 사실 너한테 호감 있는 건 알아?
그는 생각 없이 내뱉으려던 질문들을 다시 목구멍 뒤로 넘겼다.
처음 짝사랑을 해 보는 닝은 자신의 감정을 못 숨기는 만큼 잘 숨기는 남들의 이야기들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애초부터 공부, 배구부, 우시지마로 이루어져 있는 관심사에 뭘 얘기하겠냐만은. 다 떠나서 맨날 붙어 다니는 저가 본인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생판 남에 대한 관심은 일체 없는 닝이 그런 이야기들을 눈치 채는 건 둘째치고 눈길조차 줄 리도 없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많아. 나 많이 봤어."
그는 걔도 너 좋아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음- 하지만, 와카토시랑은 별개의 이야기잖아? 그리고 너네랑 놀러 나가면 동생 소리 한 두번 듣니? 그냥, 골치 아프니까 포기할까 생각하는거야. 에이타는 걱정 마, 현실을 생각하는 것 뿐이니까."
종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냐보다는, 와카토시가 어떻게 생각하냐가 궁극적 질문이었던거다. 당연한 일이지만. 앞을 바라본 세미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고민 해봤자 좋아하는 마음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희망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정도야."
"그래, 너가 편한대로 하는게 좋겠지."
딱 그 말이 하고 싶었다는 얼굴의 닝이 팔로 툭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잘 아네."
잘 알아서, 아팠다. |
Keyword 15 기억 |
시라토리자와는 강호였다. 전국 8강에는 기본으로 들어가는 그런 학교.
유스 합숙에 다녀온 뒤로 더 활기를 찾은 우시지마도 있었으니, 인터하이 때와 같은 기대를 해도 좋겠지- 라고 모두 생각했다. 하지만, 배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16강전, 아슬아슬한 점수 차, 2:1의 세트 스코어.
닝은 조바심에 다리를 덜덜 떨어댔다. 많이 아슬아슬했다. 불안한 상황에 결국 한 세트를 상대에게 넘겨주었다.
이제는 2:2였다.
이 경기에서 지면 걸어가게 만들거라 엄포를 놓는 감독에 닝의 동공이 떨렸다.
실제로 카라스노에게 져 미야기 현 예선에서 떨어졌을 당시 정말 걸어갔었다는 주장의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경기 내내 무서운 기세로 부담스럽게도 부원들을 바라보는 와시죠 감독의 뒤에 선 닝이 화이팅, 손짓을 하며 웃어주었다.
설마 도쿄 체육관에서부터 진짜 걸어가게 하겠어- 라는 생각과 정말 그렇게 시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닝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경기를 지켜봤다.
"마지막 경기였는데."
풀이 죽은 3학년들과 시무룩한 1, 2학년들에게 닝은 무어라 말을 전하지 못 했다. 그 와중에도 무덤덤한 얼굴의 우시지마를 보며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걸까 궁금했지만, 저가 함부로 물을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정적속에서 모두를 버스에 태우는 감독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센다이시 체육관 앞에 차가 멈춰서는 것을 눈치 챈 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돌아가면 서브 연습 100번이라고 소리친 감독은 그대로 버스를 출발시켰다.
꽉 차 있던 버스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닝이 스포츠 백을 품에 끌어안고 눈을 꿈뻑거리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매정할 수가, 아, 그래, 사람 때리는 인간이었지. 눈을 가늘게 뜨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감독과 코치 몰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것을 도와준 사이토 코치는 부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떴다.
텅 빈 체육관에 혼자 남겨진 닝이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어 할 일을 마친 그녀는 곧 창문을 열어 드링크를 다시 타고 공기가 순환하도록 만들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늦은 밤인데도 아직 오지 않은 이들에 걱정이 될 쯤, 열어놓은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는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뛰어왔구나. 솔직히 막차라도 잡아 탔을거라고 생각했던 닝은 약아빠진 제 사고방식에 조금 반성했다.
"먼저 씻고 나오는 건-"
질문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좀비 마냥 한 쪽에 놔둔 드링크 통으로 향하는 모습에 닝은 미간을 찌푸렸다. 졸업할 때만큼은 꼭 감독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성에 찰 것 같았다. 단숨에 피쳐까지 비워낸 이들이 탈의실로 향하려던 찰나 그녀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다들 야식 먹을래요?"
그 말에 눈을 반짝이는 덩치 큰 남학생들에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배고플만도 하지.
"치킨 어때요?"
"무조건이지!"
격하게 긍정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텐도와 세미를 제외하곤 다들 고개도 못 끄덕이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나마 팀의 이성이었던 주장이 슬프게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좋은 꿈일 뿐이야."
그 말에 닝은 함소를 품었다. 핸드폰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이며 태연하게 말 했다.
"제가 이미 전화해뒀거든요. 사비니까 들킬 리는 없고, 뭐 들킨다 해도 제가 책임질게요!"
"와- 미라클 걸 닝쨩이네-"
"정말이야?"
벙찐 얼굴들 대신 물어오는 세미에 닝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난 거짓말 안 해."
그 날 밤, 1학년들이 철문 넘어로 치킨을 품에 안고 들어와 야식 파티를 벌였다.
들키면 정말 죽음뿐이었지만, 그런 두려움보다는 찰나의 즐거움이 더 컸다. 다들 고생했다며 별 거 아니다 어깨를 으쓱이는 닝에게 이제는 배구를 다시는 하지 않을거다 이야기했던 3학년 선배가 말 했다.
"너 없이 어떻게 2년이나 버텼는지 모르겠다."
그 말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제게 해줬던 한 마디. 조용히 치킨을 잘 먹고 있는 그 한 마디의 주인을 힐끔 쳐다본 닝이 눈이 휘어지도록 웃어보였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제일 먼저 체육관에 도착한 닝이 내부를 한 바퀴 빙 돌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냄새가 배진 않았나 확인했다. 완벽하네. 스스로 뿌듯해할 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면 보이는 텐도와 우시지마에게 그녀가 엄지를 들어보였다.
"절대 안 들켜."
"걸리면 닝쨩이 책임지기로 한거야-"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는 텐도에 닝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간 바쁘게 부엌으로 향하는 닝을 지그시 쳐다보던 우시지마는 텐도가 두어 번 정도 그를 부른 뒤에야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
Keyword 16 결과 |
방학 동안 기숙사에 남은 이들은 몇 없었다.
여름 방학 중에는 꽤 되었으나, 학년이 넘어가는 시기에는 본가로 돌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원룸이나 다름없는 기숙사에 남겠다는 닝의 발언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러면, 거짓말을 하지 못 하는 닝은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집 가기 싫어서."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앙 다무는 모습에 우시지마조차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학교 안에서 지내고 있을뿐더러 딱히 할 일이 없는 닝은 매일같이 출근하듯 체육관으로 향해 관리를 했다.
작은 방에 혼자 누워만 있을바에야 체육관에라도 가 바람이라도 쐴 겸 책이나 문제집을 들고 가는 것이었다. 꼭 매일같이 나와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부원들의 말에 그녀는 눈을 굴리며 제 선택이니 연습이나 하라 받아치는 것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개학이 다가오는 봄 날의 어느 금요일에는 2학년으로 올라가는 1학년들 중 세 사람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3학년들의 졸업으로 정식 에이스 자리를 예약해 놓은 우시지마, 세터 세미, 리드 블로커 텐도.
감시하는 사람 없이 가볍게 잡담이나 하다가도 다시 코트 위에 섰고, 로드워크를 다녀오자마자 바닥에 드러눕는 텐도를 세미가 발로 툭툭 차는 동안에 우시지마는 성실하게도 배구공을 집어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닝은 벤치 위에 누워 들고 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마음을 접겠다는 결심과는 무관하게도, 그녀는 배구 연습을 하는 우시지마를 구경하는 것도 당연히 빼먹지 않았다. 제 시선을 눈치 챈 텐도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뒤에는 모른 체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분명 아침에 만났을 때는 편하게 몸 좀 풀고 갈 예정이라더니 세 사람은 4시가 다 되어가도록 집에 가지 않았다.
닝이야 뭐, 내내 누워만 있었으니 문제 없었지만,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져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두 사람에게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땀을 비오듯 흘리고는 있지만,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우시지마가 덤덤하게 드링크를 마시고 있는 꼴에 세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대로라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텐도가 책에 빠져 있는 닝과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우시지마를 번갈아 보았다. 세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물을 틈도 없이 텐도는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로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우시지마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등을 팡팡 치며 물었다.
"와카토시군, 혹시 닝쨩이 유스 축하 선물로 사준다는 밥은 얻어먹었어?"
"? 안 먹었다."
여전히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시선은 텐도에게로 옮겨가지 않았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것 같던 그의 입꼬리가 하늘에 닿을 듯 올라갔다. 텐도의 의도를 우시지마 말고는 눈치 채지 못 할 사람은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세미는 굳이 제 입으로 거들지 않았다.
"닝쨩."
책에 집중하고 있던 닝이 흠칫 놀라며 텐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보이는 - 왠지 음흉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은 - 웃음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제 집에 가려고?"
애써 텐도의 눈빛을 모른 체 한 닝은 차마 우시지마의 눈은 마주치지 못 하고 세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닝쨩-"
닝이 어쩔 수 없이 다시 텐도를 쳐다보았다.
"아직 와카토시군에게 밥을 쏘겠다는 약속을 안 지켰다면서?"
이거였군.
이대로라면 마음을 접으려는 제 노력은 무용지물이 될 게 뻔한데, 이 고비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걸까. 이미 잘 안 되어가고 있는데, 밥 약속이라면 희망이 안 피어오를리가 없었다. 그 결과는 절망밖에 없을 게 뻔했기에,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어 ... 그랬지?"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닝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꼴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지만, 이미 발갛게 물들어버린 두 볼을 가만 지켜보던 세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둘이 저녁도 해결할 겸 먹는 게 어때?"
닝이 세미를 쏘아 보았다. 그녀의 눈을 피한 그가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와카토시, 하이라이스 좋아하잖아."
답을 않은 채 괜히 가방에 책을 넣으며 시간을 끌던 닝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저를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는 우시지마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와카토시만 좋다면, 오늘 사줄 수 있지!"
활기차게 말 했지만, 벌렁거리는 심장 때문에 지금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단 둘이 먹는 건 꼭 데이트 같았으니까.
"그러지."
당사자들보다 더 신난 얼굴의 텐도가 우시지마를 탈의실로 밀며 정체불명의 음에 맞춰 집에 가자며 흥얼거렸다. 저는 집에 안 갈건데 무슨 말이냐는 우시지마의 물음은 가볍게 무시한 채로 문 너머로 사라져 버린 텐도와는 달리 세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붉게 달아올라버린 두 뺨에 차가운 두 손을 대어 식히고 있던 닝이 세미를 불렀다.
"나 꾸미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거들어버리면 어떡하냐? 큰일났네."
입술을 삐쭉 내밀며 웅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세미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 접는다며?"
"그래, 그리고 지금까지 잘도 접었지."
누가봐도 비꼬는 말투에 세미는 답을 하지 않았다. 조금 앓는 소리를 낸 닝은 조금 전의 말과는 달리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얼른 가서 씻기나 해."
팔을 툭 치며 드링크 통을 정리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가만 눈으로 따르던 세미가 작게, 아주 작게, 딱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 안녕."
*
"애들이랑 가던 데 가서 먹을까? 아니면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 다 사줄게."
우시지마의 눈을 피해 텐도에게 개수작 부리지 말라 한 바탕 잔소리를 한 닝이 우시지마와 함께 학교를 벗어났다. 본인을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물음에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에 아니라고 답한 건지 잠시 고민하던 닝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하이라이스 먹으러 가자."
말 없이 길을 걷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간질거려 닝은 괜히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빠르다는 둥, 새 학기가 시작되면 배구부 애들 다 같이 반 되면 너무 좋겠다는 둥, 별 시덥잖은 소리만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안 하면 심장이 말 대신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말들에 우시지마는 그저 응, 그랬나, 그래- 등의 가벼운 대꾸와 함께 얌전히 들어주었다. 그러는 내내 제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닝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몰래 야식을 시켜 먹은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흘리는 그녀에 고개를 약간 기울인 우시지마가 갑작스레 물었다.
"왜 그렇게 많이 사주는거지?"
눈을 동그랗게 키워낸 닝이 우시지마를 힐끔 쳐다보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정말 많이 사줬구나. 배구부는 몇 번 되지 않았지만 한 번 사면 양이 어마어마했고, 동갑내기 친구들한테는 물주 마냥 음식을 입에 들이부어 주었다. 누가 보면 아깝지도 않냐 무어라 잔소리 할 정도로.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주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음, 내가 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니까 사주는 것 같아.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물론, 너는 다른 의미로 좋아하지만. 닝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생각의 끈을 잘랐다. 고개를 끄덕이지만서도 여전히 이해가 안된듯한 얼굴을 눈치 챈 그녀가 잠시 말을 골랐다.
"매니저이긴 하지만, 나는 같이 뛰지 않잖아. 결론적으로는 체벌도 못 막아주고, 코트 위에서 땀 흘리며 뛰는 기분도 솔직히 잘 모르기도 하고.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잡일 처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니까 운동하는 애들 먹을 거라도 사줘야지- 하는 마음이야. 너도 그렇고 다들 항상 고맙다고 해주잖아. 내 일은 선수들 관리니까, 힘든 훈련 중에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후배들도 생길테니까, 더 챙겨줘야지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알지."
닝이 이동 중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걸? 다들 웃어주면 좋으니까."
그 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우시지마는 답을 해주려다, "다 왔다!" 하고 식당의 문을 여는 그녀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이라이스 맞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닝과 눈을 맞추며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곤 주문하는 그녀를 그는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의 속은 알 수 없었지만, 마주 앉은 채 저만 쳐다보는 그 얼굴이 참 잘나서, 차마 눈은 못 마주치는 주제에 닝은 제 눈이 휘어지도록 웃어보였다. 마음 접기는 제대로 말아먹었다고 생각하면서.
닝은 본인 몫의 반도 먹지 못 했는데 이미 1인분을 해치우곤 얌전히 물을 마시며 기다리는 우시지마를 올려다보곤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고보니 5그릇은 기본인 인간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하나 더 먹을래?"
지그시 닝을 쳐다보던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레온이나 하야토는 물론이고, 에이타랑 사토리도 한 번쯤 사양 했을텐데.
닝은 오히려 형식 상의 거절 따위 없이 바로 결정하는 그의 솔직함이 좋았다. 굳이 설득하려 애쓸 필요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하나도 읽히지 않는 그의 속을 헤아리기 위해 전전긍긍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너 4 그릇 먹을동안 나 1인분 먹겠다."
그리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닝에게 우시지마는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 했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저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한 없이 퍼주는 닝은 망설임 없이 3인분이나 더 시켜줬으니까.
그녀는 밥을 먹는 내내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부잣집 도련님답게 깔끔하게 먹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빨리 먹는지 궁금했다. 먹는 속도가 한참 느린 닝은 그가 추가로 시킨 하이라이스를 모두 해치웠을 쯤에야 제 몫을 다 먹었다.
분명 제가 사주기로 한 것인데, 계산대로 향하며 지갑을 꺼내는 우시지마를 보곤 그녀는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의 눈 앞에 닝이 자신의 카드를 흔들어보였다.
"하지만-"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닝은 배시시 웃었다.
지금 이 환경도, 상황도, 대상도, 모두 좋아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 축하선물!"
그 날, 우시지마는 닝을 굳이 기숙사 건물까지 데려다 주었고, 닝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엎어져 베개를 끌어안은 채 끙끙 앓았다.
"오늘 데이트 좋았다."
폭탄을 던지자마자 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곤 그대로 돌아가버린 우시지마의 뒷모습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할 말을 잃어버린 탓에 이제와서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이상했다.
물론, 마음 한 켠에서는 텐도가 수작을 부린게 뻔하다는 생각이 피어났지만, 그런 장난에도 거부감 없이 좋았다 고 말 한 건 순전히 그의 의지 아닌가?
. . .
더 좋아져버렸어.
매번 불확실했던 마음이 커지는 원인이,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
장치들에 대하여 |
가볍게 시작하자면, 중간에 닝이 흥얼거렸던 노래는 Ke$ha의 Tiktok이라는 노래로 2010년, 즉 3넨세들이 1학년이었을 당시의 히트곡입니다. 드림이지만, 이런 거 넣어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 또 해당 가사를 굳이 넣은 이유는 노래를 들어보시면 아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ㅋㅋㅋ 닝이 얼마나 신난 상태였는지 느껴지실겁니다.
그리고 닝이 흥얼거리는 모습과 이후 다가온 모브에게 싸늘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대조해보시면, 배구부를 진심으로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 반면에 또 남들에게는 얼마나 쌀쌀맞은 편인지 잘 느껴질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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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경
[ 가볍게 좌우로 흔들리는 포니테일을 가만 주시하던 우시지마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
우시지마는 강아지 털마냥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보곤 무의식적으로 만져봐도 되나? 하고 물어보려고 했어요. 만약 세미와 다른 아이들이 딱 나타나지 않았다면, 닝은 대신 나도 네 손 만져볼래! 라고 말 하고 마음껏 만져보라 했겠지요.
[ "먹어야 더 큰다."
그대로 굳어버린 닝이 우시지마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무덤덤한 얼굴이 누가봐도 악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에 걱정이 묻어나와 닝은 눈을 가늘게 떴다. ]
우시지마는 정말 진심으로 닝이 걱정되서 한 말이에요. 객관적으로도 작은 편인데, 우시지마에게는 더더욱 작아 보이니까, 닝 허리가 본인 허벅지 만한 건 아닐까 싶어서 고민스러웠죠. 저러다가 공 한 번 잘못 맞으면 그대로 아스라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많이 먹여서 더 크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성장판 닫혔다는 닝의 발언에 또 고민에 빠집니다. 살이라도 찌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현재가 좋다니까 ...
[ "그럼 너 먹어. 난 안 먹을래."
"그래." ]
샐러드를 쥐여주며 닝이 한 말에 우시지마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사실 본인이 고른 것이 바로 샐러드인데, 우시지마는 닝의 말에 일종의 의무감을 가진 채 운동 끝나고 기숙사에서 열심히 먹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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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호
[ "닝."
어느새 귀에 익은 묵직한 목소리에 그녀가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렸다.
"드링크가 필요하다." ]
닝의 분노는 근본적으로 배구부를 보호할 것이다 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어요. 그리고 의무를 들먹일 때 부원들 모두가 알게 되죠.
그런 와중에 정작 부원들 중 그 누구도, 주장조차도 한 마디 안 해주는 모습에 이상하다고 우시지마는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방법은 지금 당장 탄지군을 멱살 잡을 기세인 닝의 시선을 돌리는 것. 그것이 저들을 도우려는 닝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우시지마는 그렇게 판단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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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능
[ "수학은 레온이 잘 하잖아."
세미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닝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텐도는 오히려 세미의 불편함이 재밌다는 듯 흥얼거리듯 대꾸했다. ]
이 파트 직전에 명시된 세미의 '이기적인' 속은 닝을 좋아해서 둘이서만 있고 싶은 욕심. 그리고 텐도는 이 때부터 세미의 짝사랑을 눈치챘어요. '불편함'의 이유를 알았죠. 게스 몬스터는 코트 밖에서도 직감과 눈치가 뛰어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니까 ... 그리고 놀리는 게 재밌죠, 상대가 누구든.
[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닝을 우시지마가 가만 내려다보다 손을 긴 머리칼로 뻗었다.
"나도 고맙다." ]
순전히 만지고 싶어서 그냥 손을 뻗어버린 우시지마. 일전에 물어보지도 못 한 경험 때문에, 일단 닿으려고 했던 거예요. 닿고 싶으니까! 물론, 닝이 싫어했으면 안 했겠죠ㅎㅎ
맥락 상 뚝 끊었지만, 닝도 웃어주니까 이후에 생각보다 더 길게 만지작거렸을거예요. 상상했던만큼 부드럽고, 좋아서 손에 한 가닥 꼬아보기도 하고는 평소 닝의 근처에서 풍기는 바닐라 향이 체육관에 배어든 것 처럼 - 물론 이는 디퓨저 때문이지만 - 손에도 똑같은 향이 묻지 않을까 싶었지만, 하나도 안 나서 우시지마는 실망했습니다.
[ 그저 다른 팀원들에게 맞춰주었을 뿐이었던 우시지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자 텐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였단 말이지- 조금, 많이 신난 얼굴로 텐도는 흥얼거렸다. ]
중의적 표현: 텐도의 '그래- 그래서였단 말이지-'는 우시지마에게 '그래서 우리가 쟤네를 경계하는거야'라고 설명하는 목적도 있지만, 우시지마의 닝을 향한 이상 행동의 이유를 깨닫곤 '그래서였구나?' 하는 의미도 있어요. 밝은 텐도ㅎㅎ
[ 이런. 〈 세미 에이타 > 가 적혀 있는 물통을 주워야 하는데 손이 없어서 어쩌나 싶을 쯤 카모메다이 연습복을 입은 남학생이 하나 다가왔다. ]
우시지마 드림에서 시작한 이야기에서 세미의 짝사랑은 당연히 ... 고로, 세미의 이름이 적힌 물통이 바닥으로 떨어진 건, 우시지마를 보며 즐거워하는 닝을 보며 세미의 심장이 쿵 내려앉을 거라는 것. 결국 그 물통은 닝이 주워주지도 않죠 ... 모브가 줍습니다. 물론, 닝이 다시 물통을 채가는 모습에서 나오듯 좋은 친구로 잘 남는 걸 미리 암시하고 싶었어요!
세미 or 우시지마? 상태였다면 소름 돋았을지도 모르지만 ...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
[ "매정하네- 그렇게까지 단호할 필요가 있었나?"
"싫으니까 싫다고 한 거야."
"그래도 말이지, 상냥하게 말 할 수 있었잖아?"
묘한 질문에 닝이 가만 텐도를 올려다보다 드링크 통이 주인들을 잘 찾아간 덕에 비워진 자리에 몸을 앉혔다. ]
텐도는 이미 우시지마에게로 끌려가는 닝의 시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의 속내에 대해 이미 다 눈치채버린 텐도는 닝에게 거절의 방법에 대해 더 상냥하게 굴면 안되냐 물은 거예요. 왜냐하면, 세미도 닝도 모두 소중한 친구들이니까. 이미 우시지마랑 닝이 쌍방인 걸 아니까 세미가 상처 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덜 받았으면 싶었던 사토리.
[ "상냥한 게 아니지.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해준 것 뿐이니까."
그 말에 저를 벙찐 채 바라보는 세미에 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세미는 이때부터 감이 왔어요. 자신은 정말 그냥 소중한 친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도 마음 접을 생각 없이 숨기기만 했죠. 아직은 '나중에는' 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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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정
[ "내 새끼들?"
"내가 아낀다고."
의아한 얼굴의 우시지마를 올려다 보다 급하게 눈을 피한 닝이 가서 벤치에 앉으라며 세미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
우시지마를 다른 의미로 더 아끼는 닝. 자각하기도 전인데 눈도 오래 못 마주치면서, 세미의 옆구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로 툭툭 건드려요. 닝이 얼마나 세미를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연애의 가망은 정말 제로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시지마 드림이 아니라 ?? 루트였으면 나름 괜찮은 복선이었을텐데, 음 ...
[ 그렇다면, 감독이 최강의 무기 쯤으로 여기는 우시지마는 무슨 문제에 걸려 들었냐 하면, 유독 그 날따라 정신을 못 차렸다. 평소답지 않게 실수를 꽤나 했다. 컨디션 난조가 분명했다. ]
우시지마는 컨디션 난조 때문에 실수를 남발할 사람이 아니죠ㅎㅎ 애초에 그런 관리는 완벽하게 잘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순간에는 컨디션 난조 때문이 아니라, 벤치에 앉아 반짝거리는 눈으로 코트를 쳐다보면서 열심히 일지를 적고 있는 닝에게로 시선이 자꾸만 간 탓에 ...
결국 누구씨 때문에 결과는 좋지 못 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 의도한 것도 아니지만, 그 덕에 닝의 얼굴을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봤으니까.
[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세미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코트위의 다른 부원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우시지마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미는 저들을 쳐다보고 있는 닝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 했다. ]
이 부분 외에도 둘을 일부러 자주 세트로 나오게 했어요. 밥 먹을 때는 자주 닝이 둘 사이에 앉는다던가 하는 것들. 두 사람 다 닝을 좋아하고 있지만, 대비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른 이유보다는 캐해랄까요.
속에 담아두고 곱씹어보고 생각해보는 세미와 대체적으로 무던한 편인 우시지마.
나쁜 감독놈의 체벌 이후 코트를 쳐다보는 우시지마 = 금방 상처를 털고 일어서고,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다. / 바닥을 내려다보는 세미 = 상처를 곱씹어보고, 한 번 꺾이면 굳이 이상만을 추구하진 않는다.
둘 다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세미는 현실주의고 우시지마는 자신의 능력을 믿기에 이상을 현실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 이게 바로 자긍심 넘치는 백조택의 미세한 차이의 예시 아닐까 ...
[ 알겠다는 듯 웃어준 세미가 닝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쓰다듬곤 탈의실을 나섰다. ]
결국 먼저 마음을 접고 떠나주는 사람이 세미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 에이타가 나가고 나서 닝이 우시지마를 좋아하는 제대로 된 계기가 한 번 터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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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복선
[ "와, 에이타 군 여자친구 생겨서 오는 거 아니야?"
텐도의 능청스러운 말에 닝은 그럴 수도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
텐도는 혹시나 싶어서 떠본거예요. 세미가 누군가와 사귀게 되면 어떨 것 같냐고.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표정에 텐도는 속으로 쟤는 정말 순수하게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는구나 싶었죠.
[ "반도 안 먹지 않았나?" ]
우시지마는 순수하게 닝이 아픈건가 걱정했어요. 숟가락질 몇 번 하고는 못 먹겠다고 말하니, 많이 아픈 건 아닌가 싶었죠. 다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대충 몸보단 마음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혼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중. 물론 닝도 그랬지 ...
[ "닝 쨩은 의외로 허당이네-"
"어?"
세미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텐도는 곧바로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닝이 사라진 방향을 유심히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내리는 우시지마를 흘겨본 텐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내내 배가 아팠는데도 밥을 먹고 나서야 눈치 챘다는 거 아니겠어?" ]
허당-은 솔직하고 당당한 닝이 눈치는 엄청나게 빠른 주제에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다는 것을 말한거예요. 근데 이건 눈치 문제가 아니라 이해 문제니까, 바보가 아닌 허당. 이해를 못하는 세미에게 힌트를 흘리기 위해 텐도는 은유를 고민했죠. 두뇌 4인 만큼 텐도도 똑똑할 것 같아요! 공부 지식보다는 이런 말장난이라던가 사람을 읽는 법 같은 거.
우시지마는 계속해서 본인 욕심대로 행동하고 있는데도 닝은 '고백' 시나리오를 곱씹어보고 나서야 짝사랑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질투나서 속이 뒤집어지죠.
그러니까, 이미 배가 아프다 = 짝사랑 중이었는데, 밥을 먹고나서야 = 고백 시나리오 곱씹어보고는 질투까지 겪고 나서야, 눈치 챘다 = 본인 마음을.
[ 세미가 먼저 공을 하늘로 띄웠다. 요즘 점프 서브를 연습한다고 했다. 하늘로 떠오른 공은 꽤나 안정감 있게 세미가 의도한 동선대로 움직였지만, 선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젠장, 들리지 않는 비속어를 그가 읊조렸다.
공이 든 바구니에 기대며 세미가 뒤로 물러나자, 우시지마가 선은 보지도 않은 채 간격을 맞춰 섰다. 공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향하는 시선, 탄력 있게 튀어오르는 몸, 빠르게 공을 내리치는 손. 이마에 늘러붙는 머리칼이라던가 살짝 벌어진 입이라던가 헐떡이듯 바쁘게 움직이는 가슴과는 달리 다시 땅을 밟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다. 경기 중에는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지지만, 지금은 꽤나 유순해 보였다. 무언가 물어보는 세미에게 그가 또 간결하게 답해주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
조용히 자신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리는 세미와 달리 겉으로 다 드러나는 우시지마. 둘 중 닝이 좋아할 사람은 당연히 ...
세미의 공이 선 밖으로 떨어진 것 = 실패한 짝사랑. 세미가 뒤로 물러난 것 = 먼저 포기한 것. 선은 보지도 않고 자리를 맞춰 서는 우시지마 = 자신감 / 자긍심이 넘친다는 것 무언가 물어보는 세미 = 이후 실패하는 짝사랑때문에 한 번쯤 우시지마와 닝에게 의문을 품었던 세미, 하지만 ('간결함' = 솔직함)을 이야기한 것으로 결국 미워하지 못 하고 아끼는 친구들로 받아들이는 거를 말하고 싶었어요.
[ 의미심장한 얼굴의 텐도에 눈을 가늘게 뜨는 세미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자신의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 ]
이것도 캐해석인데, 세미는 주변을 살펴요. 눈치를 보고, 자신의 욕심만을 따르지 않죠, 웬만해서는. 고분고분 포기하는 것도 이 때문. 하지만, 우시지마는 눈치를 안 봐요. 뒤를 쳐다보지도,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본인이 보고 싶은 대상에 시선을 고정하는,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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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해심
[ 그는 '걔도 너 좋아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세미는 배려를 아는 사람이니까, 깔끔하게 물러서줬지만, 포기해줬지만, 떠먹여 줄 정도로 착하기만 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소심한 반항? 복수는 절대 아니고, 물러나더라도, 본인 손으로 이어주지는 못 하겠다는 거죠.
[ "이런 고민 해봤자 좋아하는 마음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희망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정도야."
"그래, 너가 편한대로 하는게 좋겠지."
딱 그 말이 하고 싶었다는 얼굴의 닝이 팔로 툭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
세미가 딱 그 생각을 하고 실천 중이기 때문에 '딱 그 말'을 하는 거죠. 고민 해도 여전히 좋아하고, 너가 우시지마를 좋아하는 거 아는데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쌍방인 걸 아니까 세미는 제 속의 희망을 모두 짓밟아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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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억
[ 잠시간 바쁘게 부엌으로 향하는 닝을 지그시 쳐다보던 우시지마는 텐도가 두어 번 정도 그를 부르고 나서야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
남들은 못 알아챌지라도 우시지마는 멍하게 닝을 쳐다보고만 있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그리고 텐도는 끌고 가거나 소리 지르는 대신에 여러번 이름을 부를 거예요. 하도 그러고 있는 꼴을 봐서. 눈치 빠른 사람들이 연애 사업에서 힘들죠. 특히 두 좋은 친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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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결과
[ 그래, 안녕 ]
세미가 결국 닝이 우시지마에게 밥을 사주라고 부추기게 된 이후에 너무 너무 행복해하고 설레 하는 닝을 보고 결심과도 같이 하는 말이에요.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닝에게 잘 가라는 의미에서 안녕. 친구인 닝에게 반갑다는 의미로 안녕. 닝이 생각없이 내뱉었던 약속 + 텐도의 체력 2 상황 때문에 세미는 얼떨결에 마음 정리를 하게 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