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64,000자의 긴 줄글입니다. 이야기는 느리게 흘러가는 편입니다.
• 전편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고로 전편을 읽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 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 Keyword는 각 이야기를 나누는 선이기도 하지만, 해당 키워드 이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는 다양한 장치가 있습니다. 글의 끝자락에 이를 해석하는 구간을 첨부하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Keyword ? 덩어리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바로 감정이다. 감정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인위적인 이름들과는 달리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일까?
감정은 분명하지 않고 흐릿하기만 한 선들로 그어진 경계들로 겨우 나누어진 모호한 주제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잘 아는 존재라 해도 감정에 관해서만큼은 모두 일전의 자신감과 확고한 소신을 잃을 수 밖에 없다. 후회가 질투로 변하고, 우정이 욕심으로 변하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하는 사례들은 모두 불분명한 세계에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가는 과정이라 일컫을 수 있겠다.
감정은 분리되어 있는 감각들을 묶기 위해 생겨난 명칭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를 각 개성에 따라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붙여져야만 했던 이름이라고, 화자는 이야기하고 싶다.
Keyword 1 감정 |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눈치가 없다. “와카토시군은 참 눈치가 없단 말이지.” 한 사람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는 우시지마를 지켜보던 텐도가 건넨 한마디였다. 누군가는 성을 냈을 수도, 어쩌면 날카로운 말로 되받아쳤을지도 모르는 모호한 뉘앙스를 품은 말이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덤덤하게도 답했다. “그런가.” 그는 텐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잘 파악하는 텐도 사토리는 우시지마를 처음 마주한 시점부터 눈치 없다고 생각했을거다. 그럼에도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놓지 않았던 존재가 굳이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우시지마는 잘 알고 잇다. 물론, 텐도만의 복잡한 이유들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제 착한 친구가 악의 없이 분명한 이유를 가진 채 하는 말임을 알기에, 우시지마는 별다른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한 마디를 받아들였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 눈치가 없다. 둔하다. 타인들로부터 그가 자주 들어온 말이었다. 그중 텐도와 같이 정당한 이유를 근거로 입을 여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단단한 존재에게 상처를 내고야 말겠다는 악의를 품은 채였다. 불편한만큼, 당신도 불편하기를 바란다는 독을 품은 마음들이었다. 그러나 미동도 않는 우시지마를 마주한 그들은 또 다시 날카로운 가시로 두른 두서없는 말들을 그에게 던졌다. 감정도, 뭣도 없는 기계같다고. 그들의 악심을 모를 순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없는 것과 순진함은 달랐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온갖 오해를 받으면서도 우시지마가 입을 다문 이유는 자긍심이었다. 그는 본인이 잘났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관심도 없는 타인이 무어라 떠들어대든 말든, 결국 상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예민하게 굴며 무의미한 말들에 받아칠 필요가 있는가? 굳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가? 그런 의문들을 정답으로 받아들이게 된 그는 굳이 타인의 이야기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칭찬이든 욕이든 구분 없이 한 순간에만 목소리들을 담아낸 뒤, 다시 세상을 순환하는 바람을 따라 흘려보냈다. 때로는 속이 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별일 아니었다. 결국 본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시기하는 말에 불과했기에. 자신이 어떠한 행보를 보이든 미움은 언제나 받아온터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애정을 주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왔다. 조용히 남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보면, 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종국에는 같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한 깨우침을 얻은 그는 누군가의 입맛에 맞춰주려 들지 않았고, 지금껏 살아왔듯 계속해서 살아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 욕심은 딱히 없었다. 굳이 원하는 것을 하나 꼽아보라 한다면, 배구를 꾸준히 하고 싶다는 욕심 정도가 되겠다. 그렇게나 단순하고도 단편적인 세상에 들어선 한 인물은 제 평온한 마음에 욕심 이라는 붉은 단어를 새겨넣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시작은 사소했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 아이는. 눈이 반짝였고, 빛을 발광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으며, 좋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유별나게도 이해심이 깊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 무던한 말들에 상처를 받곤 했다. 그 탓을 분명히 명시해주는 누군가가 항상 존재해왔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해서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제 자신을 재단하고 싶지는 않아 가장 간결한 형체의 말을 꺼냈다. 그러면 그 아이는 타인들처럼 상처를 받고도 꿀꺽하고 수많은 의견들을 삼키는 대신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했다. 좋으면 말갛게 웃었고, 싫으면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난 원래 잘 한다.” 그런 류의 말을 하면 재수 없다며 뒤에서 떠들어대다 끝끝내 제 귀에 들어오게 하는 타인들과는 달리 그 아이는 맑은 소리와 함께 눈이 휘어지도록 웃어보였다. 그리곤 이렇게 답했다.
"그런 것 같더라." 그 날 이후로 머릿속에 수많은 욕심이 가득 들어찼다. 더 보고싶다. 웃는 얼굴을 더 보고싶다. 나긋한 목소리를 더 듣고싶다. 귀를 울리는 맑은 웃음소리를 더 듣고싶다. 그렇게 가볍게 쓰여지던 욕심의 목록은 점차 분수에 맞지도 않는 진정한 욕심들로만 채워졌다. 내 후각이 그녀의 부드러운 향에 마비되었으면 좋겠다. 내 시야를 단 한 사람만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나긋한 한 마디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만이, 너만을. 그리고 진실로 나만이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너만을 눈에 담고, 귀에 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안되냐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너는 길고 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단답만을 내어주는 내게 질책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세미와 오히라처럼 다정한 한 마디를 내어주지도, 텐도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말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워지는 동시에 가슴이 벅찼다.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너를 보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나는 맥락도 없이 던졌다. 그러면 너는 그 의미를 묻지도 않은 채 익숙하다는 듯이 답을 내주었다. 그 익숙함이 좋았다. 길고 긴 답을 내어주는 동시에 좋은 단어들만을 입에 담는 너에게는 이기심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너의 이타심을 의무라고 표현하는 의도가 결코 이해 되지 않았다. 부족한 말솜씨로 내 이견을 너에게 짧게나마 표하자, 일방적인 대화를 하는 내내 보이지 않았던 다정한 미소가 마침내 네 입가에 걸렸다. “알지. 하지만, 하고 싶은 걸? 다들 웃어주면 좋으니까.” 나는 네가 웃는 게 좋다. 웃을 때마다 초승달처럼 접히는 너의 눈도, 어여쁜 호선을 그리는 너의 입도, 작게 흘러나오는 너의 소성도 모두 좋다. 그냥 네가 좋다. 결국 타이밍을 놓쳐 혓바닥 위까지 올라온 말을 입 밖으로 내어놓지는 못했지만,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다. 데이트였으니까. |
Keyword 2 경계 |
후배들이 들어왔다. 시라토리자와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 깐깐해보이는 감독, 어느 하나 순한 인상 따위는 없는 선배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이름의 존재만으로도 느껴지는 위압감까지. 그중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으니 새로운 부원들은 당연하게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얼굴도, 강해 보이려 애쓰는 얼굴을 한 녀석들도, 결국에는 이 첫 대면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무게 잡는 이들도 어쩔 수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들 행동하려나. 속으로 키득거린 닝이 저라도 분위기를 풀어주어야겠다는 사명감과 함께 소개를 하는 순간에 입꼬리를 당겨 올리고, 눈꼬리는 잔뜩 늘어트린 채로 활기차게 인사했다. “매니저 닝이라고 해. 궁금한 거, 필요한 거 모두 편하게 물어보고 부탁해도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할게!”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살짝 높이를 낮추는 어깨들을 보며 그녀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 새로 들어온 아이들 중 두 사람이 가장 눈에 띄었다. 물론 1학년들 중에 가장 실력이 좋아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조금 색다른 이유들이 주였다. 첫번째 아이의 이름은 카와니시 타이치. 이 후배님은 어느 하나 눈에 안 띄는 점이 없는 덕에 눈에 들어왔다. 밝은 금발도, 텐도와 엇비슷해 보일 정도로 큰 키도 모두 시선을 끌었다. 내내 무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우시지마와 성격이 비슷한걸까 궁금해하던 중, 텐도가 소리쳤다. “카와니시, 이 미라클 보이 사토리가 한 수 가르쳐주지!” “와, 기대됩니다.” 영혼이라곤 단 한 푼도 들지 않은 목소리에 짜게 식어버린 텐도와는 달리 닝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상반되게도 흥이 담긴 척 하는 목소리가 웃긴 동시에 저와 비슷한 성정을 가진걸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아니나 다를까, 휴식시간 동안 몇 마디 나누어보니, 카와니시는 할 말 다 하고 사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손쉽게 알아내었다. 이쯤되면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특징은 마이웨이인걸까 고민하며 닝은 드링크 통에 붙인 이름표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 작년 초의 끔찍한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때, 무뚝뚝한 남동생처럼 무던한 리액션을 하던 카와니시가 본인의 물통을 집어들곤 이리저리 살피며 서글서글하게도 웃었다. “누나 글씨체 예쁘네요.” 저에 대한 칭찬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는 닝은 세미와 텐도가 옆에서 ‘누나’라는 호칭에 경악하는 소리를 무시한 채 해사하게도 웃어보였다. “고마워, 타이치!” 나머지 한 명은 카와니시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는 선배들에게 잘도 말을 거는 카와니시와는 달리 우시지마만을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던 순간에도 단 한 사람에게 꽂혀 있던 시선에는 동경이 가득했다. 작년 초의 제 모습과 겹쳐지는 것이 신기하여 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프로필을 살폈다. 이름은 시라부 켄지로. 리베로인 하야토와 키가 엇비슷할 정도로 팀 내에서 키가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세터였다. 시라부에게는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특기생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배구부 전체가 특기생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기에 유일한 일반 전형 합격자라는 뜻이었다. 키가 큰 학생들을 고집하는 감독이니만큼 실력이 좋다는 건데 ... 어째서인지 다른 이들은 닝과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2,3학년들은 고작 신입생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1학년들 사이에서는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 이유를 추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추천장을 받아 들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온전히 공부만으로 시라토리자와에 들어와 배구부까지 걸음을 한 존재가 그들에게 마냥 좋게 보일리는 없었다. 물론, 닝은 그 차별과도 유사한 분위기를 열등감 이라고 서술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1학년 내의 분립이 극명해졌다. 휴식 중에는 그 누구도 시라부에게 드링크 통을 건네주지 않았고, 타올을 전달하는 와중에도 시라부에게 이를 전해주는 1학년이 없었다. 윗학년들이야 저들끼리 연습하고 얘기하기 바쁘니 그런 분위기 따위 살피지 않았고, 결국 닝만이 이를 눈여겨 보며 상황을 살폈다. 유일하게 시라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카와니시였고, 그래서인지 둘만이 이야기를 나누며 붙어다녔다. 둘이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도통 알 길이 없었으나, 혼자가 될 수 있던 아이에게 친구가 생겨 다행이라 여겼다. “특기생으로 안 들어왔다면서? 그럼 시라부도 시험 보고 들어온거야?” 닝은 이미 진실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벤치에 앉아 땀을 닦고 있는 시라부에게 태연하게도 물었다. 동급생들끼리 친해질 수 없다면, 선배들과 친해지는 방도가 있었다. 그렇기에 시라부가 저를 통해서나마 그 길을 열었으면 했다. 세미 덕에 발을 넓힐 수 있던 저처럼. “네.” "대단하네. 배구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낼 수 있겠다." 닝이 생글생글 웃어주었다. 남을 무시하려 드는 녀석들보다는 네가 주전으로 올라갈 확률이 더 높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시라부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꾸벅 숙여보이곤 드링크를 마시고 있는 타이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닝이 저 싸가지- 하고 중얼거렸다. 경계하는 이들이 많은만큼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 나도 그랬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살갑게 굴면 예의는 지켜달라 이 말이지. 어쩌면 묵례를 최소한의 예의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바람에 닝은 한숨을 푹 내쉰 뒤, 피쳐가 비었다고 말을 걸어오는 세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닝은 그 날 이후로는 시라부에게 특별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카와니기에게 시라부의 예민함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에는 “제가 얘기해 볼까요?”라는 답이 돌아왔지만, 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가 싫다는 사람에게 대화를 강요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그렇게 한발짝 물러선 곳에서 그녀는 어느새 무시에서 경계로 바뀐 다른 1학년들의 시선을 연습이나 하라는 말로 맞받아치며 시라부를 주시했다. *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 위해 공부삼아 배구 경기를 수도 없이 돌려보았다. 작년 한 해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와시죠 감독의 철학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된 닝은 세미와 시라부의 차이또한 쉬이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전의 기회를 올해가 되어서야 얻게 된 세미에 대해서도, 경계의 시선들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시라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지금, 긴 한숨만을 내쉬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다 뛰어난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었지만, 실력으로만 보자면 세미가 월등했다. 서브는 팀 내에서도 우시지마 다음갔고, 힘도, 체력도, 스피드도 모두 탁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되는 훈련을 벤치에서 지켜보며, 종국에는 시라부가 주전이 되리라 예감했다.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는 단골 손님들 중 한 사람인 시라부는 배구바보인 우시지마조차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까지 홀로 체육관에 남아있는 일이 잦았다. 체육관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장소를 불문하고 제 할일을 깔끔하게 해내는 닝은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10시인데, 이제 슬슬 정리할까?" 그러면 시라부는 저가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움찔 몸을 떨곤 체육관의 높은 벽에 위치한 시계를 올려다봤다. 그제서야 시간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매번 고개를 꾸벅 숙이곤 비품을 정리했다. 닝은 그를 도와 정리를 하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을 떨쳐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거니?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시간이 더 많이 지나고 나서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함으로서 알아낼 수 있었다. 처음 시라부가 셋업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 당시에는, 일지에 날카롭다고 표현했다. 꽤나 공격적인 토스가 세미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개성이 희미해져 갔다. 그 전의 공격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공을 띄워주는 세터만이 남았다. 마치 눈에 띄지 않겠다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아. 닝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시라부가 죽어라 노력하는 이유를.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바라볼 때마다 동경과 존경이 한데 뒤섞인 눈빛을 했고, 와시죠 감독의 배구 철학은 에이스를 중심으로 하는 플레이였다. 결론은 이 두 개의 사실만으로도 쉬이 유추해낼 수 있었다. 시라부가 존경하는 선배와 같은 코트에 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스파이커가 돋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성실하게 공을 띄워야만 했다. 세미는 스스로의 실력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만큼, 찬란한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내리쬐도록 뽐내고자 했다. 작년에는 그 성향 탓에 뺨까지 맞았으니 이를 감독이 얼마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주전 세터가 확실하게 이름나지 않은 지금, 시라부가 공을 띄워주기만 하는 세터로 숨기 위해 애쓴다면 ... 누가 목표에 도달할 지는 가슴 아프도록 뻔했다.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결국 배구는 경쟁이었다. 감독의 배구 철학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언정, 우시지마가 득점을 하는 순간 상대의 기가 죽는 꼴은 작년만 해도 수도 없이 봐왔다. 그 누가 뭐라 말해도 결국 신경전에서는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고, 점수 또한 가장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전략이라고 할 것도 없는, 힘으로 짓누르는 플레이였다. 이번만큼은 고작 매니저에 불과한 닝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에이타가 시라부를 미워하지는 않도록 한 마디 가볍게나마 던져보는 일 뿐. • 대화 : 세미 & 닝 - 시라부 저 녀석, 영 귀염성이 없단 말이지. - 에이타, 그냥 재수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 ... 너한테도 그러냐? - 예민할 뿐이야. 그래서 똑같이 대해주고 있지. - 너 카와니시랑은 잘 지내잖아. 아까도 걔가 타올 정리 도와주는 거 봤는데? - 타이치는 착해. 시라부도 착한 것 같긴 한데 ... 일단은 내 말에 답도 안 해준단 말이야. - 그새 요비스테도 한거야..? (닝은 어깨를 으쓱였다.) |
Keyword 3 관계 |
닝은 우시지마와의 ... 데이트 이후, 그와 더 가까워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어떤 기준으로 이를 체감했냐 묻는다면 명쾌한 답을 내어줄 수는 없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 쉬는 시간이 되어 올해 같은 반이 된 텐도가 저를 끌고 옆반으로 향할 때면, 우시지마는 먼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왔고; 연습 도중 쉴 적에는 꼭 제 옆의 빈자리에 와 앉았다. 그는 말 한 마디 안 건넬 지언정, 꼭 제 옆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이런 사소한 변화를 마냥 좋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시지마의 존재에 대한 면역력은 터무니없이 무너져 내렸고, 심장은 시도때도 없이 벌렁거리는 바람에 언제 한 번은 말을 하다 말고 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었다. 왜냐고? 자칫했다가는 목소리 대신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더더욱 큰 문제는 무의미한 희망을 꽉 붙든 채 못 놓게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혼자 꾸역꾸역 참아보다가 세미에게 한탄을 슬쩍 하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답만이 돌아왔다. 그의 말이 옳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체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설상가상으로 제 짝이 된 텐도는 도움을 주기는 커녕 사람을 잘도 괴롭혀댔다. 어쩜 그렇게 사람 속 긁는 소리는 잘도 골라서 하는지, 우시지마의 반으로 저를 끌고 갔다 돌아올 때마다 꼭 한 마디씩 던졌다. "얼굴이 새빨개!" "닝쨩은 역시 허당인 게 분명하단 말이지-!" "거짓말 안 한다더니, 결국 거짓말이랑 다를 게 뭐야-?" 도대체 왜 텐도가 저를 시도때도 없이 놀려대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 해서 제 자신을 변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이는 따지고 보자면 정작 텐도의 말 중 틀린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와카토시군- 하고 부르며 장난치는 그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질지언정, 저는 눈만 흘길 뿐 문제의 원인인 우시지마에게는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그날, 왜 그런 말을 했어? 우시지마에게 고백보다도 더 말하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터져나오는 의문들을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욱여넣을 뿐이었다. * 그날은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봄이 활짝 만개하는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부활동이 없음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연습을 나가는 부원들을 따라 이른 아침부터 체육관으로 향하는 그런 익숙한 어느 하루. 햇살이 유독 밝았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덕에 따스한 동시에 시원하기도 한 완벽한 날이었지만, 닝의 기분은 좋은 하루를 보내지 못한 채였다. 텐도가 언제나처럼 제게 장난을 쳤는데 하필 처음으로 그만하라 이야기를 하는 순간 선생님이 뒤를 도는 바람에 저 혼자 혼이 났고, 점심에는 유독 제가 싫어하는 야채가 많았고, 매점에 들렀을 때에는 꼭 먹고 싶었던 빵이 품절 되어 있었으며,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서려다 책상에 무릎을 박았고, 반으로 들어서던 중에는 저를 따라 들어오던 텐도가 키득거리면서도 괜찮냐 물으며 일으켜 세워줘야 했을 정도로 세게 정강이를 의자에 부딪힌 바람에 주저앉았었다. 지금조차도 체육관에서 정리하려 했던 수학노트를 반에 두고 온 바람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다시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결론은, 좋은 하루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거다. 마음 같아서는 기숙사로 돌아가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져 자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쥐여진 일들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체육관에 남아있는 편이 제 능률을 올리는 최고의 방안이라는 사실을 이미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 있었다. 운동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공 튀기는 소리, 나지막하게 깔리는 대화 소리 모두를 잔잔한 배경음 삼는 일이 습관이 되어 버린 터였기에, 그녀는 체육관에 남기를 택했다. 뭐, 훈련을 구경하다보면 스트레스가 모두 풀릴 것 같기도 했고. 그녀가 체육관 문을 열자, 예상했던대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부원들이 시야에 들어찼다. "안녕-!" 축축 처진 제 속을 조금이라도 달래볼까 하는 마음에 닝이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로 손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같이 인사를 건네오거나 고개를 까닥이는 부원들을 보며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건 다 말랐더라." "벌써요? 오케이-" 3학년 주장이 그녀의 응답에 같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저 멀리 멀어졌다. 닝은 체육관의 구석으로 향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드링크부터 준비하는 게 맞겠지? 그리 생각하며 가방에 넣어두었던 배구부 일지를 꺼내던 참이었다. "닝." 제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저음에 그녀는 또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몸을 돌렸다. "응? 필요한 거 있어? 드링크는 이제 막 타려던 참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닝을 가만 내려다보던 우시지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이 있다." "... 따로 하고 싶은거야?"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우시지마를 마주한 그녀는 머뭇거리다 곧 자리를 옮기자는 그의 제안에 응했다. 목적지가 분명이 정해져 있는 양 걸음을 성큼 성큼 옮기는 우시지마를 그녀는 졸졸 따랐다. 체육관 밖으로 나가는 둘을 발견하고는 갸웃거리는 얼굴들이 보여 “저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 하고 소리 높여 말하던 닝은 시야의 끝에 걸리는 텐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거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써보아도 과묵한 그가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 자리까지 옮기나 싶어져 심장이 벌렁거렸다. 웬만해서는 원하는 바가 있으면 체육관 구석에서 제게 조용히들 말을 걸어왔다. 그중 우시지마는 본인의 요구가 무엇이든 간에 코트 중앙에서 얘기하고도 남을 사람인데,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사항인가 하는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입도 벙긋 않은 채 긴 다리를 뻗어 걸음을 옮기는 우시지마를 열심히 따라잡다보니, 마침내 도착한 곳은 체육관 뒷편의 작은 뜰이었다. 날도 좋은데, 잔디까지 푸르러 공기가 더욱 상쾌하게 느껴졌다. 닝은 시원한 향을 깊게 들이켰다. 안타깝게도 두근거리는 속을 달래주는 효과따위는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날 데리고 왔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정적 속 그의 진한 눈빛에 숨이 목에 턱 걸려버렸다. 꼭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것처럼. 왜 저렇게 잘생긴거지? 쟤는 도대체 전생에 뭘 했길래 저렇게 다 가지고 태어난거야? 잘생긴 얼굴이 제일 재밌는 법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진리인 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두려운 한편으로는 딱 제 취향대로 생긴 잘난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서러움이 모두 가시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칼도, 잔디도, 나뭇잎도 모두. “뭐라고? 눈을 멍하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뒤늦게 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한다.” 우시지마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단어를 발음해냈다. 그 간결한 고백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서러운 하루를 보낸 탓인지. 아니면 가망이 없다고 계속해서 자기 세뇌를 한 탓인지. 아니면 짝사랑같은 건 그만두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라는 건 우습게도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서 가늠조차 못 할 정도로 커져버린 애정 탓인지. 정확한 이유는 어리짐작조차 해낼 수 없었지만, 정말 우시지마 와카토시다운 고백에 눈가가 축축히 젖어갔다. “사, 사귀고 싶은 좋아해야?” "사귀면 뭐가 달라지지?" 그런 솔직함도, 순수한 물음도 좋았다. 그냥, 다 좋았다. "키스하고 싶은 좋아해야?" 그의 시선이 잠시 높이를 낮췄다 다시 닝의 눈으로 올라왔다. 우시지마가 말을 고르는 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그녀는 재촉을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가 느지막이, 나지막이, 말했다. “응. 너에게 닿고 싶다.”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슬프지 않은 기쁨의 눈물은 그 순간이 처음이었다. 그 몇방울을 기점으로 곧 그녀의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잔디밭에 툭- 툭- 비를 내렸다. 갑자기 울어버리는 탓에 당황한 우시지마는 손을 어쩌지 못한 채, 눈만 바쁘게 움직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닝을 살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새 축축히 젖어버린 얼굴 안에 붉어진 눈가와 설렘에 달아오른 볼을 담은 닝은 그를 올려다보며 바보같이 웃었다. "나도 좋아해. 작년부터 좋아해왔어. 많이, 내가 많이-" 또 울컥해버린 그녀가 결국 우는 소리를 내며 우시지마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쳐박고는 끙끙 앓으며 그의 검은 반팔을 서러운 빗물로 적셨다. 제 옷이 축축히 젖어가는 와중에도 방황하던 그의 두 손이 마침내 닝의 작은 몸통을 감싸 안았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 위에 턱을 올린 그가 얌전히 등을 토닥여주며 물었다. “왜 우는거지?” 울다가 웃으면 안된다고 했는데.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의 물음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닝이 두 팔로 우시지마의 허리를 꽉 감았다. "네가 먼저 말해준 게 좋아서.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행복해서 우는거야." "그렇군." 가볍게 수긍한 그가 손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른 채, 그는 그녀가 우는 내내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체육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닝이 훌쩍거리며 그 품에서 겨우 떨어져 나올때까지, 계속. 손등으로 대충 눈물을 벅벅 닦아낸 닝은 곧 무언가를 발견한듯 눈살을 찌푸렸다. “너 옷 젖었어 ...” 우시지마가 옷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울어댔는지, 그의 검은 반팔이 더욱 진하게 물든 부분이 눈에 띄었다. “괜찮다.” 그가 간결한 답과 함께 손을 뻗어 닝의 얼굴에 남아있던 눈물자국을 지워주었다. 다정하지만 투박한 손길에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린 그녀가 시선을 올려 그의 눈을 마주했다. "나, 이제 너 손 잡아도 돼?" "응." "안고 싶을 때마다 안아도 되는거야?" "? 그렇다." "그럼 나 뽀뽀도 해주면 안돼?" 마음 같아선 이미 입을 여러번이나 맞춘 뒤였지만, 어쩔 수 없는 키 차이 때문에 닝은 조금 퉁명스레 내뱉었다. 대답 대신 저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로 시선을 올린 그녀가 미간을 옅게 구겼다. “해줘.” 명령 아닌 부탁에 고분고분 허리를 굽힌 우시지마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을 살짝 내리깐 그가 제 반응을 살피듯 가만 쳐다보다 다시 한번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잘생긴 얼굴이, 그리고 또 하고 싶을 때마다 해달라고 졸라도 된다는 관계가 벅차도록 좋았다. 또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발견한 우시지마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려다 말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좋아서 우는건가?" "응." 쥐어짜듯이 겨우 답을 내놓자, 그가 다시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해왔다. 좋다고 말하니, 또 입을 맞춰왔다. 머리칼에 한 번, 볼에 두 번, 입술에 세 번. 좋아서 죽을 것 같아. 그녀가 귀가 울리도록 뛰어대는 심장에 우시지마의 입술을 피하며 다시 그의 딱딱한 상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러면 또 다시 질문을 하는 대신에 몸을 감싸주는 온기와 허리를 감는 두꺼운 팔에 닝은 울음을 터트렸다. 행복감이 눈물 외의 것으로는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는듯이, 펑펑. 시간이 다시금 오래간 지날 때까지도 둘은 그 자세 그대로 산들바람을 맞으며 따스한 햇살 아래에 서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두 사람을 찾아 나섰던 3학년 주장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에 체육관 뒷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뒷뜰에서 우시지마의 품에 푹 안겨있는 닝을 발견한 주장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주장에게로 고개를 돌린 우시지마가 닝을 끌어안고 있던 팔의 힘을 풀었다.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저희 사귀기로 했어요." 겨우 멈췄던 눈물이 그 말과 함께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보였다. * 탈의실을 나서자마자 어째 싱글벙글해 보이는 텐도를 발견한 세미가 미간을 구겼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싶어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체육관을 살피니, 구석에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꼴을 발견했다. "닝은 어디갔어?" 세미는 그제서야 분명 우시지마와 함께 체육관에 도착했었는데 지금은 온데간데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와카토시는 어디갔고?" 텐도는 답을 내어주는 대신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미안- 이라는 말만을 전하고 돌아서는 텐도의 뒷모습에 대고 세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 뭐가 미안한데? 애초에 대답이나 해주고 가면 안되는건가? 그가 머리를 굴리며 정답에 근접해가는 순간, 3학년 주장이 충격이 가득 들어찬 얼굴을 한 채 체육관에 들어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들 밖에 나가는거지? 세미가 생각의 가지를 뻗혀 갈 쯤, 익숙한 인영 두 개가 시야에 걸렸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는 지 목록을 짜내기도 전에 보이는 잔뜩 젖어있는 얼굴에 그의 눈이 동그랗게 크기를 키워냈다. 붉은 눈가도, 볼을 손등으로 부비고 있는 모습도 모두 단 한 가지 경우의 수만을 가리켰다. "닝! 뭐야,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그녀의 앞으로 달려가 걱정스레 묻자 닝의 얼굴이 또 잔뜩 일그러졌다. 이미 동백꽃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뜩 붉어진 두 뺨이 채도를 높임과 동시에 눈물이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오열을 할 것 같은 표정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두 팔을 뻗어 세미를 끌어안았다. 조금 달아오르는 귀 끝과는 달리 그는 어찌 반응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 순간, 바로 근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이 어째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설마- "와카토시도 나 좋아한대 ... 이제 우리 사귀는거래 ..." 눈물을 질질 흘리며 웅얼거리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 귀여운 동시에 웃겼지만, 이제는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한 시선에 세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밀어내기라도 하면 더 크게 울어버릴 것 같은 동시에 팔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곧바로 배구공으로 한대 맞을 것 같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찰나였다. 제 마음을 읽어주기라도 했는지 닝이 먼저 품에서 떨어져나갔다. 소매로 얼굴의 눈물자국을 대충 닦아낸 닝이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미안.” 그리 간단히 사과한 닝은 여전히 충격과 공포로 가득한 얼굴의 주장에게 드링크를 준비하겠다 통보하곤 부엌으로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오도도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우시지마가 여전히 어정쩡한 자세로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세미를 한번, 그리고 여전히 벙찐 얼굴의 주장을 한 번 돌아보곤 덤덤하게 말했다. "서브 연습 하겠습니다." 배구공을 집으러 가는 우시지마의 옆에 다가온 텐도가 "축하해-" 라는 말과 함께 히죽 웃어보였다. |
Keyword 4 변화 |
우시지마의 고백 이후, 둘은 세트 메뉴라도 되는 양 어딜가든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점심 때도 닝이 자연스레 우시지마의 옆 자리를 차지했고, 쉬는 시간에는 그녀가 되려 텐도를 옆반으로 끌고 갔다. "언제는 쉬는시간마다 옆 반으로 오는 게 싫다고 하지 않았나, 닝쨩-?" 개인적으로 해도 될 말을 굳이 우시지마의 앞에서 하는 텐도에게 미간을 찌푸리면, 조용히 닝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우시지마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 반으로 오는 게 싫은가?" 그대로 굳어버린 닝이 어버버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게 아니라고 부정해 보았지만, 옆에서 상세하게도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해주는 텐도에게 진 그녀는 기어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사귀게 된 것과는 별개로 구구절절 제 삽질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 그녀가 이 고난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 고민할 쯤, 우시지마의 얼굴은 이미 심각해 보였다. 그의 미간조차 구겨진 상태였으니, 이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를 눈치챈 닝이 무어라 해명을 하려던 순간, 곧 종이 친다며 텐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그녀는 결국 제대로 된 해명은 하지도 못한 채 우시지마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제 반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누군가의 말을 마음 깊이 담아두는 사람이 아니니, 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리라 치부했다. 그러니까, 저가 노트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반의 뒷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커다란 인영에 얼마나 놀랐는지는 말로 이루 표현해낼 수 없었다. "이제 됐나?" 쉬는 시간인 탓인지, 아니면 우시지마를 보곤 놀라서 도망간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운 좋게 비워진 앞자리에 그가 몸을 앉히며 물었다. 그의 의도를 먼저 눈치챈 텐도가 파하하 웃으며 자리를 뜬 사이 닝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뭐가?" 책상에 올려진 그의 큰 손을 잡으며 묻자, 되려 더 의아하다는 눈빛을 한 우시지마가 저를 따라 거울처럼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우리 반에 오는 게 싫다고 하지 않았나?" 눈을 깜빡거리며 고심에 빠져있던 닝의 얼굴이 곧 붉게 물들었다. 그의 큰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제 손에 손가락을 엮는 행위는 열을 식히기는 커녕 오히려 더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까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꼴이 진심을 가리는 정도로 보였다는거잖아. 그래서, 지금 ...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지? 아픈가?" 미쳤다. 미쳤어. 그녀가 그의 큰 손 위에 고개를 쳐박았다. 연인이라는 이름 하나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뭐 ... 일전에 상상했던 무미건조한 연애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대 실망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로 고개를 들지 않는 닝을 가만 내려다보던 우시지마가 그녀의 이마를 받히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어지럽게 늘어진 머리칼을 제 긴 손가락에 감았다. 부드럽다. 그리 중얼거리면서. * 연애는 당연히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는 사실도 상상 이상으로 좋았지만, 닝은 눈치를 살폈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냐면, 다름 아닌 감독과 코치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연애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우시지마에게 더 혹독히 군다거나 배구부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까 걱정되었다. 그런 제 속은 당연히 조금도 모르는 우시지마는 체육관에 들어설 때마다 손을 놓으면, 왜 손을 놓는 것이냐 물어왔다. 그가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어 방안을 찾아 방황하던 닝은 마침내 제 성정에 딱 맞는 선택지를 찾아냈다. 훈련을 계속하라 이르고는 체육관을 나서는 감독과 코치를 눈으로 따르며 머뭇거리던 닝은 곧 급한 걸음으로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응? 뭔데 그러니?" 눈길도 안 준 채 그대로 직진하는 감독과는 달리 사이토 코치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둘 중 한 사람만 대답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닝이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 저," 적절한 말을 찾으려 애쓰던 닝은 끝내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곤 정면승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저랑 우시지마랑- 연애, 하는 거 괜찮죠? 물론, 경기에 지장은 안 주게 관리 할 거예요!" 제 말에 웃음이 터진 코치가 말을 못 하고 있자, 대충 괜찮다는거겠지? 싶었던 닝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돌아가도 되나 말아야 되나 고심할 쯤,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된다고 하면, 어쩔거냐?" 날카로운 말투에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잠시, 그녀가 곧 활짝 웃으며 답했다. "허락 받으려던 생각이 아니라, 혹시 모르니까 말씀 드리려던 것 뿐이에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대로 뒤돌아 가는 감독과 부원들이 너무 늦게까지 남아있도록 내버려두지는 말라 전한 코치가 와시죠 감독을 따라가는 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닝이 중얼거렸다. 그런다고 졸업식 날 멱살 안 잡을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영감님. 뺨 때리는 걸 내가 그냥 놔둘 줄 알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슬그머니 높이를 올리는 입꼬리는 어찌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의 변화를 그 누구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와중에도 우시지마와의 연애에 태도가 바뀐 인물이 딱 한 명 있었다. 누구냐 묻는다면, 바로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우상시하는 시라부 켄지로 되시겠다. 그 동안 말도 제대로 안 나누고, 대꾸도 건성으로 하더니, 어느 날 습관처럼 드링크 통의 이름을 찾아 건네주는 순간 그 아이가 처음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감사합니다." 그 동안 필요한 게 있으면 타이치를 통해 말했을 정도로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어온 적 없던 이가 고작 본인의 동경의 대상과 연애한다는 사실에 경계심을 풀기라도 한 건지. 피식 웃어버린 닝이 입꼬리를 올리며 시라부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 말 해줘서 고마워-" 뒤 돌아 가려던 시라부가 그 말에 조금 민망하다는 듯 붉어진 귀 끝과 함께 묵례를 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봤자 고등학생이었던거다. * "으, 난 저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끼어드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 "누군들 좋겠냐."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던 세미와 오히라 사이를 파고드는 1학년 후배를 보며 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에 가볍게 받아치고는 유유히 떠나가는 하야토의 말에 실소를 흘리다보면, 어느새 제 머리에 큼지막한 손이 올라와 있었다. 처음에는 그 행위가 너무도 의식되어 잔뜩 굳어버렸었지만, 그 현상이 며칠간 반복되자 이제는 아주 오래간 있던 일인양 익숙했다. 제 머리칼을 가르고 꼬여오는 손가락들이 느껴질 때,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에게 상긋 웃어주었다. "왜 그렇게 내 머리를 만져?" 그는 눈을 깜빡이며 닝의 시선을 받아주다 이렇게 답했다. "좋다." 그녀의 얼굴이 또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좋다는 말 외의 다른 답이 있기라도 한 거냐 묻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게 된 닝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그렇구나- 하고 답했다. 진심은 이렇게나 사람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 |
Keyword 5 예상 |
닝은 인원이 적지 않은 배구부 내의 유일한 매니저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일들을 홀로 모두 해냈다. 당연하게도 왜 나 혼자 해야만 하냐며 다른 이들에게 일을 어느정도 맡길 때도 있었지만. 그런 닝은 3학년 선배들은 못 도와주더라도, 동갑내기들과 후배들에게만큼은 당연하다는 듯 도움의 손길을 내주었다. 2학년이 될 때까지도 결국 배구부 밖으로는 인맥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그녀는 배구부원들에게만큼은 제 모든 것을 퍼줬다. 노트를 빌려달라는 말에는 돌려주라는 당부만을 한뒤 언제든 흔쾌히 건네주었고, 숙제도 누군가 물어보는대로 성실하게도 도왔다. 그럴때면 언제고 미안하다 말하는 친구들에게 닝은 피곤할 법한데도 그저 웃어보였다. 노력하는 사람을 빈 손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는 말과 함께. 한편, 이미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스스럼없이 이거 알려달라 저거 도와달라 잘도 말을 거는 2학년과는 달리 1학년은 매니저가 뭘 잘 하는지 알 리가 만무했다. 많은 일들을 혈혈단신으로 잘도 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저 대단한 사람이구나 여길 뿐, 그녀의 체육관 밖에서의 모습을 알 길이 없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체육관에 부원들과 함께 있었고, 체육관 밖에서 마주친다 싶으면 2학년 선배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모습뿐이니 공부에 큰 뜻이 없겠거니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누나는 너처럼 시험 보고 들어왔으니까, 공부 잘 하지 않을까?” 카와니시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시라부는 그녀가 입학한 뒤로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며 얼버무렸다. 모든 사람들에겐 괜히 ... 정말 마땅한 이유 하나 없이 괜히 꺼려지는 사람이 있는데, 닝이 시라부에게 그런 존재였다. 굳이 그 이유를 대어보자면 우시지마 상을 와카 라고 부른다거나 평소 행실이 텐도와 꽤나 유사한듯 보여서였다 - 같은 반이 된 후로는 세미만큼이나 자주 붙어다니니 어쩔 수 없었다. "오히라 상." 중간고사를 앞두고 한참동안 망설이던 카와니시가 마침내 시라부의 떠밈에 레온을 불렀다. 영 안 풀리는 수학 문제가 하나 있어 누군가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었지만, 3학년 선배들은 영 어려워 찾은 인물이 레온이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 두 사람이 거친 과정은 터무니 없었다. 1번 후보: 우시지마 상을 방해해서는 안돼! 2번 후보: 텐도 상은 차라리 안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3번 후보: 닝 상도 마찬가지. 4번 후보: 세미 상에게는 물어보기 싫다. 5번 후보: 야마가타 상은 왠지 어렵다. 그렇게 어렵게 - 순전히 시라부의 고집 탓 - 말을 꺼내보았으나, 레온은 인자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내어주기는 어려운 탓일까 싶어 어깨를 미묘하게 늘어트리는 두 후배의 모습에 레온은 웃음을 흘렸다. "나보다는 닝이 설명을 더 잘 해줄거야." 그는 닝과 꽤나 친한 사이이니 결코 틀린 말은 아니리라 여기면서도 긴가민가 하는 얼굴의 시라부를 보며 혀를 찬 카와니시는 결국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정식 훈련이 끝나고 몇 명 남지 않은 체육관의 구석에 요가 매트를 하나 깔아놓고 그 위에 엎드려 우시지마의 국어 노트를 베껴쓰고 있는 닝에게로 카와니시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몇 발짝 물러선 곳에서 쳐다보고만 있는 시라부에게로 눈을 흘긴 그가 닝의 옆에 앉았다. “누나.” “응? 타이치, 왜? 필요한 거 있어?” 상긋 웃어주는 닝에게 카와니시가 탈의실에서 가져온 노트를 펼쳐 보였다. 이게 말이죠 ... 로 시작하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줄줄이 읊는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은 닝이 고개를 들었다. 설마 모르겠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조바심이 난 카와니시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던 순간, 그는 곧 닝의 시선이 제게 향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라부는 저기 서서 구경만 할거래?” 웃음기 가득한 말에 카와니시도 고개를 돌렸다. 이미 옷을 다 갈아입고 가방까지 어깨에 맨 채로 벽에 붙어선 곳에서 저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시라부를 발견한 카와니시가 손짓을 했다. 닝이 저를 보며 웃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새빨갛게 물든 귀와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시라부가 닝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카와니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재수없기는. 하여간, 더럽게도 예민한 녀석이 자존심도 쎄다. 시라토리자와는 어째 자존심과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들만 오는건지. 물론, 그렇게 따지고보자면 저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닌지라 닝은 그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이왕 물어볼거면, 궁금한 거 한 번에 다 물어보는 편이 낫지 않겠어?” 닝이 비어있는 오른편 바닥을 손으로 두드렸다. 잠시 고민하듯 어물쩡거리던 시라부가 곧 반대편으로 넘어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자, 봐봐-“ 양 옆에 앉아 있는 두 후배를 위해 나긋하게 시작된 설명은 막힘없이 노트를 술술 채워나가는 풀이와 함께 계속되었다. 선생님보다도 이해가 더 잘 되도록 설명하는 모습에 카와니시는 내내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시작된 질문의 향연은 끝까지 남아있던 우시지마, 레온, 하야토가 정리까지 모두 마칠 때까지 이어졌고, 씻고 나온 우시지마가 마침내 “닝, 안 갈건가?” 하고 물어온 뒤에야 끝났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닝의 성적표를 팔랑팔랑 흔들어보이며 배구부원들에게 떠들어대는 텐도 탓에 닝의 성적이 전교권에서 논다는 이야기를 의도치 않게 들은 시라부는 하루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도 잘 자고 맨날 노는 것만 같던 닝도 결국 그렇게나 어려웠던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온 학생이라는 사실이 상기된 탓이었다. 그 이후, 닝을 향한 아주 소량의 동경심이 피어남과 함께 경계가 조금 ... 아주 조금 풀렸다. |
Keyword 6 희극 |
“세터는, 시라부.” 인터하이가 몇 주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본격적인 시즌으로 넘어가기 전 주전 멤버 발표를 하던 중이었다. 닝은 세미가 티는 안 내려 아무리 애써도 마음 한 켠으로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야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이미 예민하게 굴고 있던 시라부를 좋게만 보고 있지는 않던 세미의 속이 걱정되었다. 누구 하나 서로 미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리스트를 마저 읊어 나가는 감독의 목소리 외에는 체육관 안에 그 어떠한 소리도 감돌지 않았고, 시라부에게 축하한다고 작게 속삭이는 카와니시와 세미의 눈치를 보는 텐도 외에는 그 누구도 미동조차 않았다. 그 날의 훈련은 사이토 코치의 지시 하에 진행되었다. 둘의 사이가 그렇게 친근한 편은 아니지만, 누가봐도 우시지마에게 직접 공을 띄워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상기된 얼굴을 한 시라부가 세미를 힐끔 쳐다보는 눈길이 보였다. 그에 반해 세미의 얼굴은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딱, 평소와 같았다. 세터 둘을 넣은 로테이션을 고려할 수도, 어쩌면 핀치 서버로 경기에 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봤다 주전의 꿈은 사라진 채였다. 닝은 코치가 적으라는 내용을 받아 적는 내내 씁쓸한 기분을 지워낼 수 없었다. 현재 시라토리자와 팀의 최대 강점은 우시지마 와카토시.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님에도 이 팀의 감정은 그것이었다. 또한, 기본 전국 8강에는 들어가는 강호임에도 우승은 거머쥐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에이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기 또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잘 나간다는 사실은 당연히 좋았지만, 그를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경기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매니저의 입장으로서는 서글퍼지는 속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얘기 좀 할까?" 닝이 말갛게 웃어보였다. 탈의실을 나서던 세미가 손으로 가방끈을 매만졌다. 잠시간 시라부와 다른 부워 몇 명이 남아있는 코트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의 뒤를 따라 나오던 우시지마를 발견한 닝이 눈을 잔뜩 접어보였다. “내일 봐, 와카!”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부빈 닝이 예쁜 미소를 지어주고는 세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기 위해 움직이던 우시지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왜 나와 같이 안 가는거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음표로 가득찬 시선이 벌써 비어버린 공간만을 눈에 담았다. 잠시 굳어있던 우시지마는 씻고 나온 텐도가 뭘 하는거냐 묻는 순간에야 다시 움직였다.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엥?! 방금 씻고 나왔잖아?” "안다." 그대로 다시 탈의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텐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봄다운 날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런 날. 드넓은 운동장을 바라보는 계단에 자리를 잡으니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 좋은 미소가 자연스레 피어났다. 다리를 쭉 뻗으며 등을 바로 윗계단에 편히 기대 앉은 닝이 제 옆에 앉은 세미를 힐끔 쳐다봤다. 딱히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공표한 것도 아닌데, 이미 대화의 주제를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생각에 잠긴 채였다. 방해 말고 조용히 앉아만 있어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닝이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세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형편없어서 주전이 안된 건 아니야. 그건 알아둬.” 그녀의 말에 세미가 헛웃음을 흘렸다. “알아. 왜 주전에서 밀려난건지.” 분명 이유를 물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닝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물론 모르는 편이 더 이상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유를 안다니 ... 주전이 발표되는 순간에조차 그가 꽤나 침착해보이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 되었다. "시라부는 최대한 빛을 안 받으려 하잖아. 그에 반해 나는 ... 빛을 받으려 애쓰는 거 알고 있어. 그렇다 해서 자존심 굽히고 들어갈 생각도 없어서, 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찾아온 정적 새로는 바람에 흔들려 나부끼는 나뭇잎과 바닥에서 잔뜩 흐트러지는 꽃잎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검게 물든 하늘을 밝히고 있는 달을 가만 올려다 보던 닝이 먼저 고요를 깨었다. “그래, 너는 그만큼 스스로도 빛날 수 있는 사람인거니까. 기회가 올 때마다 뽐내면 되지. 솔직히 핀치 서브로도 코트에 자주 올라갈 것 같아-“ “그랬으면 좋겠네.” "에이타는 올라운더니까."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을 눈에 담은 세미가 기분좋게 웃었다. 한 발짝이라도 물러난 곳에서 보면, 이렇게나 희극이었다. * 다음 날, 세미는 닝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쥐여주었다. 근래 들어서는 음식을 사주는 일은 없었기에 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뭐야, 뇌물이야?" "그래, 친구비다." • 대화 : 카와니시 & 닝 - 누나, 도와줄까요? - 응? 음- 나보다는 하야토를 도와주는 게 어때? - 네? (고개를 돌리자 세미와 시라부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는 하야토가 보였다.) - 우리 리베로 없어지면 안돼. - ... - 가서 구해.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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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지마는 애초부터 표현에 미숙한 인간이었다. 여태껏 그런 행동의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으니,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둘의 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닝이 먼저 다가가는 편이었다. 먼저 손을 끌어다 잡고, 안아달라 말 하고, 쪽쪽 얼굴에 뽀뽀를 해대고. 그렇다고 그녀는 지치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일일 뿐이었기에, 지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미 그가 어떤 성정을 가진 인물인지 알고도 좋아하게 된 것이었고, 저가 다가가면 두 발짝 다가올지언정 멀어지지는 않는 관계라는 사실도 알기에 ...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표현을 잘 하는 닝은 우시지마에게만 후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미는 말할 것도 없고, 텐도와도 쿵짝이 잘 맞을 때면 모두의 정신을 헤집어 놓는 장난을 이리저리 해대고 레온과 하야토와도 잘만 붙어 다녔다. 그녀는 저 좋은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퍼주었다. 그런 모습을 이미 1년 간 봐온 우시지마도 딱히 의식하는 일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문제는 어느 날부턴가 그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와의 관계가? 다름아닌 한 살 어린 후배, 카와니시 타이치와의 관계가. 닝은 세미와 한없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 가벼운 터치만이 오갔다. 반면에 카와니시의 경우에는 닝이 한없이 예뻐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예뻐하는 만큼 손이 자주 올라갔다. 머리를 헝클고, 볼을 툭툭 건드리고, 잘 한다고 웃어주고. 그 모습이 왜 눈에 거슬리는 알지 못했다. 그 작은 행동들이 왜 그렇게도 제 심기를 긁어대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저렇게나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편했을 뿐. 그럼에도 그는 이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행복해보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저보다 한참 작은 닝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주며 고마워요- 하고 걸음을 옮기는 카와니시를 우시지마가 지그시 쳐다보았다. 왜 거슬리는 지는 모르겠다. 왜 기분이 나쁜지도 모르겠다. 왜 내 영역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흐음- 닝쨩이랑 타이치랑 참 친한 것 같아- 안 그래, 와카토시군?" "그렇다." 모르는 것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일 뿐, 그 이상의 의문을 꺼내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묻어놓을 생각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왜 거슬리는 지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 순간, 텐도가 불편한 구석을 잔뜩 헤집어놓는 말을 툭 내뱉었다. "후배님들 사이에서는 닝쨩이 와카토시군이 아니라 타이치를 더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 정도라니까-?" 침묵이 흘렀다. 우시지마의 시선은 여전히 저와 만나기로 했던 체육관 뒷편으로 걸음을 옮기는 닝에게 고정 되어 있었다. 흥미롭다는 얼굴로 글르 힐끔 쳐다본 텐도가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떠났다. 먼저 가보겠다는 말에도 답을 건네지 않은 우시지마는 그 자리에 정승처럼 가만 서 있었다. 그녀가 부를때까지. "와카!" 뒤늦게 그의 존재를 눈치챈 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그에게 다가섰다. 허리를 굽힌 우시지마가 그 품에 안겼다.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었어?" 제 물음에는 답을 않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오는 우시지마의 행동이 의아했지만, 닝은 별다른 말을 하는 대신 웃음을 흘렸다. 분명 제가 안겠답시고 팔을 벌렸음에도 안긴 꼴이 된 것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제 몸을 감싸는 두 팔도 마냥 좋았다. 그의 거친 머릿결에 손을 엮으며 기분좋게 웃던 그녀가 갑자기 제 품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사나운 눈매와는 달리 유순한 눈빛이 어째 시무룩해보였다. 물론 그럴리가 없지만. “닝.” "응?" "카와니시를 좋아하는건가?" 한없이 하늘로 치솟던 그녀의 입꼬리가 그대로 추락했다. 당황한 닝이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제가 이해한 의미로 물어보는걸까? "타이치는 ... 내가 예뻐하지?" 여전히 표정에 변화라곤 일체 없는 모습을 지켜보던 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나보다 카와니시를 더 좋아한다는 소문이 돈다더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닝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토리 짓이네. 벌써 가닥이 잡혀오는 이야기를 곱씹어보던 그녀가 결국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마주한 닝이 다정하게도 웃어보였다. “사토리가 하는 말을 다 믿으면 어떡해-.” 그녀가 손을 뻗어 우시지마의 볼을 살살 쓸었다. 대꾸 없이 작은 손에 얼굴을 기댄 그가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는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다 하지 않나?" "뭘?" "내게 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지 않나?" 닝이 우시지마의 눈을 마주했다. 올곧은 시선을 보고 있자니 진심이 분명한데 ... 물론 그는 입밖으로 내뱉는 모든 말들이 진심이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걸까 고민하던 그녀가 곧 해답을 찾곤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저는 자각도 못한 순간에 후배 예쁘다고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했나보다, 제 무던한 연인이 불편해할 정도면. "질투하는구나?" "질투?" 생전 처음 입에 담아보는 단어인 양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항상 표정 없던 얼굴이 작게나마 구겨지는 모습에 닝이 배시시 웃어버렸다. 누군가 귀여워 보이는 순간 깊이 빠져든거라는데 ... 위험신호가 깜빡였다. "타이치는 아끼는 동생이잖아. 뽀뽀는 와카랑만 하는 걸?" "그런가." "응!" 인상은 풀렸지만, 여전히 제 손에서 살짝 떨어져나가는 얼굴을 눈으로 따르며 닝은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는 내가 조심할게. 그럼 괜찮지?" "응." 그 이상의 말 없이 잘난 얼굴 구경하던 닝이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까치발을 들었다. "와카, 나 뽀뽀해줘." 특별날 것 없는 여름 날의 특별할 것 없이 익숙한 말. 지금까지 셀 수 없이 한 말임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랐다.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는 짚어낼 수 없었지만, 기분 나쁜 차이는 아니었다. 대꾸 없이 고분고분 닝의 부탁을 따라 고개를 숙인 그가 입술을 맞댔다. 평소처럼 짧게 떨어질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볼을 감싸는 거친 질감의 큰 손 하며, 옅게 빨아들이는 입술 하며, 모두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행동들이 아니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았다. 살갗을 뚫고 튀어나올 기세로 쿵쿵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라며 한 손으로 그의 셔츠를 잡은 닝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깨져버릴까 걱정스러운듯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싼 손과는 달리 그의 혀가 투박하게 틈을 벌렸다. 자연스레 입술이 더 벌어진 그녀가 자각조차 하지 못한채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조금 거칠게 파고들던 우시지마가 그 소리에 겨우 떨어져 나갔다. 배구를 할 때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마주한 닝이 옅게 부어오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좋아해, 와카." 사랑스럽게도 웃으며 저를 살짝 잡아 내리는 손길에 우시지마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
Keyword 8 소나기 |
코 앞까지 다가온 경기 날짜에 인터하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다들 하루에 세 번씩 체육관에 나오고, 잠들기 직전까지 체육관에 남아있었지만, 그 중 단연코 모든 시간을 부활동에 쏟아붓는 인물은 시라부였다. 1학년 유일 주전으로 선발이 된 이후 악으로 깡으로 연습을 하고는 있었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도 왜 세미 대신 세터로 선발되었는 지는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탓이었다. 어쩌면 너무나 객관적인 탓일 수도 있겠다. 연습을 하는 선배들을 옆에서 볼 때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상념들을 결코 지워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토스를 올려주고 싶던 선배와 같은 순간에, 같은 코트에, 같은 팀으로서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고민또한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력보다는 전략 덕에 손꼽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나 힘겨웠다. * 닝은 주전이고, 친분이고 하는 사사로운 것들을 떠나 모든 부원들의 컨디션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페이스가 들쑥날쑥한 사람은 없었지만, 연습경기에서의 실수 하나가 곧 부상으로 이어쥘 수 있는 것이 스포츠였다. 그리고 부상은 곧 선수 생활의 끝이었다. 그렇게 유심히 한 사람 한 사람 살피다보면 코트 위에서도, 밖에서도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시라부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더 이상 그에게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주전으로 꼽히는 것은 단순히 감독의 비위에 잘 맞춰주는 플레이를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실력이 되니까 주전으로 뽑히는 것이고, 실력이 되니까 스타일도 바꿀 수 있는 법이었다. 애초부터 하고 싶다고 다 된다면, 제가 체육에서 80을 맞는 일 따위 없었을거다. 아무리 제 직책이 매니저라 하여도 타의가 아닌 자의로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시라부에게 무어라 간섭할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시라토리자와의 배구부에 들어오고 싶어 추천장 대신 일반 전형으로 들어올 정도로 근성 있는 존재에게 쓸데없는 간섭 따위는 오히려 그를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말에 불과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순히 오버워크만은 피하도록 시라부를 늦지 않은 시간에 체육관 밖으로 쫓아내는 일 뿐이었다. "우시지마 상-!" 짧다. 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스파이크를 위해 올라갔던 왼손 대신 우시지마의 오른손이 네트 너머로 공을 가볍게 넘겼다. 그녀가 눈을 데굴 굴려 감독의 얼굴을 살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녀는 수많은 말을 하는 대신에 부실로 걸음을 옮겼다. 고작 연습 경기에 불과했지만, 고작 연습 경기가 본 경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더 큰 문제는, 다행히도라는 단어 따위는 감독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저가 아무리 날뛰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현실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슴이 찢어지도록 두 눈으로 목격해온 닝은 주섬주섬 면봉과 연고를 챙겼다. 아이스 팩을 냉동실에서 꺼낸 그녀가 얼음 물을 여유분으로 남아있던 물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은 뒤, 창 밖의 맑은 하늘을 내다보았다. 후덥지근한 날을 식히는 바람이 열린 창문을 가로질러 가볍게 불어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부엌 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해서는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에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물건들을 챙겨 부엌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바닥만을 내려다보며 벤치에 앉아 있는 시라부가 보였다. 고개를 돌려 코트를 돌아보면 그를 대신하여 세터로서 레온에게 공을 토스하는 세미가 보였다. 실수란 이런 것이었다. 잘못이 아닌 실수기에 교체는 될 지언정, 주전이 바뀌지는 않았다. "시라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제 손에 들린 물건들을 보곤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 먀냥 구겨지는 얼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닝은 탈의실 방향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따라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던 시라부는 살짝 높이를 달리하는 그녀의 눈썹을 마주한 뒤 몸을 일으켰다. 시라부는 자리를 벗어남에도 아무 말 않는 감독에 의아함을 느끼며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앉아. 이거 볼에 대고 있고." 설마했지만, 정말 두 뺨 모두 붉어져 있는 얼굴에 닝의 인상이 구겨졌다. 졸업 선물로 배구공을 감독의 얼굴에 던져버리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다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우시지마에게 시키고 싶었지만, 살인 미수라도 될까 두려워 제가 하기로 결심했다. 운동 못 하는 나한테 맞으면 자존심이 저 나락으로 추락하겠지. 그리 중얼거리며 손수건으로 감싸진 아이스 팩 두 개를 건네자 시라부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선배 아니었으면 욕 했겠다?" 찔리기라도 했는지 곧바로 아이스 팩을 받아들고 두 볼에 갖다 대는 모습에 닝은 웃음을 삼켰다. 예민한 후배의 작은 얼굴이 파란색 아이스 팩 두 개 사이에 껴 있는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다. "감독님이 참 너무하지." "아뇨. 그럴만 했습니다." 그의 대답이 놀랍지는 않았다. 시라부에게 가장 엄격하게 구는 인물은 감독이 아닌 본인이었으니까. 닝이 팔짱을 낀 채로 혀를 찼다. "그럴만하지 않아. 실수는 모두가 해. 최강의 무기 취급 받는 와카도 실수를 하는데, 누구는 안 하겠니?" "우시지마 상이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듯한 목소리에 닝이 웃음을 흘렸다. 우시지마를 어지간히도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나보다. 뭐, 코트 위의 그를 보고도 안 반하고 배길 사람이 있나 싶지만. “작년에 크게 실수했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회상에 닝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올해도, 뭐, 자율 연습 때라서 아무도 눈치 못 챘을 뿐이고.” 시라부의 미심쩍다는 얼굴에 닝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믿으면 좋고, 안 믿어도 좋고. 그녀의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닝이 맞은편의 벤치에 앉아 시라부의 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의도는 알지도 못하면서 눈치나 보며 앉아있던건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시라부가 아이스팩을 닝에게 돌려주었다. 곧장 문으로 향하려는 시라부를 잡아세운 닝이 얼굴을 굳히며 벤치를 가리켰다.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싸늘한 얼굴에 몸을 움찔 떤 시라부가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이리저리 그의 고개를 돌려가며 얼굴을 살핀 그녀가 살갗이 거칠어진 왼뺨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말없이 연고의 뚜껑을 닫고, 면봉을 버린 닝이 다시 맞은편의 벤치에 몸을 앉혔다.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내리꽂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있는 시라부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라부는 스스로한테 너무 엄격한 것 같아. 물론 어느 정도의 자기관리는 좋지만, 지금의 너는 너무 과한게 아닐까 싶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닝이 마저 말을 이었다. "얼마나 스스로에게 가차없이 구는 지, 내 눈에는 때때로 어떻게 보이는 지 알아?" 시라부가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선배를 올려다봤다. "내 눈에는, 네가 네 자신을 어지간히도 못 믿고 있는구나-로 밖에는 안 보여." 인상을 구긴 시라부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세미 상보다 부족합니다. 물론 제가 왜 주전으로 뽑혔는지는 알고 있어요. 부족하니까, 더 노력하는 겁니다." "그만큼 자신을 안 믿잖아?" "부족한 걸 아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산산조각이 나 깨어진 유릿조각들처럼 날카로운 어투였지만, 닝의 눈빛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힘들었겠지. 고작 고등학생이다. 나도, 와카도, 에이타도, 시라부도, 모두 고작해야 고등학생이다. 법이 공식적으로 미성숙하다고 규정내린 나이일 뿐이다. 결국엔 딱 그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잘난 우시지마가 있는 탓일까, 아니면 그저 이 학교의 특성인걸까. 자기 객관화가 잔인할 정도로 분명한 주제에 남 탓은 조금도 않는 성정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착할 수가 있나 싶었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와시죠 감독의 탓도 어느정도 있기도 하겠지만은. "그래도 코트 위에서는 너 스스로를 믿어야지. 그 순간에 공을 띄우는 컨트롤을 쥐고 있는 네가 최고라고 믿어야 해. 너마저도 네 자신을 믿지 않으면 에이스가 어떻게 너를 믿을 수 있겠어." 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와카는 너를 믿고 있어. 이미 1년 간 함께 한 에이타만큼이나 너를 믿어. 토스를 받을 때 뛰는 모습을 보면 알아." 그녀가 다정히 웃어보였다. "와카가 너를 믿는만큼 너는 믿음직한거야. 너무 자책하지 마. 너 안 부족해." 시라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어떠한 소리도 흘리지 않는 후배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닝이 연고를 주머니에 넣고, 아이스 팩 두개를 한 손에 쥔 채로 시라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에이타도 너를 미워하지 않아. 원망하지도 않고. 노력은 좋지만, 혹사는 하지 말자. 알았지?" "... 네." "이제 나갈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눈에 담은 닝은 굳이 그를 기다려주지 않은 채 탈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부엌에 도착할 때까지도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내 크기를 키워내던 검은 먹구름에서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굳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구경하며 감탄을 할 필요도, 의아하게 여길 이유도 없었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자연스레 그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한차례 비가 땅을 쓸고 지나가면,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니까. 그러면 나는 그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어주면 되는거다. 비가 내린 적이 있기에 하늘이 이렇게나 맑은 것이라 웃으며 이야기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을 당연시 여겨주는 방법이었다. * "켄지로." "네." "좋은 하루야." 비대칭 앞머리의 삐딱하고 예민한 후배가 미소를 머금었다. |
Keyword 9 폭풍 |
그 해의 첫 경기였다. 2,3 학년은 전혀 긴장을 안 한 채였지만, 1학년은 잔뜩 굳은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1학년 주전이 된 시라부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닝이 조금이라도 달래줄까 싶어 등을 토닥였지만, 싸늘한 얼굴로 저를 돌아보는 바람에 그대로 물러났다. 저러다 실수라도 하면 그대로 벽에 이마를 쾅쾅 박아댈까 걱정되었다. 오늘의 상대는 놀랍게도 아오바죠사이 고교. 분명한 강호임에도 인터하이 예선에서 맞붙게 됐다는 소식에 모두 적잖게 놀랐었다. 그 팀은 세터를 중심으로 도는 플레이를 하는데, 팀워크가 유별나다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들었었다. 물론 그 누구도 질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긴장과 패배의 예상은 별개의 문제였다. 음 ... 시라부의 경우에는 다른 이야기였지만, 잘난 세터로 유명한 고등학교와 1학년 주전 세터로서 맞붙는 경기가 긴장 안 될리도 없었다. 타올들을 벤치 한 켠에 정리한 뒤 아이스 박스 안에 드링크 통을 깔끔하게 정리한 닝이 카와니시와 시라부에게 긴장하지 말라 다독였다. 그렇게 무덤덤한 척 해봤자 첫 공식 경기에서 긴장하는 것은 본능이었다.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상대 팀의 빈 코트를 가만 쳐다보던 닝이 폴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풀고 있던 부원들에게 해맑게 웃어준 닝이 견학 온 초등학생 마냥 팔랑팔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작년에는 그저 짝사랑하는 친구로서 바라봤다면, 이제는 연인으로서 경기를 구경한 뒤에 우시지마에게 칭찬의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상기된 채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닝이 가벼운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시계로 그녀는 시선을 올렸다. 이런, 빨리 가야겠네.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린 닝이 다급하게 움직이려던 순간 쿵-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래, 꼭 급하면 사건이 하나씩 나더라.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닝이 손을 탁탁 털었다. 일어나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던 찰나 눈 앞에 뻗어진 손을 발견한 닝은 고개를 들어 앞의 두 남자를 올려다봤다. 큰 손을 붙잡고 일어난 그녀가 손으로 바지를 툭툭 털며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급하게 가다가 부딪혔네요." "괜찮아요! 근데- 시라토리자와 학생?" 두 사람 중 꽃미남 스타일에 가까운 갈색머리 남자가 살랑살랑 웃으며 하는 말에 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 한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특히나 상대 팀이 도착한 후에 모습을 보인다면, 감독이 무슨 히스테리를 부릴 지 모르는 일이었다. 닝은 어색하게 웃으며 두 남자를 올려다봤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급하게 가봐야 해서 말이죠. 죄송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허리까지 꾸벅 굽혀가며 인사를 한 닝이 엄청난 속도로 체육관으로 뛰었다. 와시죠 감독에게 단 한 번도 - 체벌 문제로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 한 소리 들어본 적 없던 그녀는 굳이 오늘같은 날, 예쁜 후배들 공식 경기 데뷔하는 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경기를 구경하는 날, 그 기록을 깨고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상쾌한 마음으로 구경하고 상쾌하게 돌아가고 싶단 말이지. "또 준비할 건 없나요?" "빠르게 타올이랑 드링크 받을 수 있게 정리만 해라." 형식 상 입꼬리를 올려가며 물었지만, 물론 세팅은 모두 해놓은 뒤였다. 입꼬리를 불편하게 꿈틀거린 닝이 굳이 따지고 들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돌렸다. 타올도 집어가기 쉽게 말아놓고, 드링크 통에 붙은 이름표 잘 보이게 돌려놓기까지 했는데, 뭘 더 하라는 건지. 눈을 굴린 닝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제 얼굴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와니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내저었다. 그 옆의 텐도가 키득거리는 꼴에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찌른 닝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 순간, 환호성이 터지는 관객석에 닝이 얼굴을 쭉 빼며 시끄러운 함성소리의 이유를 찾았다. 어? 아까 부딪힌 사람들이네. 다급하게 온 탓에 옷조차 살피지 못 해 상대 팀이라는 것도 눈치 못 챘었다니. 아까 손을 내밀어준 잘생긴 인물이 관객석에 밝게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이다 뾰족 머리의 남자에게 등을 맞았다. 풉. 헛웃음을 흘린 닝이 옆에 다가선 인영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도와주세요." 딱딱한 목소리와 굳은 얼굴과는 달리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이프를 내미는 시라부를 올려다 본 닝이 기분좋은 웃음을 흘렸다. 경기에 들어가면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잘 할 녀석이 별 꼴이다. 그의 첫 공식 경기이기에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면이라 여긴 닝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프를 받아들었다. * 2:0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역시나 강호답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깔끔한 승리였다. 와시죠 감독이 별 말 없이 돌아설 정도로 깔끔한 승리. 시라부도 실수랄 것 하나 없이 첫 공식 경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덕에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 인터하이 예선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작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배구부를 향한 애정이 한 층 더 깊어진 탓인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복감에 닝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할 듯 올라갔다. 햇살을 닮은 웃음을 지어보인 그녀가 박수까지 쳐주며 말했다. "다들 너무 잘했다! 축하해!" "너도 우리 팀이야." 레온의 말에 닝이 또 헤벌레 웃었다. 평소에는 웃지도 않는 편인데, 유독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웃음이 헤퍼졌다. "그렇네!" 그렇게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한 사람 한 사람 잘한 점 읊어가며 드링크도 리필해주고 차근차근 정리를 해주던 닝이 마침내 우시지마 앞에 멈춰섰다. 기대하는 낯빛을 한 그는 저가 정리하고 있는 가방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땀을 닦으며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소리 내어 웃어버린 그녀가 빨랫감을 넣을 가방을 열다 말고 두 팔을 벌렸다. 그녀를 곧 바로 품 안으로 끌어당긴 우시지마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체향인 양 풍겨오는 섬유유연제 향을 가득 들이마셨다. "우리 에이스 최고다, 너무 멋있어." 평소 땀 냄새라면 질색하는 주제에 누가 보든 말든 그의 머리까지 손으로 잔뜩 헝클인 닝이 화룡점정으로 볼에 입을 맞춰주곤 꿈틀거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곤 헤실헤실 웃으며 잔뜩 끼부린 닝이 타올을 마저 걷어 정리했다. "아까 자율연습이라던데, 제가 아이스크림 쏠까요?" "넌 뭘 그렇게 자꾸 사려고 하냐?" 어깨에 스포츠 크로스백을 진 닝이 세미를 돌아봤다. "돈 쓸 일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간식 사주려고. 그러니까, 첫 경기 기념 아이스크림 어때요?" 아쉬울 것 없다며 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되려 본인이 더 행복하다는 듯 웃어보이는 닝을 시라부와 카와니시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 코치와 함께 버스로 짐을 옮긴 닝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화장실도 들르고 탈의실 안에 두고 온 빨랫감 담는 가방을 대신 들어줄 생각으로 발을 들인 것이었건만, 급하게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온 후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중요한 한 마디를 해보자면, 길치다. 타고나길 길치여서 지금껏 길을 잃어버린 횟수를 손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되돌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핸드폰도 안 챙겨왔는데, 망할 생리현상 때문에 화장실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맴돈 덕에 현재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왜 방금 경기를 끝냈는데 아무도 안 지나다니는거지? 누구라도 보인다면 도움이라도 청할텐데 놀랍게도 개미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닝이 대충 감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커다란 건물임은 맞았지만, 그렇게 복잡한 구조는 아니었다. ... 정정하겠다. 그렇게까지 복잡하지 않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타이치가 “갈림길이 많네요.” 라고 말했을 때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물론 이제와서 후회한다고 길이 나오지는 않았다. "쿠소카와,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거야?" "너도 딱히 할 말은 ... 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복도 끝에서 모서리를 돌아 오는 커다란 인영들과 함께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닝이 시선을 돌렸다. 그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으며 눈살까지 찌푸려가며 누구인가 살피니 일전에 보았던 얼굴들이 잔뜩 보였다. 불과 몇십분 전 경기를 치뤘던 아오바죠사이 팀. 상대 팀이 저 곳을 돌았다면, 저도 그 길을 따르다보면 결국 시라토리자와에게 배정도니 탈의실도 금방 발견할 수 있겠지.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닝이 하얀색과 민트색 조합의 져지를 입은 이들에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묵례를 꾸벅 했다. 배구부는 잘생긴 애들만 하나 봐. 그런 생각 따위나 하면서. 그렇게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던 중 복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꽃미남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린 한 마디였다. 오이카와 ... 였나?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네.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전형적인 이케맨처럼 생긴 얼굴을 올려다보던 닝이 조금 전처럼 가볍게 묵례를 했다. 가끔 배구부를 얼굴로 뽑나 싶어질 때가 종종 있었는데, 아오바죠사이는 기정사실인가보다. 사실 학교마다 취향차이가 있을 뿐 잘생긴 애들만 쏙쏙 고르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만족스러운 결과들이 눈 앞에 보일리가 없다 여기며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시라토리자와 배구부 매니저를 가만 쳐다보던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갈림길에 이 곳은 혹시 미로가 아닌걸까 고민하던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닝이 고개를 돌렸다. "네?" "설마 우시지마랑 사귀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통성명도 안 한 초면인데 누가 저런 걸 물어봐? 몸을 완전히 오이카와 쪽으로 돌린 닝이 날이 선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미동도 없이 답을 기다리는 모습에 오른쪽 눈썹을 치켜 올린 그녀가 차갑게 되물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하세요?"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오이카와는 속으로 되뇌었다. 예 또는 아니오의 답변을 바랐을 뿐인데 이유를 되물으면 그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구구절절 떠들어대봤자 무표정하게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 그러나 꼭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 여자애한테 답을 얻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시지마 같은 여자네. 마음에 안 들어. 그리 생각하며 입만 달싹이던 찰나였다. 그의 시선이 닝의 머리 너머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을 반짝인 오이카와가 갑작스레 해사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지? 태양을 닮은 그의 함소에 풀어진 미간과는 달리 의문이 떠올랐다. 뭘 봤길래- 고개를 돌려보려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닝을 붙잡았다. "다른 이유는 없고, 너무 예쁘니까- 누구랑 사귀는 거 아니면 번호 물어보려고 했지-" 능청스럽게 말하는 오이카와가 더욱 예쁘게 웃으며, 상냥하게도 목소리를 낮췄다. 아까 보니까 여자팬들이 많은 것 같던데, 뻔하네. 눈을 가늘게 뜬 닝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갑자기 제게 이리 구는 그의 의도가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분명 우시지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에는 그의 목소리가 독에 잔뜩 배여 있었다. 그래놓고 이렇게까지 밝게 웃는 건 영 맥락에 안 맞지 않나? "그런 것 치곤 너무 다급하게 사람을 불러 세웠지 않았나요?" 빛을 반사하는 오이카와의 눈이 어째 형형했다. 조금, 나쁜 의미로. "너무 아름다워서, 잠깐 넋을 놓은 거 있죠?" 그의 얼굴에 두 개의 초승달이 떠올랐다. 잘생김의 범주를 떠나, 예뻤다. 그건 당연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빚좋은 개살구라는 말만이 떠올랐다. 구린 작업 멘트에 거짓임이 선연히 드러나는 사탕발림까지 하나하나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닝이 실소를 흘렸다. 난생 처음 길 가다 번호 따여보는데 - 물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 이게 뭐지? 마치 이용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정말 저가 그의 목적이라 한덜 상냥하게 대해 줄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지만. 황당함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느리게 일그러지는 얼굴의 분홍빛 입술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얼핏 들으면 함소였으나 명백한 조소였다. 눈치 빠른 우시지마가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 속을 잘 긁어댈리가 없어. 금이 가버린 자존심과는 달리 오이카와는 시야의 끝자락에 걸리는 인물을 위해 더욱 예쁘게 웃어보였다. * "선배가 온다고 했어?" "짐 같이 들어야 하니까 돌아온다고 했어." "음- 닝쨩이 한두 번 길을 잃은 게 아니라서 말이지-" "하루 이틀 일이냐." "근데 왜 안 말렸어요?" "닝은 말린다고 안 할 성격이 아니잖아." 그들의 대화의 주어는 분명 탈의실 앞에서 기다리겠다 이야기했었다. 짐이 한두개가 아닐 뿐더러 어차피 본인의 목적이 달성도리 때까지 우길 것이 분명해 그녀의 말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닝이 모습을 보이기를 기다린 것이 벌써 10분이 넘어갔다. 혹시 몰라 3학년 선배들은 먼저 버스로 향했으니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연락이 왔을텐데. 얘는 해리포터에나 나오는 비밀의 방을 현실에서 찾기라도 하는건지. 세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던 우시지마가 가방을 텐도에게 건넸다. "내가 데려오겠다. 먼저 가 있어라." "우시지마 상, 제가-!" "켄지로는 와카토시 가방을 들어주는 게 어때?" 레온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인 시라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우시지마의 가방을 어깨에 지었다. 가방끈이 조금 많이 길지 않냐 물으려던 텐도의 입을 틀어막은 세미가 앞장섰다. 서서히 사라지는 다른 이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우시지마는 그들이 사라진 곳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잃을때면 대충 이리저리 헤메다가 결국엔 감 따라서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돌아오는 지점이 결코 목적지는 아니지만 그 근처 어딘가에서 빙글빙글 돈다는 이야기도 모두 닝이 일전에 같이 점심을 먹으며 해주었었다. 그 전까지는 다들 그저 길치다- 정도만 알고 있었으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너라도 날 찾아오라 당부하던 그녀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찬란한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순간의 반짝이는 눈빛과 제 뺨을 간지럽히던 손길. 그 모든 것이 떠올라 그의 입꼬리가 조금 높이를 달리했다. 두어 번 모퉁이를 돌았다. 시선의 끝에 보이는 기다란 복도와 왼쪽으로 트인 갈림길에서 우시지마는 고민했다. 결정하지 못 한 채 갈림길에 도착한 순간, 그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시야에 들어오는 어디서도 알아볼 수 있는 작은 인영을 눈에 담으며 우시지마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느리게 내쉬었다. 제 연인을 부르려던 순간,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기다란 인영에 그의 손가락이 불편하게 구부러졌다. 얘기를 하는건가? 무슨 얘기를 하는거지? 어째서? 왜? 자꾸만 피어오르는 호기심 어린 의문들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닝은 대화에 끼어드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우시지마는 걸음을 늦췄다. 그녀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 터져나오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어금니가 꽉 다물렸다. 의식조차 하지 않은 순간, 우시지마의 손이 느리게 말려갔다. 주먹이 쥐어진 제 손을 내려다 본 그가 손을 뒤로 감췄다. 우시지마의 단순하지만, 최정상에서 하늘만을 바라보는 인생에 필요라는 단어는 모호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좋아한다 는 단어의 의미또한 모호했다. 알 수 없었다. 그저 배구를 해야만 내가 아직까지도 누군가를 잘 기억하고 있으며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고 공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저 그녀에게 더 닿고 싶다는 욕심이 제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배구는 그 뒤의 의미를 다 차치하고도 좋아하는 것이 되었고, 내 눈앞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저 존재는 좋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둘은 그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동시에 품은 대상이었다. 우시지마의 단순하지만, 선이 분명한 세상에 제 영역으로 인식되는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 또는 존재였다. 특별했다. 제게 특별한 만큼 저 또한 두 대상에게 특별했다. 그래서 손꼽히는 에이스인 것이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일컫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대상이 제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감정들로만 속이 가득해진 적이 있었는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하지만, 새까만 덩어리가 제 속에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불편한 장면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둘은 대화 중이었다. 저가 한 없이 탐하고 싶은 존재와 저를 알 수 없는 이유로 혐오하는 존재가 대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웃고 있는 제 연인이 불편하다 한들, 끼어들 수는 없었다. 분명, 저 아이가 싫다고 했었으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속이 불편해도, 단단한 바위로 일컫어지던 제 속이 바다에 침식되어도 몇 발짝 뒤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가 닝의 손을 잡았다. 느리게 올라간 손등에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곤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째서?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닝의 그 어디에도 입을 맞추는 행위 따위 할 수 없었다. 제 영역이었다. 우시지마의 냉랭한 눈빛과 오이카와의 독을 품은 맑은 눈빛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깊은 바다 속의 용암이 끓어올랐다. * "저, 우시지마랑 사귀는 거 맞아요." 짧게 한숨을 내쉰 닝이 마침내 답했다. 뭐라고 하고 가야되지?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맹수의 눈빛을 보니 저를 곱게 놓아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말을 고르느라 입만 달싹일 쯤 오이카와가 생글 웃어주었다.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조심해서 가요." 예쁘게도 웃는 오이카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잠시, 갑작스레 제 오른손을 잡아오는 큰 손에 닝의 미간이 구겨졌다. 중세시대의 귀족들이나 하듯 손등에 입을 맞추곤 다시 한 번 웃어주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꼴을 눈으로 따르던 그녀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상한 인간이네. 근데 왜 그렇게 여자애들이 좋아라 하지? 제 손등을 내려다본 닝이 눈을 굴리며 져지 앞에 손을 대충 닦아내었다. 하여간,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은 더럽게 어렵다. 아무튼, 저 사람이 저쪽으로 갔으니까 - 닝이 고개를 들어 갈색 머리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다 몸을 빙글 돌렸다 - 난 이쪽으로 가면!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미묘했던 그녀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와카!" 저번에 혹시나 해서 한 마디 해놓았을 뿐인데 저를 찾으러 와줬다는 안도감과 고마움에 닝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상긋 웃는 얼굴로 달려간 그녀가 두 팔로 우시지마의 허리를 감았다. 역시나 방금 씻고 나온 덕에 상쾌한 향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저를 익숙하게 감싸야 할 온기가 부재했다. 여전히 우시지마가 저를 찾으러 와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닝은 채근을 하는 대신 눈을 아기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저런 얼굴을 하지?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닝의 얼굴을 가득 채웠던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원체 표정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만큼이나 기분을 읽어내기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정확히 무어라 짚어내기 어려웠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과 구겨진 미간은 불쾌함이 가득했으나 혼란이 가득 담긴 눈은 어지럽게 제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걸어오지 않고 서 있었구나. 왜 기다리고만 있었지? 문득 떠오르는 의구심과 함께 닝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왜 그래? 괜찮아?" 손을 뻗어도 그의 뺨에 닿지 않았다. 닝이 그의 등을 짚은 왼손으로 져지를 잡아당겼다. 이리저리 자리를 잡지 못 하던 시선이 마침내 한 곳에 멈춰섰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그녀가 기분좋은 웃음을 흘리며 그의 볼을 쓸어내렸다. 오른손. 그 사실을 깨달은 우시지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단 한 번도 구김없던 얼굴이 순식간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찬 모습에 당황한 닝이 입을 열 찰나조차 주지 않은 그가 두꺼운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한참 굽혀진 그의 고개가 목적지를 찾았다. 우시지마는 잔뜩 흐트러져 있는 머리칼에 코를 박았다. 라벤더와 바닐라가 부드럽게 뒤섞인 향이 그의 후각을 가득 채웠다. "아-! 아파! 잠깐, 와카. 와카?"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건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강하게 허리를 감아오는 우시지마의 등을 닝이 다급하게 두드렸다. 몇 초 간 미동도 않던 그는 조금 느린 템포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당연히 힘 차이는 어마어마했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정말 곰처럼 안아온 적은 없었다. 닝이 우려가 가득 담긴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래? 나 많이 걱정했어? 다음부턴 핸드폰 들고 나와야겠다, 그치. 앞으로는 내 분신처럼 몸에 붙이고 다닐게." 일단,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부터 풀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서러움이 가득한 눈과 화가 새겨진 눈썹, 그리고 억울함에 살짝 처진 입꼬리까지. 이 얼굴을 가만 보고 있다가는 되려 저가 울어버릴 것만 같아 혼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닝은 그가 입을 달싹이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 해. 해도 돼." "왜 오이카와가 네 손에-" 우시지마가 처음으로 말을 마무리 하지 못 했다. 희미해진 말끝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의 한결같이 묵직하고 침착하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야 그저 세상엔 정말 별난 놈 다 있구나 치부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다 봤구나?" 미안함에 닝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하게 한걸까 싶어 미안했고, 미련하게 멀찍이 서 있기만 하던 그가 안쓰러운 동시에 귀여웠다. 그리고 애정이 더욱 빛나게 꽃을 피웠다. 나 정말 많이 좋아해주는구나? 그동안 저가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싶던 의구심을 지워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정적인 인간이니 당연한 것이라 여겼었고, 그런 모습까지 모두 좋아하니 딱히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표현 방식이 한참 침착했을 뿐, 마음의 크기의 차이에서 기반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에 닝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한편, 이미 초점이 흐려진 우시지마의 속은 이미 검고 깊은 바다로 뒤덮여버린 뒤였다.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니었나? 내가 본 게 일부일 뿐인가? 내게 해주지 않은 이야기들, 혹시 그것들 중 하나인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구심이라는 이름의 폭풍이 초면인 바다를 휩쓸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용암이 질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쓰나미가 몰려왔다. 불은 알겠다. 그럼 갑자기 떡하니 자리 잡은 이 바다는 무엇인가? 그 바다를 뒤엎는 폭풍은? 그 속을 이리저리 상처내고 있는 돌 덩어리들은? "와카."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오는 사랑해 마지않는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마침내 끊임없이 수를 늘려가던 갈고리를 닻으로 사용했다.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는 곳에 마침표가 찍혔다. 처음으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처음으로 그는 제 혼란스러운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패배감 이라는 세 음절에 거센 파도가 바위들을 으깼다. "와카." 져지를 잡아내리는 손길에 우시지마의 시선이 다시 그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이보다 더 거센 폭풍을 감당할 수 있는가? 새롭게 머릿속을 채우는 커다란 물음표에 우시지마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난 너를 좋아해." 그가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사랑해." 우시지마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나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사랑해. 그리고 난 네가 내 손을 놓기 전까지, 변하지 않을거야. 단언할 수 있어." "..." 일자로 다물린 입술을 손 끝으로 건드린 그녀가 눈이 휘어지도록 웃어보였다. "와카가 내 손을 놓는다 해도, 구질구질하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랑해." 거센 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무섭게도 소리치던 파도를 모두 거둬갔다. "하지만-" "응? 아- 아까 그 오이카, 어, 뭐였지? 아무튼 그 사람이 갑자기 너랑 사귀냐고 묻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왜 물어보는데요? 했더니, 뭐 누구랑 안 사귀면 번호를 물어본다느니, 아름다워서 넋을 어쩌구저쩌구 하는 거 있지? 내가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더라니까?" "... 응." 칠흑빛의 깊은 바다가 푸른색을 머금었다. "그래서 네, 저 우시지마랑 사귀어요. 했더니, 아 어쩔 수 없죠. 조심히 가세요- 하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는거야. 근데 갑자기 입을 맞추는거 있지! 그 사람 가자마자 져지에 닦았어. 돌아가면 바로 애들 연습복이랑 같이 세탁기에 넣어야겠어. 내일은 나 체육복 없으니까, 와카거 하나 빌려줘, 알았지?" "그래." 느리게 일렁이던 호수가 햇살 아래에서 고요히 반짝였다. |
Keyword 10 매력 |
아이스크림만 사오겠다며 우시지마를 끌고 편의점으로 향했던 닝이 들고 온 봉투 안에는 아이스크림 뿐만 아니라 과자가 한가득이었다. 식단조절이니 어쩌니 해봤자, 결국 위장이 큰 고등학생들을 위한 독단적인 선택이었다. 당연하게도 코치에게 아이스크림 허락은 받은 뒤였지만, 과자 허락은 받지 않은 채였기에 그녀는 과자가 담긴 봉투를 우시지마의 손에 쥐여주며 신신당부를 했다. "숨겨, 알았지? 코치님이랑 감독님 가면 꺼내는거야." 어린 동생을 가르치듯 몇 번이고 확인한 닝이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는 부원들이 훈련 대신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온데간데 없는 감독과 코치에 닝은 아이스크림을 한 구석에 붓고 우시지마의 손에 들려 있던 과자까지 바닥에 잔뜩 부어버렸다. 딱 우시지마와 제 몫을 봉투에 남긴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그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닝의 뒤로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 떼마냥 달려드는 선배들을 경멸과 충격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라부가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러신거죠?" 제 몫의 빠삐코를 뜯어주는 우시지마를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던 닝이 시라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편애 할 순 없잖아?" 시라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아이스크림을 치켜드는 텐도를 쳐다봤다. 도대체 남들이 저 모습을 보면 시라토리자와를 뭐라 생각할지 걱정됐다. "와카-" 벽에 기대 앉아 초코맛 빠삐코를 맛있게 먹고 있던 닝이 하드 아이스크림을 과자 씹어먹듯 먹고 있는 우시지마를 나긋하게 불렀다. 이 단단한 사람이, 그 어떠한 일에도 무너지기는 커녕 되려 더 단단해진 갑옷을 몸에 두른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사람이 고작 저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려버렸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도록 미안했지만, 심장 떨리도록 좋았다. 나 정말 많이 사랑받고 있구나. 너의 마음은 내가 어리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구나. 제 손과 엮여 있던 굳은살이 박힌, 굵직한 동시에 기다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듯 넝쿨마냥 말려들었다.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저를 돌아보는 얼굴이 왜 그렇게 귀여운 지, 닝은 벽을 쾅 내리칠 뻔한 충동을 겨우 지워냈다. "근데, 그 아까 오이카- 라는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 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찰나에 오이카와에게서 느껴졌던 악의, 타이치 때와는 달리 혼란과 충격으로 가중되었던 와카토시의 감정. 저가 느꼈던 그 기묘한 분위기를 서술할 만한 단어가 마땅치 않았다. 왜 그렇게나 많은 독이 품어져 있었을까? 왜 그 사람에게만 유독 예민하게 굴었을까? 왜? 어째서? 수많은 의문을 단 한 단어로 함축시킬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듯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입을 베어물곤 얌전히 우물거렸다. "음- 그, 사이가 안 좋은거야?" 그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잠시 말을 고르듯 틈 새로 흐르던 정적과는 달리 꽤나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하찮은 자존심을 부리는 사람이다." "자존심?" "자존심 때문에 이 곳으로 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오바죠사이 부원들의 시너지가 굉장했다. 개인적으로도 실력이 대단한 세터였지만, 과연 그가 시라토리자와에서 살아남았을까? 굳이 따져보자면 빛나고 싶어하는 세미와 비슷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세터로서 기량이 뛰어난 세미는 마찬가지로 실력이 좋지만, 그림자로 숨길 택한 시라부에게 주전 자리를 잃었다. 그런 '하찮은 자존심'을 부리는 사람이 이 곳에 온다 해서 지금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을 뽐낼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진실된 답을 그에게 내어줄 수 없던 닝은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네가 항상 이겨서 같은 학교로 안 왔다는거야?" "그렇다." 닝의 머릿속이 다시 어지러워졌다. 그렇다면 대면을 불편해 할 인물은 우시지마가 아니라 상대 아닌가? "그럼, 아까 왜 안 끼어들었어? 싫었으면 말 하지, 미련하게 서 있기만 하고." "네가 대화를 방해하는 것은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 ...구나? 했었네. 근데, 그 말이 그런 의미는 아니지 않나? 물론 우시지마가 알아듣기에는 무리인 말임은 분명했다. 제 의도가 어쨌던간에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알아듣는 사람인데, 부가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해서 딱히 제 탓이라 치부하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그런 말들까지 모두 하나하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내 말만큼은 한 마디 한 마디 다 들어주고 있던거구나.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닝의 입꼬리가 눈꼬리와 맞닿을 듯 올라갔다. "와카는 괜찮아. 아까처럼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마음대로 와도 돼. 알았지?" "알았다." 자꾸만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한 닝이 결국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왜 그러나?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에 귀여워서 라고 답하면,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큰일났다. 그의 모든 행동이 모조리 다 귀여워 보였다. * "이번 일요일에는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로드워크 말인가?" 평소 남들보다 3분은 기본적으로 빠른 우시지마의 기록을 떠올렸다. 일단 지구력과 체력이 어마어마한 인간이니 스피드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잔잔한 조깅 삼아 에이타와 일주일에 한 번 로드워크를 하던 내가- 그 쯤까지 생각이 가지를 뻗히자 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드워크 말고. 그냥, 산책. 데이트하듯이!" 우시지마가 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데이트?" "응! 그냥 산책이 떠올랐던 거긴 한데, 이 김에 밥도 먹고 오는 거 어때?" "좋다." "정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주말에 데이트 삼아 시내로 나갔던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바깥활동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었기에 이러나 저러나 다를 바가 없어 결국 쓸데없이 면적만 넓은 학교의 쓸모를 찾아보는 기회만 자주도 얻었었다. 그게 조금 아쉬워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학교 부근을 돌며 바람을 쐬는 일이었다.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진 닝은 옷을 고르며 웃음을 실실 흘렸다. 산책이라는 말을 저가 먼저 했으니 우시지마는 비싼 브랜드의 것이든, 학교 저지든 운동복을 입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다지 차려입지는 않기로 했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날씨에 맞게 얇은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닝이 머리를 반만 묶어 올렸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던 그녀는 기숙사 앞에서 마주친 제 연인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와카." "응." "누가 골라준거야?" "뭘 말인가?" "셔츠." 본인의 검은 셔츠를 내려다 본 우시지마가 이해가 안된다는 얼굴로 고분고분 답했다. "텐도." "사토리가 골라줬어?" "너와 데이트를 간다고 했더니, 운동복은 안된다고 했다." 닝이 벅찬 마음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안 꾸민 제 자신이 죽도록 미웠으나, 텐도가 오늘만큼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 물론 우시지마도. 그렇게나 즐겨보는 점프 주간지 한동안 꼬박꼬박 읽어서 맞장구 좀 열심히 쳐줘야겠어. 다음 달 점프도 다 사줘야지. "싫은가?"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친구인 배구 에이스가 올블랙을 입었다. 근데 상의로 입은 검정색 셔츠의 단추 두어 개를 푼 채로, 그 셔츠가 몸선을 다 드러낼 정도로 붙어 있는 모습을 싫어할 여자친구가 있을까? 있어도 너가 입은 건 아닐거야. 절대. 네버. 사토리에게 배구 생각이 없다면, 패션 쪽을 가보라 해야겠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괜찮나?" 여전히 말을 못 하고 있는 닝에게 다가선 우시지마가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네가 잘났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난 것 같아. 감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해사하게도 웃으며 말 했다. "앞으로는 사토리 말 잘 듣는 게 좋다고 생각해." 우시지마가 답을 않은 채 눈을 깜빡였다. "와카 너무 멋있다. 어떡하지? 난 하나도 안 꾸몄는데? 고작 산책하는데, 혼자 화보 찍고 있으면 어떡해? 물론 불평하는 건 아니야. 완전 좋아. 정말 좋아. 나 최고로 행복해." "너도 예쁘다." 마지막 타격을 입은 닝이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쳐박았다. 쓸데없이 근육질이다. 아니다, 쓸데없진 않아. 하지만 ... 닝이 우시지마의 허리 부근의 셔츠를 손에 쥐었다. 하. 새삼스럽게 좋다. 제 몸을 감싸오는 팔이 느껴졌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녀는 난생 처음 생각했다. 닝은 단 한 번도 제 작은 키에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늘까지는. 현재 최선을 다해 셔츠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신경쓰고 있지 않는 중인데, 제 키가 더 커서 풀린 단추를 계속 쳐다보게 되었다면, 더더욱 어려웠을 거다. 이미 밥 먹는 내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른 채 대충 숟가락을 휘적거리는 바람에 그 놈의 하이라이스를 유치원생 밥 먹여주듯 그가 손수 입에 넣어주어야만 했었다. 오늘 잠 자긴 글렀다.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채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떠들어대던 닝은 우시지마의 손을 쥔 채 그가 걷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텐도같은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나 달가울 수 없었다. 물론, 텐도에게 매우 고마우니 한달 간 철저한 물주가 되어줄 생각은 여전했다. 야옹- 어지러운 정신을 깨워주는 앙증맞은 소리에 닝이 의식의 흐름대로 - 물론 진정한 무의식은 공개하지 않은 채 - 떠들던 입을 꾹 다물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화단의 울타리 사이로 몸을 빼꼼 내밀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성묘보다는 확연히 작으나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기도 아닌 크기의 자그마한 녀석은 경계심도 없는 지 저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타이치가 이 주변을 맴도는 고양이를 몇 마리 봤다더니 그 애들 중 하나인듯 싶었다. "와카, 내가 얼른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올게. 고양이 어디 안 가게 봐줘, 알았지?" 닝에게로 시선을 내린 우시지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만 있으면 되나?" "어? 어, 그렇지. 어디 안 가는 지 봐줘, 야옹이 먹을 거 얼른 사올게!" 우시지마에게 답을 할 틈조차 주지 않은 닝이 순식간에 시야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쪽을 가만 바라보던 그가 비워진 제 손을 만지작거리다 시선을 내렸다. 보고 있으라고 했는데. 저를 올려다보는 삼색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자, 제 손만한 동물이 조심조심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몇 걸음 물러서는 고양이의 모습에 우시지마가 느릿하게 몸을 낮췄다. 불편하게 쭈그려 앉은 우시지마는 잠시 고민하듯 삼색 고양이를 눈으로 살폈다. 어디 안 가는 지 봐달라고 했으니, 도망가게 하면 안될텐데. 작년 로드워크를 하다 마주친 고양이와 잘도 놀던 텐도와 레온을 떠올리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살피던 고양이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얼굴을 들이밀곤 냄새를 맡듯 킁킁거리던 작은 생명체가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한 우시지마는 닝을 떠올렸다. 고양이.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손가락을 뻗자 어린 고양이가 얼굴을 손에 부비적 비벼왔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런. 왜 이럴때만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귀여운 생명체에 약한 닝이 이 김에 길고양이들을 위한 뷔페라도 차리겠다는 듯이 참치캔들을 품에 한가득 안은 채였다. 이렇게 오래 걸렸으니 와카 혼자서 멀뚱멀뚱 서 있는 거 아니야? 조바심에 샛길로 샐 생각도 않은 닝이 허겁지겁 뛰어 도착했을 때에는 전혀 생각도 못한 장면이 보였다. "세상에." 봉투를 왼손으로 옮긴 닝이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미치도록 귀엽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서 울고 싶어. 닝이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을 참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힘겹게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몸을 굽힌 채 조심스레 다가갔다. "와카, 인간 캣잎이야?" "난 사람이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건지, 길고양이 서너 마리에게 손을 내주고 있던 우시지마가 닝을 올려다봤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는 그의 다리에 머리를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그건 알지." 키득거린 닝이 그에게 고양이용 참치캔을 건넸다. 캔따개도 없는데, 우시지마가 순전히 힘만으로 쩍 소리와 함께 한번에 깔끔하게 딴 참치캔을 바닥에 내려놓자 고양이들이 하나씩 차지하곤 식사를 시작했다. "뭘 그렇게 많이 사온건가?" "사다보니까 ... 그, 있지, 우리 고양이들 더 보고 갈까?" 그의 눈빛이 조금 반짝였다. "타이치가 학교 안에서도 몇 마리 봤다고 얘기해줬었거든, 거기 가서 밥 주고 올까?" 고개를 끄덕이는 우시지마의 손을 닝이 잡아끌었다. 훨씬 건전하고 귀여운 상상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래, 이 편이 훨씬 나았다. |
Keyword 11 특이점 |
"보고 싶을거야." 우시지마의 품에 안긴 닝이 속삭였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부원들과 함께 잘 갔다 오라며 생글생글 웃어준 터였지만 막상 정문까지 나오니 마냥 웃을 일은 아니었다. 대략 1년 전의 유스 후보 합숙 중에는 짝사랑에 끙끙 앓고 있던 중이었고, 마음을 접네 마네 하는 같잖은 소리나 하던 때였다. 그리고 지금은, 달콤함을 맛볼대로 맛본 뒤 제대로 중독되어버린 상태였다. 그 뿐이랴, 매일 같이 보던 얼굴을 5일 동안 안 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닝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우시지마가 그녀를 품에서 떨어트렸다. 역시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그녀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제 턱을 한 손으로 그러쥔 그가 얼굴을 가까이 해오자 눈을 감았다. 길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가빠올 쯤 떨어진 그가 다시 허리를 피며 나지막히 말했다. "다녀오겠다." 분명 여태껏 잘 돌아가던 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금방이라도 힘이 풀어질 것만 같은 다리로 애써 버티고 선 닝이 배시시 웃었다. "응, 연락 많이 해줘야 돼!" 우시지마는 저가 말하면 말하는대로 곧이곧대로 알아들었다.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성격 탓이니 딱히 불평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만큼 속에 묵혀두는 이야기들도 없으니 싸울 일도 없었고, 제가 불편하다는 행동도 곧잘 고치니 더더욱 좋았으며, 무언가를 해달라 부탁할 때면 또 성실하게도 잘 해냈다. 그러니까, 연락을 많이 해달라는 부탁은 정말 많은 것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유스 후보 합숙이니만큼 이야기를 나눠볼 사람들도 더 많을테고, 강한 사람들과 훈련도 더 열심히 해야 할테니 그저 하루의 끝에 전화라도 한 번 하는 것을 바랐다. 하루의 일을 공유하고 잘자라는 한 마디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근데 이 사람은 많이 라는 단어를 정말 수없이 많은 으로 알아듣고는 부지런하게도 연락을 해왔다. 제게 보고라도 하는 양 아주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 다 문자를 보내왔다. [ 방금 일어났다. 너는 아직 자는건가? ] [ 로드워크 다녀왔다. ] [ 아침 먹었다. 너도 거르지 말고 먹어라. ] [ 훈련 하러 간다. ] [ 훈련 다녀왔다. ] [ 점심 먹으러 간다. 너도 맛있게 먹어라. ]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고작 [ 그랬구나. ] [ 열심히 해! ] [ 너도! ] 따위 밖에 없었지만 닝은 핸드폰 알림이 울릴 때마다 입을 틀어막았다. 짧은 한 마디를 보내기 위해 그 큰 덩치로 작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을 상상을 하니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닝은 바닥을 작은 주먹으로 내리쳤다. "뭐하냐?"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하야토를 닝이 돌아보았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가서 리시브 연습 해." "그래 ... 근데 바닥은 치지 말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인 닝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건을 접으러 가자. * 자율연습을 하는 부원들을 구경하던 닝이 띠링-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얼굴을 환하게 밝힌 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체육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하늘을 수놓은 반짝이는 별들 사이의 달이 은은하게 밖을 밝히고 있었다. 우시지마와 자주 시간을 보내는 뒷뜰로 향한 그녀는 체육관 벽에 등을 기댄 채 잔디밭에 앉았다. 거센 바람을 체육관 건물이 막아주는 덕에 조금은 쌀쌀했지만, 춥지는 않았다. 단축번호 1을 길게 누르자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닝." "와카!" 대화는 언제나 유사한 편이었다. 이미 보고서마냥 매 활동마다 문자를 보내왔으니 얼떨결에 우시지마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된 닝이 자신의 하루를 재잘재잘 떠들었다. 에이타가- 타이치가 사토리한테- 레온이- 켄지로가 하야토한테- 길게도 설명해주는 그녀의 말에 우시지마는 간간이 그래, 응 정도의 대답과 함께 들어주었다. 오래간 이야기하다가도 저도 그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픈 마음에 닝이 물었다. "2학년들은 이미 본 애들이라고 했지? 1학년들은 어때?" 그녀의 물음에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까지 불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꽤나 객관적이고 뼈 아픈 소리까지 하는 우시지마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키득거리기도 잠시, 듣기 좋은 목소리에 닝은 편히 눈을 감은 채 맑은 공기를 들이쉬었다. 조금은, 그가 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와카가 제일 잘 하는 것 같아?" "제일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난 원래 잘한다." 언젠가 들어본 한 마디에 닝이 기분좋은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렇지, 와카는 원래 잘 했지. * 친목은 커녕 묵묵히 훈련만 하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유스 후보 합숙 내에서도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스파이커로서의 좋은 평판이 자자할 뿐더러 사담 없이 연습만 하고 있으니 모두 말은 못 건 채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다. 그 중 유일하게 그가 대화를 한 인물은 사쿠사 키요오미. 이유는 단순히 대단한 스파이커라서 우시지마가 먼저 말을 건 것으로 시작되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인간이 핸드폰만 들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신기해하던 사쿠사는 마침내 4일 차 밤, 의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누군데 전화만 하면 웃는거예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쿠사의 표정을 오해 할 법도 한데, 무던한 성격의 우시지마는 대수롭지 않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덤덤하게도 답했다. "여자친구다." 이미 3대 스파이커니 어쩌니 하며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던 두 인물을 은근슬쩍 지켜보던 주변 선수들의 동공이 크기를 키워냈다. 전혀 예상치도 못 한 답변에 인상이 더욱 구겨진 사쿠사가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누구요?" "매니저다." 앉아 있는 우시지마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던 사쿠사가 그의 생뚱맞은 대답에 마스크를 다시 올리며 허리를 폈다. "매니저가 여자친구다?"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사쿠사의 어투에 우시지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왜 놀라는거지?" 장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아는 듯한 답을 사쿠사는 굳이 내어놓지 않아도 된다 판단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
Keyword 12 가족 |
어째서일까, 분명 조금도 마음도 두고 있지 않던 인연임에도 끊어지면 정신이 멍해지는 이유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피로 이어진 관계 따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별 반발 없이 고분고분 끌려다녀 준 이유는 간단했다.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넉넉하게도 채워주었기에. 물질주의적인 사상으로 생각될지언정, 그것이 제 믿음이었다. 그것이 최소한 저를 낳은 책임을 지는 그들의 삐뚤어진 방식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책임감이 아니라, 본인들을 위한 속죄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한 쪽과의 연은 어긋난 상태였다. 그래서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결코 후회 않는 선택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당시에 느꼈던 막막함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남은 하나의 실을 붙잡는 수밖에는 없었다. 오로지 물질만으로 이어져 있던 관계이더라도. 딸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뭘 잘하는지, 어떻게 잘 적응했는지조차 관심이 없음에도 그 사람은 제게 넘치는 돈을 손에 쥐여주었다. 저는 사치는 커녕, 소비 자체가 적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존재가 내린 결정이었다. 이미 그 시점부터 어긋날대로 어긋난 관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조금의 희망을 쥐고 있던 탓에 떠밀리는 척 이 곳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얼굴조차 마주하는 일을 꺼림에도 내린 선택이었지만, 결국 거부감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을 무릎쓰고도 서로를 잇고 있는 얇디 얇은 실을 잘라내지 않은 것은 그래도 가족의 일원이 되고픈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제도 모르고 품어버린 과분한 욕심에 불과한 듯 했지만. "닝쨩 오늘 이상한 것 같아-" 점심도 대충 숟가락질 몇 번만 하곤 다 먹었다며 반으로 되돌아온 닝에게 텐도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책상에 볼을 맞댄 채 엎드려 있던 그녀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 이상한 것 같아." "오늘따라 말이지-" "처음부터 이상했을 수도." 답을 않은 텐도가 닝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별 말을 하지 않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던 그가 히죽 웃으며 말 했다. "화장실 갔다올게-" 고개를 끄덕인 닝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돌아서자마자 웃음을 지워낸 텐도가 조금 다급한 걸음으로 옆 반으로 향했다. "닝쨩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 우시지마와 세미의 앞에 앉은 텐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알 수가 없지. 입 꾹 다물고 말을 안 하는데." "와카토시군도 몰라? 이유 안 물어봤어?"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우시지마가 고개를 들었다. 의외로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그가 답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세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솔직한 성격의 닝은 이리저리 감추고 제 자신을 속이는 대신 단순히 말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어지간히도 심각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결국에는 이야기해주지 않겠다는 다짐이 굳게 표현되는 탓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우시지마는 말이 없는 탓에 혼자서 별의별 말을 다 하게 된다고 닝이 제게 한탄 아닌 한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와카토시에게 말 하지 않겠다는 건- "닝은 말 안 하면 끝까지 품고만 있을 것 같은데, 얘기 해봐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싫다고 했다." "넌 안 궁금해?" "내 호기심만으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뭘 보는 건지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인 우시지마와 어떻게든 그를 꾀어내려는 세미를 번갈아보던 텐도가 알 수 없는 음을 흥얼거렸다. 텐도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해사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던 닝을 떠올렸다. "닝쨩은 슬퍼서 말을 안 하는 것 같던데, 솔직한 사람이 진실을 말하지 못 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 이제 닝쨩이 안 웃으면 어떡하지-?" 우시지마의 시선이 텐도에게로 옮겨졌다. 텐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강 감을 잡은 세미가 거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봐도 말 안 할 걸. 네가 말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세미를 마주보던 우시지마가 핸드폰을 다시 뒤집었다. "... 그래. 얘기해보지." * 집중이 안됐다. 슬퍼서도, 우울해서도, 화가 나서도 아니었다. 원망에서 비롯된 것 또한 아니었다. 시작은 의문에 가까웠으나, 현재는 자책에 가까웠다. 작년 초의 문자를 곱씹어보면 곱씹어볼수록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내가 초래한 결과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너무 상대 측의 배려만 바란 건 아닐까? 내가 힘들더라도 내가 노력해야 했던 건 아닐까?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누나, 무슨 일 있어요?" 훈련이 끝나고 드링크를 마시던 카와니시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는 닝에게 카와니시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보였다. 그제서야 답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있는데, 음- 걱정할 일은 아니야." 어색하게 웃은 닝이 화이팅이라 속삭이곤 체육관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와카토ㅅ-" 지금 얘기를 해 보는 게 좋지 않겠냐 말하려던 세미가 어느새 사라져버린 우시지마를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와카토시군이 씻으러 간다네?" 넌지시 답을 내어주는 텐도에 세미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눈치를 안 본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만큼 이득이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이리저리 뒤죽박죽 얽혀버린 생각의 끝을 잡으려 애쓰면, 비참함만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유독 흐린 달을 올려다봤다. 애정 따윈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이렇게나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별다른 애착을 느낀 적도, 집착한 적도 없었다. 애초부터 무의미했던 존재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낄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무의미한 존재들에게 진정으로 없었던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니 더더욱 제 가치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닝" 그녀의 시선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옮겨졌다. 자연스레 새어나오는 미소와 함께 닝이 제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제 옆에 앉은 우시지마를 가만 올려다보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여전히 물기가 가득한 그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도 안 말리고 나왔어?" "무슨 일인가?" 사르르 녹아내리던 닝의 얼굴이 다시 굳어버렸다. 눈을 꿈뻑거리던 그녀가 손을 거두며 벽에 등을 기댔다. 바닥으로 떨어진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우시지마가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나한테는 얘기해도 되지 않나?" 닝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별마저도 빛나지 않는 하늘만을 향해있던 눈이 느리게 감겼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쉰 그녀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달싹였다. 제게만 내리꽂힌 고요한 시선에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이제 가족이 없어." "무슨 말인가?" 아랫입술을 혀로 축인 그녀는 짧은 한숨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곳으로 오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빠랑 연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였어. 아빠때문에 한국에서 살고 있던 중에 부모님이 서로 틀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가 너무 싫어져서 아빠 따라서 영국으로 갔었어. 그렇다고 아빠랑 사이가 좋던 것도 아니라서 어영부영 살았던 것 같아. 그랬는데, 어느 날, 나보고 선택하라는거야. 영국에 남아서 혼자 살던가, 아니면 다시 엄마랑 같이 미야기에서 살던가.” 그녀가 손을 뒤집어 그의 길고 굵직한 손가락에 손을 엮었다. 이곳저곳의 굳은 살 탓에 투박하고 딱딱했지만, 한없이 부드러웠다. “새로운 인연을 찾았으니까 내가 집에서 나가줘야 하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야. 어딜가든 내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돈은 지원할테지만, 내 존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이제 막 적응해나가고 있던 중이라서 남아 있어도 되는데도 미야기를 택했어. 그때는 같잖은 이유들을 갖다 붙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원해서였던 것 같아. 미약하더라도 분명한 가족의 끈을.”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무언가를 그녀는 꿀꺽 삼켜내려 애썼다. "그래서 이 곳으로 온 거야. 기숙사로 들어오기 전에 몇 주 정도 엄마랑 지냈는데, 영 안되겠더라고. 자꾸만 그 날이 떠올라서, 자꾸만 불쾌감이 온 몸을 기어올라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어. 그래도 엄마라고 생각했어.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미워도. 그래도 날 낳아준, 그리고 받아준 엄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까 문자가 와 있더라. 연락하지도 말고, 앞으로 보지도 말자고, 연 끊자고. 1년이나 시간이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연을 끊자는거야. 물론, 내 잘못도-" 무언가 목을 답답하게 메워왔다. 그제서야 눈을 뜬 그녀가 우시지마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저를 향해 있는 시선은 곧았고 또 짙었다. 목구멍을 가득 메우던 덩어리가 슬금슬금 눈가까지 기어올랐다. 징그러운 지네가 온 몸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내 잘못도 있다고는 생각해. 나도 노력 안 했고, 나도 도망쳤으니까. 그래도 나는, 실 한오라기로나마 연결되어 있던 관계가 끊어질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정말로, 나는-" 독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참함, 죄책감, 원망 모두가 뒤섞여 검게 물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지네가 기어올라왔다. "난 가족이라는 말에 집착한 적 없거든. 그런 거 애초부터 원하지 않았단 말이야. 근데, 막상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니까, 아예 그 이름조차 담지 못 하게 되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왜 슬픈지도 모르겠는데, 너무 답답해." 큼지막한 손이 제 얼굴을 감싸왔다. 독을 지워내는 손길에 지네가 발버둥쳤다. "가족을 가질 가치도 없는걸까? 날 낳은 사람들이 내가 싫대. 나는, 이제 아무도 없어. 내가 싫어서 다 떠나갔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지네가 입 밖으로 기어나왔다. "너도 언젠가는 내가 싫어질까?" 우시지마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것이 흐릿해진 시야에 담기는 것은 없었다. "너는 나 왜 좋아해?" "좋아서 좋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독이 턱을 타고 추락하기 전, 커다란 손이 대신 담아내었다. "설명은 어렵지만, 싫어질 일은 없다." "하지만, 다들 싫다잖아. 내가 원망스럽대. 나- 그런 말, 그 누구에게도 듣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세미는 널 싫어하지 않는다. 텐도도, 오히라도, 야마가타도 싫어하지 않는다. 카와니시와 시라부도 널 싫어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모두 널 좋아하고 있다." "그치만-" "그리고 나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손이 독사의 입처럼 그의 손을 꽉 물었다. 하지만, 그는 미동조차 않은 채 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나는 널 사랑하고 있다." 목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을 뱉어내듯 닝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가족을 원한다면, 나와 저들이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체육관 벽을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검은 덩어리를 물고 있던 지네가 그녀의 기침과 함께 바닥으로 뱉어졌다. 닝이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와카." "응." "나 안아주면 안될까?" 그가 맞잡았던 손을 놓았다. 두 팔을 뻗어 닝을 가볍게 안아 든 우시지마는 제 허벅지 위에 그녀를 앉혔다. 목을 감아오는 얇은 팔에 입꼬리를 올린 그가 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이제 괜찮은건가?" "... 아까 해준 말 다시 해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 우시지마가 잠시 고민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인지 짚어낼 수 없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기만 하던 그가 마침내 정답을 골라냈다.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사랑할 것이다." |
Keyword 13 첫 |
"닝은 이번에도 기숙사에 남을거야?" 종업식이 고작 일주일 앞까지 다가온 시점에 세미가 물어온 말이었다. 순간 멈칫했던 닝이 우시지마를 힐끔 쳐다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선택지가 없잖아." 닝의 말에 세미는 마땅한 대꾸를 내어주지 못 했다. 차마 속사정을 캐묻지는 못 한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텐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와카토시군네 가는 건 어때?" 놀란 눈으로 텐도를 쳐다보는 세미와는 달리 닝은 진지하게 선택지로 고민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었다. 방학동안 그의 집을 텐도와 세미가 쳐들어갔다는 이야기는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기도 했고 - 레온과 하야토는 양심이 있어서 쳐들어가지 않았다. "기숙사에 남으니까 놀러가자 해도 안 오잖아-! 에이타군의 끔찍한 사복센스를 보면 닝쨩이 어떻게 반응할 지 궁금하단 말이지." "에이타 사복 입은 거 한두 번 봤니?" "뭘 모르네- 그건 이 미라클 보이가 손에 쥐여준 거고, 진정한 세미세미만의 패션을 넌 보지 못했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리고 내 패션이 어때서." "그러게, 그래봤자 뭐 얼마나 별로라고." "그걸 보고 말해야 돼, 닝쨩." 의아한 얼굴을 하는 닝과 세미와는 달리 텐도는 꼭 봐야 한다며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카토시군네에서 지내면 이 사토리가 집순이인 닝쨩을 위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세미세미를 친히 데려가줄게." 고민하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닝을 우시지마는 별다른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안된다고 말 해주는 편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같이 있고 싶다는 욕심이 더욱 컸다. 닝의 결정대로 따라주는 것이 우선임은 분명했으나, 제 욕심에 그는 입을 다문 채 얌전히 기다렸다. "음, 와카만 괜찮다면 난 좋을 것 같은데. 어때? 그래도 돼?" 발갛게 물든 볼과 함께 닝은 반짝이는 눈으로 우시지마를 올려다봤다. 제 손을 잡아오는 제 연인의 눈을 마주하며 그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작은 원룸이나 다름없는 기숙사에서 2년을 버틴 닝은 캐리어를 끌고 우시지마의 오피스텔에 들어섰다. 엘레베이터에 들어서면서부터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꽤나 무표정했다. 역시 믿음직해- 라고 닝은 중얼거렸다. 내내 비워져 있던 집이었기에 깔끔한 것과는 별개로 싸늘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되게, 뭐랄까, 공허하네." "응." "다시 학교 갈 때쯤은 돼야 사람 사는 집 같아지겠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는 닝을 뒤로 한 우시지마가 그녀의 캐리어를 들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찌 해야 할 지 몰라 닝은 일단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역시나 깔끔한 손님방은 블랙 앤 화이트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 냄새라곤 조금도 안 났다. 뭐, 혼자 사는 집인데다가 기숙사에서 내내 시간을 보내니 어쩔 수 없겠지만. 부드러운 검은 실크 이불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닝이 캐리어를 한 쪽에 내려놓곤 저를 쳐더보고 있는 우시지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다. 신세 좀 질게!" 무어라 대꾸하려던 우시지마는 화장실은 어디냐며 손부터 씻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곤 길을 안내했다. 닝은 지금껏 혈연이 아닌 관계의 누군가와 집은 커녕 방조차 나누어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숙사조차 혼자 방을 쓰게 되는 행운아닌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으니 남과 같이 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뭐, 초등학교 때 갔던 수학여행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까 싶었지만, 남자친구의 집이니 전혀 다른 문제이긴 했다. 그 탓에 걱정이 많았지만, 우시지마의 간결한 생활 방식 덕인지 아니면 양측의 배려 덕인지 의외로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아침이 되면 밥 먹으라며 문을 두드리는 우시지마에게 겨우 익숙해진 닷새날이었다. 굳이 집으로 찾아와 놀겠다는 텐도와 세미에게 응한 지 2시간 쯤 지난 후였다. 우시지마의 허벅지를 배게 삼아 밴 채로 - 불편했다 - 책을 읽고 있던 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내가 나가볼게." 제 배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그의 큰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날에도 체육관에서 만났지만, 반가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연 순간 마주한 휘황찬란 화려한 색들의 향연에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을 꿈뻑이자 웃는 얼굴의 잘생긴 세미가 보였다. 그제서야 텐도의 말이 이해가 됐다. 그동안 사토리가 사람 만들어준거구나 ... "에이타." "안녕." "설마 그 이상한 천 쪼가리를 옷이라고 입고 온 거야?" 어깨가 축 처진 세미의 뒤로 숨이 넘어가도록 웃고 있는 텐도가 보였다. "이상한 천 쪼가리라니 ..." "제발 돈 주고 산 거라고 말 하지 마." "비싸게 주고 샀대!" 옆에서 한술 더 뜨는 텐도의 말에 닝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옆으로 비켜났다. 운동화라도 멀쩡한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배를 부여잡고 있는 텐도를 보며 그녀는 눈을 데굴 굴렸다. "컨셉이지?" "세미는 원래 저렇게 입는다." 닝은 어쩌면 훈련 직후에만 놀러나가는 선택이 제 시력 보호를 위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쟤는 왜 저 얼굴을 가지고 저렇게 써먹는걸까? "에이타, 그냥 운동복 입고 다니면 안돼?" "왜?" 세미는 진심이냐는 눈으로 맞받아치는 닝의 시선을 피했다. 운동복은 후줄근하잖아- 라고 덧붙이는 그를 보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토리, 너가 친구라면 저렇게 나오게 하진 말았어야지." "닝쨩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서-!" 여전히 키득거리고 있는 저 요물의 머리를 처음으로 잡아당기고 싶었다. 그 동안 텐도가 쌓은 덕을 떠올리며 닝은 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에이타, 얼굴 그런 식으로 쓰지 마. 좋은 옷걸이를 두고 왜 그런 걸 입니? 앞으로는 그런 거 돈 주고 사지 마. 차라리 내가 사줄게." "옷걸이?" 고개를 기울이는 우시지마를 흘깃 쳐다본 닝은 처음으로 실소가 튀어나왔다. 이젠 바닥에 엎어져 웃어대고 있는 텐도를 조금 밟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별로야?" 여전히 의아함과 충격이 얼굴에 그려져 있는 세미의 얼굴을 닝이 곧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려." * "그래서 엄청 웃었었는데." 환히 웃어보이는 닝의 머리를 우시지마가 느리게 쓸어주었다. 그의 몸 위에 엎드려 있던 닝이 꼼지락거리며 상체를 움직여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초승달 마냥 휘어진 눈으로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그는 조용히 눈에 담아내었다. 다시 입술을 가볍게 맞대고 떨어지려던 찰나, 머리를 손으로 약하게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입을 살짝 벌리자 그가 조금은 거칠게 파고들었다. 그가 혀를 얽어 오는대로 따라주던 닝이 옅은 신음과 함께 떨어져나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그녀는 그제서야 후드티 안으로 들어온 큰 손이 제 허리를 지분거리고 있음을 알아채었다. 특정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내비쳐지는 우시지마의 눈을 마주했다. "소파는 힘들 것 같은데." 모호한 말 따위 이해하지 못 하는 그는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면서도 그녀의 바지의 허릿단 안으로 손가락을 걸었다. "침대." 가쁜 호흡과 함께 내뱉어진 한 마디를 그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 . . 제 허리쯤을 감고 있는 손을 잡아들었다. 제 등에 기다란 자국들을 남긴 작은 손을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숨을 깊이 들이키자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후각을 가득 채웠다.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단 한 사람만이 제 품에 가득 담겨왔다. 시야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저만이 들을 수 있는 나긋한 한 마디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나만이 너만을 가졌다. "와카 ..." "응." "왜 나만 힘든 거 같지?" "나는 좋다." 힘겹게 웃음을 흘린 그녀가 얄밉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네가 좋다. 그새 기절잠에 빠져버린 제 연인의 귓가에 그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
Keyword #관계 |
그날은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봄이 개화하는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정식 훈련은 없지만, 당연한 연습을 위해 체육관으로 나가는 그런 익숙한 어느 하루였다. 햇살이 유독 밝았고 살랑거리는 바람 덕에 따스한 동시에 시원한, 완벽한 날이었고 유독 제 욕심이 목을 죄여올 정도로 커진 어느 하루였다. 한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힘들었고, 배구공을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는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한 사람을 결코 지워낼 수 없었으며, 단 한 사람에게 닿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와카토시군-" 우시지마는 텐도의 밝은 웃음 뒤에 숨겨진 장난기와 호기심을 눈치채지 못 했다. 그의 시선은 따분하게 벽에 튕겨져 다시 손으로 돌아오는 배구공에 꽂혀 있었다. "닝쨩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라-?" 그 순간, 다시 손에 닿아온 배구공은 규칙적인 움직임에서 어긋났다. 경기 중에 스파이크라도 맞은 양 튕겨나간 공은 굉음과 함께 벽에 부딪혔다 다시 허공으로 떠올라 카와니시에게 셋업을 하고 있던 시라부의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강한 배구..! 눈을 반짝이며 우시지마를 돌아보는 시라부와는 달리 카와니시는 두려움에 두 발짝 물러났다. "그렇군." 텐도는 입꼬리를 더욱 올린 채 몸을 좌우로 바람빠진 풍선마냥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낮춘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근데, 닝쨩은 먼저 말 할 생각이 없대- 와카토시군이 먼저 말하는 건 어때?" "? 무슨 말이지?" "역시 와카토시군은 바보네! 우리 미라클 걸 닝쨩이 좋아하는 사람, 와카토시군이잖아?" 저 멀리 날아가버린 배구공 탓에 비워진 손을 내려다봤다. 날 좋아하는데 왜 고백을 하지 않겠다는거지? 말 해주면 기분이 좋을텐데 ... 내가 좋아한다 말하면, 나를 좋아하는 닝은 기분이 좋아질까? "안녕-!" 그의 속을 가득 채운 주인공이 밝은 얼굴과 함께 손을 들어보이며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체육관의 구석으로 향하는 모습을 가만 시선으로 따르던 우시지마가 곧 걸음을 옮겼다. * 날이 좋았다. 상쾌한 공기가 좋은 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기분좋은 웃음을 흘리는 닝의 소성이 귀에 담겼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체육관의 뒷뜰에서 우시지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길래 여기까지 왔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보이는 얼굴이 예뻤다. 한창 활짝 피어난 벚꽃을 닮아 있었다. 예뻤다. 생각의 끈을 잘라내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불그스름한 닝의 두 뺨을 가만 쳐다보다 가장 하고 싶었던, 듣고 싶었던 한 마디를 꺼냈다. "좋아한다." "뭐라고?" 듣지 못 한건가? 그는 다시 한 음절 한 음절 끊어 발음했다. "좋아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환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이 보고싶어 한 말인데 되려 그녀의 맑은 눈에 빗방울이 맺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 사귀고 싶으면 좋아해야?" "사귀면 뭐가 달라지지?" 서글픈 눈을 한 채 입꼬리를 올린 그녀의 표정이 의미한 바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키스하고 싶은 좋아해야?" 하지만,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응, 너에게 닿고 싶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싫은건가? 또 텐도의 장난에 순순히 걸려준건가? 어찌 대처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방법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새 축축히 젖어버린 얼굴, 붉어진 눈가와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의 닝이 저를 올려다봤다. 닿고 싶다는 욕심이 제 속을 가득 채웠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나도 좋아해. 작년부터 좋아해왔어. 많이, 내가 많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 닝이 갑작스레 제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녀를 내려다보다 그녀의 작은 몸통을 감쌌다. 마침내 닿았다. |
장치들에 대하여 |
#? [ 감정이라는 것은, 분리되어 있는 감각들을 묶기 위한 명칭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를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붙여져야만 했던 이름이라고, 화자는 이야기 하고 싶다. ] 이 부분은 키워드인 '덩어리'가 요점. 이리저리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관한 이야기 많아서 시작에 넣은 파트예요. 그래서 덩어리로 표현된 무언가는 모두 불분명한 감정 덩어리를 일컫는 것이었어요 [ 후회가 질투로 변하고, 우정이 욕심으로 변하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하는 사례들은 모두 불분명한 세계에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가는 과정이라 일컫을 수 있겠다. ] 저 '사례'들은 모두 풀어낸 이야기들입니다. 무엇이 무엇인지는 ... ㅎㅎ ———————— #1 감정 [ 그냥 네가 좋다. ]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면 ... 아마 1편의 마지막에서 텐도의 도움 없이 고백하지 않았을까 ... 물론 그 데이트도 텐도의 도움이 있었지만요. ———————— #3 관계 [ 그 날, 왜 그런 말을 했어? ] 우시지마의 마음을 모르는 닝은 데이트 끝에 그가 건네었던 말에 대한 의문을 내내 품고 있었어요. 물론 고백 뒤에야 답을 얻어내었지만. [ 금방이라도 오열을 할 것 같은 표정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두 팔을 뻗어 세미를 끌어안았다. 조금 달아오르는 귀 끝과는 달리 그는 어찌 반응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 순간, 바로 근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이 어째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 미련은 없지만, 짝사랑에 안녕을 고했지만, 그래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싸그리 마음을 지워내기에는 어렵다구 생각해요. 조금은 설레였겠지. 그리고 질투의 첫 조짐. 우시지마는 자각하지 못 했어요. 그냥 묘하게 마음에 안 드니까 쳐다본 거 ... ———————— #6 희극 [ 이미 동백꽃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뜩 붉어진 두 뺨이 채도를 높임과 동시에 눈물이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 동백꽃의 꽃말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 물론 세미는 끝난 사랑이지만, 동백꽃을 닮은 얼굴을 한 닝은 우시지마에게 그 감정을 고이 내어주죠. [ 왜 나와 같이 안 가는거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음표로 가득찬 시선이 벌써 비어버린 공간만을 눈에 담았다. 잠시 굳어있던 우시지마는 씻고 나온 텐도가 뭘 하는거냐 묻는 순간에야 다시 움직였다.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 질투. 여전히 자각 못 했어요. 하지만, 미묘한 거슬림을 배구로 풀기 위해서 이미 다 씻고 나온 뒤인데도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합니다. [ 한 발짝이라도 물러난 곳에서 보면, 이렇게나 희극이었다. ] 짝사랑이라는 감정을 지워내고 한 발짝 물러난 곳에서 바라보면, 이렇게나 좋다는 세미의 생각. 그 관계가 딱 보기 좋은 희극.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죠. ———————— #7 명명 키워드 명명 → 질투의 감정에 '질투'라고 명명했기 때문에 / 겉으로 나타남이 없이 아득하고 그윽하다는 뜻의 '명명하다'의 어근. 즉, 우시지마의 감정은 그러하다는 의미에서 붙인 키워드였어요. ———————— #8 소나기 고작 고등학생 ... 이라고 계속 말 하죠. 무너져도, 울어도, 미숙해도 모두 괜찮다고 닝은 생각해요. 그래서 시라부를 미워하지 않았죠. #1 에서 우시지마가 이야기한 유별난 이해심은 모두 이 사고에서 기반되었어요. 너도, 나도, 모두 어리숙하니까 실수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당연히 탄지군은 이해 못 해줌. [ 내내 크기를 키워내던 검은 먹구름에서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굳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구경하며 감탄을 할 필요도, 의아하게 여길 이유도 없었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자연스레 그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한차례 비가 땅을 쓸고 지나가면,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니까. 그러면 나는 그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어주면 되는거다. 비가 내린 적이 있기에 하늘이 이렇게나 맑은 것이라 웃으며 이야기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을 당연시 여겨주는 방법이었다. ] 시라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닝은 탈의실을 혼자 나서요. 닝은 불안감과 강박감을 속에 쌓아두고만 있는 먹구름과도 같은 속을 가진 시라부가 비라는 형태로 쏟아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죠. 그러니, 예민하고 냉정한 시라부가 우는 것에 별 반응을 하지 않았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린 시라부에게 웃어주면 되니까. 너가 감정을 겉으로 드러냈기에, 마음을 추스릴 수 있던 것이라고 언젠가는 이야기해주겠죠. 당연한 일을 당연시 여기게 해주는 방법. [ 비대칭 앞머리의 삐딱하고 예민한 후배가 미소를 머금었다. ] 이 일 이후로 시라부는 닝에게 마음을 열어요. 우시지마 상처럼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시라부는 특히나 제 해석으로 풀어보고 싶었는데 (하... 슬픈 분량 ...) 켄지로는 닝처럼 누군가가 한 마디 해주지 않는 이상 먹구름을 쌓아가기만 했을 것 같아요. 여기서 시라부가 운 이유는 1. 우시지마가 믿고 있다는 말 때문에 2. 세미가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는 말 때문에 3. 닝이 안 부족하다고 말 해줘서 ———————— #9 폭풍 독 → 악의, 적의 오이카와의 말과, 눈빛에 배여 있던 독은 모두 너도 절망감을 체감해봐라 하는 조금 유치한 복수같은 느낌이랄까요. 제일 처음에 풀었던 썰에 대충 써보았던지라 오이카와의 시점은 굳이 글에 넣지 않았어요! [ 그 순간 터져나오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어금니가 꽉 다물렸다. 의식조차 하지 않은 순간, 우시지마의 손이 느리게 말려갔다. 주먹이 쥐어진 제 손을 내려다 본 그가 손을 뒤로 감췄다. ] 자각이 느려요. 몸이 먼저 반응하고 머리가 따르죠. 본능에 충실하지만, 그렇다고 충동적이지는 않은 그런 캐릭터 같달까 ... 그리고 주먹을 감춘 이유는, 혹여 돌아본 닝이 오해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런데, 도저히 힘이 안 풀려서. [ 하여간, 사람은 이해하기 더럽게 어렵다. ] 감정이 모두 혼란에 가득찬 에피소드라서. 영 이해하기 힘들죠. 오이카와조차도 복잡한 심정으로 덤비고 본 거 아닐까 싶고. 오이카와는 미숙한 충동과 너도 어디 한 번 속 뒤집어져봐라 하는 복수심을 품고 행동했지만, 종국에는 비참함을 느꼈겠죠. 닝은 속아주지 않았으니까 ... 그래서 닝의 대사로 말 해봤어요. 입체적인 캐릭터일 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더 인간다운 탓에. 우시지마에게 말 할 때 닝은 오이카와를 오이카와로 부르지 않는데, 이건 단순히 까먹어서가 아니예요. 당연히 쉬운 이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시지마에게 저가 토오루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가장 쉽게 전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닝은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름조차 모르는 척 해요. 닝은 뭐가 됐든 잘생긴 사람 이름은 잘 기억합니다. 혼란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대신 자연을 감정으로 빗대었어요. 용암/불 → 질투 바다 → 상실감 / 서러움 바위 → 일전의 단단한 우시지마의 마음 부서진 돌 덩어리 → 불안감 폭풍 → 닝은 바람입니다. 우시지마가 이해할 수 없는 닝의 행동이 그의 감정에 혼란을 야기하고, 이는 곧 폭풍으로 변합니다. [ 패배감- 이라는 세 음절에 거센 파도가 바위들을 으깼다. ] 불안감이 더더욱 커집니다. 처음으로. [ 거센 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무섭게도 소리치던 파도를 모두 거둬갔다. ] 바람 = 닝. 상실감과 우울감, 그리고 불안감까지 모두 소란을 피우는데, 결국 닝의 사랑 고백에 다시 모두 진정합니다. 바람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바다를 진정시키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 칠흑빛의 깊은 바다가 푸른색을 머금었다. ] 깊은 서러움/상실감이 옅어집니다. 그래서 깊은 바다의 칠흑빛 대신 호수의 푸른빛을 머금죠. [ 느리게 일렁이던 호수가 햇살 아래에서 고요히 반짝였다. ] 바다 대신 호수가 되어요. 아직 상처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죠. #1 에서 말했듯이, 우시지마는 온전히 받아들인 후 흘려보낼 줄 아니까. 반짝반짝 💎 ———————— #11 특이점 키워드인 특이점 → 배구부원들은 우시지마를 아니까,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아도 그러려니 합니다. 이미 짝사랑하는 둘의 삽질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어버렸으니 ... 하지만, 생판 남인 유스 후보 합숙의 인원들에게는 ... 특이점이 바로 이 기묘한 발견이었죠. ———————— #12 가족 [ 도대체 뭘 보는 건지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인 우시지마와- ] 뭘 보고 있었냐면, 고양이들 밥 줄 때 찍었던 닝 사진. 그 날 기분 좋다고 셀카도 찍어줘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얘기하기 싫다는 닝의 말에 조금 시무룩해지긴 했어서 귀여운 사진 보고 나름의 힐링 ... [ 어떻게든 그를 꾀어내려는 세미를 번갈아보던 텐도가 알 수 없는 음을 흥얼거렸다. 텐도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해사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던 닝을 떠올렸다. ] 텐도는 우시지마가 뭐에 움직이는 지 의도치 않게 알게 되었었어요. 그래서 웃는 얼굴을 들먹여요. 텐도와 세미가 우시지마를 꾀어낸 이유는 간단해요. 이미 명시되었듯 항상 솔직하게 이야기하던 사람이 속에 쌓아놓으면, 좋지 못하니까. 우시지마의 이유도 옳고 당연히 이해하지만, 때로는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부모님이 틀어진 사건 → 1편에서 주장이 뺨을 맞는 순간 어떤 장면이 겹쳐지죠. 엄마가 아빠의 편을 드는 닝의 뺨을 충동적으로 때린 순간입니다. 딱 한 번, 있었던 일이고 그 전에도 이후에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감독이 손드는 행위에 곧바로 눈이 뒤집어진 이유입니다. 나는 도망갔지만, 다른 이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주고 싶다는 그 마음에서 비롯되었죠. 그래서 아빠를 따라간거예요. 하지만, 두 사람 다 결국 닝에게는 그 어떠한 애정도 없어요. 책임감이 아닌 속죄,는 애정을 주지 않았으니 물질적인 지원으로 커버하겠다 ... 하는거랄까요. 그래서 닝은 끝까지 넉넉하게 살 정도로 돈이 많지만, 딱 그 정도의 존재였습니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닝의 가정사를 처음부터 어둡게 잡은 건 아니었는데,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이 꼭 사랑이 가득한 집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넣고 싶었어요! 1편에서도 나왔죠. 감내하지 않고 말해야 한다고. 그런 마인드로 닝은 살아갑니다. 설령 또 다른 불이익을 얻게 되더라도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부모님과 아이는 별개의 존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요. 개인이니까,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고 다른 경험을 하게 되니까, 아무리 형편없는 가정이어도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닝은 강한 사람으로! 그렇게 닝은 또 다른 강한 사람과 연애하게 되었네요. [ 독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참함, 죄책감, 원망 모두가 뒤섞여 검게 물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지네가 기어올라왔다. ] 당연하게도 독은 눈물입니다. 지네가 기어올라왔으니, 독이 흘러내릴 수밖에 ... 직전에 검은 덩어리가 눈가로 퍼진 탓에 독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어요. 우시지마의 고백 당시에 흘렸던 눈물과는 달라요. 독과 눈물은 전혀 다르니까. 또한, 기어들어온 게 아닌, 기어오른 지네. 속에 내내 자리를 잡고 있던 이 지네는, 사실 닝의 혈연 가족을 일컫습니다. [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지네가 입 밖으로 기어나왔다. "너도 언젠가는 내가 싫어질까?" ] 혈연 가족의 잔상, 그것이 닝에게 남아있습니다. 날카로운 말과 감정, 닝은 여태껏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 없는 솔직한 삶을 살아왔어요. 하지만 그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었던 만큼, 말끔히 지워내지는 못 했네요. 지네가 (속에 갇혀있던 부모에 대한 감정/기억들이) 튀어나온 순간, 두려움이 담긴 날이 선 말이 나와요. 불안해서. [ 체육관 벽을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검은 덩어리를 물고 있던 지네가 그녀의 기침과 함께 바닥으로 뱉어졌다. 닝이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 지네는 내내 검은 덩어리를 물고 있었어요. 즉, 닝의 혈연 가족은 끝까지 부정적인 감정들만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우시지마가 새로운 가족이라는 개념을 내미는 순간 지네는 뱉어집니다. 연을 끊자 했던 엄마의 통보대로 닝도 온전히 모든 실을 끊어내요. 우시지마 덕에, 친구들 덕에. [ 우시지마가 잠시 고민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인지 짚어낼 수 없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기만 하던 그가 마침내 정답을 골라냈다.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사랑할 것이다." ] 눈치를 안 볼 뿐, 그래서 눈치가 없는듯 여겨질 뿐,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닌 우시지마. 그녀의 불안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앞으로도- 라는 말을 덧붙여요. 현재에도, 미래에도 너만을. ———————— #13 첫 키워드 첫 → 여러 의미에서 첫을 사용했어요 '첫' 경험 / '첫' 동거 / '첫' 대면: 세미의 끔찍한 사복센스 대면(ㅠ) 등을 의도한 키워드.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우시지마의 생각은 #1 감정 에서 읊어진 욕심들과 겹쳐지죠. 욕심이 더 이상 과분한 욕심이 아닌 실현 가능한 바람이 되었어요. 1번과 겹쳐진다는 의미의 '첫'. [ "왜 나만 힘든 거 같지?" "나는 좋다." 힘겹게 웃음을 흘린 그녀가 얄밉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네가 좋다. ] 닝은 당장 제 몸이 아파서 투덜거린건데, 생뚱맞은 답이 돌아와요. 하지만, 그 답이 마냥 좋은 건 매한가지라 웃으며 잠에 빠져들죠. 진심은 좋은 의미로도 심장을 아프게 하네요. ———————— #관계 #4 관계의 우시지마의 시점의 짧은 이야기라서 해시태그-관계로 했어요! 우시지마 시점의 마지막 말 : 마침내 닿았다. 닿고 싶다는 욕심은 물리적으로 닿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감정적으로 닿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닝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마침내 닿은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