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지금 뭐라했나.]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
들고있는 핸드폰에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뒤이어 핸드폰 너머 상대편에선 짙고 깊은 한숨만이 들렸다. 시끄러운 주변환경 때문에 닝의 귀엔 잘 들리진 않았지만.
[...결혼이 애들 장난이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데.]
뭐하는 짓이긴, 아주 잘하는 짓이지. 닝은 이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입에 담고만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 진짜 화나겠지. 지금도 화난 것 같지만. 닝은 무심하게 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작은 캐리어를 챙겼다. 전화 너머로 그가 지금 어떤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지 짐작은 되었다. 결혼 준비가 한창일 때 약혼녀가 이 결혼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하는 지금 이 상황, 과연 몇이나 겪을까. 상대측은 얼마나 황당하려나. 그럼에도 그녀는 이 선택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비행기 시간 다 됐어. 나 여행 갔다오는 동안 머리 좀 잘 식히고 생각해봐요.”
[닝아.]
다급하게 이어져오는 그의 말에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폰화면에는 오직 [키타 신스케] 라는 이름만이 남겨졌다. 닝은 작은 핸드백에 넣어놓은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꺼내 캐리어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혼자서, 그리고 이렇게 충동적으로 가는 여행은 처음이다. 비록 해외여행은 아니고 가볍게 다녀올 예정이라 별로 기대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좋아.’
이 답답한 상황에서 지친 자신을 달래줄 것이 분명했다. 닝은 빠르게 탑승수속을 마친 후, 간단한 점심을 먹은 채 비행기 안으로 향했다.
‘12....12A...’
그녀는 캐리어를 든 채 티켓과 좌석표를 위아래로 번갈아 확인하며 깊숙이 안으로 들어갔다.익숙한 번호가 눈에 들어오자 닝은 환하게 웃으며 들고 왔던 짐을 위에 집어넣으려 캐리어를 두 손으로 들었다. 그러나 선반은 그녀의 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고 닝은 속으로 절망하며 승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자신보다 키가 한 30cm정도는 더 클 것 같은 거구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
“넣어드려요?”
“네?”
“캐리어.”
“아, 네..그래주시면 저야 감사...”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음 보는 남자는 닝이 들고있던 캐리어를 가볍게 한 손으로 쥐고 단번에 선반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단단한 팔근육도 그녀의 눈에 가까이 들어왔다. 당황한 닝은 낯선 호의에 가볍게 고개로 감사인사를 한 후,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그 남자가 들어오더니 제 옆자리에 앉았다. 닝은 깜빡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제 옆자리?”
그는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됐네요.”
“아...네...”
뭐지. 어색한 기류에 닝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 곁눈질로 살펴보자 그도 더 이상 그녀에게 볼 일 없다는 듯, 무심하게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닝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창밖만 쳐다봤다. 그녀는 턱을 괴면서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
“닝.”
“.....”
“.....”
“.....”
“내랑 영원히 말 안 할 기가. 와 그라는데.”
왜 그러냐고 묻는 신스케의 말에 닝은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묻고 있다. 작은 음악이 나오는 카페 안에서 오직 그 둘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닝은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다가 그가 똑바로 말해보라는 말에 정면을 마주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나한테 단 한 번도 당신 집안에 대해서 얘기 안 해줬잖아요.”
“.....”
“난 그게, 솔직히-”
닝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목이 막혔다. 화가 나서 말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니, 이 상황에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가? 그녀는 가슴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에 차가운 물을 목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몸은 차가워졌을지 언정, 머리를 식혀주진 못했다. 전날 밤부터 생각해두던 말은 걷잡을 수 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솔직히, 당신한테 무슨 상처가 있을까봐. 혹시라도 내가 당신한테 본의 아니게 집안문제로 상처를 줄까봐, 일부러 그 부분에 있어서 말 안 했어요. 내가 말을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가족은 바꿀 수 없으니까.”
“.....”
“...어떻게 3년 동안, 사람을 감쪽같이 속여?”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정성도 참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를 처음 만나고 딱 1년이 되던 날 그는 내게 약혼을 제안했다. 약혼식은 각자 부모님의 허락을 맡고 간소하게 둘이서만 하자고. 그의 제안이 얼떨떨했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교제하는 동안 서로가 잘 맞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건 각자의 관심사도 일하는 분야도 다르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완벽히 맞아떨어질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그 점은 미안하다. 솔직히...말하기가 싫었다.”
“.....”
“그냥 네가 내 모습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게 좋았어. 그래서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던거고.”
“우리 아버지, 저번 식사 자리에서 얼마나 놀라셨는지 알아요?”
“.....”
“거기에 나왔던 요리들, 다 합치면 몇십만원은 족히 넘어요. 게다가 주방장 스페셜 요리까지. 나랑 우리 아버지, 살면서 그런 요리는 처음 먹어봤는데 당신이랑 당신 부모님은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솔직히 거기서부터 자존심이 상했는데....더 놀랄만한 게 따로 있더라구요.”
닝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신스케는 그녀 모르게 오른손을 꽉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네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는데.”
닝도 지지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한테 준 돈.”
그녀는 이 난감한 상황에 옆에 놓아둔 가방 안에서 통장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그녀는 분노에 차서 목소리가 떨렸다.
“도대체 이해가 안돼. 예단을 8억씩이나 해가는 집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당신 어머님이 흘리듯이 말씀하신 걸,,...그날 밤에 당신은 나한테 이걸 줬죠.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 마냥, 통장에는 당연하다는 듯 8억이 찍혀있고.”
“닝아, 조금만 진정하고-”
“당신한테 이렇게 큰 돈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고 그 돈으로 당당하게 어머님께 갖다바치면, 그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네가 모자라서 그 돈을 준 게 아이다.”
“아니.”
닝이 단호하게 그를 쏘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난 내가 모자라게 느껴져요. 정확히 말하면,”
“.....”
“내 가족이 그렇게 느낄까봐 무서워요.”
신스케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 평소 별다른 감정 동요를 하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그녀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손 끝이 차가웠다. 닝은 더 이상 그를 마주했다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요. 전화하지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