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려 감기던 승연의 눈꺼풀이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작게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옅게 퍼졌다.
날이 이 정도로 추운 걸 보니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꽤 춥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승연은 제 옆에서 작게 말하는 주원을 흘겨봤다.
춥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전혀 날씨를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추우면 방에서 도라지꽃차나 마시면서 쉬면 될 일이지, 굳이 이렇게 나와서 말타기를 하다니. 머저리 같은 놈."
너무 추운 나머지 코 끝이 붉어진 승연은 손으로 입김을 모았다.
"그 정도로 껴입으셨으면 안 추우셔야 정상입니다."
주원은 승연의 두꺼운 소매를 톡 건드렸다.
"정상 비정상이 어디 있어. 내가 춥다면 추운 거지."
승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사복시(司僕寺)에 말을 넣어두고 얼른 뛰쳐나왔다.
이런 날씨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넌더리가 났다.
승연은 얼른 걸음을 옮겨 수화각 쪽으로 향했다.
저벅이는 발걸음이 점점 바빠졌다.
"그래도 이제는 *사어(射御)에 많이 능해지셨습니다."
"그럼. 지겹도록 시키는데."
* 사어(射御): 활쏘기와 말타기
추운 날 말타기를 해서인지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주원은 작게 웃었다.
한 달이 넘도록 질리게 배웠으니 감을 못 잡는 것도 어폐였다.
"잘하셨습니다."
툴툴대던 승연의 입술이 뚝 멈췄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처음보다 훨씬,"
말을 하던 주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주원은 멀리서 지나가는 정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정연이 아닌, 그녀가 입은 스란치마를 보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일으켜드릴 테니 손을 좀 잡겠습니다.
승연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치마였다.
그의 손을 보았던 순간이 생생히 기억났다.
"..."
자신이 정연 공주와 착각할 만도 했다.
닮긴 닮았으니까.
정연을 보던 주원의 눈 앞에 별안간 승연의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뭐 하느냐?"
갑작스런 말에 주원이 승연을 보았다.
"아주 감회가 새롭지?"
승연은 주원이 제 앞에서 대놓고 *매씨인 정연을 눈에 담는 걸 보니 속이 뒤틀렸다.
단단히 오해한 그의 낯이 서늘해졌다.
* 매씨: 자기의 손위 누이를 이르는 말.
"네 놈이 처음으로 연모한 우리 누님 말이다."
짜증이 나서였다.
주원은 살짝 고개를 내려 설풋 웃었다.
"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승연을 바라보았다.
웃음을 계속 머금던 주원이 승연의 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평생,"
둘의 눈이 마주쳤다.
"못 잊을 것입니다."
주원이 환하게 웃었다.
"용천지랄을 떨고 있네."
승연이 표정을 잔뜩 구겼다.
이젠 자신이 누님을 좋아했던 걸 숨기지도 않는 것 같자 승연은 머리에서 김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비틀어 주원의 손길을 피했다.
"잘도 지껄이는구나."
승연의 말에도 주원은 산뜻하게 웃을 뿐이었다.
주원이 승연의 손을 답삭 잡았다.
잊지 못할 제 기억과 꼭 닮은 촉감이었다.
"안 치워?"
승연은 주원의 손을 얼른 뿌리쳤다.
"손가락 자른다?"
무시무시한 말에도 주원은 웃기만 했다.
승연은 잔뜩 투기를 부렸다.
첫눈에 반한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였다.
"계속 명을 어기면 첫눈을 받아다 네 등 뒤에 모조리 쏟아 부을 것이다."
첫눈이 오면 으레 사람들이 하던 노릇이 있었다.
첫눈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한턱을 해야 하는데, 누가 줬는지 알아 맞추면 눈을 보낸 사람이 도리어 한턱을 냈다.
어차피 권 문학한테 눈을 보낼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주원이 맞춰봤자 손해볼 일도 없었다.
자신은 남는 게 돈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승연은 소복히 쌓인 눈을 야무지게 뭉쳐다 주원의 옷 속에 잔뜩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남은 눈은 그의 얼굴에 박박 문댈 것이다.
"기대해라. 눈만 오면 내가 친히 네 면상을 갈겨..."
승연의 말이 멈추었다.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내려 앉더니 이내 사르륵 녹았다.
"..."
정말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주원은 저벅거리던 걸음을 멈췄다.
"그때 손수건을 건네준 사람은,"
주원이 멈추자 승연의 걸음도 멎었다.
"저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승연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그가 주원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히 지금을 틈타서 허언을 하다니."
승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첫눈 온다고 지금 일부러 날 놀리는 것이지?"
눈이 오는 첫날에 한 거짓말은 강녕전의 주상에게 하여도 용서가 되었다.
너무 뻔한 농에 승연이 주원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주원이 작게 신음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내 그가 작게 웃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예. 맞습니다."
이 허언이 꼭 나쁠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원히 모르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속을 줄 알았느냐."
여전히 가소롭다는 얼굴이었다.
"첫눈이 오는 날에 한 허언은 모두 용서되지 않습니까."
"멍청이."
승연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걸 믿다니."
승연이 성을 내며 일부러 주원을 앞질렀다.
"해서 결국 첫사랑은 누군지 꽁꽁 숨겨둘 생각인 게지."
주원은 승연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화나셨습니까."
"아니다."
"헌데 이미 얼굴에는 화(火)가 쓰여있습니다."
이 사실을 영원한 비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첫눈이 왔으니 오늘만큼은 허언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마음 편한 생각마저 들었다.
"천천히 가십시오. 넘어집니다."
"따라오지 마."
뒤에서 답싹 껴안고 싶어졌다.
주원은 점점 더 빠르게 걸었다.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 와락 껴안으니 화들짝 놀란 승연이 자신을 쳐다본다.
승연이 몸부림치며 팔로 그를 밀어내자 주원은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가 실없이 웃자 그 모습에 더 화가난 승연은 아등바등했다.
겨우 빠져나온 승연이 씩씩거리며 주원을 바라보았다.
"화해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개수작 말라고,"
승연은 말을 멈췄다.
주원이 승연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놀라서 토끼눈이 된 승연은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떴다.
승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던 주원이 고갯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용서하십시오."
하필 이럴 때 첫눈이 내리다니.
승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하얀 눈이 온 세상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수화각 完.
*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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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긴 휴재가 있었음에도 수화각의 마지막까지 오랫동안 봐주신 독자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저는 텍스트본(배포본)으로 정리하여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정확히 언제 올지 예측하긴 어렵지만... 2월 안까지는 수정하여 배포본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