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만력 13년( 1584년) 부터 태업을 시작하였으나 놀라운 신속한 조선지원 결정으로 "고려천자"라는 별호도 하나 가지게 된 신종만력제.
그의 조선 파견군 양식은 조선이 전적으로 부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임진년에는 4만4천 명군의 군량을 조선이 지원했으나
그 다음해 부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된 1593년에서 1597년 중반까지 조선에 주둔한 명군의 수는 1만을 크게 넘지 못했습니다
선수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일(을유) 7번째기사
황제가 산동의 군량 10만 석을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다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내려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이때 바닷길을 통행하지 않은 지 이미 2백 년이나 되었으므로 무관(武官) 오정방(吳定邦)을 여순(旅順)의 어구에 보내어 인도해 왔다.】
선조 41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19일(경자) 9번째기사
비변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군량을 운반할 대책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병(大兵)이 양남(兩南)에 유주(留駐)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아무리 군량을 조치한다 하더라도 탕패(蕩敗)된 뒤라서 곡식을 모아 군량을 대주기가 어렵습니다. 의주(義州)에 있는 당량(唐糧)2018) 외에 산동(山東)에서 계속 운송해 온 곡식이 있으니, 해서 판관(海西判官)으로 하여금 충청·전라 감사와 상의하여 공사(公私)의 선척(船隻)을 다 징발하고 각각 그 고을에서 초공(梢工)2019) 과 양물(糧物)을 공급하게 하며, 첨사(僉使)나 만호(萬戶) 중에서 따로 차원(差員)을 정하여 일시(一時)에 의주로 보내어 내달 안으로 군산(群山)으로 실어 와서 한산(韓山)을 경유하여 공주(公州) 금강(錦江)에 도착시켜 중국군이 주둔한 곳으로 급히 수송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41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28일(기유) 4번째기사
장삼외의 충고에 따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하는 자문을 보내기로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 도사(張都司)가【삼외(三畏). 】말하기를 ‘산동(山東)에 사들인 쌀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쌀은 1만 석도 채 되지 않으며, 요동해(遼東海)에 민간의 비상량(備上糧)이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것은 겨우 1십만 석뿐이다. 지금 2만 명의 유병(留兵)이 하루에 먹는 양이 4백 석이나 되니, 그대 나라에서 어떻게 마련하여 공급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양곡을 청하고자 한다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나라가 잔파(殘破)되어 군량이 떨어졌으니, 끝까지 구원의 은혜를 내려 접제(接濟)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으로 경략에게 이자(移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4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16일(병인) 7번째기사
비변사가 식량 부족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의 큰 걱정은 오로지 각처의 식량이 모자라는 것이니 조처할 계획을 반드시 십분 자세하고 극진하게 해야 할 것은 물론 또 주야(晝夜)로 재촉해서 운반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중외의 군색과 고갈을 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안 창고의 곡식은 쌀과 콩을 합쳐 겨우 3만여 석뿐이어서 보통때의 경비에 쓴다 하더라도 오히려 두어 달 쓸 것밖에 못되는데, 만일 남쪽과 북쪽의 군사가 불시에 많이 오게 된다면 무슨 곡식으로 지공(支供)할 수 있겠습니까. 군색하고 절박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근래의 우리 나라 일들은 한결같이 두서가 없습니다.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오직 군량 한 가지 뿐이데 시종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탓으로 서쪽이나 남쪽에서 달마다 사용하는 것을 모두 살피지 않고 있어 그 동안에 축난 것을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그래도 우리 나라의 양곡입니다. 중국에서 준 양곡은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요한데 전후에 내린 것 가운데 요동(遼東)에서 나온 것이 14만 석이나 되고 이번에 산동(山東)에서 나온 것이 또 12만 석인데, 이미 나온 양곡의 소재(所在)도 모릅니다. 그 나머지 10만 석 또한 장차 계속해서 오게 될 것이니, 평양(平壤)에 운반해 온다면 따로 1인을 시켜 관장하게 하고 오는 대로 받아 쌓아놓고 실제 수량을 파악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 후에 더러는 서울로 운반하고 더러는 평양에 머물러 두고서 중국군에게 지급해야 할 것이요, 앞서처럼 산실(散失)하여 간 데가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일로(一路)의 인력(人力)이 이미 고갈되고 두축(頭畜)2141) 또한 다 없어져서 육로(陸路)로의 운반은 백방으로 헤아려 보아도 방책이 없으니, 역시 김수(金?)로 하여금 따로 계획을 세워 조운(漕運)할 방도를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9일(무자) 3번째기사
청량사 허욱이 곡식을 보내달라는 내용의 자문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다
청량사(請糧使) 허욱(許頊)이 주문(奏文)을 가지고 북경으로 떠났는데 그 주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臣)이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흉적을 막지 못한 탓으로 선조(先祖)의 기업(基業)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신의 나라는 지방이 수천여 리로 크게는 주부(州府)와 작게는 군현(郡縣)이 모두 3백여 구역인데 이것이 병화에 거의 다 타서 창름(倉?)은 빈터만 남았고 전지(田地)는 폐허가 되었으며 죽음을 면하고 보존된 자도 열에 한둘 정도입니다. 그런데 식량이 결핍되어 진구할 방책이 없으므로 당장 백성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게 되었으니 이대로 가면 다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지난해에 내려준 산동의 양향(糧餉)도 해로(海路)가 험난한 관계로 아직 도착되지 않고 있고 숫자도 많지를 않아서 군량과 민식(民食)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 서지를 않습니다. 주야로 노심 초사하고 있으나 구제할 방도가 나서지 않아 부득불 다시 울부짖으면서 은휼(恩恤)을 바라는 바입니다.
신은 이미 많은 흔단을 쌓은 탓으로 왜적의 침구를 자초하여 거듭 성조(聖朝)에 걱정을 끼쳤는데 멀리까지 구원병을 보내시어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 주셨고 은량(銀糧)까지 내려 주시어 군량을 충족시켜 주시었으니, 천지 부모 같은 은혜가 이미 더할 수 없이 높고 후했습니다. 신의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이 은혜를 우러러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신이 급난(急難) 때문에 매양 신청(宸聽)을 번거롭혀서는 안 되지만 힘이 다하여 화가 곧 닥치게 되었으므로 감히 신의 궁핍한 정상을 진달하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가 가까이 동쪽 모퉁이에 있으면서 2백 년 동안 성택(聖澤)에 흠씬 젖어 생치(生齒)가 매우 번성하였고 병난을 당해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액운을 당하여 적봉을 간신히 면한 끝에 거듭 기근이 닥쳤으니 만일 수개월이 지날 경우에는 적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리 나라의 존망(存亡)이 결판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사세는 마치 말라들어가는 수레바퀴 자국 속의 물고기가 물거품으로 겨우 적셔가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침내 말라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적을 퇴치하지 못하고 이 원수를 갚지 못한 채 군신 상하가 먼저 죽어 통분함을 머금고 지하로 들어간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바다 모퉁이에 사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해부(該部)에 명하여 상의, 분발(分撥)하도록 하여 한 나라의 죽어가는 목숨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습니다.”
선조 49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3월 18일() 2번째기사
호조에서 중국에서 운반할 곡식 중 일부를 백성의 목면과 교환해줄 것을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병화(兵火)를 치른 끝에 국가나 개인이나 탕패(蕩敗)되어 한결같이 재정이 텅 비었고 외롭게 남은 백성이 나날이 죽어가는데 여염(閭閻)에서는 곡식 값이 귀하기가 황금 같아서 포목 한 필의 값이 많아야 6∼7승(升)에 지나지 않고 혹은 4∼5승에도 거래됩니다.
경성(京城)에 사는 사람은 국가의 급료를 받는 사람 외에는 살아갈 계책이 없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곧 죽어갈 사람들의 헝클어진 머리와 귀신 같은 몰골은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충분히 구제한다고 하여도 전혀 실질적인 효과가 없어 시체는 쌓여 언덕을 이루며 나날이 심해지는데 이러한 때에 특별한 조처가 없다면 도성은 텅 비고 오직 백골만 남아 쓰러진 삼대 같을 것입니다. 말이 이에 이르니 모르는 사이에 통곡이 터져 나옵니다.
이번에 중국의 식량을 실은 배가 많이 도착하였다 하니 그 중에서 당소미(唐小米) 7백 석을 우선 떼어 내어 법전(法典)의 상평창(常平倉)의 예에 의거, 혹 목면(木綿)이나 면주(綿紬)·은냥(銀兩) 등 가지고 있는 대로 백성이 원하는 만큼 관에 바치게 하고, 그 값어치의 양곡을 시중보다 후하게 주어 양곡이 경도(京都)에 퍼지게 한다면 남은 백성의 죽어가는 목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목면·면주 등의 물건을 양맥(兩麥)이 성숙한 곳에 수송하여 낮은 값으로 곡식을 사들임으로써 백관의 산료(散料)의 비용을 보조한다면 역시 편리하고 유익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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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597-98년에는 만력제의 경제논리와 무관한 식량지원으로(
선조 75권, 29년(1596 / 명 만력(萬曆) 24년) 5월 10일(병자) 2번째기사
왕 동지를 접견하고 식량 문제 등을 의논하다 등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해도 명의 조정과 군부는 식량지원에 매우 부정적 이었지요 ) 조선은 대기근으로 인한 참사를 면 할 수 있었습니다.
선수 32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4월 1일(을묘) 1번째기사
왜적이 남쪽 변방에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중국에서 쌀을 보내 구제하다
이때에 왜적이 남쪽 변방에 주둔하고 있어 백성들이 제때에 농사짓고 수확하는 일을 하지 못해 굶주림이 날로 심해져 중국에서 산동(山東)의 쌀을 운반하여 구제하였다.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활동하고 군리로도 활동한 조경남의 일기인 난중잡록에서는 만력제가 보내준 산동의 곡식 1백만석이 수많은 조선인의 목숨을 구한 사정을 보여줍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 중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b002&gunchaId=&NodeId=&setid=1231119
○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재조번방지 ] 중 병부상서 형개의 상소 중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i006&gunchaId=&NodeId=&setid=1235459
하였다. 이 일에 절(浙)ㆍ섬(陝)ㆍ호(湖)ㆍ천(川)ㆍ귀(貴)ㆍ운(雲)ㆍ면(緬) 남북 군대를 징발한 것이 통계 22만 1천 5백여 인이고,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약 5백 83만 2천여 냥이며,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또 3백만 냥으로서 실제로 쓴 본색 은과 쌀이 수십만 석이었다.
알고 보면 조선 파견 명군은 엄청난 비용을 식량보급비로 지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