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이틀 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빈이를 보기 위해 오늘도 연구소로 향했다. 오늘 오면 이제 시험 끝나고나 볼 수 있겠구나…. 괜히 울적한 마음을 지우고는 한빈이를 보기 위해 마지막 정류소에서부터 열심히 걸었다. 익숙한 길을 지나자 저 멀리에 하얀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평소처럼 웃으며 맞아주는 송윤형을 향해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데 그 뒤로 낯선 차 한 대가 눈에 띈다.
이 곳에 나 말고 찾아오는 사람이 또 있었나…?
처음 보는 차긴 했지만 별달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다른 연구원들 인 것 같았다. 늘 그렇듯 송윤형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가 한빈이에게로 걷다 말고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온다.
" 왜요? "
" 이런 말 하는 거 너무 서운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 무슨 말이요…? "
" 오늘은 한빈이랑 함께 못 있을 거에요. "
네…?
지그시 자신을 올려다 보며 되묻는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은 송윤형은 '오늘은 방 안엔 못 들어가요. 밖에서만.'하고 말해온다. 왜요? 하고 묻는 나에게 송윤형이 짧게 답했다. '한빈이가 다른 사람과 닿으면 안 되거든요.' 한빈이가 있는 방으로 못 들어간다는 건 속상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쉽지만 그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한빈이의 방이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 앞에 섰다.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자 오늘도 역시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한빈이가 고개를 들어 내가 선 쪽을 바라보았다. 날 발견하자 웃어오는 한빈이를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마주보고 선 한빈이와 내 사이에는 유리 창 하나가 가로막고 있다. 닿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손을 들어 괜히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 나 왔어. "
" 왔어? "
" 오늘은 나 못 들어간대. "
" 알아. "
" 아쉽다. 그치? "
내 말에 한빈이도 손을 뻗어 내 손이 있는 곳에 제 손을 가져온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빈이 손의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그 손길이 이상하게도 축 쳐져있는 느낌에 한빈이를 달래듯 말을 걸었다.
" 오늘은 뭐 했어? "
" 운동 하고 밥 먹고. "
" 여기도 당근 나와? "
" 응. "
" 당근은 다 먹지? "
" 당연하지. "
이제 편식도 안 하고. 예쁘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그 눈을 마주하곤 웃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늘 함께 웃어주던 한빈인데 오늘은 함께 웃는 것 대신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오늘 따라 왜 안 웃어주지…. 예쁘게 웃는 모습 보고 싶은데.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 오늘 오면 우리 일주일 뒤에나 볼 수 있어. "
" …. "
" 늦게 가면 돌아가는 차가 없어서 오늘은 일찍 가봐야 해. "
" …. "
" 나 시험 잘 치고 올게! "
기운 없는 한빈이를 위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가 그대로 다시 유리창에다 가져다 댔다. 이게 뽀뽀 대신이야. 내 속삭임에 평소의 한빈이였으면 피식 웃었을 텐데 한빈이는 여전히 웃음 없이 날 바라보기만 한다. 그냥, 그렇게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빈이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그대로 내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 뭐야…. "
" …. "
" 오늘은 웃어주지도 않고. "
" …. "
" 얼굴 보려고 왔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기야? 나 좀 봐 한빈아, 응? "
시험때문에 못 온다고 말했을 때도 저렇게 축 처져 있더니 그것 때문에 여태 저렇게 속상한 걸까. 날 바라보지 않는 한빈이에게 나 좀 봐, 응? 하고 살살 달래듯 말을 걸자 한빈이가 힐끔 이쪽을 바라봐온다. 그 짧은 찰나, 한빈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빈이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 너… 울어? "
김한빈이 울고 있다.
내 물음에 한빈이가 고개를 위로 들어 애꿎은 천장만 바라봤다. 그렇게 아무 말 없는 한빈이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한빈이가 우는 건 처음이라 순간 너무나도 당황해서 한빈아, 하고 그 이름만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한빈이가 눈을 꼭 감았고 눈물이 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왜 울어… 응? "
" …. "
" 하필 오늘은 그 안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왜 울고 그래…. "
" …. "
걱정되는데 안아줄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속상하고 또 화가 났다. 왜 우는거야, 한빈아….
우는 그 모습에 덩달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빈이가 우는데 나까지 같이 울어버리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리고는 닿을 수 없는 한빈이를 대신해서 유리창만 계속 쓰다듬었다.
…울지 마. 응?
한빈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런 한빈이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밖으로 나와 힐끔, 뒤를 돌아 연구소를 바라보니 오늘따라 저 새하얀 건물의 분위기가 다른 것만 같다. 늘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빈이를 보았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는데 오늘은 어쩐지 다른 날보다도 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버스 안에서도, 집으로 걸어가는 그 시간 동안에도 한빈이의 우는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우는 그 모습이 생각나서 나도 괜히 울적. 계속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품에 안은 가방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괜찮아, 시험 끝나고 올 거잖아.
일주일만 기다려.
일주일 뒤에 봐, 한빈아.
*
한빈이와 내가 서있는 곳은 하얀 모래로 덮힌 곳이었다. 앞에는 안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이는, 정말 말 그대로 푸른 바다가 있었고 우리가 서있는 곳 뒤에는 지금 이 곳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나무로 된 작은 집이 있었다.
김한빈은 늘 그렇듯 제 팔을 내게 걸어왔다. 한빈이의 품에 꼭 안긴 채로 한빈이의 허리에 내 팔을 감았다. 이 곳에서는 아무 걱정도 없었고 복잡한 생각도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바람은 바다의 향을 흠뻑 머금은 채로 시원하게 불어와 내 코를 간지럽혔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이 흘렀다.
내 웃음에 한빈이가 웃었다.
여기 어때? 한빈이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선물이야. 나랑 여기서 살자.
한빈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이유 없이 미소가 지어졌다. 같이 안 살아 주면 어떡할 거야? 장난을 가득 담아 묻는 내 질문에 한빈이가 절대 못 그럴 걸, 하고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을 해 온다. 넌 나 없으면 못 살잖아.
뭐라고 답을 할까 잠깐을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는 거 같아. 그러고는 둘 다 기다렸다는 듯 웃음이 터져버렸다.
앞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시원한 바람, 따뜻한 햇빛, 그리고 내 옆의 너.
그 곳의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절로 눈이 떠졌다. 잠에 든 것이 아니라 마치 감고 있던 눈을 뜨는 것 처럼 슬며시 눈을 뜨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나도 기분 좋은 꿈이였다. 꿈 속의 한빈이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한빈이보다 더 행복해 보였던 건 바로 나였다.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그렇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봤다.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쥐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시험까지는 3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알람보다도 일찍 깨버린 탓에 울리기로 했던 알람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꿈이 주는 그 느낌이, 그 여운이 너무나도 좋았다.
왠지 한빈이가 시험 잘 보라고 얘기해 주는 것만 같다.
벌써 일주일이나 못 본 한빈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다 문득 시선이 책상 위의 액자 속에 닿았다. 그 곳에서는 짧아진 머리의 한빈이와 내가 어색하게 웃고 있다. 얼마 전 연구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한 장 찍자는 내 말에 한빈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더니 저런 어색한 웃음을 보여왔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정말 내가 김한빈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꿈에서도 보고 사진에서도 보고. 저 늑대는 볼 수록 자꾸만 더 보고 싶었다.
마지막 시험을 보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펜을 놓았다. 공부한 만큼 적은 것 같아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치고 나왔다. 다 치고 나오니까 시험을 칠 때 보다 내 마음이 더 빠르게 쿵쿵댄다. 아마도 한빈이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익숙한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들떴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익숙한 도로를 지나 익숙한 길을 걸어 익숙한 건물에 도착했다.
늘 나를 맞아주는 그 남자가 이상하게도 오늘은 보이질 않는다. 바쁜 일이 있나…. 항상 그랬던 것 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느낌이 뭔가 이질적이다. 묘하게 이상한 느낌을 느끼며 건물의 자동문 앞에 섰다. 자동문 센서가 나를 감지함과 동시에 자동문이 열렸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이 새하얗기만 한 복도였지만 오늘의 이 곳은 뭔가 이상했다. 늘 느껴지던 사람의 느낌도, 하다 못해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이 곳은 마치… 텅 빈, 버려진 건물에 온 것만 같았다.
이상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복도를 지나 한빈이가 있는 그 곳의 문을 단번에 열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 아무도 없었다.
한빈이가 늘 읽던 책도, 한빈이가 잠을 잤던 그 침대도, 식탁도, 의자도, 아무 것도 없었다.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방을 나와 다른 방 문을 열었다. 맞은 편 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에는 작은 가구 하나도 없었다. 그저, 하얀 벽지가 칠해진 비어있는 방이 전부였다.
미친 듯이 복도를 거닐며 그 곳에 있는 모든 방의 문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다른 방도 모두 같았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곳인 것 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겨우 일주일 전에 이 곳에서 한빈이를 봤는데…. 갑자기 한빈이가 사라졌다. 한빈이 뿐만 아니라 이 곳에 있던 모두가 사라졌다. 그 남자도, 다른 연구원들도, 이 곳에 있던 또 다른 늑대 인간들도 모두.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송윤형의 번호를 찾아 주저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울리는 통화음.
그리고 받지 않는 전화.
통화를 할 수 없다는 안내 메세지가 나옴과 동시에 내 손에서 바닥으로 휴대폰이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김한빈은 그렇게 사라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그 때, 아무런 말도 없이 잠깐 스쳐간 바람 처럼, 그렇게.
*
나는 오늘도 네가 있던 그 곳에 다녀왔어.
연구소 옆에 비어있던 그 언덕 기억나? 그 곳이 전부 노란색으로 변한 거 있지.
어느새 네가 좋아하는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왔나 봐.
아직 여긴 날이 풀리지 않았는데 네가 있는 그 곳은 어때?
오늘도 보고 싶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빈아….
*
겨울이 지나 봄이 되었다. 두껍게 입던 옷들은 다들 한결 가벼워졌고 춥기만 하던 날씨는 조금 따뜻해졌다. 하지만 아직 이른 봄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침과 저녁은 꽤 쌀쌀한 느낌도 들었다. 조금은 춥게 입고 온 나는 운동장을 향해 걸으며 입고 있던 코트를 조금 여몄다. 봄과 함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학교에는 온통 새내기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는, 누가 봐도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신입생 무리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덩달아 작게 웃음이 났다.
한빈이는 지난 겨울이 오기 전 그렇게 사라졌다. 송윤형이라는 그 남자도, 그 연구소에 있던 모든 늑대들과 늑대 인간들도 마치 없었던 일인 것 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아니. 사실은 너무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송윤형의 번호, 그들이 있었던 그 연구소, 둘이 함께 찍었던 사진, 집안 곳곳에 김한빈이 남겨둔 흔적. 무엇보다도 가장 날 많이 괴롭혔던 건 내 기억이었다. 김한빈과 함께 했던 추억들.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연락을 해보려고 수 없이 많은 전화를 했고, 매일같이 그 연구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고 바보 같이 그제서야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매일을 울며 보낸 한 달. 그리고 더 이상의 눈물이 남아있지 않은 지금. 여전히 나는 김한빈이 사라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빈이와 학교를 구경하러 왔을 때에 잠깐 앉았었던 그 벤치에 몸을 앉혔다. 학교, 그리고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우리 과 신입생인 건지 앳된 얼굴의 무리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해온다.
" 안녕하세요! "
" 응. 안녕. "
" 선배님. 조금 있으면 저희 신입생 환영회 하는데 선배님도 오실 거죠? "
" 나? 잘 모르겠는데…. "
" 에이, 오시면 안 돼요? 저희는 선배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
뭐가 그렇게 수줍은 건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그 모습들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났다. 생각 해볼게. 하는 내 말에 오세요, 오세요, 하고 조르던 새내기들은 수업에 늦겠다며 그대로 또 쪼르르 강의실을 향해 달려간다. 가면서 내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아이들이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아주 문득 내 시선에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보인다.
김한빈…?
저 뒷모습은 분명 김한빈이다. 김한빈을 꼭 닮은 그 뒷모습에 순간 몸을 벌떡 일으키곤 뭔가에 홀린 듯 멀리 보이는 그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신입생들로 인해서 복잡한 사람들 속을 뚫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따라 걷는데, 잠깐 시야가 가려짐과 동시에 그 남자가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살펴도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 진짜 큰일이다…. "
괜찬아 진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헛것이 보이기까지 하는 구나.
나도 모르게 바람빠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정말 누군가 날 끌어 당기고 있는 것만 같이, 그렇게 벌떡 몸을 일으켜 그 남자를 따라온 내 모습이 우스웠다. 바보 같아…. 의미 없는 웃음을 몇 번 뱉고는 차가운 공기 때문에 손이 시려오는 느낌에 양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발걸음은 늘 가던 그 곳으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나 그 곳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가 오기만 기다리는데 동기 한 명이 내 어깨를 툭 쳐 온다.
" 너 오늘도 어디 가냐? "
" 어? 아,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
" 매일 어딜 그렇게 가. 신입생 얼굴도 익히게 과모임 같은 것도 좀 나오고 그래. "
" 신입생 보면 뭐 해. "
밥 사주는 것 밖에 더 하겠어? 내 말에 동기가 킥킥대며 웃었다. 하긴 그렇네.
먼저 가겠다며 버스를 타고 가는 동기에게 손을 흔들곤 휴대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끼웠다. 몇 곡 듣지 않았는데 금방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에 몸을 올렸다. 아직 추운 날씨 때문인지 버스 안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자리에 앉아 창가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때 마침 귓가에 흘러나오는 노래도 조용하고….
" 학생, 안 내릴 거야? "
버스 기사님의 목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깼다.
나른하단 기분이 들긴 했지만 정말로 잠들어 버릴 줄은 몰랐는데…. 급하게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곤 아저씨를 바라보자 늘 이 곳에 내가 내리는 걸 아는 분이신 듯 웃으며 날 바라보고 계신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몇 번을 불러도 잠을 안 깨고, 아주. 아저씨의 말에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깨워 주셔서.
버스의 문이 열리고 바깥 공기가 볼에 닿자 마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버스 안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의 온도 때문에 볼이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이 곳은 늘 그랬다. 다른 곳 보다도 훨씬 구석진 곳에 있어서, 그리고 훨씬 높은 곳에 있는 탓에 바람도 많이 불었고 기온도 훨씬 낮았다.
어느새 많이 자란 풀들이 옷 위를 스쳤다. 이 곳은 그대로였다. 한빈이를 포함한 모두가 사라진 그 때의 모습 그대로.
자동문 앞에 서자 늘 그렇듯 센서가 날 인식하고 문을 열었고, 텅 비어버린 그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연구소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 때의 일들은 모두 꿈이 아니라고.
꿈이 아니었는데 대체 어딜 간 걸까.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늑대 인간이라는 것 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 꿈이라도 꾼 걸까. 그게 다 한 겨울 밤의 꿈이였을까? 혹시 내가… 미친 걸까.
한빈이가 있던 곳, 한빈이를 마지막으로 본 날 마주보고 섰던 그 유리 앞에 다시 섰다. 그 때 처럼 손을 뻗어 유리를 만지는데 한빈이의 온기가 맞은 편에서 전해져 오지 않는 이 유리는 너무나도 차갑다.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보다 머리도 많이 길었고 살도 빠졌고. 시간이 지났고 그 때의 나와는 제법 달라져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동안 겨우 잡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이제야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손으로 그 유리를 그 때 처럼 한 번 쓸어보고는 천천히 손을 뗐다.
이거면 됐다.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아.
그치… 한빈아.
그 곳을 나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그 건물을 한 번 바라보았다.
" 이제 다신 오지 말자. "
혼자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 날 이후로 매일을 습관처럼 들린 곳이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없는 이 곳에 추억도, 모든 것도 다 두고 갈게. 김한빈, 너는… 정말 꿈이었던 것 같아.
이제는 널 잊어야 할까 봐.
도로가 보이는 곳까지 내려와 아까 내렸던 그 정류장의 반대 편 정류장에 앉았다. 언제 버스가 올까 기다리며 신발 끝으로 바닥만 툭툭 찼다. 이어폰을 꺼내 노래라도 들을까 싶었지만 휴대폰 속에 있는 노래들은 이미 몇 번을 반복해서 들은 탓에 다 지겨웠다. 대신에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편했다.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시간이 지나면 더 괜찮아 지겠지.
그렇게 가만히 바람 소리를 듣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주변 공기가 바뀐 듯한 느낌이 든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 때를 맞춰 내 앞으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금방 누군가 맞은 편에 서 있는 걸 본 것도 같았는데…. 때 마침 그 사람과 내 사이를 지나가는 버스 때문에 내 시야에서 그 사람이 가려졌다.
" 누구지…. "
익숙한 사람 같았는데.
그렇게 짧은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초점이 바로 맞지 않아 흐릿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는데 점점 초점이 맞아지며 그 남자의 얼굴이 내 눈에 맺혔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세상이 멈췄다.
한참을 귓가를 간지럽히던 그 바람 소리도 멈췄고 지금 이 순간에 이 곳에 존재하는 건 오직 저 사람과 나 뿐인 것 같았다.
바닥을 툭툭 차던, 까딱이던 발이 멈췄다. 눈에는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고 다시 한 번 그 사람이 천천히 흐려졌다.
맞은 편의 그 사람은 내 쪽으로 뛰어와 내 앞에 섰다.
그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내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갈라진 앞머리가 하늘거렸다.
" 안녕. "
검은 정장을 입고는 날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숨 쉬는 법 마저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 모습만 그렇게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보는데 그는 날 보며 웃어왔다. 그렇게나 익숙했던 그 얼굴 그대로.
" 학교에 있을 줄 알고 열심히 찾아 다녔는데 여기 있었네. "
" 너……. "
" 보고 싶었어. "
너도 그래?
웃으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인 그 사람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김한빈이었다. 다정하게 웃어오는 그 웃음을 보고 그대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 …한빈이야? "
" 응. "
" …이거 또 꿈이구나. "
" 꿈 아냐. "
" …진짜… 김한빈… 맞아? "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김한빈에게로 팔을 뻗어 그 목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제야 나타난 그 이유도, 궁금한 것이 투성이였지만 그런 건 나중 일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김한빈이라는 사실에 더 물을 것도 없이 그 품에 고개를 묻었다.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흐으, 하고 흐느끼는 내 소리에 한빈이가 등을 토닥여온다.
" 울지 마. "
" 어디 갔었어… 이 나쁜 놈아…. "
" 미안해. 미안, 미안. "
계속해서 우는 내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토닥이는 김한빈의 손길. 아까 유리창 위에서 느끼지 못했던 그 따뜻함이 여기에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 하던 이 향기도, 이 목소리도 다 여기에 있다. 겨우 숨을 죽이듯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렸다. 더 크게 우는 내 울음소리에 한빈이는 그냥 그렇게 내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내가 다 울 때 까지 기다려 주는 것 처럼. 조금씩 내 울음이 잦아들었고 그 품을 다독이던 한빈이가 내 등을 몇 번 쓸더니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만 울어. 응?
품에 안긴 채로, 그 목을 끌어 안은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의 웃음소리가 울려서 들려온다.
너 보면 하고 싶었던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들어줄 거야?
눈물을 흘리면서 그 품에서 고개를 떼곤 한빈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마지막에 본 모습에서 머리만 조금 긴 채로, 검은 머리를 한 한빈이는 자기를 안은 내 팔을 풀곤 제 손으로 내 양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 뭔데… 하고 물어보는 내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그 목소리에는 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 울보. 못 생겼어. "
그게 할 말이야…? 나 못 생긴게…? 서러운 마음에 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한빈이를 올려다 보며 표정을 살짝 찡그리자 김한빈이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저어온다.
" 나 이제 늑대 아니야. "
순간 들려온 한빈이의 말에 누군가 나를 때린 듯 멍해졌다.
그럼 그 연구 성공한 거야…? 내 물음에 한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잊고 지냈던 송윤형,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그렇게나 미워했던 사람. 꼭 성공하겠다고 약속했던 그 남자였다. 결국은 성공 했구나.
" 그리고 하나 더 있어. "
" …뭔데. "
마지막으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을 내 손으로 닦아냈다. 지금 이렇게 날 바라보고 있는게 김한빈이라는 사실이 눈을 마주칠 때 마다 새로웠다. 정말 잠깐도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불과 몇 분 전이었다. 널 잊어도 되겠다고 말한게. 하지만 다시 마주한 김한빈을 보며 깨달았다. 잊으려고 마음 먹는다고 해서 쉽게 잊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구나.
문득 예전에 꾼 꿈이 떠올랐다. '넌 나 없으면 못 살잖아.' 하고 내게 말해오던 김한빈의 말이 머리에 울렸다.
당연하다는 듯 나는 대답했었다. '그런 거 같아.' 하고.
그 꿈이, 그냥 꿈이 아니었구나.
정말 그런 것 같아. 한빈아.
나는 널 잊을 수가 없었어. 네가 필요해.
한빈이가 내 양 볼을 잡았다. 가만히 내게 맞춰오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작스럽게 한빈이의 얼굴이 내게로 다가왔다. 눈물이 가득 담긴 내 눈에 닿았다 떨어지는 김한빈은 차례대로 내 코, 양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아무 말 못하는 내게 한빈이가 물어온다.
내가 무슨 말 할 거 같아?
…모르겠어.
내가 짧게 대답했다.
"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말이야. "
마지막으로 잠깐 날 바라보다가 내 입술에 조금은 길게 닿았다 떨어진 김한빈이 씩 웃어 온다.
" 사랑해. "
개 같은 김한빈 키우기 完
♡
두 편에 걸쳐서 진행될 것 같았던 내용을 '마지막화' 한 편에 담아 왔어요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한빈이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 그리고 몇 편의 특별편은 다음과 그 다음에 걸쳐서 담아 오도록 할게요
제 사랑 이쁜이들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기와 뒷 이야기에서 찾아 뵐게요
안녕, 개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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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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