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박카스
W. 리플(Riffle)
BGM) F(x) - Love Hate
▶ 박카스 두 병 : 사랑의 불시착
(부제: 몰카의 결말이 궁금하다!)
물고있던 빨대를 떨어트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려니 쯧, 하는 소리와 함께 잔에 새 빨대가 하나 꽂혔다. 백현은 꿈벅꿈벅 눈만 감았다가 떴다.
얘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거야?
"아 그러니까! 너가 모른 척하고 경수만 속여주면 된다니까?"
"한번만 도와줘라 백현아"
"…나보고 지금 그걸 하라고?"
"응!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어. 재밌을 것 같지도 않고 난 하고 싶지도 않아! 너네 이거 일부러 사준거지. 나 빼도 박도 못하게 하려고! 백현은 짜증스런 얼굴로 반 쯤 비운 음료수잔을 흔들어댔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려고 나 불러낸 거였어. 심지어 입 막음 하려고 밥에 음료수까지 쐈다고! 무서운 것들….
백현은 양의 탈을 쓰고 제 앞에 앉아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동기들을 노려보았다. 몰카를 도와달라니. 그것도 도경수를 타깃으로 삼아서.
안 그래도 내심 불안하던 터였다. 지난 밤, 술자리에서 경수와 백현이 저들을 몰래카메라로 골탕먹인 걸 벼르고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동기들이 준비해왔다는 몰카의 내용을 듣자마자 백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단숨에 음료수를 들이켰다. 톡 쏘는 탄산이 들어가자 목이 따끔거렸다. 이래서 여자들이 무섭다니까.
"나도 너네 속였는데 애꿎은 나를 끼워서 주동자로 만드려는 이유가 뭐야?
"경수가 속는 게 더 웃길 것 같아서! 그리고 이건 너네 둘이 해야 잘 어울리잖아"
아니 이것들이. 백현은 이를 아득 갈았다. 귓볼의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외침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얼굴들을 보고있자니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그래. 몰카를 도와달라는 것까지는 괜찮다 이거야. 근데 이건 내용이 너무 불순하잖아! 도경수에게 뜬금없이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라니!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도 없는 각본을 가져와 놓고서 나한테 연기를 하라니! 나는 심지어 남잔데!
"저기. 너네가 흥분해서 중요한 걸 잊었나본데. 나는 남자야. 대한의 건아라니까?"
"그래! 그래서 하라는 거야"
백현은 들려오는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혔다. 어쩐지 요즘 들어 경수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
소름이 돋아난 팔을 쓸어내렸다. 저게 뭐가 재밌을 거라고 나한테 시키려고 드는지. 분명 저것들 머릿속엔 새빨간 영상으로 가득할거야.
"결론은 그거잖아. 너네 좋으라고 몰카를 하겠다는 거 아냐. 심지어 나까지 팔아먹고!"
"에이, 팔아먹는 건 아니다"
"웃기네! 그런 거에 도경수가 좋다고 넘어가줄 것 같냐?"
"백현아. 모든 건 너에게 달렸어"
"와, 진짜…"
됐다. 너넨 시간이 남아도냐? 백현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옆자리에 놔뒀던 백팩을 어깨에 걸치며 연신 불만을 터뜨렸다.
나더러 게이 역할을 하라니. 내가 너무 남자답지 못한 모습만 보여줬나봐. 이젠 나를 여자로 착각해!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단단히 삐진 백현의 마음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뭐야. 어디가게?"
"몰라. 너네끼리 재밌게 해라. 어차피 경수는 불러도 나오지도 않을껄?"
백현은 틱틱거리며 카페를 나서려다가 팔을 잡아당기는 악력에 이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백현아. 어딜 가려고?
어어, 툭 튀어나온 입을 집어넣을 새도 없이 백현은 제 가방을 뺏으려드는 동기들을 손을 막아내려 반사적으로 가방끈을 쥐었다. 힘이 여간 센 것이 아니였다.
백현은 울상이 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우선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인데.
"너 이대로 가면 우리가 사줬던거 그대로 우리한테 쏴야 할텐데?"
마주보고 서서 가방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손이 움찔 떨려왔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작게 감쳐물었다. 그리곤 슬그머니 저가 앉았던 의자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내가 뭐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찝찝했던 느낌은 단순한 기분 탓 같은 게 아니었다. 과 동기들과 친해진 날로 따지자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저와 경수를 놀려먹으려고 안달이 났다.
이제 조금 친해졌는데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왔다.
첫 만남 이후 경수와 백현은 부쩍 가까워졌다. 유독 과에 여자가 많은 탓도 있었지만 둘은 자의든 타의든 줄곧 붙어다녔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기들끼리 두루두루 친해지긴 했지만 여자들끼리만의 분위기라는 것도 있었고 다른 남자 애들은 저와 이렇다 할 공통의 관심사가 없어서 어울리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백현은 경수가 편했다. 초기에 퍼졌던 소문만 듣고 경수를 개 싸가지라고 단단히 오해했었지만 알고보니 나쁜 애도 아니었고 오히려 경수가 덜렁거리는 저를 챙겨주려고 나섰다. 경수는 강의가 없는 날이면 백현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밥도 차려주고 둘이 영화도 보고, 둘이 있으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둘이 어울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경수가 백현에게 관심이 많아서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마냥 좋다고 헤실거리는 저를 귀여워 한다는 게 좀 신경쓰이긴 하지만, 어쨌든!
백현은 이번 학기만 끝나면 기필코 기숙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혼자 자취를 하는 경수를 보면서 무언가 부럽기도 하고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찬열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막상 기숙사를 나간다고 하면 제일 섭섭해할 사람이 찬열일 게 분명했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 우정 변치말자, 라는 졸업식에서의 눈물겨운 포옹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처럼 가물가물해졌고 어쩐일인지 요 근래 찬열의 얼굴도 보기가 힘들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숙사의 방까지 같이 쓰고있지만 과 자체가 다르기도 했고 강의를 듣는 건물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쉽게 마주질 기회가 없었다.
"…찬열이한테도 경수 소개시켜주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를 낼 때면 경수는 그저 백현의 머리만 살살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백현은 애꿎은 의자다리만 발로 차며 눈꼬리를 잔뜩 늘여뜨렸다. 하여간 지금 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제 곧 경수가 도착할 터였다.
경수야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여기로 와주면 안돼?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저를 달래주려 허겁지겁 달려올 경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몰카라고 하면 나 경수한테 두들겨 맞는 거 아니야? 백현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카페 테이블에 엎드려버렸다.
지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자신도 어안이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밥 사준다고 할 때 강아지마냥 쫄래쫄래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경수에게 만나자고는 했지만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저 멀리 카페 맞은 편 횡단보도에 서있는 경수의 얼굴이 보였다.
백현은 핸드폰의 홀드만 만지작거렸다. 이젠 피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동기들한테 밥을 쏠만큼 지갑이 두툼한 것도 아니고.
"백현아!"
카페의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백현은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여기까지 뛰어온건지 경수는 백현의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숨을 몰아쉬었다.
백현은 막상 경수의 얼굴을 보니 뭔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미안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경수는 백현을 보며 까맣게 타들어간 속을 추스리고 있었다.
한참 과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백현의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모든 행동을 멈추고 달려온 탓이었다.
이런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경수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을 마주하곤 안절부절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왜 그래, 응?"
헝클해진 머리는 안중에도 없는지 계속 백현의 얼굴만 살피기에 바빴다.
"어디 있었는데 여기까지 뛰어와. 안 그래도 되는데"
"애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인데 그럼 뛰어와야지"
그래도…. 아 진짜, 경수야 이거 얼른 마셔…. 제 앞에 놓인 음료수잔을 쥐어주는 손이 참 작았다.
백현은 정말 울고싶었다. 어디선가 둘을 지켜보고 있을 얼굴들이 생각나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지금만 잘 넘기면 되니까!
"그래. 할 말이 뭔데?"
"아, 그게…."
백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연거푸 마른 숨을 내쉬면서 살살 경수의 눈치를 보았다. 연기인지 진짜 속앓이를 해오던 걱정이 있는건지 어두워진 얼굴은 조용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을 하려는 듯 하지 않는 모습에 경수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을 했다.
"뭐야. 왜 그래"
"아 진짜, 아… 어떡하지"
수능시험을 칠 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아. 작게 심호흡을 하며 백현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이것만 잘 넘기면 되는거야. 경수는 나를 이해해줄거야!
잠시 주위를 살피던 백현이 무언가 결심한 듯 경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백현의 눈이 반짝였다.
"경수야"
"응?"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백현아"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벌어져 있던 경수의 입이 꾹 다물렸다. 테이블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즈막하게 깔리는 카페의 노랫소리가 멎고 완벽한 고요에 휩싸였다.
당황해할거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경수는 올곧이 백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반응이 왜 이러지? 백현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막, 당황해서 무슨 소리를 하냐며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백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바짓춤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어느새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수습을 하든 백현은 이 가시방석을 벗어나고 싶었다. 속으로 십초만 세고 경수한테 사실대로 털어놔야겠다. 10, 9, 8 ….
"…진심이야?"
"어?"
"아. 어떡하지. 백현아. 나는, 나는 잘 모르겠다"
"경수야 잠깐만!"
경수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오히려 백현이 말을 버벅거렸다. 진지해진 경수의 목소리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감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얘가 지금 뭐라고 그러는거야. 백현아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무슨 생각할 시간을 줘!"
자신의 머리를 잡아뜯으며 작게 한숨을 내뱉는 모습을 지켜보며 백현은 가슴팍을 두어번 두드렸다. 혼자 삽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간 저가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거 몰카야"
"뭐?"
"몰카라고, 이 멍청아!"
백현은 경수에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경수야 미안해. 알았다니까. 장난인 거 알지? 응. 근데 이것 좀 놔주면 안돼? 나 팔 아파. 자신의 손과 맞물려있는 곳을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는 경수의 모습에 눈만 꿈벅꿈벅 떴다. 그리곤 딱밤을 놓듯 콧등을 딱, 튕기는 손가락에 백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린거야"
"화 풀렸다면서, 왜 그래"
"생각해보니까 너가 너무 괘씸해서"
딴 애들은 그렇다고 쳐도 너가 어떻게 나를 골려먹냐. 그렇게 안봤는데. 배신이다, 변백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백현은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몰래카메라였다고 사실을 고하자 억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통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려다보이는 뒷통수를 작게 쓰다듬어주곤 경수는 백현을 끌며 카페에서 나왔다. 어디가냐는 물음에 밥이나 먹자며 싱긋 웃는데 백현은 그저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근데 너 아까 진짜 진심인 줄 알았어?"
"아니"
"에이, 거짓말 하네! 완전 진지했으면서"
"백현아"
"응?"
사뭇 진지해진 표정에 백현은 눈만 도륵도륵 굴렸다. 얘도 참 뜬금없지만 뭐라고 자신에게 말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아랫입술만 혀로 쓸었다.
"나 너 좋아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경수의 얼굴이 들어찼다. 놀리려던 목소리가 다시금 쑥 가라앉았다. 머릿속이 까맣게 암전이 되었다가 금세 파고드는 현란한 불빛에 백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뭐라고 그런거지?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을 그려보다가 순간, 화악 달아오르는 볼주변에 백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러면 너도 당황하잖아. 한번만 더 그랬단 봐"
경수는 얼어있는 백현의 얼굴을 보며 씩 웃곤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놓았던 손목을 다시 그러쥐곤 앞서서 걷기 시작하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백현은 경수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손목에서 내려와 손바닥을 마주잡는 경수의 손이 뜨거웠다. 화끈화끈 불에 데인 듯 흰 손목에 빨갛게 손자국이 남을 것만 같았다.
"백현아"
"응!"
"햄 구워줄테니까 우리 집에 가자"
나긋나긋한 경수의 목소리에 백현은 결국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나도 참, 경수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