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 오던 날이었다. 파란 우산을 쓰고 책을 사러 갔었다. 근처에 서점이 없어 꽤 멀리까지 나갔다. 시집 하나, 영화에 관련된 책 하나를 고르고 계산대에 올려뒀을 때, 계산대 바로 옆에 있던 출입문의 종이 딸랑이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눈을 들어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교복. 내가 전학 가게 될 학교 교복이었다. 다시 눈을 내렸다. 계산이 끝난 책들을 봉투 안에 넣고 서점을 나서 파란 우산을 잡아 폈다. 빗방울들이 떨어진다.
그 애를 처음 본 날이었다.
2.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던 날, 그날도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어느정도인지 가늠도 잘 안 되고 해서, 첫 차를 타고 학교에 가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건 버릇이 들어서인지 수월했다. 파란 우산을 들었다. 버스에 올랐는데, 이미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애가 하나 있었다. 왜 이렇게 멀리까지 학교를 다니지? 의아했지만 궁금하진 않았다. 자리에 앉았다. 빗방울이 버스 창을 두드렸다. 전학 후,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이다.
3.
학교는 생각보다 꽤 멀었다. 꼭 첫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난 아침마다 첫 차를 탔고, 아침마다 그 남자애를 보았다. 그 남자애를 보고 든 생각은 이거였다. 참, 하얗다.
4.
전학은 처음이었지만 꽤나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공부를 잘 하는 학교라선지 애들은 얌전했고, 딱히 적응할 만한 것도 없었다. 평화로웠다.
언제나 아침마다 버스를 탔고, 그 남자애를 보았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어, 금방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 같은 날씨임에도 언제나 마이만 입고 있는 그 남자애. 하얀 피부와 짙은 남색의 교복이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추워보였다. 붉은 귀. 나는 내가 입은 파란색의 후드집업을 내려보았다.
시간은 지나, 방학이 되었다. 하얀 피부가 어른거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방학이 끝났다. 하얀 피부를 마주하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2학년이 코앞이었다.
5.
2학년이 되었다. 반을 찾아갔을 땐 이미 한 남자애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하얀 피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다.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결 좋아보이는 까만 머리카락. 세모꼴의 눈. 하얀 피부. 묘하다. 오래 눈을 마주치려 한 건 아니었지만, 꽤나 오랜시간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소란스러운 여자아이들 두 명이 반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아이가 시선을 돌렸다. 난 가방을 내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다. 약간 기분이 붕 뜬 느낌이 든다.
가라앉지 않는다.
6.
난 나를 내리치던 주먹을 기억한다. 그 발을 붙잡고 일어났던 기억도. 미친듯이 달렸다. 숨이 가파랐다. 그날의 기억. 나는 정말 죽지 않을 만큼 맞았고 죽을만큼 뛰었다. 밑창이 다 닳았던 컨버스화. 손목엔 시계에 눌린대로 빨간 상처가 있었고, 이마를 타고 흐른 핏방울이 눈에 들어갔다. 눈을 부여잡았지만, 비명지를 숨도 없었다. 달리는 다리를 멈출 재간도 없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저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열여섯 동생의 쫙 핀 손가락들... 엄마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린다.
열일곱의 밤이었다.
7.
뒤숭숭한 꿈을 꾸고 학교에 등교하자니 기분이 꿀꿀했다. 개학식 이후 2학년 첫 등교날인데, 늦게 일어나 첫 차도 놓쳤다. 그 남자앤 오늘 못 볼건가 보다. 뭐, 이제 같은 반이니 아마 학교에서 보겠지만.
첫 차를 놓치니 지각을 했다. 선생님은 첫 지각자들에게 단단히 본보기를 보여줄 생각이셨던건지, 남아서 깜지를 쓰고 가라고 하셨다. 나와 한 네댓명 쯤 되어보이는 아이들은 야유를 내뱉었지만, 선생님은 완고하셨다. 아, 하고 탄식섞인 목소리를 내뱉은 나를 맨 왼쪽 줄 창가자리 다섯 번째 자리에 앉은 그 남자애가 쳐다보고 있었다. 또 눈이 마주쳤다. 째졌지만, 딱히 사납진 않은 눈초리. 머리카락이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풋 흔들린다. 고개를 돌린다. 동그란 뒷통수.
8.
운동을 꽤 잘했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새학기가 시작한지 3주정도 지나고 있지만, 그 애가 말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버스에서도 늘 같았다. 같은 반인데, 좀 친근하게 굴 수도 있는데, 딱딱하다. 기분이 애매했다. 그애를 신경쓰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새학기들어 새 친구를 사귀었다. 이름은 정혜진. 예쁘장한 애다. 눈은 좀 작지만, 하얗고 홍조있는 볼이 귀엽다.
아, 그 남자애의 친구들은 일정하다. 약간 밝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애와, 농구부에 있는 애들 몇 명. 그 애들과 점심을 먹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특별한 일 없으면 늘 자리에 있는 쉬는시간과 달리, 점심시간엔 늘 그 아이들과 운동장 구석 농구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요즘들어 생각의 끝은 늘 그 애인 것 같다.
9.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난 날이었다. 버스 타러 나가기에도 조금 시간이 남아, 거실 쇼파에 앉아있었다. 물을 마시러 나오신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시곤 손짓하셨다. 이리 와 봐.
"왜요?"
물을 조로록 따라 한 입 들이키신 할머니가 한숨을 한번 푹 내쉬더니 나를 올려보셨다. 뜸이 길었다. 겨우 입을 여신다. 엄마랑 동생, 만나봐야하지 않겠냐. 너무 뜬금없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 반문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한 번 더 말씀해주셨다.
"느이 엄마랑 동생, 아직도 그러고 살고 있을 것 아니냐."
"......"
"만나봐야지. 만나서 구해줘야지......"
무서워요. 말하지 않았다. 무섭다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 눈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 했던지 눈치채신 것 같았다. 이해한다. 짧게 마지막 말을 뱉으시고, 할머니는 나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가셨다. 목을 돌맹이가 막고있는 듯, 아아, 하는 소리 외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자코 서있다 버스 탈 시간을 놓쳤다. 근데 달리고 싶지 않았다.
10.
그 애가 오늘 계단을 오르다 넘어졌다. 같이 버스를 타다보니, 교실까지 올라가는 길도 거의 비슷하게 가기 때문에 봤다.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그 애 이름을 한번도 불러보지 않은 것 같다. 출석을 부를 때 몰래 보고 안 건데, 그 애 이름은 민윤기다. 이름이 특이했다. 특이하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윤기, 윤기야. 그 동그란 뒷통수와 하얀 피부, 가끔 세모꼴의 그 눈이 나를 볼 때면 나는 짐짓 어색해진다. 날 본다. 민윤기가. 하고.
11.
동생이나 엄마를 만나본다는 생각은 심연 중에 늘 하고 있는 생각 중에 하나다.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못 찾아갈 것 같다. 동생 학교라도 가서 몰래 보고 오고 싶은데, 못하겠다. 무섭다.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 그 곳. 그 때. 그 때를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나 장소같은 것을 보거나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그 곳을 다시 찾아가 그 때 같이 있던 사람들인 엄마와 동생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근데 보고싶었다. 엄마든, 동생이든, 그곳에 사는 내 친구들이든... 보고 싶다.
보고싶어.
12.
의외의 이야긴데, 혜진이가 그 애, 윤기랑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했다. 일학년 초반 쯤에 전학을 왔는데, 애들 다 관심을 가졌지만 낯을 많이 가리고 말이 없어서 금방 관심이 시들어버렸다고 한다. 처음에 사투리를 써서, 애들이 사투리 써달라고 자꾸 그래서 말수가 준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며 혜진이가 푸스스 웃었다. 사투리? 잘 매치가 되지는 않지만 궁금하다. 어디 지역 사투리를 쓰는 지 물어보고싶었지만 너무 관심있는 게 티가 나 보일까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 없는 성격, 낯가리는 성격이라.
정국이와 비슷한 성격이다. 정국이도 그랬다. 나는 같이 중학교를 다니면서 정국이가 축구부에 들기 전까지 걔가 축구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하도 말을 안 해서. 집에 오면 하는 말도 거의 한정적이었다. 누나, 나 배고파. 밥 해줘.
전정국, 밥 혼자 못 하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니. 누나없이.
13.
혜진이가 학교 끝나고 노래방에 가자 했다.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점심을 먹는데, 혜진이가 새 친구들 몇 명을 데리고 왔다. 난 교실에 먼저 올라가있겠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혼자 계단을 오르는데 창밖 보이는 농구코트에서 윤기가 이리저리뛰며 농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오르다 멈춰서서 창가에 기대 농구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직은 봄, 쌀쌀하진 않지만 덥지도 않은 날씨인데 땀을 뻘뻘 흘리며 농구를 하고 있다. 왜 저렇게 열심히 할까. 난 저런 거 재미 없던데,
아,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고개를 휙 돌리고 계단을 후다닥 올라섰다. 벽면에 붙어있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약간 붉었다. 내가 늘 입고다니는 파란 후드집업. 빠르게 고개를 돌렸지만, 나인 걸 눈치 챘을 것 같다.
그나저나 진짜 직빵으로 눈 마주쳤다. 대박!
14.
혜진이가 방과후 놀자는 것을 세 번이나 거절했다. 학원을 다니냐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그렇다고 해버렸다. 혜진이가 푸스스 웃었다. 그럼 그렇다고 하지. 자꾸 학교 끝나고 만나는 걸 피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나보다. 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끔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오늘 버스에서, 버스카드가 없어서 현금으로 돈을 냈다. 지갑에서 버스카드를 찾다가 버스가 출발했다. 아무래도 버스카드가 없는 것 같아서 현금을 꺼내들었는데, 근처 자리에 앉아있던 윤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천 원짜리 지폐를 통에 넣었다. 동전 이백 원도 꺼내서 넣었다. 짤그랑, 바로 문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 애는 이미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 밖을 보고 있다. 그 애가 보고 있는 창 밖엔 동이 거의 터 있었다. 다시 시선을 옮겨 윤기를 보았다. 귀가 붉다.
15.
귀에 이명이 자꾸만 울려서 방과후 병원에 들렀다. 엘레베이터를 탔는데, 윤기가 있었다. 너무 놀라서 그 얼굴을 보자 마자 멍청하게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애가 눈을 내려 나를 보았다. 급하게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민망하게 층도 같은 층이었다. 엘레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갔다. 난 이비인후과에 가고 윤기는 안과에 갔다.
그렇게 방과후에 만난 게 꼭 운명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그앤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였지만.
16.
어차피 가보지도 못할 거면서 정국이가 간 고등학교를 알아냈다. 같이 다녔던 중학교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친구들이 정국이를 잘 챙겨주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직접 챙겨주진 못하니까...
엄마 보고싶다.
17.
그 애, 오늘 버스를 타지 않았다.
18.
이상한 걸 깨달았다. 그 애, 민윤기. 등교는 늘 같이하면서 하교는 한 번도 같이한 적이 없었다. 야자를 하는 것 같진 않던데, 하교할 땐 매번 빨간색의 멀리까지 나가는 버스를 타고는 했다. 의아해서, 따라가 보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같이 버스를 타는 순간 들킬테니까. 궁금해 죽겠다.
19.
날이 더워졌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올라왔는데, 더워서 벗어둔 내 파란 후드집업을 민윤기가 만지작대고 있었다. 밝은 머리칼의 그 친구와 앞 뒤로 앉아서 대화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윤기의 하얀 손이 내 후드집업 소매부분을 톡톡 두드린다. 아마 쟤네도 더워서 농구를 하러가지 않은듯 싶었다. 그냥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뒤돌아 나왔다. 느낌이 묘했다.
20.
국어시간에 읽는 거 시키기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윤기한테 초록색 글씨들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윤기는 읽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럽다는 듯이 선생님을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평소 농구를 같이하고 윤기와 나름 친해보였던 남자애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초록글자들을 지가 읽기 시작했다. 몇 명은 웃었고, 선생님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나는 왜 조금 심각해졌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윤기가 안과에 갔던 게 생각이 나서.
21.
며칠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결국 악몽을 꾸고 늦잠을 잤다. 첫차를 놓쳤으니 지각이 틀림없었다. 대충 느릿하게 교복을 입고 정류장으로 나왔다. 근데, 익숙한 동그란 뒷통수가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윤기가 맞았다. 우리 집 앞 정류장에 왜 윤기가? 사람 오는 소리에 뒤돌아본 민윤기가 나를 보고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돌리다가 그냥 손을 살랑였다.
"안녕,"
"아, 어. 안녕."
왜 윤기가 여기 있을까. 원래 나보다 더 먼저 정거장에서 타서 내가 탈 땐 늘 이미 버스에 타 있었는데.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윤기의 차림이 하복으로 변했다. 날이 많이 더워지긴 했다. 춘추복에다 파란 후드집업까지 입은 내 꼴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너 여기 살아?"
"어? 응."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버스 오는 것만 보고있는 줄 알았던 윤기가 갑자기 휙 뒤돌아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황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대답했다. 맞긴 하다. 여기 정류장 바로 뒤에있는 아파트에 사니까. 윤기의 시선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내게 머문다. 뭐라 말을 해야할 것 같아서 우물쭈물 말을 건넸다.
"너 원래 더 앞에서 타더니 왜 여기서 타?"
근데 곤란한 질문이었나보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윤기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치 방금 전의 나처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버스가 안 와서, 그냥 걷다보니까 여기까지 와서."
어설프다. 그냥 믿는 척 그렇구나, 했다. 버스가 온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보다 늦어서 그런가 버스에 사람이 많았다.. 윤기가 배려해주는 것처럼 느리게 걸음을 떼 내가 먼저 버스에 올라서, 어디 앉아야할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하차문 바로 뒤 두 좌석이 비어있다. 근데 저기 앉으면 윤기가 내 옆에 앉을까? 아닐 것 같은데. 괜히 두 좌석인 데 앉지 말자. 고민하다가 앉을 타이밍을 놓쳤다. 그냥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섰다.
"저기, 앉아."
깜짝 놀랬다. 옆에 서 있는 줄은 알았지만 내게 말을 건넬 줄은 몰랐으니까. 들려오는 민윤기의 낮고 깔끔한 목소리에 당황해서 응? 하고 되묻자 윤기가 하얀 손가락으로 자리 하나를 가리킨다. 창가 쪽, 비어있는 한 자리.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하려다가, 살짝 내 몸을 밀며 다가오는 윤기 때문에 결국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가방을 앞으로 끌어안고 앉자 마자 윤기의 회색빛 가방이 내게 건네져온다. 당황했지만 자연스러운 척 안 당황한 척 가방을 받아들었다. 내 파란 가방과 윤기의 회색 가방.
"파란 색 좋아해? 다 파란색이네. 맨날."
"아, 응. 좋아해."
학교로 가는 버스 그 한시간 거리동안, 계속 내 옆에 서서 가던 윤기. 그리고 내 품에 안겨있던 그 윤기의 회색가방. 대화는 저 파란색 좋아하냐는 말 한마디만 나누었지만, 나는 뭔가 오래도록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윤기와 함께 등교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 년은 같이 버스를 탔음에도. 그 날 우린 나란히 지각을 했다.
22.
잠결에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또 악몽을 꾸었다. 늦잠을 자진 않았지만. 정국이가 내 꿈에 나와서 막 나에게 화를 내는 꿈이었다. 누나가 나를 버리고 갔어. 엄마랑 나를 악마한테 냅두고 혼자 갔어. 떠났어. 누나가 버렸어.
누나, 배고파. 밥 해줘.
그냥 눈물이 나길래 울었다. 악마한테 가족을 버리고 온 나도 악마일까.
23.
첫차를 놓쳤다. 정류장에 윤기는 없었다. 먼저 간 것이다. 또 대화하면서 등교하고 싶었는데.
부은 눈, 약간은 맹한 목소리 때문인지 학교에 가자마자 혜진이가 울었느냐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봐도 나는 울면 티가 난다. 비 오는 날의 교실은 약간 더 어수선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혜진이의 차림도 하복으로 바뀌었다. 나는 하복을 입고 그 위에 파란 후드집업을 입었다. 윤기가 내 파란 후드집업 소매를 만지작댔던 것과, 어제 내게 파란색을 좋아하냐 물은 것 때문인지 그냥 이 후드집업은 자꾸만 입고 싶었다.
"왜 울었어?"
"안 울었다니까-"
혜진이의 말에 대답하며 눈가를 손으로 닦았던 그 순간 나는 느꼈다. 윤기의 시선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나를 보았다.
24.
어쩐지 뭔가 비도 오고, 우울하고,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눈물도 나고, 불안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점심시간에 정국이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 깜짝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앞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보인 정국이. 큰 눈 옆에 있는 상처와 터진 입술이 내 죄책감을 마구 두들켜 패는 것만 같았다. 정국아. 하고 부르자마자 나를 향한 눈빛은 배신감을 담고 있었다. 후다닥 달려서 그 앞에 섰다. 정국이다. 전정국.
"정국아."
눈물이 다시금 차오른다. 손을 뻗어서 정국이의 옷을 쥐었다. 정국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뛰었다. 끌려가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학교를 빠져나갔다. 비가 마구 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슬부슬 내리는데, 우산조차도 쓰지 못했다.
"..."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정국이는 일년 새 꽤 많이 커 있었다. 이제 열일곱살인가. 차오르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낯선 정국이는 좀 무서웠다. 그리고 미안하게 했다.
"... 누난 엄마랑 나 잊었지."
한참만에 흘러나온 목소리도 낯설다. 어느새, 겨우 일년사이에 커버린 동생.
"아니야."
"맞잖아. 왜 다시 안 왔어. 왜 혼자 도망쳤어."
정국이가 운다. 당황해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려했는데, 정국이가 내 팔을 탁 쳐냈다. 허공에 머문 손이 민망하고, 슬펐다.
"아빠가 계속 나 때리는데, 엄마도 맞고,.."
"미안해."
"왜 안 왔어..."
"미안해. 정국아. 미안해. 울지 마."
감기걸리겠다. 이렇게 비 내리는데.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었을텐데. 눈칫밥만 먹고, 힘들었을텐데. 내가, 나도 무서워서. 못 찾아갔다.
열일곱의 밤. 나를 내려치던 아버지의 주먹을 피해 달아났던 여름밤. 할머니네집에서 울며 거두어달라고 빌었던 날들. 날 기다렸을 정국이.
"기다렸어. 누나 언제 오나."
"미안해. 이제 우리 같이 살자. 응?"
"엄마도 도망쳤어. 나 두고,"
아아.
"엄마랑, 누나랑, 다, 나 두고..."
감기, 걸리겠다.
25.
그 날 학교는 조퇴했다. 조퇴하면서 윤기를 보지는 못했다. 사실 윤기 생각할 틈도 없었다. 조퇴하자마자 빨리 정국이 손을 잡고,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집은 우리 집이 아니다. 할머니집이지. 따듯한 물에 샤워하라고하고 밥을 먹였다. 할머니가 오시면 또 정국이까지 거두어 달라 빌어야했다.
할머니는 마음이 약하다. 할아버지 또한 그렇다. 정국이는 그 날 내 손을 잡고 잠들었다. 나는 바닥에서, 정국이는 침대에서 잤는데, 꼭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는 것이었다. 죄책감이 빗방울이 창문 두드리듯 자꾸만 나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