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F.L.
비가 왔다.
시험날이라 간만에 일찍 끝나서 기분 좋았는데……. 백현이 고개를 들어 너른 하늘을 살폈다. 많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또 금방 그칠 기미도 안 보였다. 가방 안엔 제가 아끼는 책이 있었다. 우산은 그 밑에. 읽은 흔적조차 안 낼 정도로 아끼는 책들이었지만, 우산을 꺼내자니 그건 그거대로 또 귀찮았다. 짧은 시간 고민하던 백현이 결국 가방을 꼭 부여잡은 채로 학교를 나섰다. 집까지는 오 분 거리니, 이 정도 비를 맞는다고 한들 책까지 젖지는 않을 것이었다. 수많은 우산들과, 가족을 기다리며 처마 밑에 숨은 학생들 사이에서 우산 없이 걸어가는 백현이 이질적이었다. 그래도 백현은 걸었다. 언젠가 어린 날엔 로망이었던, 비를 흠뻑 맞으며 걷는 일은 생각보다 무드없는 것이었다. 빗방울이 슬슬 볼을 타고 흘렀다. 코너를 돌자 보도블럭이 몇 개 없어져 생긴 웅덩이가 보였다. 폴짝 뛰어넘었다. 백현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머리 위로 까만 우산이 드리워졌다.
“우산 없어?”
박찬열이다.
“있어.”
백현이 슬쩍 몸을 틀어 우산 밖으로 튀어나왔다. 시선은 발치의 보도블럭에 있었다. 다음 웅덩이다. 좀, 컸지만 나름대로 잘 뛰어넘었다. 다시 우산이 덮였다.
“근데 왜 안 써?”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한 때는 부러워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는 남자다운 목소리였다.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는 않기로 했다. 슬쩍 옆을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찬열의 냄새가 훅 끼쳤다. 이번에는 빨리 걸어서 우산을 벗어났다. 바닥을 보는 척 슬쩍 고개를 숙여 뒤를 보니, 기껏해야 일 미터 뒤에서 슬슬 걸어오는 박찬열의 신발이 보인다. 보도블럭은 끝이 났다. 아스팔트 위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생각보다 꽤 커서 위압적이었다. 이번에도 뛰어넘었다. 찰박찰박 발소리가 울렸다. 빗줄기가 조금 거세졌다.
“비 맞잖아.”
박찬열이 긴 다리로 재빠르게 다가와서 우산을 씌웠다. 백현은 요리조리 몸을 굽혀 우산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번에는 소용없었다. 우산을 든 찬열의 팔이 백현을 좇았다.
“감기 걸린다.”
“나한테 잘해주지 마.”
백현이 재빨리 뛰었다. 발치로 향해있던 시선이 매끄럽게 뒤쪽을 염탐했다. 박찬열의 신발이 멀뚱히 서있었다. 빗방울 몇 개가 볼을 타고 흘렀다.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앞에 거대한 물웅덩이 하나가 놓였다. 외길은 아니었지만 돌아가긴 싫었다. 하나, 둘, 셋. 세 번의 쉼호흡 끝에 백현이 물웅덩이 근처까지 달려간 후 발을 딛고 뛰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집에 가서 재빨리 바지를 벗어 물에 씻고 말렸다. 그래도 교복 바지엔 흙알갱이가 더덕더덕 붙었다. 그게 박찬열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