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오전 6:20
김태형: 메리 크리스마스
김태형: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오전 6:21
쇼윈도 부부
2
기지개를 펴며 몸을 감싼 두꺼운 이불을 걷고 정신을 차리니 서랍장 위에 올려둔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새로운 메세지에 확인 버튼을 누르니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예고도 없이 맞이하게 된 김태형의 얼굴에 당황해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민윤기가 욕실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한 것도 없이 죄책감이 들어 홀드 키를 눌러 화면을 껐다. 그대로 침대를 지나쳐 가 드라이기를 꺼내 머리를 말리는 민윤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로 아침부터 민윤기 얼굴을 집에서 다 보고. 몇 분 정도 머리를 말린 민윤기가 드라이기 코드를 뽑고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침대 위에 앉아 여전히 민윤기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는 옷장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꺼냈다. 단추를 잠그는 손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민윤기는 고개를 숙인 채 정수리만 보여주고 있었다. 단추를 모두 채운 민윤기가 고개를 들자 깜짝 놀라 시선을 떼고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화장대 앞으로 가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민윤기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요? 내 물음에 민윤기는 거울 너머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렇게 눈을 맞추다 민윤기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거래처 사람이랑 약속 있어.”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이 아니면 대충 티셔츠 한 장에 패딩을 걸치고 작업실로 향하던 민윤기가 정장을 차려입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민윤기는 향수를 뿌렸다. 토크쇼를 촬영했던 날 이후로는 처음 맡은 향수 냄새였다. 오늘따라 번듯하게도 차려입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향수 냄새는 좋지 못한 기억을 끌고 왔다. 잠시 있지도 않은 여자 향수 냄새가 풍겨왔고, 민윤기의 와이셔츠 카라 가려진 어느 부분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민윤기의 멀끔한 얼굴이 술에 취해 달아오른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내 두 손이 이불을 부여잡은 세기가 점점 세지자 그를 눈치 챈 민윤기가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불을 탁 놓았다. 조금은 커진 눈으로 민윤기가 입술을 꾹 깨물다가 이내 눈을 꼭 감았다 뜨며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감았다. 정작 민윤기의 머릿속에서는 깔끔하게 지워져 버린 기억이 나에게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게 참 화나는 일이었다.
털실내화를 신고 쇼파 위로 가 앉았다. 텔레비전을 켜 케이블 채널을 훑다가 리모콘 버튼을 누르던 손이 31번 채널에서 멈췄다. 화면 속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태형의 얼굴을 보자마자 김태형이 아침에 보내온 카카오톡이 생각나 방으로 달려들어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다시 김태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전 7:31 제 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김태형: 전정국한테요 오전 7:32
김태형: 기다렸는데 연락이 안 오길래 그냥 제가 물어봤어요
김태형: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ㅜㅜ 오전 7:33
성격상 셀카로 도배되어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의외로 깔끔했다. 프로필 사진 없이 상태 메세지에 산타 이모티콘과 선물 이모티콘을 하나씩 깔끔하게 붙여 놓은 것이 귀여웠다. 괜히 호기심이 생겨 그의 트위터를 찾았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내게 됐네요 우리 팬분들은 남자친구랑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요 - 김케빈’
3분 전에 등록된 글을 한참을 살폈다. 그러다 카카오톡 창으로 다시 돌아가 또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다시 김태형에게 말을 걸었다. ‘크리스마슨데 누구 안 만나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주제 넘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소심한 마음이 나를 덮쳐와 머리를 싸매고 그의 답장을 기다렸다. 텥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귀를 재웠다. 민윤기보다도 낮고 굵은 목소리가 그 곱상한 얼굴에서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카메라에 아이컨택을 해 오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를 마주했다. 쳐져 있던 눈꼬리가 고양이마냥 올라갔다가 다시 축 쳐지는 것도 신기했다. 텔레비전 속 그와 인사를 하다가 카카오톡 수신 알림음이 울렸다. 텔레비전 화면 속 김태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으로 소파를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집었다. 패턴을 풀면서도 손가락이 자꾸 꼬였다. 민윤기가 집에 없어 기분이 더 들뜨고 설레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랜 방송 생활을 했음에도 숫기도 없고 말주변도 딱히 없었던 탓에 진득하게 친분을 나눠 본 이성이 없어 김태형이 새로웠는지도 몰랐다.
‘여주 씨가 만나 주실래요?’ ‘저 케빈이에요’ ‘나 홀로 집에...’ ‘혹시 고민 없어요?’
딱딱하면서도 발랄한 답장에 웃음이 났다. 나도 모르게, 정말 홧김에 김태형과 약속을 잡았다. 나 역시 케빈이 되기는 싫어 같은 처지의 케빈과 만나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 화면을 보니 김태형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따라 미소를 지었다. 민윤기와 연애를 하던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그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는 것 같았다. 옷방으로 달려들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체크무늬 모직원피스를 꺼냈다. 결혼한 뒤로는 입어 보지 못했던 옷들이 가득했다. 민윤기와 발랄한 커플마냥 데이트를 나갈 일도 없었을 뿐더러 예전만큼 몇십 분 동안 옷을 고르고 설레발을 칠 일들이 부족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설렘이 몸을 감쌌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감고, 블라우스와 원피스를 입고, 오랜만에 신경을 써 단장하고, 촬영이 있는 날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던 화장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 시간 전의 민윤기처럼 화장대에서 향수를 골라 살짝 뿌렸다. 아직 한창의 나이였음에도 벌써 잃어 버린 것 같았던 나이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하얀색의 작은 차를 찾았다. 잘만 몰고 다니다가 우울증이 도져 작은 접촉 사고가 난 뒤로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운전이었다. 새로운 기분으로 차를 다시 한 번 몰아 볼까 생각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려 지상으로 나왔다.
약속을 잡은 건물을 향해 걸어가던 중에 하얀색 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섰다. 흠칫 놀라 가방에서 급하게 마스크를 찾았다. 밖에 나오지 않은 지 얼마나 됐다고 마스크에 모자 하나 없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손을 휘저어 겨우 마스크를 찾았던 그때, 창문이 열리더니 김태형이 손짓을 했다. 입이 쩍 벌어져 종종걸음으로 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찬 숨을 쉬며 좌석에 앉는 날 보던 김태형이 끅끅대며 웃었다.
“연예인 맞아요? 무슨 아이돌 가수가 이렇게 얼굴 다 드러내고 돌아다녀요?”
그것도 결혼까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요즘 활동 안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가리고 다녀야지, 사람이 조심성이 없어. 결혼한 아이돌 출신 여배우가 크리스마스에 남편 두고 웬 남자 아이돌 가수랑 데이트를 해. 기사 내기 딱 좋은 소재 아니에요? 나를 놀려대며 배를 잡고 웃는 김태형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어눌한 말솜씨는 정말 컨셉인 모양인지 말 참 잘도 한다. 그칠 줄 모르는 웃음에 김태형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출발이나 하라고 면박을 주니 김태형이 서서히 웃음을 그치며 엑셀을 밟는다.
영화 티켓을 사 영화를 봤다. 오랜만의 문명생활을 경험하게 해 준 김태형이 고마웠다. 민윤기와는 달리 입맛까지 딱 맞는 김태형 덕에 식사 메뉴를 고르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루에 이렇게나 많이 웃어 본 마지막 기억이, 아마 민윤기와 연애를 할 때였을 게다.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안 된다고 최면을 걸었으면서도 김태형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하면 할수록 민윤기와 연애할 때의 감정이 그대로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온 들뜬 감정을 내쫓으려 애쓰는 대신 그냥 두기로 했다. 해가 지고 나서는 차 안으로 들어가 김태형과 대화를 나눴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정식으로 대면한 지도 몇 달 채 되지 않은 사이였음에도 일년은 만난 사람처럼 그가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대화가 멈출 시점에 김태형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맥주 좋아해요? 얼굴에 물음표를 떠올리며 그를 바라보니 그가 귀엽게 웃는다.
“크리스마스에 맥주는 좀 별론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완전 좋죠.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한가하게 맥주를 마셔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그는 차를 한강 쪽으로 몰았다. 오랜만에 눈앞에 펼쳐진 한강의 경치에 또 한 번 가슴이 뛰었다. 내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그는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에 차에서 내리지는 못하고 김태형이 차에서 내려 작은 슈퍼마켓에서 사 온 맥주를 꺼냈다. 김태형의 손에 맥주 캔을 쥐어주다가 멈칫했다. 근데 이거 마시면 운전은 어쩌고요? 놀라 물으니 태연하게 대답한다. 운전하면 안 되니까 그냥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까요? 개구진 웃음에 같이 웃으며 어깨를 때리니 제 몸을 감싸다가 내 손목을 잡아 멈춘다.
“저는 안주 먹죠, 뭐. 원래 술 그렇게 좋아하는 편 아니에요.”
김태형에게 미안해 맥주 캔을 가만히 들고 있다 맛나게 오징어를 뜯는 김태형에 웃음을 흘리고 맥주 캔을 입에 갖다댔다. 그를 보며 말했다, 오해 하지 마요, 저도 술 그렇게 좋아하는 편 아녜요, 날이 날이니까 먹는 거예요. 다시 김태형과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는 딱히 무겁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분위기에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두 사람이 동갑이라는 것부터 김태형이 데뷔하기까지의 과정, 우리 두 사람이 각자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일. 그리고 우리 둘의 매개체인 전정국에 대한 이야기까지. 전정국과 김태형은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라 했다. 대부분 연예인으로 구성된 게임 친목에 연예인 뺨치도록 잘생긴 경호원으로 입소문이 난 전정국이 합류하게 되면서 둘은 지극한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 게임에 목을 매는 전정국이 떠올라 혀를 끌끌 찼다. 우리는 그렇게 하늘이 새까매질 때까지 담소를 나눴다.
김태형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주목적이 담소였던 덕에 많은 양의 술을 뱃속으로 집어넣지는 않아 정신은 꽤 말짱한 편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일러가 꺼져 있었다. 당연히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민윤기를 생각하며 거실로 천천히 들어가니 민윤기가 얇은 이불을 덮고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매일 골골대면서 보일러도 틀지 않고 얇디 얇은 이불 한 장 덮은 채 잠들어 있다. 그대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아주 미미한 정은 있어 두꺼운 이불을 꺼내 와 덮어 주었다. 기껏 따뜻한 이불을 덮어 주었더니 이불을 걷어내며 뒤척인다. 괜히 짜증이 나 걷어내는 족족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느새 기운이 빠졌는지 더 이상 이불을 걷어내지 않고 곱게 잠든 민윤기를 지켜보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처음 보는 분홍색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 남자 놈 티를 팍팍 내는 민윤기와 분홍색 목도리가 매치되지 않았다. 그러다 취향이 바뀌었나 보다, 나이 먹으니까 소녀틱한 게 끌렸나 보지, 하고 넘기며 목도리를 민윤기의 옷장에 조심스럽게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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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라서 태태와의 데이트를 쪄 보았습니다 윤기랑 사이가 안 좋으니 태태랑 놀아야조 일반 글은 진짜 훅훅 뒷페이지로 사라져 버리네요 열심히 써야겠어요ㅠㅠ 이 글 좋아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행복함이다 비티에수와 함께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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