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으로 날렸던 조각. 그래서 제목이 503 조각.
중간이 뚝 끊김 주의. 짧음 주의.
깊은 지식 없음 주의.
The White Birch - Breathe
길게 떨어지는 검은색의 사제복, 손에 항상 쥐고 있는 두터운 성경책,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윤기는 어느 방 문을 열고 들어가 벽을 마주하고 앉는 심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성경책을 내려놓고 두 손을 마주대어 그러쥐고, 그 위로 이마를 대어 오늘도 죄를 고하러 오는 이들을 용서해주시길, 가여운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자비를 내려주시길 기도했다. 지독히도 좁은 방, 유일한 가구는 책상 하나와 앉을 의자 두 개. 그나마도 책상 가운데 파티션이 세워져있어 마주앉을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파티션은 마치 벽과도 같았다. 죄를 고하러 오는 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당신의 입으로 뱉어낼 불결한 것들은 앞에 앉아있는 불투명한 상대가 아닌 저 하늘의 위대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세워진.
윤기는 좀 전에 울면서 제 가정사를 줄줄 내뱉던 한 여자때문에 조금 지쳐있는 상태였다. 참, 눈물도 많다. 문이 열렸다. 다시 누군가 들어왔다. 불투명한 시야일 뿐이라 엎드려있지만 않는다면 상대는 윤기가 어떠한 불량한 자세로 앉아있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윤기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스스로가 흐트러지고 싶지 않았다.
"앉으세요."
"..."
"무슨 죄를 고하러 오셨습니까?"
"어떤 죄를 말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겁니까?"
"신은 모든 것을 듣고 계십니다. 미천한 종인 저는 용서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옅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남자의 목소리는 짙고, 탁했다.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니지만 목을 긁는 걸걸한 소리는 빈 말로도 듣기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윤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변조해 내는 사람들은 많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죄를 범하면 다시 찾아오겠노라 말하고 나가버렸다. 시간이 되었다. 윤기는 목에 걸린 십자가를 들어 두 손으로 잡고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저들을 구원해주소서.
"오늘도 열심이네요. 참 신기해."
요새 이상한 남자가 자꾸 나타났다. 은회색의 머리를 가진 그는 달빛을 받은 스테인글라스와는 다른 화려함을 내뿜었다. 윤기는 빈 기도실 안, 수많은 목재 의자 중 제일 앞에 자리한 의자 위에 성경책을 올려두고 석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남자가 처음 찾아왔을 때부터 몇 번정도는 윤기도 용건을 묻긴 했으나 대답은 대부분 흐지부지 흩어졌다. 항상 성당 안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윤기는 기도실에 들러 하루 일과를 고하며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지었다. 어느순간 그 일정에 남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 빼면, 역시나 오늘도 딱히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소문은 들었어요? 요즘 뱀파이어들이 기승이라던데."
"..."
"신부님은 예쁘니까 더 표적이 되기 쉬울텐데. 용케 아직 목이 안 뚫렸네요."
"..."
"그것도 신의 은총인가? 신의 보호인가?"
"..."
남자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과 비꼼의 기색은 없었다. 오로지 의문만을 담은 채 윤기에게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저 남자에게 휘말려 갈 것 같아 윤기는 대답없이 고요한 기도를 끝냈다. 밤이 깊어졌다. 더이상 스테인글라스도 빛나지 않았다.
윤기는 자신이 떠남과 동시에 남자도 이 곳을 떠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에 누군가 와서 또 기도를 올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도실에 있는 촛불에 불을 붙였다. 주황색의 불빛이 찬란하게 빛났던 기도실 안을 차분히 내려앉게 만들었다. 이상하게 따듯하지는 않았다.
"다음에 또 봐요."
남자는 윤기와 같이 기도실을 나왔다. 그리고 성당을 먼저 박차고 나갔다. 나가면서 제 옷을 툭툭 털어대는 것은 그 남자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윤기도 몸을 돌려 성당의 숙소로 향했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는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내내 몸을 완벽히 감싸고 있던 사제복을 벗어내리는데 그 소리에 깼는지 이불 안에 있던 어린 남자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요한, 깼어?"
"윤기 형, 이제 들어온거예요?"
"응. 미안. 바로 잘테니까 너도 더 자. 그리고 윤기 형이 아니라."
"알아요. 메토디오. 그렇지만 둘만 있는데 굳이 세례명을 쓸 이유는 없잖아요."
요한, 지민은 배싯 웃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다. 애교있는 말에 윤기는 졌다는 듯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한결 편한 차림이 된 윤기는 저를 위해 지민이 켜놓았던 촛불에 다가갔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훅 불어내어 불꽃을 꺼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방에 내려앉았다.
드디어 하루가 끝이 난 것이다.
"이번에도 골목길에서 피가 모두 빨린 시체가 발견이 되었다면서요?"
"어머, 무서워라. 언제까지 그런 추악한 것들이 기승을 부릴지 모르겠어요."
"영주님까지 나서서 성당에 들려 뱀파이어를 죽이는 것에 도울 것이라 말했다면서요. 곧 잠잠해지겠지요."
요즘은 어딜가나 저 이야기구나. 하기야, 생명은 누구에게나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절실한 것. 그들의 불안함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윤기가 빤히 바라보면서 눈치를 주는 것은 지금은 자신들의 불안함을 늘어놓으며 소리를 내는 시간이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성당 가장 가운데, 넓은 공간에서는 진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루는 생각보다 길기도, 짧기도 했으며 윤기는 그 하루에 충분히 제 할 일을 모두 끝내는 규칙적인 생활이 좋았다. 무엇하나 흐트러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성당 내의 흘러가는 시간, 기울어져 가는 해는 윤기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오늘 하루도 부디 무사히 끝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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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무례한 언행은 계속 되었다. 입술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으며 머리색과 꼭 닮은 눈동자는 호기심에 빛나 있었으나 윤기는 더이상 그것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윤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서 화내봤자 손해는 자신만이 볼 뿐이었다. 화낼 이유가 없다. 무시하고 가버리면 그만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윤기가 몸을 돌리자 얇은 손목이 억센 손아귀에 잡혔다. 몸이 휘청인다고 생각할 때 윤기의 몸은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두터운 성경책은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윤기는 끝이 구겨져 나뒹구는 저 성경책이 꼭 저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꽤 오래 참았다니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맛있는 건 두고두고 먹는 주의라지만, 당신은 정말 까다로워서 말이야."
"..."
"그래도 재밌었어. 아무리 경고를 해도 무시해버리는 무심함 덕분에, 기회가 생겼네."
바닥에 부딪친 어깨와 등이 욱신거렸다. 윤기는 이를 악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상체만 일으켰다. 그러나 그 행동도 남자의 손이 가슴팍을 내리 눌러버려 소용이 없어졌다. 귓가에 소름이 돋는 숨결이 닿았다. 부드럽고, 낮았던 목소리가 한없이 끈적해져 기분 나쁘게 윤기의 감각을 일깨웠다.
"신부님. 죄를 고하러 왔습니다."
"..."
"신의 종을, 탐하려고 합니다."
"..."
"역겨운 신이시여, 정말로 그대가 존재한다면 지금 내게 탐해질 이 아름다운 존재를 한 번 구원해보시길."
조롱이다. 윤기는 손을 뻗어 남자의 단단한 어깨를 그러쥐었다. 어젯밤 남자가 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신은 정말, 그대들을 모두 보살피고 있는 것이냐고. 사제복 단추가 툭툭 풀려나갔다. 무슨 수를 쓴건지 윤기는 조금씩 정신이 몽롱해져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남자의 가슴팍을 겨우 밀쳐내어 눈이 마주쳤다. 숨이 들이삼켜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먹잇감을 바라보는 뱀파이어였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마."
"싫으면 절절하게 외치던지. 네가 항상 그렇게 기도를 드리는 신에게."
"놓으라고, 김남준."
평생을 삼가해온 욕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름이 불린 남자는 알고있었냐는 듯 놀란 얼굴을 보였다가 이내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입술을 벌렸다. 날 그렇게 거부하지마. 난폭하게 굴고 싶어지잖아. 얼핏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윤기가 바닥을 짚어 겨우 상체를 지탱하는 사이 입술이 먹혔다. 서늘한 체온 중 유일하게 온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혀와 입술이 부지런히 윤기의 입술을 벌리고 그 틈을 노렸다.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아 남준은 이를 드러내 윤기의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입술이 찢기며 피가 흘렀다. 그러나 소리 한 번 내며 입술을 벌릴만한데도 여전히 틈새는 벌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집은."
윤기의 피가 묻은 입술을 혀로 쓸어낸 남준이 작게 혀를 찼다. 손을 뻗어 사제복의 단추를 뜯어내었다. 배려라고는 찾을 수 없는 거친 손길인 주제에 표정은 부드럽기 짝이 없어 윤기는 괴리감에 몸을 떨었다. 남준은 손 끝을 타고 느껴지는 옅은 떨림에 입꼬리를 올려 다시 웃었다.
정말이지 망가뜨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남자라니까.
"이건 그대로 놔둘까?"
목에 걸린 십자가를 잡아 당기는 손길에 윤기의 목이 절로 살짝 들어올려졌다. 차가운 금속이 목에 닿자 윤기는 다시금 터진 입술을 깨물었다. 금속 못지 않게 차가운 손이 어느새 드러난 상체에 닿았다.
모든 것이 차가운 곳인데 점차 열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술이 벌려지고 남준의 목소리에 못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남준이 윤기의 턱을 그러쥐고 돌려 기도실 중앙에 위치한 석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석상은 여전히 달빛을 받아들어 아름다웠다. 윤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진 이곳에서 빛나는 것이라고는 남준의 눈동자와, 은회색의 머리칼이 다였다. 빌어먹게도 아름다워서, 사람을 홀린다고 생각했다.
검은 사제복 위로 하얀 빛이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기어코 윤기는 정신을 놓았다. 윤기를 끌어안은 남준이 낮게 웃음소리를 뱉어내었다. 드디어 내 것으로 물들였다며, 다시금 맞춰오는 입술에 윤기는 조용히 입술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민윤기. 신이 아직도 널 보살펴주는 것 같아? 은총이 네게 닿은 것 같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윤기의 하얀 손이 달빛에 그 끝만 겨우 닿아 새하얗게 빛났다. 그정도도 기분이 나쁜건지 남준은 제 두툼한 외투를 가져와 윤기의 몸을 감쌌다.
너에게 새로운 신을 보여줄게.
축 늘어진 새하얀 남자를 품에 안은 남자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고 다시 화려한 스테인글라스 유리창 아래로 남겨진 것은 엉망이 된 검은 사제복과 구겨진 성경책. 그리고 줄이 끊어진 십자가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