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성애자 권순영 08 - 나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 그 애는 그저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어 가곤 했다. 불안했지만 그 애기 때문에 믿었다. 나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 권순영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조용히 내 귀를 막아 줬다. 듣지 말라고 나를 감싸고는 계속해서 내 귀를 막고 걸었다. 매점에 다다라서야 내 귀를 감싸던 권순영의 손이 스르륵 풀린다. 나에 향해 속삭이던 애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긴장이 풀리자 내 옆에 있는 권순영을 조용히 올려다 본다. 알고 있었다. 권순영이 화를 많이 참으며 걸었다는 사실을. 내 귀를 막아주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애들의 시선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던 손을. 권순영은 몇번이나 숨을 고르며 화를 누르고 있었다. 이제야 불편함이 좀 가신 표정이다. "권순영" "응?" "왜 귀 막아 줬어?" "듣기 싫어서." "그럼 네 귀를 막아야지." "내가 듣기 싫은 건 너도 듣기 싫을 거니까." 권순영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난 살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계산 없이, 매번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을 해주는 권순영이 고마워서. 이제는 말해야 된다. 매번 받기만 하던 순간들에도 늘 감정을 표하지 못했으니까. "순영아." 권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놀란 그 표정을 보고 있자 살짝 웃음이 난다. 이름 한번 불러줬다고 저렇게 반응할 일인가. 하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데. 놀랄만도 하지. 나는 괜시리 더 목소리를 높인다. "고마워." 권순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표정 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 볼 뿐이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뭔가 한마디가 나올듯 말듯 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뱉는다는 말이, 와. 그리고 한번 더, 와. "나 사실 참느라 진짜 힘들었는데." "..."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한순간에 다 풀린다." "..." "어떡하지 진짜?" 권순영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참았다는건 화를 말하는거겠지. 난 권순영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려버린다. "뭘 참았는데?" "주먹질. 네가 하지 말라며." "내가?" "응. 전에 안했으면 좋겠다며." 어렴풋이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약을 발라주며 흘려 보냈던 말. 권순영은 그것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걸 기억해?" "당연하지. 누가 말한건데." 권순영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럼 아까부터 참아오던게 단순히 화가 아니라 주먹질이었다는거야? 새삼 권순영에게 놀란다. 무슨 얘는 앞뒤도 안가리고 내 얘기 한 마디 했다고. 그래도 참아서 다행이긴 한데. "너 진짜..." 말을 잇다가 다시 웃음이 터진다. 할말이 없어 나오는 웃음이다. 권순영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마음이 가는대로 마저 말을 뱉는다. "고맙다고." 권순영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난 계속해서 웃음이 난다. 권순영은 내 손을 끌어 당긴다. 난 손을 빼지 않는다. 권순영은 빵을 고르려는 듯 선반으로 향한다. 난 권순영의 뒤로 따라가며 묻는다. 전부터 궁금했던 것. "넌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권순영은 돌아 보지도 않고 빵을 고른다. 손가락이 잠시 까딱거리다 닿은 곳은 초코빵이다. "글쎄,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권순영은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난 권순영이 뒤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붉어진 뺨을 들키지 않을 수 있기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나?그리고 권순영은, 저런 말을 아무한테나 내뱉나? 권순영의 담담함이 신기했다. 동시에 평소보다 빨리 뛰는 내 심장도. 권순영은 이제 음료수 코너로 가더니 초코우유에 손을 뻗는다. 난 그저 권순영의 손이 잡아끄는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 보니 권순영의 손에 들려 있는건 초코빵에 초코우유다. 권순영 초코 되게 좋아하나보네. 나도 초코 진짜 좋아하는데. 난 수업시간에도 초코맛을 좋아한다고 발표까지 한 적이 있다. 권순영은 카운터로 향하더니 빵과 음료수를 내려놓고 한손으로 능숙하게 지갑을 뺀다. 반대쪽 손은 내 손을 잡고서. 난 문득 권순영한테 갚아야 될 것이 많다는 생각에 손을 놓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찾는다. 권순영은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 보더니 손을 잡고 자기에게 끌어 온다. "뭐해. 넌 내 손 잡고 있어야지." 권순영은 내 손을 가볍게 막는다. 반대쪽 손도 끌어와 함께 잡자 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누가보면 어디 잡혀가는줄 알겠다. 난 손을 빼려고 노력하지만 권순영의 한 손 힘에도 당하지 못한다. 낑낑대는 나를 보며 권순영은 슬며시 웃는다. 그러고는 조그맣게 말한다. "풀어줘?" "응..." "그럼 풀어주세요 해봐."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다. 와 진짜. 권순영 이런데 취향 있나봐. 난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절대 안해.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일부러 딴곳으로 돌린다. 그러는 사이 권순영이 계산을 끝낸다. 권순영은 한손으론 빵과 우유를, 나머지 한손으론 내 양손을 쥐고 매점 옆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너 계속 말 안하면 교실까지 이러고 간다?" "..." "좋으면 가만히 있어도 되고." "야." "응?" "...아니야." 난 속으로 거의 오열한다. 권순영은 이 상황이 재밌는듯 나를 간지럽게 쳐다본다. 난 완전 산책나온 강아지 꼴이다. 권순영한테 풀어달라고 하는거나 이대로 붙잡혀 가는거나 거의 양대산맥 급이다. 권순영은 능글거리며 계속 얼굴을 가까이 해 온다. 난 권순영의 정강이를 발로 슬쩍 깐다. 권순영은 아픈 기색도 없다. 우씨, 먹히는 것도 없어. "권순영"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풀어주세요." 권순영은 이제야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한참을 웃다 내 빨개진 얼굴을 한번 보더니 앓는 소리를 낸다. 아까 찬 정강이가 이제야 아픈 건가? 근데 권순영을 지켜보니 아픈 건 아닌것 같다. 나를 보며 계속 아아, 거리는데 기분은 진짜 좋아 보인다. 갑자기 덥썩. 내 양 볼을 잡는다. 미치겠다, 말하는 얼굴이나 목소리나 웃음기가 가득하다. "예뻐, 너무 예뻐." 권순영은 내가 본 모습 중에 가장 환한 모습으로 웃는다. 붉어졌을 내 얼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는 권순영이 싫지 않다. 다만 심장이 계속 간질거릴 뿐이다. 고개를 푹 숙이려는 나를 붙잡고 권순영은 계속 얼굴 여기저기를 살펴 본다. "보지마..." 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도 권순영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 턱, 입술, 코, 어디로 향하는지 빤히 보이는 시선이 얼굴 곳곳을 스친다. 권순영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아까 왜 잘해주냐 물었지." "..." "이래도 대답이 필요해?" 권순영은 내 눈을 바라본다.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싱긋 웃는다. 난 살짝 어지러울 정도가 된다. 권순영의 모든게 내 안에 너무 갑작스럽게 들어와서. 권순영은 한쪽 손을 가볍게 쥐고 복도로 향한다. 이래도 대답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래. 너 자체가 대답인데, 그런게 필요할리가. 교실로 걸음을 옮기던 중 누군가 권순영의 이름을 부른다. 권순영이 걸음을 멈춘다. 얼굴을 보니 익숙한 무리다. 권순영의 친구들. 학기초에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들어 권순영이 쟤네들과 다니는 모습을 못 봤다. "권순영 저게 요새 얼굴을 한번 안비쳐요." "야 좀 섭하다?" "쟤 여자 생겼다고 저러는거냐?" "아마." 애들의 몇마디 대화가 오가는 동안 권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모르게 내 손을 끌어당겨 제 등 뒤로 오게 한다. 그러던 와중 권순영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 더 겹친다. "권순영." 친구들의 목소리가 순간 줄어들다 다시 북적거린다. 몇몇 애들이 야 이제 가자, 하며 화제를 전환한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편한 분위기에 난 괜히 권순영의 눈치를 살핀다. 권순영은, 아까의 표정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를 참는 표정 말이다. "니 옆에..." 권순영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말한다. 다음 말에는 내 이름이 와야 될것만 같은 느낌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권순영은 말이 끝나기 전에 걸음을 뗀다. 난 권순영의 손길에 자연스레 따라간다. 권순영은 조금 더 세게 나를 잡아당겨, 자기 옆에 가까이 붙게 만든다.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권순영과 뒤의 애들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 무리 중에 한명이. 유난히 입꼬리가 올라간 한명이 정확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권순영은 편하게 내 옆에 앉는다. 난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 권순영에게 묻는다. "아까 왜 그랬어?" 권순영은 부드럽게 웃는다. 더 이상 아까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괜찮아." "아니. 너 무슨 일 있잖아." "니가 걱정할 일 없어. 다 괜찮아." "걔는 네 이름 왜 부른거야?" "네 얘기 한애 말하는거면 신경 안써도 돼. 그냥 옆에 있어서 한마디 한거겠지." "..." 나는 권순영에 대해 묻고. 권순영은 나에 대해 대답한다. 권순영은 이 와중에도 나만 생각한다. 답답해진 내가 한번더 입을 열려던 그때 권순영의 입가에 뭔가가 시선을 붙잡는다. 멍이 들어있다. 왜 이걸 이제야 발견한걸까. "여기 왜이래?" 난 급히 입가를 쓰다듬는다. 권순영은 순간 인상을 찌푸린다. "아, 어제 운동하다가 다친거야." "아니잖아." "아니야. 원래 내가 운동을 좀 격하게 해서." "...진짜?" "당연히." 설마 또 싸우다가 이렇게 된건가.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권순영의 상처를 몇번이고 들여다 본다. 권순영은 안심하라는 듯 자꾸만 편한 미소를 짓는다. "또 싸운거야?." "왜 계속 걱정을 할까." "그거야 걱정이 되니까..." "네가 주먹질하지 말라며." "..." "그럼 들어야지. 나 네 말 하나는 진짜 잘 듣는데, 이래도 계속 의심할거야?" ...아니. 고개를 젓는다. 권순영이 아니라면 아닌거겠지.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걱정도 한결 덜하다. 권순영은 내 표정이 풀리는걸 보고는 빵과 우유를 내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너 주려고 산거야. 먹어" "...응?" "너 초코맛 좋아하잖아." 그걸 어떻게...권순영을 쳐다보니 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건 그렇고 이걸 나한테 주면 권순영은?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럼 너는?" "난 안먹어. 초코 별로 안 좋아해." 뭐지. 그럼 권순영이 애초에 자기 먹으려고 산게 아니라 나 먹으라고 산거라고?권순영은 어느새 빵 봉지를 뜯고 있다. 초코우유 빨대도 뜯어서 푹, 하고 꽂는다. "나 초코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어?" "딱 그렇게 생겼잖아." "아아 그러지 말고. 어떻게 알았냐고." "오 방금 좀 넘어갈뻔 했어. 근데 안 말해줄거야." 빨리 먹기나 하세요. 빵을 집은 권순영의 손이 입으로 다가온다. 내가 먹을 수 있다고 하려다가 말을 바꾼다. "네가 먹여주는대로 먹으면 말해줄거야?" "생각해 보고." 난 입을 크게 벌린다. 꼭 알아내야지. 내가 발표하는걸 들은건가? 하지만 그때는 권순영이 한참 자던 시기 아닌가. 그때일리가 없다. 이번엔 빨대를 꽃은 초코우유가 다가온다. 나는 또 쪽쪽 빨아먹는다. 권순영은 웃음을 터트린다. 애기같아, 난 못들은 척 한다. 아직 다 씹지 않아 뭉게지는 발음으로 말한다. "자 이제 말해줘." "싫어." "아 왜!" "너무 귀여워서 취소됐어." 그러더니 권순영은 또 크게 웃는다. 아오, 저 자식을 그냥. 난 권순영의 손에서 빵과 초코우유를 뺏어 온다.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는데 권순영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권순영을 째려보고 있는데, 권순영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행복한 표정이다. 빵을 우물거리는 내 속도가 조금씩 느려진다. 이럴때 권순영의 눈빛은 뭐랄까, 뭔가 색깔로 표현하자면 분홍 빛으로 가득하다. 따뜻하게 심장을 스치는, 그래서 자꾸만 바라보고 싶은. 권순영은 문득 입을 연다. "여주야." "응?" "넌 무슨 향 좋아해?" "그건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서. 샴푸냄새도 있고, 비누냄새도 있고, 뭐 많잖아." "음...난 그냥 샴푸냄새." "샴푸냄새?알았어." "너는?"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지고는 아차 싶었다. 물어보나 마나 권순영의 대답은 뻔할거라서. 당연히 내 향기... "너." "내 향기?" "아니, 그냥 너." 순간 입을 다문다. 내 향기가 아니라, 나란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권순영의 눈만 맞추고 있는다. 권순영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애라서. 한마디의 말로도 이렇게 나를 흔들리게 한다. 빵을 쥔 손이 공연히 꼼지락댄다. 권순영은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리 가깝지는 않은 곳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기울인다. 내 향기를 맡는다.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자란 검은 머리가 흔들린다. 탈색하지 않은 머리도 썩 나쁘진 않구나. 고개를 들어 권순영의 눈을 마주치자 나는. 언제나처럼 멈춰버린다. 권순영은 가볍게 미소짓고는 내 손에 들린 초코우유를 가져간다. 빨대를 머금더니 한입 마신다. 어. 저거 내가 먹던건데. 권순영은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내 심장이 자꾸 뛴다. 얼굴이 붉어지기도 전에 입을 뗀 권순영이 말한다. "나 초코우유 싫어하는데, 이건 맛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