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 아이도 말이 많은편도, 눈에 띄는편도, 나서는 편도 아니었다. 쉬는시간엔 엎드려 자고 점심시간엔 교실로오는 급식을 먹고. 아마 수능을 칠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을즘 이었던것 같다. 서로가 같은 반인줄 알았던 때가. 수능이 끝나고 담임선생님께서 자리를 바꾸자고 하셨다. 그렇게 그 애와 나는 짝이 되었다. 잠도 안오고 짝이된 그 아이가 뭘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옆을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 땐 무슨 용기가 났었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로를 한참 쳐다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건 처음인데 좀 잘생긴것 같기도 하고. 시선이 어색해질 즈음 먼저 입을 연건 그 애였다.
"너 이름은 뭐야?"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구나.
"김탄소"
"난 박지민"
1년의 끝이 다와가서야 우린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웃겼는지 작게 웃음이 터졌다.
그 뒤로 그렇게 많은 말이 오가진 않았다. 그냥 나도 박지민도 그림그리는 취미를 갖고있다는걸 알게된 정도. 각자의 공책을 펴놓고 연필을 사각거리는 시간이 많았고 그러다 박지민이 졸다가 그림에 연필을 쭉 그어놓으면 몰래 지워주기도 했었다.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면 이상하게 볼까봐 가끔 책을 꺼내 읽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듣기도 했다. 가끔 옆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말을 걸어보려고 한적도 많았지만 차마 용기가 안났던것 같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박지민을 생각하면 몸안에 나비가 있는것처럼 간질거리는 탓에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12월이 되고 날씨가 조금더 추워졌다. 집에 가서 뭘하면 시간이 빨리갈까라는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학교를 나서려는데 언제부터 오기시작한건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왠지 몸이 좀 쳐지는게 느낌이 이상하더라. 우산도 없고 비가 많이 오는것도 아니여서 집도 가까운데 그냥 맞고 가야지 하던 찰나
"비 와"
익숙한 목소리였다. 설마 나한테 하는말이겠어 싶어서 패딩지퍼를 잠그고 모자를 썼다.
"맞고 가려고?"
또 들리는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봤다. 나처럼 우산이 없는애들이 많았고 그냥 그애들중 한명을 불렀겠거니 빗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김탄소"
그래 뛰어들려고 했는데 내 이름에 발목이 잡혔다. 뒤를 돌아보니 박지민이 무지개색 우산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못들은거야 못들은 척 한거야"
"아니.. 나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고..."
"집가는거지? 같이 쓰고 가"
비가 보슬보슬 적당히 와서 둘이 쓰고 걸어도 어깨가 젖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박지민이 날 데려다 주는동안에도 딱히 많은 말이 오가는건 아니었지만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가만히 있는 손이 어색했고 내 발걸음이 너무 느린가 신경쓰이기도 했고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별로 걸은것 같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이었다. 조금 더 걷고 싶었는데.
"다 왔어 우리 집"
"여기야? "
"응"
"잘가"
"응 너도 잘가"
그렇게 박지민은 다시 빗속으로 걸어갔다.
자려고 누우니까 생각이 났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구나 박지민 집도 이 근처인가. 문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번호부에서 한참을 박지민 번호를 찾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없는게 당연했다. 우린 번호교환을 한적이 없으니. 내일은 꼭 번호 물어봐야지.
늦잠을 자다가 지각을 해버렸다. 수능끝난 고3이 지각이랄것도 없지만. 교실에 도착하니 박지민은 자고있었다. 일어나면 꼭 전화번호 물어봐야지. 한참을 기다리다가 잠이들었고 이상하게 오늘따라 박지민 얼굴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깨어있을땐 박지민은 자고있었고 아마 내가 자고있었을땐 박지민이 깨어있었겠지.
자고 일어나길 반복하다가 하교시간이 되어서야 우리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집가는 길에 물어볼까 우리 집 근처에 사는거 맞겠지 우물쭈물 거리는데 박지민은 나와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다. 어, 이게아닌데. 더 있다간 정말 놓칠 것 같아서 용기내 눈을 꼭감고 이름을 불렀다.
"박지민"
박지민이 뒤를 돌아보더니 나에게 걸어왔다.
“왜?”
눈을 뜨고 박지민 눈을 쳐다보면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용기를 더 냈다. 그래 번호 물어본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뭐.
“휴대폰 번호 좀”
박지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웃어서 그런지 번호를 물어본 게 창피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박지민은 번호를 저장하고 휴대폰을 돌려줬다.
“연락해. 난 네 번호 없으니까 네가 먼저 해야 된다”
그렇게 웃으며 말하곤 미련 없이 뒤돌아 갔다. 집 나랑 반대 방향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거기까진 무리인듯 했다.
그 후로 난 박지민에게 연락하며 내 번호를 알려 주었고 적당히 연락하며 학교에서도 적당히 대화했다. 조금 가까워진듯했지만 그냥 같은 반 친구 그 이상은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겨울방학을 맞이했고 방학동안에도 박지민과 종종 연락을 주고 받았다. 먼저 카톡을 보내 보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연락이 없으면 가슴 졸여보기도 하고, 알림이 울리면 박지민일까 확인해 보기도 하고. 하루종일 카톡 답을 기다리다 잠이 든적도 있다. 그러다 다음 날 아침에 답이 와 있으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박지민의 연락 한통에 하루만에 내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그래프를 그렸다. 아주 가끔씩 전화를 할때면 오랜만에 듣는 박지민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마치 내가 박지민을 좋아하는 것 처럼.
아, 좋아하는 건가.
뭐 그렇다면 그런 것 같다. 내가 박지민을 좋아하는 건가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됐다보다.
방학이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눈 떠보니 개학이었고, 다시 눈 떠보니 졸업식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는 날이 오기도 하는구나. 대학은 성적에 맞춰서 안전하게 넣어서 그런지 다행히 붙었다. 박지민은 어떻게 됐을까. 졸업하면 이제 볼 일이 없겠지. 고백을 해볼까 싶었지만 그럴 용기까진 나에게 없었다. 친구라도 하고싶어서. 혹은 고백하게 되면 미안하다는 대답을 들을 것만 같아서. 박지민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친구로라도 남아서 그냥 나만의 감정으로 추억속에 예쁘게 담아두고 싶었다. 더이상 박지민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랬던 시절도 있었구나 싶도록.그리고 박지민의 기억속에도 고백을 거절했던 여자아이가 아닌 반가웠던, 친했던 여자아이로 남겨두고 싶었다. 강당에 들어와 우리 반 줄에 앉았고 옆에는 박지민이 와서 앉았다. 졸업식은 순서대로 빠르게 진행되었고, 교실로 돌아와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많은 반 아이들이 눈물을 보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집에 돌아가서 눈을 감고 눈을 뜨고 내일을 맞으면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를 와야 할 것만 같았다.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했고, 각자 가족과 함께 또는 친구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옮겨 교실을 나서는데 내 앞으로 박지민이 와서 섰다.
"탄소야"
"......"
"졸업 축하해"
마지막까지 웃어 보이는 박지민 때문에 끝까지 나지 않던 눈물이 조금 차오르는 것 같았다.
"손 줘봐"
박지민의 말에 난 손을 내밀었고 박지민은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더니 내 손바닥 위에 얹었다.
"이게 뭔데?"
"단추"
내 손바닥엔 단추 한 개가 놓여있었고, 박지민의 교복에는 단추 하나가 떨어져 실밥이 엉켜있었다.
"일본에서는 졸업식날 단추를 주는 문화가 있대"
"......"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말을 듣는 순간 조금씩 차올랐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천천히 떼며 박지민에게 물었다. 조심스럽게.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줘..?"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다른 여자애한테 대신 전해달라는 말이 나올까봐.
"좋아하니까"
".....나를?"
"응, 좋아해"
눈물이 더 많이 흘렀다. 보기 흉할텐데.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내 모습은 더 예쁘고 싶었는데.
"네 단추는 나 주면 안 돼?"
박지민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땅을 보면서 천천히 물어왔다. 아마 나는 너를 안좋아한다고 생각했나보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의단추를 가져가면 언젠가 다시 그 사람과 만나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대"
그제야 박지민은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리 둘다 눈은 울면서 입은 웃는 채로 서로를 바라봤다. 처음 짝이 된 그날처럼. 나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내 교복 단추를 떼어서 박지민 손에 건네줬고, 박지민은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줬다. 길을 걸으면서도 우린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입을 열면 울컥해서 주저앉아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런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난 너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고 우리 집 앞에서 작별을 고했다.
"잘 가"
"응. 너도 잘 가"
우리는 처음 우산을 같이 쓴 날 박지민이 처음 집 앞까지 데려다준 날, 그날처럼 인사했다. 마치 내일 학교에서 볼 친구처럼. 박지민은 등을 보였고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아마 박지민의 집은 우리 집과 아주 반대편에 있나 보다. 반대쪽이었음에도 나를 데려다주려고 먼 길을 걸었나 보다.
너는 돌아가는 길에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참 흉하게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좋아해 나도 좋아했어 지민아"
어떻게 이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우린 서로의 기억 속에 예쁜 첫사랑으로 남을 수 있을까.
네가 떠난 자리에는 하늘에서 내린 하얀 눈이 대신 나를 향해 뒤돌아 봐주었다.
***
독방에 올렸었는데
이름은 잘 바뀌는지 모르겠ㅇ....
포인트는 내 첫글이니까 설정 안했고
여기 올려 놓을만큼의 필력은 아니지만
올려놓고 떠나요 총총총....